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012
1월21일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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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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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q2hjC1umppo (양우철 야고보 신부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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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우리 각자 안에 깃들어있는 아주 작은 가능성을 눈여겨보십니다!>
12 사도의 선발은 예수님 공생활 기간에 있어 큰 획을 긋는 중요한 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12 사도들의 합류로 인해 예수님의 공생활은 더욱 탄력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 사업은 더욱 활기를 띄기 시작합니다.
언젠가 예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제자들 한 명 한 명을 놓고 오랜 묵상을 해본 적이 있었습니다. 요즘 많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 ‘스펙’입니다. 스펙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사람들 앞에 내세울 만한 것이겠지요. 취득한 자격증, 이수한 코스, 그간 받은 상장, 표창장, 감사장...
열두 제자의 스펙은 사실 보잘것없었습니다. 스펙이 보잘것없으면 성품이라도 무난해야 하는데, 그것도 아닌 경우가 많았습니다. 나대기 좋아하는 제자, 성격이 불같은 제자, 드러내놓고 아부하는 제자, 당대 사람들로부터 매국노라고 손가락질받던 제자, 혁명으로 세상을 전복시키려던 제자...
공생활 기간 동안 제자들의 삶은 불을 보듯이 뻔했습니다. 때로 불과 불이 만나 큰 문제가 생기기도 했겠지요. 때로 정치 성향을 달리하는 두 제자가 부딪쳐 불화와 반목을 거듭했겠지요. 때로 성숙과 극단적 미성숙이 만나 속병이 다 생겼겠지요.
한 두세 명은 참으로 탁월한 재능의 소유자였습니다. 충분히 배웠고, 도시물도 먹었고, 배경도 그만하면 괜찮았습니다. 나머지 사람 가운데 대여섯 명은 그저 그랬습니다. 특별한 것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냥 놔두셨으면 한평생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온몸으로 뼈 빠지게 땀 흘려 근근이 먹고 살 정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나머지 두세 사람은 ‘사도단’ 가입이 참으로 이해가 안 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인간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때 참으로 부족한 사도단이었지만 인재 양성의 귀재 예수님을 만나면서 놀라운 변화를 시작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강도 높은 특별교육을 제대로 이수한 12 사도들은 스스로도 놀랄 정도의 능력을 부여받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12 사도 각자 안에 깃들어있는 아주 작은 가능성을 눈여겨보십니다. 그들 마음 안에 자리 잡은 작은 사랑의 씨앗을 발견하십니다. 그 작은 가능성, 그 작은 사랑의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도록 힘과 용기를 북돋아 주십니다.
12 사도들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느님 나라 선포라는 동일한 목적으로 똘똘 뭉칩니다. 굉장한 응집력을 발휘합니다. 상부상조, 일치단결하여 신명나게 공동 사목을 펼칩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를 바라봅니다. 어쩌면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 다 부족하기 짝이 없습니다. 가만히 보니 다른 형제들도 비슷하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바라보면 볼수록 하나같이 부족하고 나약합니다.
때로 형제들의 부족함, 이중성, 이율배반, 극단적 이기주의 앞에 크게 실망하기도 하고 낙담하기도 합니다. 이게 뭔가 하는 생각도 끊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결국 이런 생각을 하는 나 역시 별반 다를 바가 없어 또 괴롭습니다.
그러나 요즘 와서 드는 한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그런 현상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부족하니 공동체가 필요한 것입니다. 한심하니 형제가 필요한 것입니다. 나약하니 나를 통한 하느님의 도움과 위로의 손길이 필요한 것입니다.
부족한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 이토록 부족한 우리를 통해 당신 사랑의 기적을 계속해나가시는 하느님께 그저 찬미와 영광과 감사를 드릴 뿐입니다.
은혜롭게도 자비하신 주님께서는 부족한 우리, 나약한 우리, 미처 준비되지 않은 우리를 그냥 쓰시지 않고, 당신의 합당한 도구로 쓰시기 위해 우리를 단련시키십니다. 거친 황야로 내모십니다. 원치도 않은 시련을 겪게 하십니다. 오랜 거듭남의 과정을 통해 우리를 정화시키십니다.
이 땅 위에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생명에로의 부르심, 세례성사와 견진성사에로의 부르심, 결혼에로의 부르심, 사제나 수도자, 혹은 평신도에로의 부르심, 오늘이라는 선물에로의 부르심, 봉사직에로의 부르심, 리더에로의 부르심, 병고에로의 부르심, 죽음에로의 부르심...
주님께서는 어제도 우리를 부르셨듯이 오늘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때로 큰 사건 사고를 통해서도 우리를 부르시고, 때로 한 인간 존재를 통해서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 모든 부르심 앞에 보다 합당한 응답의 태도는 어떤 것인지를 고민해야겠습니다. 매일 매 순간 다가오는 주님의 부르심에 보다 순수하게, 보다 올곧게 응답하기 위해, 더욱 우리 자신을 정화시키고 쇄신시켜나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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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war0SVdI7u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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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 뽑히면 보장되는 행복: ‘지금’을 살게 됨>
오늘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직접 뽑으시는 내용입니다. 특별한 점은 당신이 뽑은 사도들에게 “당신과 함께 머물게” 하는 특권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특권일까요? 주님과 머묾이 왜 좋은 것일까요? 주님과 함께 머물면 자유가 없는데도 말입니다.
우리의 모든 고통은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지금 십자가의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 그 고통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면 쉬어도 불안합니다. 미래를 위해 뭐라도 해야 하는데 그러면 과거의 기억을 소환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과거에 해결되지 않은 기억을 소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려 지금을 소진합니다. 그렇게 과거에 얽매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뭐 해야 하는지 알려주시며 과거의 안 좋은 기억을 소환할 필요가 없다고 하십니다.
영화 ‘기억의 밤’(2017)은 과거의 기억 속에서 사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잘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영화는 한 가족이 새집으로 이사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재수생인 동생과 모든 것에 완벽한 형은 우애가 좋았습니다. 그런데 형이 조금씩 이상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형이 조금씩 형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자신을 해치려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니 부모도 조금 이상합니다. 친부모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는 가족들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낍니다. 결국, 집을 빠져나와 경찰서로 도망칩니다. 가족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것 같다고 신고합니다. 그런데 경찰서에서 신원조사를 해 보고 거울을 보니 자신은 20대 초반의 재수생이 아니라 이미 40이 넘은 아저씨였습니다.
