[ 영화, 역마차 ]
이번 회에서는 고전 서부극 4대작(황야의 결투, 셰인, 하이 눈, 역마차) 중의 하나인 <역마차>를 소개합니다. <모호크족의 북소리>와 같은 해에 나온 <역마차>는 존 포드의 초기 대표작이자,
이듬해 존 스타인벡 원작의 <분노의 포도>가 보여준 사회주의적 리얼리즘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전형적인 서부극의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사진,영화 속의 역마차)
이 영화는 서부극의 장르가 정착되는 시기의 작품으로 여전히 북아메리카 원주민인 인디언을 악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존 포드는 서부극의 개척, 변형, 발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서부극의 거장이지만, 그의 초기작에서 보여준 전형성은 인디언의 터전을 침탈한 미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모습에 머물러 있습니다. 역마차는 이름 그대로 철도가 개설되기 이전에 마차를 이용한 지역 간의 이동수단이지만, 이 영화는 그 역마차를 통해 서부개척시대의 일면을 엿보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먼저 역마차에 탑승한 각양각색의 인물을 되짚어 보기로 합니다.
수비대 남편을 찾아 온 젊고(사진,역마차 속의 승객들)
아름다운 루시 멜로리 부인(루이즈 플랫), 마을에서 쫓겨난 창녀 달라스(클레어 트레버) 등 두 여인과 루시의 미모를 좇아 온 도박꾼 핫필드(존 캐러딘), 알코올중독 증세를 보이는 의사 분(토마스 밋첼), 플러머 형제를 향해 복수에 칼날을 가는 탈주범 링고 키드(존 웨인), 링고를 체포한 보안관 등이 역마차를 몰며 서부를 돌아다니는 마부 북의 손님들입니다.
그 외 공금을 횡령한 채 도망가는 은행가, 유태인으로 보이는 위스키 도매상이 함께 역마차에 탑승합니다. 이들은 각자 서로 다른 이유로 제로니모가 이끄는 아파치 인디언의 습격이 예상되는 로즈버그 행 여정에 오릅니다. 그 과정에서 존 포드의 연출 의도는 다채로운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우선, 로즈버그로 가는 중간 기착지에서 출산이 임박한 루시를 헌신적으로 간호하는 달라스의 존재입니다. 달라스가 역마차를 탄 이유도 그녀의 직업에서 기인했듯, 모든 역마차 승객들이 달라스와 함께 식탁에 앉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달라스에게 놓여진 암묵적인 직업과 신분의 차별을 대변합니다.
그 차별은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존 포드에게 사라져야 하는 요소이고, 루시의 출산을 통해 달라스의 존재는 재탄생하게 됩니다.(사진,기병대의 호위를 받는 역마차)
역마차는 결국 인디언의 습격을 받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인디언이 쏜 총과 화살에 맞아 은행가와 위스키 도매상은 숨지게 되고... 여느 재난영화처럼, 살아남는 자와 죽는 자의 구분에 깃든 당위성을 찾자면, 인디언과의 전투에서 역할을 하지 못한 채 내내 비겁한 모습을 보이거나 무관심으로 일관한 인물들을 죽음으로 내몰린 셈입니다.
이를 확대해석 하면, 그들은 미국 서부개척시대에 무용한 존재이고, 단죄되어야 마땅하다는 전언에 다름 아닙니다. 이에 반해 탈주범의 신분으로 보안관에게 붙잡힌 링고의 경우, 인디언의 습격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이유로 플러머 형제와의 3:1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게 하고 보안관의 용인 하에 달라스와 함께 새로운 희망의 땅으로 향하도록 선처를 받기도 합니다. 그것은 그의 용맹성과 아울러 달라스의 신분에도 개의치 않고 루시와 동등하게 대우를 했던 링고 키드의 품성을 높이 산 이유기도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존 포드는 영화 <역마차>를 통해 서부개척시대에 진보적이며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어 순수한 사랑을 동경하는 도덕적 우위 혹은 포용력), 영웅적인 (악의 침략에 맞서 이를 응징하고 위기를 극복한 위용) 선조들을 탄생시키면서, 다분히 미국의 역사를 정당화시키려는 의도를 감추지 않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 서부극의 전설적인 거장, 존 포드 ]
존 포드는 영화가 탄생한 해인 1885년 미국 메인주에서 아일랜드 이민의 후예로 태어났습니다. 메인 주립대학을 단 3주간 수학한 후 그만두고,
형의 손에 이끌려 할리우드에 오게 된 그는 잭 포드란 이름으로 1917년에 그의 첫 작품 <토네이도>를 연출하게 됩니다.(사진,안경을 쓴 사람-존 포드)
이어 <철마>, <세 악당> 같은 무성영화 시대의 웨스턴을 만들어내게 되는데, 그는 이 시기부터 야외에서 행해지는 액션 신에 장대한 스펙타클을 집어넣음으로써 초기 웨스턴의 원형인 카우보이 오페라에 시각적 요소를 강화하기 시작합니다.
1930년대는 포드에게 상업적인 성공과 함께 좀 더 개인적인 색채가 짙은 영화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시기였습니다. 1935년 아일랜드 혁명의 무용담을 그린 영화 <정보원/밀고자>로 최초로 아카데미상을 탔고, 1939년에는 <젊은 링컨>과 <모호크족의 북소리>, 그리고 그의 초기 걸작이자 대표작이 된 <역마차>를 만들었습니다.
