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제가 올렸던 글인데, 엉뚱하게도 전혀 예시가 맞지도 않는
초한지, 삼국지 얘기만 댓글이 잔뜩 달렸던 데다가 아예 후삼국시대 자체에 대한 질의가 나오면서
본문에서 부각되는 바는 안드로메다로 갔었기에 다시 올립니다.
여기서 주로 논하고자 하는 것은 삼국 시대의 청산되지 않은 전통이 후삼국 시대에 다시 반복됨입니다.
-> 따라서 통일신라의 삼국통일로 삼국의 전통이 절대로 끝난 게 아니라는 게 핵심입니다.
후삼국 시대는 통일신라가 세 개로 짜개지는 양상이 아니라,
그냥 기원전부터 있었던 마한 진한 변한 고구려 등등등의 대립이 몇 백 년 만에 소소하고 짧은 규모로 리바이벌 되는 경향이
주요소며, 따라서 위촉오로 갈라졌던 동한과는 완전 다른 양상이라는 게 되겠습니다.
즉 삼국 시대는 물론이고, 삼한 시대의 잔재와 은원이 통일신라까지도 여전히 청산되지 않았음이
관찰됩니다.
1. 그 예로 후고려 vs 후백제 공산 전투 <- 한성 공함 직후 전고려 VS 전백제-신라 연합군 대치
후백제군의 주류는 일단 신라 정규군 사단들이 모체인데,
그 지역 근거지들은 당연히 옛 백제 지역이지만 다른 한 중대한 뿌리가 있습니다.
충북 남부-경북 서남부 일대의 추풍령 지역이 근거인 장병들.
이들이야말로 자비 마립간 때부터 진흥왕 때까지 신라가 심혈을 기울여 육성한 정예 중의 정예군,
신라 정예 사단의 직계 후예였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야말로 백제-신라 연합군이었습니다.
공산 전투에선 후백제의 깃발 아래 같은 지휘관 아래 같이 묶여 있었지만요.
한편 한성 공함 직후 부여문주 왕제가 신라 자비 마립간이 급파해서 보내온 신라군과 연합해서
구성한 백제-신라 연합군을 보죠.
신기하게도, 바로 자비 마립간이 보내온 신라군은 수백 년 후와 똑같이,
다름아닌 추풍령 일대에서 신라 왕실이 육성한 정예군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꽤 빠르게
백제 지방군보다 먼저 합류가 가능했다고 하네요.
이 백제-신라 연합군이 한강을 사이에 두고, 장수왕 고려의 그 고구려군과 한 달 동안 대치했었습니다.
공산 전투같이 아예 그냥 쌈빡하게 엉겨붙진 않았지만.....
거의 똑같은 인적 구성으로 약 사백오십 년 만에 리턴 매치하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겁니다.
우연히도, 이때의 명목상 총대장은 역시 백제왕인 문주왕.
다른 점이 있다면 그저 대치만 한 뒤 하는 수 없이 연합군을 이끌고 공주로 내려가는 결말이었는데.
이로부터 약 사백오십 년 만에 거의 그 구성지역이 같은 군대끼리 싸우게 될 줄은 몰랐을 겁니다.
물론 '고려군'이 캐발살나게 될 줄은 아무도....
2. 후백제의 나주 함락 및 나주 호족 대학살 파티 <- 근초고왕 백제의 나주 함락
근성의 화신 견훤이 공산 전투 후 나주 일대를 점령해서 정말 오랫동안 스스로를 환장하게 만든
영산강 유역 일대를 평정하는데. 주된 이유는 영산강 유역이 실은 신라 장군 출신
견훤의 '백제왕' 즉 백제 계승성을 인정하지 않았던 데 있었죠.
마찬가지로 근초고왕 당시 백제도, 백제국의 마한 영도국 자격에 동의하지 않았던
영산강 유역, 즉 침미다례 일대를 정벌했었죠.
두 경우 다 마찬가지로 이후 영산강 유역 호족들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어버리는데.
근초고왕 시절의 경우는 그래도 백제 왕실의 마한 지역 지배에 기여한 측면이 있었지만,
견훤의 트롤링 탓에 이후 고려 혜종이 외가 지원을 제대로 못 받게 되면서 고려 왕실의 난맥상이
초래됩니다.
하여튼 고려와 신라 양쪽 공히 트롤링했던 견훤...... 태조 왕건에서 묘사되었던 견훤 캐릭터가 의외로
현실과 가까웠을거란 심증이, 역사책을 읽을수록 깊어집니다.
3. 후백제의 서라벌 함락, 고려의 신라 접수 < - 초기 백제의 목지국 공함, 이후 목지국 세력 해체
이건 다음 글에서.... 다만 미리 말하자면 그나마 백제는 욕도 먹고 실리도 챙겼지만
후백제는 욕만 디립다 쳐먹고 실리는 전혀 챙기지 못했습니다.
다만 이게 나무위키에서 말하는 바와 달리 견훤이 항우라서 생긴 일은 아니었습니다.
견훤은 실제로는 장한 상위호환에 가까웠던 인물이라서.
근데 신라가 장한 안 시켜주니까 서로마 제국 알라릭 노릇 해버렸죠. (.....)
나무위키에서 은근 유방 이미지 덧씌우는 왕건은 거꾸로 조조와 조비를 좋아했고
이들 부자를 고평가했으며, 실제 행동양식은 유방보다는 초한 쟁패기의 제나라 전영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왕건이 전영보다는 군사적 재능이나 정치력 상위호환이었던 것 같지만. 여튼 그렇습니다.
첫댓글 졌어! 또 졌어!
견훤이 백제왕으로서 정체성을 굳혔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나 서라벌 함락이후 견훤의 행동은 권신에 가까운 행보를 보였지요. 경애왕 족친것도 고려도와서 자기 엿맥인거 한풀이하는 것 같달까요..?
백제왕으로 정체성 굳히는게 서라벌귀족들이 그를 인정하는것보다도 더 빠르죠.
잘 보고 갑니다
왕건 이미지는 태조왕건 드라마의 역할이 지대한거같네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