이 모든 것은 형이 꾸민 일이었습니다. 형은 사실 20대 초반입니다. 자신의 가족을 살해한 범인을 찾다가 결국 찾아냈는데 그 범인이 기억상실증에 걸려 자신의 범행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사 오는 중에 난 사고 이후의 모든 기억이 지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최면을 걸어 모든 것을 20년 전으로 돌려놓고 그 범인이 자기 부모를 살해한 것을 기억해 낼 수 있도록 꾸민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범인은 조금씩 기억을 되찾게 되었고 결국 이들이 자신의 가족이 아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결과는 어떨까요? 자신은 착한 재수생이고 형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동생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이 살인자였음을 알고는 자살합니다. 범임을 찾아 원수를 갚으면 속이 후련할 것이라 믿어 고생 끝에 범인의 기억을 되살려주기는 했지만 결국 허무함을 깨닫고 형도 자살합니다. 이렇게 영화는 허무하게 끝납니다. 과거에 얽매인 인생도 그러할 것입니다.
과거는 과거로 묻어버리고 현재를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살아오면서 수치스럽고 창피하고 분노가 끌어 오르는 일들이 그렇게 쉽게 잊힙니까? 혼자 힘으로는 잊히지 않습니다. 그것을 잊어도 괜찮다고 보증해 줄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그 누군가는 나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 이여야 하고, 또 현재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줄 수 있는 분이어야 합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밖에 없고, 성장하면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이러한 삶으로 부르십니다. 예수님과 있으면 과거와 미래가 사라집니다. 현재만 남습니다. 지금 해야 할 일을 지시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행복입니다.
‘첫 키스만 50번째’(2004)는 하와이 라이프 파크에서 근무하는 수의사 헨리와 루시의 엉뚱한 데이트를 그린 로맨틱 코미디 영화입니다. 헨리는 그냥 바람둥이였지만 식당에서 우연히 만난 루시와 사랑에 빠집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루시는 교통사고로 매일 교통사고 이전의 기억으로 되돌아갑니다. 잠들었다 깨면 모든 기억이 원위치가 되니 최대한 모든 걸 쏟아부어야 하는데, 그 모든 것이 또 사라져버립니다.
그래도 계속 사랑할 수 있을까요? 헨리는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매일 그녀를 유혹합니다. 물론 키스도 50번이나 합니다. 하지만 루시에겐 매일의 키스가 첫 키스입니다. 그래도 헨리는 청혼합니다. 하루에 키스하고 잠자고 청혼까지 다 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 날 그녀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헨리는 매일 짧은 비디오테이프를 만들어서 모든 사실을 한 시간 안에 다 받아들일 수 있게 합니다. 그리고 루시도 매일 일기를 쓰며 아침에 모든 상황을 파악할 수 있도록 만듭니다. 그렇게 둘의 사이는 좋아지는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헨리가 자신을 위해 해마 연구를 하는 것을 포기하려 한다는 것을 알자 자기 때문에 그런 모든 것을 희생하는 헨리를 떠나보냅니다. 같이 추억을 공유할 수도 없고 결혼이나 아이를 갖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고 무엇보다 자신을 위해 꿈과 생활까지 포기하며 곁에 있어 주려는 헨리의 모습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둘은 그간의 모든 기억을 불태우고 서로 모르는 사람으로 지내게 됩니다.
가끔 만나는 때가 있었지만 둘은 눈인사만 할 뿐이었습니다. 해마를 연구하기 위해 멀리 있는 길을 떠나는데 그의 가족들이 헨리를 붙잡습니다. 그녀가 헨리만 보면 기억은 못 해도 기뻐 노래하고 그의 얼굴만 그린다는 것입니다. 꿈에 헨리를 보는 것입니다. 헨리는 다시 그녀를 유혹하고 첫 키스를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습니다. 어느 날 눈을 떠 본 루시는 자신이 결혼하였고 딸이 있고 헨리가 남편이고 그와 함께 해마 연구를 위해 요트에 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행복해합니다.
예수님은 헨리와 같은 존재입니다. 내 기억이 다 사라져도 나를 사랑하여 옆에 있을 보증인입니다. 그러니 과거에 잊고 싶은 것은 잊어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내 잊힌 기억들을 대신 책임져 주실 만큼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할 수 있는 대로 그분 뜻에 충실하면 됩니다. 그러면 매일 똑같은 일상이지만 매일 새롭고 신비롭습니다. 매일 기쁩니다. 과거의 우울과 미래의 걱정에서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오늘 뽑힌 사도 중 가리옷 유다는 그리스도께 뽑혔음에도 자신을 잊기를 거부하였습니다. 미래의 걱정에 사로잡혔습니다. 자기 뜻대로 살아가려 했기 때문에 예수님도 돌아가시게 하고 자신도 죽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좋은 점은 모든 것, 과거의 꿈과 기억과 소망까지도 그분께 다 맡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분으로부터 뽑히고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제 할 일은 그분과 머무는 특권을 누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그분께 맡기십시오. 이를 위해 그분이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그리고 매일 새롭게 시작하십시오. 매일 같은 날이지만, 날마다 신비롭고 기쁜 하루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다만 그분이 하느님이시고 나를 사랑하시고 그래서 나를 부르셨고 나와 함께 계심을 믿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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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3,13-19 : 제자들을 부르셔서 당신 곁에 있게 하시다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여정을 시작하시며 열둘을 부르시어 당신의 모든 제자들 가운데 그들에게만 사도라는 영예로운 이름을 주셨다. 예수께서 이제 그들과 깊은 친교를 나누며, 당신이 하시는 일에 협조자가 되게 하기 위함이다. 즉 공생과 파견이라고 할 수 있다(6,6-13). 파견된 제자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신 대로(1,34.39)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를 쫓아내는 기적을 행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열 두 사람을 가려 제자단을 만드신 것은 그분과 함께 살고, 함께 사귀고 또한 그분이 하신 것같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즉 그분에게 흠뻑 젖어 세상에 전할 말씀을 더 깊이 깨달을 수 있도록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선발하신 12 제자들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어부도 있었고, 세관원도 있으며, 혁명당원 즉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인간적인 면에서는 여러 가지 부족한 사람들도, 그리고 똑똑하다는 사람들도,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투사들도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보아도 이 제자들이 예수님의 사업을 계속해 나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하는 그런 사람들로 보일 정도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이 제자들은 자신의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복음을 전했고 교회를 이끌어 갔다. 이것은 교회가 각계각층의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 앞에 모여온 것을 말하고 주님의 가르침은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믿을 수 있는 보편적인, 가톨릭적임을 의미한다.
사도들의 이름들이 나오는데, 새로운 이름을 받음 사람들이 있다. 마치 구약에서 성조들이 시련을 이겨냈을 때, 새로운 이름으로 부르셨던 것과 같이, 즉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었고,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시몬은 베드로라 불렸고, 사울은 회개하고 나서 바오로가 되었다.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을 천둥의 아들들이라 하였고, 레위를 마태오라고 불렀다.