이 영화는 두 가지 면에서 신기원을 이룬 작품이기도 했다. 즉 서부극의 가장 전형적인 공간으로 모뉴멘트 밸리를 정착시킨 영화라는 점, 그리고 계곡의 광대함과 사회적 의미를 지닌 역마차의 동작을 대조하며 시각 요소의 대립을 통한 감각적이고 통제된 카메라워크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존 포드는 1940년 <분노의 포도>, 1941년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로 연속 아카데미상을 수상하며 감독으로서 완숙한 기량을 선보였습니다.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전쟁 다큐멘터리들을 만들며 잠시 할리우드와 멀어지는 듯했던 포드 감독은 이전 영화보다 더욱 서정적이고 표현력이 풍부해졌습니다.
공동체와 영웅의 긍정적인 측면에 관심을 기울인 유토피아 서부극, <황야의 결투>와 개인보다는 기병대라는 집단적인 영웅을 만들어낸 서부극과 전쟁영화의 혼합장르인 기병대 삼부작 <아파치 요새>, <노란 리본>, <리오 그란데>를 만들며 서부영화에 대한 그의 여전한 관심을 보여주었습니다.
50년대로 넘어오면서 잠시 휴식을 취했던 존 포드는 1956년 그의 진정한 걸작으로 꼽히는 영화 <수색자>와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를 발표합니다. 이 영화들은 서부와 사라져가는 영웅,
서부극에 대한 고별사와도 같은 작품으로, 영화가 과거를 왜곡하고 조작하는 바로 그 과정에 주목합니다.
그는 평생 100편이 넘는 영화를 감독했고, <분노의 포도>와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나 다큐멘터리를 포함한 진지한 영화들로 인하여 아카데미상을 6번이나 수상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영화여정 중 서부극이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포드의 영화인생을 따라가는 것은 바로 서부극 역사를 더듬는 길입니다. 어떤 감독도 존 포드처럼 일관된 스타일과 감수성, 본능적인 이해력을 지니고 서부극을 대한 적은 없었습니다. 서부극은 존 포드보다 더 오래 존재하고 있지만 영원히 그에게 빚을 지고 있는 셈입니다.
* 서부극에 대한 사랑 그리고 상남자
“나는 존 포드요. 웨스턴을 만듭니다. 미국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이 방에서 세실 B. 데밀(<십계>와 <삼손과 데릴라>의 명감독>)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어떻게 보여주는지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세실 B. 데밀을 바라보며) 그러나 나는 당신이 싫소. 오늘밤 여기서 당신이 말한 것도 싫소.”
이는 50년대 미국에서 매카시즘(극우적인 상원의원 매카시가 선봉이 되어 벌인 빨갱이 색출운동)이 크게 벌어져 한창 불어 닥칠 때 감독협회에서 존 포드가 행한 연설의 일부입니다. 할리우드에서 매카시즘을 주도한 인물이 바로 명감독이었던 세실 B. 데밀이었습니다. 데밀과 그의 추종자들은 무려 4시간에 걸친 연설을 하며 매카시즘 전파의 선봉에 섰습니다. 데밀은 협회의 모든 감독들은 ‘충성맹세’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분위기를 압도했습니다. 이때 데밀에게 정면으로 대든 인물이 바로 존 포드였습니다.
연설에는 존 포드의 두 가지 특성이 드러나 있습니다. 우선 반골기질 혹은 아웃사이더로서의 비판적인 태도입니다. 매카시즘이라는 일방적 애국주의에 많은 감독들과 영화인들이 움추러 있을 때, 포드의 용기는 팽팽한 긴장의 얼음판을 깨버렸습니다. 그의 발언 이후 분위기가 역전된 것은 물론입니다.
두 번째는 서부극(웨스턴)에 대한 자부심입니다. 그는 아카데미에서 감독상을 네 번이나 받았지만, 한 번도 웨스턴 덕분에 수상한 적은 없습니다. <분노의 포도> 같은 드라마에 비해 웨스턴은 저급한 장르로 치부될 때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을 소개하며, “웨스턴을 만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장르에 대한 그의 일종의 반골 기질이기도 합니다.
존 포드 감독은 또한 매우 가부장적 마초기질의 인물이었습니다. 그 앞에서는 할리우드 최강의 배우들도 함부로 나대거나 감독의 지시를 거부하거나 항변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는 영화를 제작할 때나 그 이후나 항상 자신이 보스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고, 그 권한을 즐겼습니다.
그의 가부장적 자부심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는 보여주는 가장 좋은 예시(위의 데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는 매카시즘 선풍이 불어 닥쳤을 때였습니다. 그는 이른바 매카시즘 열기에 사로잡힌 미국의 영화제작 한복판에서 자신의 스텝들 중 '의회반미활동위원회'가 영화제작자들을 월도프-아스토리아호텔에 불러놓고 만들도록 한 '블랙리스트'에 속한 스텝들을 영화제작에서 배제하고 고발하라는 요청을 꿋꿋이 거절했습니다.
그가 단지 거절만 한 건 아니었습니다. 존 포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개수작들 하지마!" 당시 매카시즘의 광기에 휘말린 많은 영화인들이 자살하거나 수감되는 등 생계수단을 잃고 엄청난 고초를 겪을 때였습니다. 이렇게 모두들 빨갱이 색출 태풍에 주눅이 들어 있을 때 포드는 용기 있는 마초기질을 여실히 들어 내 보였던 그야말로 상남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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