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19일(수)
* 시작 기도
주님...
이 하루도 주의 말씀 안에서 시작할 수 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눈을 떠 속히 주의 말씀으로 달려가오니 이 종을 붙드사 오염된 나의 영육을 주의 보혈로 씻어 맑히소서.
나의 연약한 것으로는 날마다 순간마다 넘어지오니 이런 나를 그냥 내버려두지 마시고 주의 품에 강권적으로 품어주소서.
새 영과 새 마음을 두사 나를 새롭게 빚어주시고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충만케 하소서.
내 속이 시끄럽듯 세상이 시끄럽습니다.
교회를 코로나의 원흉으로 지목하고 분탕질을 하려 하나이다.
이럴 때일수록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인 성도들이 깨어 있게 하시고 교회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게 하소서.
눈에 보이는 것에 연연하게 마시고 오직 눈에 보이지 않으나 영으로 볼 수 있는 영원한 생명에 붙들려 살게 하소서.
이 하루도 주의 강한 손길이 나의 영육의 걸음을 인도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본문 / 롬 11:25-36
제목 :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데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27. 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28. 복음으로 하면 그들이 너희로 말미암아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네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라.
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30.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31.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 나의 묵상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은 대적하는 자들이 아니라 협력자들이다.
좁게는 로마에 있는 유대인 기독교인들과 이방인인 로마의 기독교인들이 그렇고, 넓게는 이스라엘에 있는 정통 유대인들과 열방의 이방인들이 그렇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영생을 주시기로 약속하셨고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하여 또한 창세전에 이미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를 세상에 육신으로 보내기로 작정하셨다.
아직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시기 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하여 번성한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을 택하셨다.
그리고 그들을 애굽에서 해방시키심으로 그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을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을 삼으셨으며 무엇보다 그들을 하나님의 소유(히, 써굴라)로 삼으셨다.
제사장 나라는 그들이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가 되어 열방 중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을 전하는 제사장의 역할을 하는 것이며, 거룩한 백성은 그들 스스로는 어떠한 경우에도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없지만, 하나님과의 언약 안에서 말씀에 복종하며 살 때 그들 안에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나타나고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히브리어로 써굴라라고 하는 ‘하나님의 소유’는 하나님의 것으로서 정서적인 표현으로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존재’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자는 곧 생명으로 낳은 자식을 의미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생명으로 낳은 자식이 된 이스라엘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언약 안에 머무르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해야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출애굽 당시 하나님과 시내산 언약을 맺고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 그리고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음에도 제사장 나라나 거룩한 백성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소유된 자로서의 책임을 간과하다 못해 무시하기 까지 하였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여 제사장 나라의 역할을 맡기신 것은 그들만 구원의 자리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모든 족속들이 하나님 나라 곧 구원을 받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다.
그런데 이런 특별한 은혜를 입은 이스라엘이 자기들이 잘 나서 그런 것인 양 교만하고 자기 의로 똘똘 뭉친 자들이 되고 만 것이다.
그래서 자기들만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뿐, 이방인들은 지옥의 땔감 정도로밖에 쓰지 못한다고 하여 그들이 구원의 반열에 들어오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였다.
이에 대한 비근한 예가 바로 요나서가 아닌가?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에 있는 12만 여명이나 되는 그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요나를 그곳에 보내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였건만 요나는 이방인인 니느웨 백성들이 복음을 듣고 구원 받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니까 항구로 가서 배는 타지만 니느웨로 가는 배를 타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정반대편인 다시스로 가는 배에 몸을 싣고 만다.
얼마큼 잔잔한 바다를 지나다가 갑자기 돌풍이 불어 선원들이 감당을 하지 못하자 돌풍의 원인이 자신 때문임을 알고 요나가 그 선원들에게 자기를 들어서 바다에 던지라고 한다.
그러자 집어삼킬 듯하던 바다가 잔잔해졌다.
한편 바다에 빠진 요나는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큰 물고기가 먹었다.
그러나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요나는 거기서 소화되어 죽은 것이 아니라 그 자리가 바로 그에게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무덤의 자리가 된 것이다.
무덤의 자리는 생명의 자리이다.
이 세상 어떤 무덤도 생명으로 나온 무덤이 없다.