마태오 복음에서 세리 마태오라고 한 것은 그 회개의 표시로 자신의 이름에 세리라고 덧붙였다. 사람의 이름을 바꾸어 부르는 것은 신원이 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들은 이제 주님과 함께 살면서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살아가며 그분과 함께 그분의 여정을 함께 하는 그분의 친구로 살아가기 위한 것이다. 사도들이 복되다는 것은 예수님의 친구로 함께 간다는 것이다.
주님께 선택을 받는다는 것이 우리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가 아님을 제자들의 부르심에서 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분과 함께 살고 그분을 닮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자신이 그분과 함께 그분의 친구가 되어 살아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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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증언>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신 다음,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열둘을 세우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그리고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마르 3,13-19)
사도행전을 보면, 마티아를 사도로 뽑을 때, 베드로 사도가 이런 말을 합니다. “주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는 동안 줄곧 우리와 동행한 이들 가운데에서,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 승천하신 날까지 그렇게 한 이들 가운데에서 한 사람이 우리와 함께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사도 1,21-22) 또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사도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47-48) 열두 사도는 아니지만 바오로 사도에 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사도 9,15)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사람들이고, 그 예수님이 곧 메시아라는 것을 증언하는 사람들이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과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증언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사도들의 증언을 믿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말씀들을 ‘직접’ 들었고, 예수님의 일들을 ‘직접’ 보았습니다. 특히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에 대한 사도들의 증언은, 자신들이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을 말한 것입니다. (누군가에게서 배우거나 전해들은 것을 옮긴 것도 아니고, 공부나 연구를 통해서 얻은 결론을 발표한 것도 아닙니다.) <사도들의 증언을, “나는 보았고 들었다. 그래서 나는 믿는다.”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신 다음에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신 것’은 나중에 그들을 당신의 증인으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사도들의 증언은 직접 보고 들은 것에 대한 ‘깨달음’과 그 ‘깨달음’을 통해서 얻은 ‘믿음’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직접 보고 듣는다고 해서 누구나 믿는 것도 아니고 증인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뒤의 4장을 보면, 한 마디 말씀만으로 바람과 파도를 잠잠하게 만드시는 예수님의 권능을 직접 보고서 제자들은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라는 말을 합니다.(마르 4,41) 제자들은 아마도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동안에 계속 ‘이분이 누구시기에...’ 라는 질문을 했을 것입니다. 그 의문이 완전히 해결된 때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입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토마스 사도의 신앙고백은(요한 20,28) 토마스 사도뿐만 아니라 사도들 모두가 예수님에 대한 의문이 해결되고 완전한 깨달음과 믿음에 도달했음을 나타내는 신앙고백입니다. 그 믿음은 일반적인 믿음보다 더 강한 ‘확신’이고 ‘신념’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 믿음에 도달했기 때문에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복음 선포’는 지식 전달이 아니라 ‘신앙의 증언’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거나 부족한 사람은 복음 선포 활동을 할 수 없습니다. (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주신 것은, 마귀들을 쫓아내는 일을 하라고 ‘임무’를 맡기신 것인데, 그 일도 역시 신앙을 증언하는 일에 포함됩니다. 마귀들을 쫓아냄으로써 예수님을 증언하기 때문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려고 시도했다가 크게 실패했다는 이야기가 사도행전에 나옵니다.(사도 19,13-16) 마귀들은 예수님을 두려워하고 예수님의 이름도 두려워하지만, 믿음 없는 사람이 사용하는 예수님의 이름까지 두려워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에게 주신 은총과 임무는 오늘날의 주교들에게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주교들은 사도들의 후계자들입니다. 신부들은 주교들의 협력자들입니다.) 그리고 모든 신앙인은 자신의 ‘삶’으로 예수님을 증언하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 5,13ㄱ)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4ㄱ.16) 신앙인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살아가는 것은 각자 한 사람의 사도가 되어서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빛과 소금으로서 살아가려면 먼저 믿어야 하고, 믿는 대로 살아야 합니다. 믿는다면 어떤 어려움을 겪어도 흔들리지 말아야 하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만을 희망하면서 살아야 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복음서에 있는 열두 사도의 명단에는 배반자 유다의 이름도 들어 있습니다. 유다의 이름 앞에 있는 ‘예수님을 팔아넘긴’이라는 말은 마치 그의 이름처럼 굳어져버린 말입니다. 복음서 저자들이 열두 사도 명단에 마티아를 적지 않고 유다를 적은 것은, 기록의 진실성과 정직함을 나타내는데, 그래도 이 명단을 대하는 사람들에게는 유다가 사도로 뽑힌 일 자체가 이해하기 어려운 일로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가 배반할 것을 모르고서 뽑으셨을까? 알면서도 뽑으셨을까? 모르고 뽑으셨다면 예수님의 신성에 문제가 되고, 알면서도 뽑으셨다면 유다에게 배반의 책임을 묻기가 어렵게 됩니다. 이 일은 세상 마지막 날까지 미스터리(신비)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유다가 배반한 것은 그 자신이 선택한 일이라는 점입니다. 누구든지 배반자 유다처럼 될 수도 있고, 다른 열한 사도처럼 될 수도 있습니다. 선택은 각자 스스로 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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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
‘예전에 앓던 이가 빠지는 기분’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비슷한 말로 ‘뜨거운 감자’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회계사께서 2022년에 새로운 제안을 하였습니다. 신문사는 비영리 단체이기에 현금보다는 체크를 사용하라고 하였습니다. 직원들은 모두 체크로 급여를 받았습니다. 다만 저의 활동비와 주방 자매님은 현금을 사용하였습니다. 저도 활동비를 체크로 받기로 하였습니다. 문제는 주방 자매님이었습니다. 어르신은 체크를 받으면 문제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나라에서 받는 보조금을 못 받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회계사께서 좋은 방법을 알려 주었고, 어르신도 체크를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말 그대로 앓던 이가 빠지는 기분이었습니다. 뜨거운 감자를 잘 넘긴 기분이었습니다. 친한 친구 사이에도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사랑해야 하는 부부 사이에도 감정이 쌓일 때가 있습니다. 작은 계기로 오해가 풀리고, 묵은 감정이 봄눈처럼 녹으면 말 그대로 앓던 이가 쑥 빠지는 기분이 될 것입니다. 새해에는 앓던 이는 빠지고, 뜨거운 감자는 잘 넘기면 좋겠습니다.
오늘 독서는 사울과 다윗의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사울은 충실한 부하 다윗, 아들 요나탄의 친구인 다윗, 딸 미갈의 남편 다윗을 시기하였습니다. 사울의 시기는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사울에게 다윗은 앓던 이가 되었고, 뜨거운 감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인터넷에서 시기와 질투에 대한 글을 보았습니다. “시기는 자신의 화살로 자신을 죽인다. 질투 속에는 사랑보다 이기심이 더 많다. 세상 사람들은 나보다 나은 사람들을 싫어하고 나에게 아첨하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모든 격정 중에 가장 추악하고, 반사회적인 것, 그것은 시기이다. 공기처럼 가벼운 사소한 일도, 질투하는 이들에게는 성서의 증거처럼 확정적이다. 나는 내 실망은 견딜 수 있어도 남의 희망은 참을 수 없다. 시기심은 살아있는 자에게서 자라다 죽어서 멈춘다. 시기심을 나타냄은 자기 자신에 대한 모욕이다.” 이중에서 가장 제 마음에 와 닿았던 것은 ‘공기처럼 가벼운 사소한 일도, 질투하는 이들에게는 성서의 증거처럼 확정적이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사울이 마음을 바꾸기만 하면 다윗은 여전히 충실한 부하이고, 아들의 죽마고우이고, 믿음직한 사위였습니다. 그만 시기가 마음에 들어와서 다윗이 뜨거운 감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선한 마음을 가진 다윗에게 사울은 앓던 이가 아니었습니다. 뜨거운 감자도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기름 부어 주신 왕이었습니다. 친구 요나탄의 아버지였고, 사랑하는 아내의 아버지였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다윗의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이제야 나는 너야말로 반드시 임금이 될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스라엘 왕국은 너의 손에서 일어설 것이다.” 그렇습니다. 앓던 이는 시기와 질투였습니다. 뜨거운 감자는 교만과 오만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12제자에게 3가지 권한을 주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명, 병자를 고치는 능력, 마귀를 쫓아내는 힘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제자들은 앓던 이가 아니었습니다. 뜨거운 감자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면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도 앓던 이가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됩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면 진흙 속에서도 보물을 찾을 수 있습니다.
시기와 질투라는 안경을 벗어버리고 사랑과 나눔의 안경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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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건강검진’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작년에도 건강검진을 받았고 대체로 큰 문제는 없었지만 시력, 청력이 조금씩 떨어진다고 하였습니다. 위에도 염증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꾸준히 운동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과음이나 과식을 하지 않으면 나름대로 건강을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한국교회에 대하여 ‘건강검진’을 하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굳이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으셔도 우리는 현재 한국교회에 대해서 나름대로 진단을 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미래인 청년, 학생들이 교회에서 잘 보이지 않습니다. 청년들에게 교회가 큰 매력을 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학생들은 공부 때문에 바쁜 것 같습니다.
10년 후의 한국교회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옵니다. 신앙생활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주일미사 참례 비율입니다. 예전에는 70%가 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25%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으며, 10년 후에는 17%에도 미치지 못할 거라는 예측을 하고 있습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굶주린 이들에게 교회의 문턱이 너무 높아졌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교회의 재정을 살펴보면 이웃을 위한 나눔이 적다고 합니다.
국립 현충원에는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다가 사망한 사람들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 무덤에는 각자의 이름과 직책 등이 적혀있습니다. 저도 예전에 동작동에 있는 국립묘지에 갔던 기억이 납니다. 하얀 비석에 검은 글씨로 이름이 적혀있는 묘비들이 세워져 있었고, 그것이 참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얼마 전 큰 병원에 갔었습니다. 병원 현관에 병원 건립을 위해서 도움을 준 사람들의 명단이 붙어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신앙인들의 이름은 어느 곳에서 볼 수 있어야 하나 생각합니다. 기부금을 낸 사람들의 명단에, 자선과 나눔을 한 사람들의 명단에, 누군가를 도와준 사람들의 명단에 신앙인들의 이름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 지금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주님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명단에 신앙인들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질투하고, 남에게 해를 끼치고,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자신의 욕심만을 채운 사람들의 명단에 신앙인들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잊고, 모를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함께 복음을 전할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복음서는 그 제자들의 이름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그리고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우리들 각자의 이름이, 언젠가 하느님 나라에 기억되고 기록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지금 나의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제자로서 충실해야 합니다. 주어진 능력과 재능을 하느님을 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나는 그들의 생각 속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리라.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한국 천주교회의 시작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4번에 걸친 커다란 박해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신자들은 가진 것을 함께 나누었고, 교우촌을 이루어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5대째 천주교를 믿는 집안에서 태어난 저에게도 신앙은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매일 기도하였고, 주일 미사는 꼭 참례해야 했고, 돌아가신 분들의 기일에는 연도를 함께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더불어 목숨을 바쳐서 예수님을 증언한 분들입니다. 오늘 나는 어느 자리에 서야 하는지 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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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홍보국]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신 다음,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성경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산’은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장소, 기도하는 장소입니다.(마르 6,46 참조)
‘원하시는’ 열둘을 ‘가까이 부르시는’ 행위는 예수님의 주도권을, 그분께 ‘나아가는’ 행위는 사도들의 순명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장면을 상상하면 참으로 장엄하고 거룩하게 느껴집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신 목적은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파견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사명이 파견의 사명보다 먼저 언급된 것이 인상적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고 친교를 나누며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복음이 무엇인지를 배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지냄’은 사도들의 정체성이며, 파견 활동의 원천이 됩니다. 파견에는 ‘선포하는 활동’과 ‘마귀들을 쫓아내는 활동’이 포함됩니다. 열두 사도는 예수님과 함께하는 공동체 안에서 경험하고 깨달은 것을 선포하고, 마귀들을 쫓아내야 합니다. 열두 사도가 해야 하는 일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과 같습니다.
앞서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공생활을 이렇게 요약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마르 1,39) 예수님의 사명은 제자들을 통하여 계속됩니다. 그리스도인은 현재를 살아가는 그분의 제자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지내며’, 이웃에게 ‘파견되어’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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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홍태 베다 신부님]
<부르심>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오늘도 우리를 쓰시기 위해 부르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무엇을 보고 부르실까요?
1. 예, 하느님은 우리의 가능성을 보고 부르십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중요한 인물들 몇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① 베드로
주님은 급한 성격(덜렁거림, 신중하지 못함)에다 겁도 많아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까지 했던 시몬 속에서 ‘베드로’라고 하는 교회의 반석을 발견하셨다.
② 야고보와 요한
주님은 천둥(번개)의 아들이란 별명을 가진 대로 거칠고 공격적인 성격을 가진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 속에서 교회의 기둥을 발견하셨다.
③ 토마
반드시 확인하고 짚고 넘어가야 직성이 풀리는 토마의 성격 안에서 주님은 신앙의 확실성을 보셨다.