오직 예수님의 무덤만이 생명으로 나왔다.
생명의 무덤은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이 유일무이하다.
이와 같이 요나의 무덤은 예수님의 3일의 무덤을 예표한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로마에 있는 유대기독교인들은 자신들만의 자존심이 있었다.
그들은 적어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이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이며 무엇보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주신 할례와 모세를 통하여 주신 율법이 자기들에게 주신 특권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비하면 로마 이방인 기독교인들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잡히는 할례나 율법과 같은 어떤 것도 그들에게는 없었기에 유대기독교인들 앞에서는 항상 기가 죽거나 작은 자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교만하거나 자고한 유대인들이 구원의 자리에서 멀어진 대신에 이런 율법이나 할례는 잘 알지 못하지만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는 믿음을 주셨다.
그 믿음을 통해서 그들이 구원에 이르게 되는데 이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곧 그리스도의 말씀 곧 복음을 들을 때 믿음을 선물로 받게 되며 거기서 구원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사(선물)과 부르심에는 결코 후회하심이 없으시다(29절).
이방인들이 이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아 구원과 전혀 상관이 없는 자들이었으나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음으로 오히려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긍휼을 받아 그리스도의 말씀인 복음을 먼저 듣고 믿음을 얻게 되었다.
사람들이 불순종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긍휼을 베푸시고자 불순종의 무덤 안에 가두어 두심이다.
이를 과연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토록 깊으신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말이다.
그래서 오늘 바울의 찬양은 우리의 닫혀진 눈과 귀 그리고 마음을 여는 은혜의 고백이요 찬송이다.
(33, 36절)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나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을 전혀 알지 못하는 자였다.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는 그 마음을 내가 어찌 헤아릴 수 있단 말인가?
십자가의 은혜는 그저 지렁이와 같은 작은 지식에 지나지 않았고 감히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에 견줄 수 없는 것이었다.
밟으면 꿈틀거리는 지극히 본성적인 것만 알았지, 그 밟히는 고통 속에 하나님의 섭리인 생명이 들어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조차 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어떻게든지 밟히지 않으려고 요리조리 피해다니다가 밟히면 그 상황을 모면해보려고 하는 상황해결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였다.
이것이 바로 우둔한 나의 지식이요 지혜랄 수도 없는 본성적인 지혜였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친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이를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어 하나님의 자녀를 삼아주신 것이다.
세상에 이런 일이 또 어디에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이는 결국 나의 생명은 아들의 생명이요 나아가 하나님의 생명이다.
오늘도 나의 생명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간다.
그곳이 내가 있어야 할 곳이며 내가 영원히 거할 성읍인 아버지 품속이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오늘 하루도 유한한 이 세상에서 눈을 뜨고 땅을 밟으며 살아가지만 나의 영혼은 하늘을 딛고 살아가게 하소서.
그 하늘은 다름 아닌 성령 안에서 주의 말씀의 순종함이오니 불순종의 극치를 달리던 내가 요나임을 알아, 무덤의 자리에서 아들의 생명을 얻어 주의 복음을 전하여 함께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주의 백성들이 되게 하소서.
어찌하든 세상은 예수를 핍박하고 예수를 구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경멸하여 세상의 왕이 되고자 하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 우리의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우리의 목적을 두고 그 나라를 현재로 살아가는 자들이오니 그런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도록 우리를 주의 십자가에 묶어주소서.
영생의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알아,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이 땅에서부터 아들의 생명을 현재로 누리는 하나님 나라가 되게 하소서.
(찬양)
주를 위한 이곳에 예배하는 자들 중에
그가 찾는 이 없어 주님께서 슬퍼하시네.
주님이 찾으시는 그 한 사람, 그 예배자
내가 그 사람 되길 간절히 주께 예배하네.
주 은혜로 이곳에 서 있네
주 임재에 엎드려 절하네.
그 어느 것도 난 필요 없네 주님만 경배해.
주 은혜로 이곳에 서 있네 주 임재에 엎드려 절하네
난 어느 것도 난 필요 없네. 주님만 경배해.
난 정말 주님만 있으면 어느 것도 필요 없는 자인지 다시 한 번 자문합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사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