④ 자캐오
주님은 사리사욕에만 정신이 팔려있던 자캐오 속에서 가난한 이들과 나눌 줄 아는 사람으로 새로 날 희망을 발견하셨다.
⑤ 사울
주님은 극단적인 열정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사울 속에서 오히려 역으로 누구보다도 정열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울 강렬한 에너지를 발견하셨다. 바로 그 하느님께서 오늘날은 우리 안에서 어떤 가능성을 발견하고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2. 그 다음은 우리를 부르셔서 어떤 목적으로 쓰실 것인지 하느님의 뜻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사실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지식이란 하느님의 뜻을 아는 것이며, 우리 신앙인들의 인생 가운데서 최대의 발견은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이고,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최상의 성취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느님의 뜻을 아는 최선의 방법은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는 순종의 대답을 먼저 하는 것입니다. 신의 뜻을 헤아리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순종하고 헌신을 결심하면 그 뒤에 신의 뜻을 알게 됩니다. 하느님은 순종하는 자에게 가장 좋은 것을 맡기십니다.
예) 마리아도 그러하셨다. 먼저 마리아의 그러한 신앙이 있었기에 하느님의 선택을 받았다. 이 모든 성공이 부르심에 대한 순종으로부터 시작됩니다.
3. 하느님께서 나를 불러 주셨다는 말은, 내 시간이 하느님의 뜻대로 사용되도록 맡겨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부르심이란 하느님의 필요에 응해 사는 헌신을 뜻합니다. 부르심이란 나의 명함을 버리고 낮은 곳이라 할지라도 기쁘게 내려가는 결심을 뜻합니다. 부르심이란 나의 체면을 포기하고 누구와도 함께 어울려, 주께서 주신 사명을 달성하겠다는 겸손을 뜻합니다. 부르심이란 어려운 환경과 핍박과 반대에 부딪치더라도 주를 위해 참으며 십자가를 지는 것을 뜻합니다.
예)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봉사직을 맡아 달라고 하면 손사래를 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1) 겸손해서... 2) 십자가를 지기 싫어서, 3) 욕먹기 싫어서...
어느 자매님이 저를 찾아와 엉엉 우는 것입니다. 나름대로는 봉사한다고 하는데 온갖 질시와 판단을 받으니 다시는 봉사하고 싶지 않다는 겁니다. 이러니 누가 자기 시간 내 가며 봉사하려 하겠습니까?
약점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약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봉사직을 맡았으면 그 사람을 지원해 주고 밀어주어야 합니다. 어쨌든 그렇게 힘듦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십자가를 져야 하고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봉사해야 합니다.
예) 저는 20대 초반 때 국가의 부름을 받고 군복무를 춘천에서 했다.국가의 부름에도 응해야 하는데 하물며 하느님이 부르시는데... 그러므로 부르심이란 하느님의 병사가 되기 위한 소집 영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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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이렇게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시어, 당신이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마르 3,13)
이는 마치 야훼 하느님께서 모세를 시나이 산으로 불러올리는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처럼, 그분께서는 먼저 부르시고, 제자들은 그분께 응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신께서는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셨습니다.” 이토록, 당신께서는 우리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성소는 당신이 원하신 것이요, 당신이 주신 선물이요, 은총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께 나아온” 이들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부른 이’가 누구인가에 따라, 응답한 이의 삶이 바꾸어지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의 부름을 받은 이는 대통령의 영광을 입은 것이고, 대통령이 부여한 일을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이는 하느님의 영광을 입은 것이고, 하느님의 일을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복음사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 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마르 3,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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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마르 3,14)
주님!
당신이 불러 뽑으셨으니, 저는 분명 당신의 사람입니다.
당신을 저의 거처로 내어주시고, 저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셨습니다.
하오니, 당신의 말씀을 실행하고, 당신 뜻 안에 살게 하소서.
당신 뜻의 실천이 제 양식이 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사랑으로 녹아나고,
당신 뜻에 맞는 예배가 되게 하소서. 아멘.
이제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열두 부족으로 구성된 이스라엘 민족을 갱신하고, 신약의 새로운 백성을 선포하십니다. ‘세우다’란 말의 원어의 뜻은 ‘만들다’, ‘창조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제 새 이스라엘이 세워지고 만들어지고 탄생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둘을 “사도”라 부르십니다. 그러니 결국, 이 “열둘”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곧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그분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는 ‘제자’(μαθετεσ)의 의미와 동시에,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하느님나라를 선포하고 다니는 “사도”(αποστολοσ)라는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제자요 사도인 공동체에 속하게 되는가?
그것은 우선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것’ 입니다. 그것은 마치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면 부모를 떠나 ‘부부가 함께 지내는 것’처럼 한 몸을 이루며, 모든 것을 함께 공유하고 서로 안에 머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스승이 계시는 곳에 제자도 있어야 하고, 스승이 파견한 일을 사도가 하게 됩니다. 곧 제자와 사도의 신원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이’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함께 지내되, 누구와 함께 지내느냐?’ 입니다. 왜냐하면, ‘함께 지낸다.’는 것은 ‘물들어 간다. 섞인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곧 악한 사람과 함께 지내면 악에 물들고 선한 사람과 함께 지내면 선에 물들어가듯, 하느님이신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 하느님이 되어갑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이 되어 간다는 것이요, 예수님과 함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가 됩니다. 그리하여 바오로 사도가 말한대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품어 나르는 “그리스도의 향기”(2코린 2,15)가 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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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마르3,14)
<제자와 사도!>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시어,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예수님께 나아갑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제자(mathetes)'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하느님의 나라와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apostolos)'로 뽑으십니다.
예수님께서 뽑으신 열두 사도들의 직업이나 모습을 보면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 어부와 세리와 열혈당원 등과 같이 평범한 직업을 가진 소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지막 때인 예수님께서 잡히셨을 때, 예수님을 두고 도망갔던 사람들이었고, 예수님을 의심하고, 배반하고, 십자가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골고타로 향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조차도 지지 않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그런 사람들을 사도로 뽑으셨을까???'
첫째, 예수님께서 그들을 원하셨기 때문에. 둘째, 그런 사람들을 구원하러 오셨고, 약함을 통한 모두의 구원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었기 때문에. 셋째, 예수님을 따른 이들, 예수님과 가까이 했던 이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의 약함은 약함이 아니었습니다. 끝내 회개하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스카리옷 유다를 빼고는, 나머지 사도들은 예수님 부활과 성령체험의 힘으로 끝까지 사도로서의 삶을 살아냈습니다.
부족함이 많은 우리들, 예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셨고, 또한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부르심에 "예!" 라고 응답했습니다.
그러니 말과 행동으로, 예수님의 뒤를 잘 따라가는 제자, 하느님의 나라와 복음을 잘 전하는 사도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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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과 사람>
마르코 3,13-19 (열두 사도를 뽑으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시어,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열둘을 세우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그리고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하느님과 사람>
하느님이신
사람께서
하느님 닮게 하고픈
사람들을
당신 가까이
부르시니
하느님 닮고픈
사람들이
하느님이신
사람께로
몸과 마음 낮추어
나아간다네
하느님이신
사람께서
하느님 닮게 하고자
사람들을
당신 곁에
지내게 하시니
하느님 닮기 위하여
사람들이
하느님이신
사람 곁에서
몸과 마음 비워
머무른다네
하느님이신
사람께서
하느님을 닮은
사람들을
온 누리 모든 이에게
보내시니
하느님을 닮은
사람들이
하느님이신
사람과 함께
쉼 없이 힘차게
하느님나라 일군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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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르심, 다가섬, 머무름, 보내심>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신 것은 공생활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입니다. 하느님의 아들로서 당신 혼자 모든 사명을 수행하실 수 있었던 예수님께서 굳이 가난하고 무식하고 천대받던 사람들을 당신의 사도로 부르심으로써, ‘예수님과 사도들’, 곧 ‘하느님과 사람들’이 하나 된 공동체가 탄생한 것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의 일에 참여한다는 것은 참으로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2000년 전 사도들뿐만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 역시 이 감격스러운 일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감격하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오늘 복음을 통해 과연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십니다. 그러자 그들이 그분께 나아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둘을 세우시어 그들을 사도라 이름 하시고,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십니다.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들을 쫓아내려 그들을 파견하기 위함입니다.
열 두 사도를 뽑으신 결정적인 사건을 복음서는 단 몇 줄로 전하고 있지만, 이 안에는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전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내용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는 오늘 복음에 비추어 볼 때, ‘부르심, 다가섬 곧 부르심에 대한 응답, 머무름, 그리고 보내심 곧 파견’의 과정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마음에 두셨던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는 흔히 할 수 있는 인간중심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든 모르든 우리가 예수님께 다가서기 전에 예수님의 부르심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의지로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 예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고자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9주도권은 우리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심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이제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중요합니다. 부르심을 받아들이고 예수님께 다가설 수도 있지만, 이를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 다가가는 사람만이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비록 주님의 일이라 하더라도 어떤 거창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 곁에 머무는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곁에 머물게 하시려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 곁에 머물며, 예수님을 닮아 예수님처럼 변하는 것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인류의 구원을 위해 기꺼이 사람이 되신 하느님처럼, 우리도 자신을 내어놓음으로써 하느님 구원 사업에 동참할 수 있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미사 때 밥이 되어 오시는 성체 안의 예수님을 모심으로써, 우리 자신도 이웃을 위해 밥이 될 수 있는 용기를 지니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곁에 머무르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머무름으로써 변화된 우리는 세상으로 파견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고 억눌린 이들에게 자유와 해방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고,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를 거스르는 이 세상의 마귀들을 쫓아내라고 우리를 파견하십니다.
다시 말해, 더불어 사는 세상을 방해하는 치열한 경쟁의 논리를 깨뜨리고, 돈을 하느님으로 섬기는 우상 숭배를 무너뜨리라고, 우리를 세상 한 가운데로 보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하는 참 평화와 화해의 삶을 우리만의 전유물로 만들지 않고, 이 삶을 모든 이에게 나누기 위하여 세상 깊숙이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부르심, 다가섬 곧 부르심에 대한 응답, 머무름, 그리고 보내심 곧 파견’의 여정을 걷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주님께서 부르실 때가 있고, 주님께 다가서야 할 때가 있습니다. 주님께 머물러야 할 때가 있으면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떠나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 모든 시간에 충실해야 그리스도인답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대로 이 시간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또 하나의 사도로 초대받습니다. 그러니 기쁜 마음으로 우리를 초대하신 주님께 다가가 함께 머물며, 그분의 사랑으로 우리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벅찬 마음으로 세상의 벗을 향하여 힘찬 발걸음을 내딛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일도 모레도, 이 고귀한 여정을 계속 이어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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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종종 시집을 펼쳐 들고 읽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때 시집을 읽을까요? 아무 때나 시집을 펼치지는 않습니다. 대신 마음이 다른 것으로 꽉 차 있을 때 시집을 펼치게 됩니다. 이때는 시를 읽어도 잘 이해가 되지 않거든요. 그 래서 계속 반복해서 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시가 이해되면서 동시에 복잡한 마음도 풀어집니다.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에 상처받는 사람이 많습니다. 실제로 상처 주기 위한 말과 행동일 수도 있지만, 많은 경우 본인의 지레짐작이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복잡한 심경으로 부정적인 마음을 품기 때문입니다.
시를 이해하며 읽기 위해서는 마음을 비워야 함을 말씀드렸습니다. 마찬가지로 삶을 살면서도 마음을 비워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야 시를 잘 읽을 수 있는 것처럼, 상대방을 잘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세상 것에 대한 욕심과 나만을 위한 이기심으로 늘 복잡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우리입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조용히 나아가서 기도하며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마음을 다스리면서 주님의 뜻을 알 수 있고, 그 뜻을 실천하면서 얻는 행복이 얼마나 큰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는 주님께서도 직접 모범을 자주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비롯해서 자주 산에 올라가셔서 기도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산은 하느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모세는 산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았고, 예수님께서도 산에 올라가셔서 하느님 나라의 기본 교육이라 할 수 있는 산상수훈인 진복팔단을 발표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 전날 밤에 올리브 산에서 뜨거운 기도를 올리셨던 것도 우리는 기억합니다. 이렇게 산은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었고, 중요한 가르침이나 결정을 위해 꼭 필요한 장소였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기도하시면서 마음을 비우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사도직을 부여하는 순간 역시 매우 중요했기에 하느님을 만나는 산에 가셨던 것입니다. 특별히 제자들에게 주신 세 가지 사명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사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주님과 함께 지내야 한다는 것.
둘째, 파견되어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는 것.
마지막으로 마귀들을 쫓아내야 한다는 것.
우리도 어떻게 사는 것이 정답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주님을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세상에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쉽지 않은 삶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계속해서 비워가면서 주님의 마음으로 채운다면 불가능한 삶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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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걸으세요>
경관이 아름다운 산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이 산의 경관은 빼어났지만, 산길이 너무 험했습니다. 그래서 우뚝 솟은 산봉우리에 오르는 것이 너무 힘들어 발밑만 보고 앞으로 나갈 뿐이었습니다. 당연히 주변의 경치를 볼 수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의 표지판을 보게 되었습니다.
“천천히 걸으세요. 풍경을 감상하는 걸 잊지 마세요!”
산을 오를 때만 서두를까요? 이 세상을 살면서도 우리는 계속 서두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름다운 모습, 감명 깊은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기도를 바치면 곧바로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그러나 곧바로 이루어지면 기도가 이루어지는 과정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손길을 볼 수가 없습니다. 무엇이든 서두르지 말아야 합니다.
마라톤을 뛸 때 초반에 전력 질주를 하면 결승점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인생은 마라톤보다 더 길고 험한 여정의 연속입니다. 서두르지 않으면서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손길을 발견하는 사람만이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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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산에 오르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마음에 두셨던 사람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습니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마르 3,13-14)
성경에서 산이란 하느님이 계시는 곳, 하느님의 뜻이 밝혀지는 곳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산에 오른다는 것은 하느님이 계신 곳으로 하느님의 뜻을 받으러 간다고 말할 수 있으며 오늘 우리에게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원하시는 사람을 불렀습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15,16)는 말씀대로 입니다. 산에 오르셔서 부르셨다는 것은 아버지 하느님의 뜻대로 처신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부름을 받은 사람의 모습을 보면 특별히 잘난 사람이 없습니다. 오히려 사나운 사람이 섞여 있었습니다. 신중하게 뽑으셨는데 가리옷 사람 유다가 거기 있었고, 남을 등쳐먹는다는 공적인 죄인 세리 마태오, 열혈당원 시몬, 천둥의 아들이라 불리는 야고보, 성질 급한 요한, 다혈질적인 베드로 등 그야말로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의 속을 아셨을까요? 아니면 모르셨을까요? 저 같으면 아마도 그런 사람은 제쳐 놓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품고 가십니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셨습니다.
세리 마태오와 열혈당원 시몬은 당시 상황에서 도저히 함께할 수 없는 적대관계에 있었습니다. 세리들은 이스라엘 점령세력인 로마인들과 협력하는 반면에 열혈당원들은 로마인들에게 저항하여 무력 투쟁을 하던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적대관계에 있던 이들까지도 하느님백성공동체로 모아들이셨습니다. 갈등과 적대관계의 극복뿐만 아니라 차별과 소외와 배척을 넘어서 모든 사람을 하느님 품 안에 모으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렇게 커졌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지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동안 어떤 생활을 해왔든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부름을 받고 예수님과 함께 새 생활을 하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함께 지냈다는 것은 단순히 공간적인 의미를 말하지 않습니다. 함께하면서 주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오상의 비오 신부님은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미래는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고 오늘을 사랑으로 살라고 하였습니다.
“함께 지내는 것”은 그분 가까이 머물면서 그분을 믿고, 배우며, 닮아 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스승으로부터 지식만 전수받는 것이 아니라 스승의 삶을 배워야 합니다. 스승과 공동운명체가 됨으로서 스승의 사명에 참여하게 되고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석에 쇳가루가 오래 붙어 있으면 그 쇳가루도 자력을 지니듯이 열두사도도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그분에게서 생명력을 받아 그분처럼 복음을 전하고 구원사업을 펼치게 됩니다.
“유다’라는 말은 “찬미하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뜻을 가진 유다가 왜 주님을 찬미하지 못하고 배반자가 되었을까? 그는 예수님과 함께 지내기를 제대로 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몸은 같이 있어도 마음은 따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몸과 마음이 그분과 함께 있지 않으면 유다처럼 되지 않으리라고 장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있지 않고 어떻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지내야 듣고 보고 체험한 바를 전할 수 있습니다. 사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누리는 기쁨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은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주어지는 것입니다. 복음을 선포하고 선포하는 바를 살면 그 안에 능력이 주어집니다. 저희는 왜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하고 제자들이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지 않고서는 그런 것을 쫓아낼 수 없다”(마르 9,28-29).고 말씀하셨고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 하며 꾸짖으셨습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곧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것이고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사탄을 쫓아낸 것입니다. 세상이 쓸모없다고 제쳐놓은 사람들도 예수님께서는 결코 소홀히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의 생각을 접고 하느님의 능력을 사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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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소聖召의 소중함>
-성소는 은총의 선물膳物이자 과제課題다-
오늘은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하느님의 귀한 선물인 성인들이 참 고맙고 자랑스럽습니다. 주님께 부름 받은 성소자인 우리의 신원을 비춰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좌표와도 같은 희망의 징표, 구원의 징표, 회개의 징표가 되는 성인들입니다. ‘아, 이렇게 살아야 하겠구나!’ 깨달음과 더불어 희망과 용기를 주는 성인들입니다.
성녀 아녜스는 291년에 태어나 304년에 순교하였으니 고작 13세의 참 짧은 생애였습니다. 아녜스는 그리스어로 ‘순결’ 또는 ‘양’을 뜻합니다. 로마제국의 어는 부유한 집안 출신인 성녀는 이미 13살에 하느님께 자기의 순결을 지키기로 서원합니다. 그러나 구혼에 실패한 청혼자의 고발로 그리스도인임이 발각되어 체포된 성녀는 마침내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 참수형을 받아 순교의 월계관을 씁니다. 이후 성녀는 순결과 순수함을 추구하는 동정녀들의 수호성인이 됩니다.
전설처럼 전해지는 성녀의 유언과도 같은 성무일도중 1.즈가리야의 노래 후렴과 2.마리아의 노래 후렴이 참 감동스럽습니다.
1.“보라, 나는 내가 갈망하는 것을 보았고, 희망하는 것을 얻었으며, 지상에서 온 마음으로 사랑한 분을 만났도다.”
2.‘성녀 아녜스는 두 팔을 벌리고 “내가 사랑하고 찾으며 갈망하던 거룩하신 성부여! 당신께 나아 가나이다.”하고 기도하였도다.'
새삼 우리 정 아브라함 수사의 1.종신 서원 상본과 2.사제서품 상본에 나온 기발한 착상의 성구에 감탄하게 됩니다. 세상에 이보다 성소를 새롭게 점검케 할 수 있는 성구도 없을 듯 합니다.
1.“아브라함아!”(창세22,1)
2.“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22,11)
비단 아브라함뿐 아니라 각자 주님께서 자기를 부르셨다 생각하고 자기 세례명을 넣어 불러 봐도 좋을 것입니다. 마침 피정중인 어느 수녀님의 문자 메시지가 생각났고 이에 대한 제 답신이 생각납니다.
‘이번 피정 제목은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로 하려고 한답니다.’
“피정 제목 좋습니다. 하느님 불러 주신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사는 것이 평범하지만 최상의 길이지요!”
부질없는 상상이지만 만일 우리가 주님께 부름 받지 않았다면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요? 도저히 상상이 안될 것입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삶에 가정법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로운 섭리의 부르심에 의해 응답하여 이렇게 은총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얼마나 놀랍고 고마운 하느님 부르심의 성소인지 깨닫습니다.
유명한 합리주의의 철학자 데칼트는 말합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그러나 유대인 랍비 여호수아 헷쉘은 말합니다. “나는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참으로 공감이 가는 성소의 본질에 대한 언명입니다. 주님께 부르심을 받음으로 비로소 존재감 충만한 하느님의 자녀로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새삼 우리의 성소가 얼마나 귀한 은총의 선물인지 깨닫습니다. 그리하여 오늘 강론 제목은 “성소의 소중함-성소는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 과제다-”로 정했습니다. 마침 어제 자매와의 면담중 장부가 냉담중이지만 그 갈망을 해소하려 타종교의 스승들에게 진리를 찾고 있다는 말을 듣고 드린 조언이 생각납니다.
“왜 여기 샘솟은 우물인 주님을 놔두고 밖에서 물을 퍼다 마십니까? 여전히 목마를 뿐입니다. 기도가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말씀 많이 들어도 기도를 통해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영적 갈증은 결코 해갈되지 않습니다. 매일 기도를 통해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 생명수를 마셔야 비로소 해갈되는 영혼입니다. 한두번의 만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그날까지 매일 주님을 만나 생명수를 마셔야 삽니다.”
요지의 권고였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귀한 선물이 각자의 성소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열두제자를 사도로 부르신 경우와 똑같습니다. 예수님은 주로 호숫가에서 가르치셨고 기도하실 때나 제자들에게 중요한 일을 하실 때에는 군중에게서 떨어져 산으로 오르셨습니다. 오늘 복음 전반부 묘사가 한폭의 그림처럼 선명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시어,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사도라 이름하였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즉시 기꺼운 마음으로 응답하는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성소의 신비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께서 원하셔서 부르셨음이 분명합니다. 성소의 두 측면이 드러나니 즉 제자이자 사도로서의 신원입니다. 주님과 함께 지내며 주님께 배워 닮아야 하는 관상적 측면의 ‘제자직’과 세상에 파견되어 복음 선포의 사명을 수행해야 하는 활동적 측면의 ‘사도직’입니다.
안으로는 관상의 제자요 밖으로는 활동의 사도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두 측면의 조화가 균형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에 이은 파견이 이런 진리를 분명히 보여 줍니다. 미사중 주님의 ‘제자’가 되어 주님과 일치의 관상후 세상에 복음 선포의 ‘사도’로 파견되는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성소는 순전히 주님 은총의 선물입니다. 저절로 선물로써 끝나는, 완성되는 성소가 아닙니다. 성소 또한 과정이자 여정입니다. 평생 성소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이요 그리하여 날마다 새롭게 주님을 만나 성소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죽는 그날까지 부단히 자기 성소를 깨어 돌보고 가꿔야하는 과제는 순전히 우리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총에 우리의 과제 수행의 분투의 노력과 더불어 성장 성숙해가는 우리의 성소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평생 날마다 끊임없이 시편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 훈련에 전심전력을 다하는 여기 수도자들입니다. 유일무이한 각자의 귀한 성소입니다. 참으로 우리 하나하나가 존엄한 품위의 인간임을 실증하는 성소입니다.
참으로 부르심을 받은 성소자로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는 일이 얼마나 본질적인 일인지 깨닫습니다. 내 성소가 귀하듯이 형제들의 성소도 귀합니다. 참으로 서로 돌보고 가꾸는 섬김의 사랑이 얼마나 결정적인지요. 바로 인간 존엄성의 근거가 하느님께서 불러 주신 우리의 성소입니다. 결코 비교하거나 판단할 수 없는 하느님께서 불러주신 참으로 신비로운 각자의 성소입니다.
그러니 부단히 물어야 할 내 성소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나?” “제대로 참으로 진짜 살고 있나?” “이렇게 살아도 되나?” 등 끊임없이 날마다 물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사울왕의 성소를 아끼는 다윗의 인품이 참 감동적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동굴에서 임금님을 제 손에 넘겨주셨습니다. 임금님을 죽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저는 ‘그분은 주님의 기름 부음 받은 이니 나의 주군에게 결코 손을 대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임금님의 목숨을 살려 드렸습니다.”
이어지는 구구절절 다윗의 진정성 넘치는 진실하고 간절한 고백이 사울을 감동시켰고 이에 대한 사울의 솔직하고 순수한 반응도 감동적입니다.
“네가 나보다 의로운 사람이다. 내가 너를 나쁘게 대하였는데도, 너는 나를 좋게 대하였으니 말이다. 이제야 나는 너야말로 반드시 임금이 될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스라엘 왕국은 너의 손에서 일어날 것이다.”
사울의 성소를 아끼는 다윗의 관대한 사랑이 사울을 감동시켜 회개에로 이끌었음을 봅니다. 이후 또 다윗을 추격하는 변덕스럽고 불안한 사울이지만, 다윗은 한결같이 사울의 성소를 존중했고 자신의 성소에 충실했습니다. 참으로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또 제1독서의 다윗을 통해 우리 성소의 소중함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의 제자이자 사도로서 우리의 귀한 성소자의 신원을 새롭게 깨닫게 해 주시며, ‘성소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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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mP7Ro8S8zy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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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들을 사도로 이름하셨다."'(마르 3, 14)
삶의
최전방에는
언제나
뜨거운 봉헌이
있다.
새로운 삶이
주어졌다.
참된 행복을
잃어버린
우리들
삶이다.
평범한 이들을
부르시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생활이
되시는 생활의
하느님을
만나게된다.
평범함을
꿰뚫는 것은
언제나
평범함이었다.
평범함을 통해
우리가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된다.
보통의
평범함이
만들어가는
아름다운 사람의
여정이다.
평범함 위에
피어나는
희망이
참된 희망이다.
희망의
깨끗한
얼굴들이
평범한 일상의
기쁜소식이
되었다.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평범한
열두 제자들이다.
평범함의
주소에서
출발했기에
평범함에
감사드린다.
신앙의
참기쁨은
평범함 뒤에
숨어계신
평범한 주님을
만나는 기쁨이다.
평범함이
빚어내는
새로움이다.
이제부터
삶의
이야기가
달라진다.
작은 것에
감사하게 된다.
평범함을
믿게 되었다.
우리가
사랑하지 않으면
안되는 평범한
일상의 기쁨이다.
쓰다 버린
이름이 아닌
가장 소중한
인격이 있다.
심장이 뛰는
인격을 부르시는
주님이시다.
평범함의
기쁨으로
돌아가야 할
우리 교회의
모습이다.
평범함이
가장 큰
선물이다.
평범함의
최전방에
계시는
생활의
주님이시다.
생활을
바꾸어주시는
주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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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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