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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 20일(목)
* 시작 기도
주님...
죄의 수렁에서 헤매던 나를 건지사 주의 품안에서 뛰놀게 하소서.
주님을 가장 가까이서 섬겨야 할 이 종이 주를 가장 멀리 떠나 죄에 종노릇하며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나이다.
주님의 품을 떠나 나의 정욕과 욕심을 따라 살았던 나를 주의 긍휼과 자비로 감싸주시고 주의 집으로 돌아오는 나를 오직 주의 보혈로 덮으사 깨끗하게 씻어 정결하게 하옵소서.
주님...
이제 그 악행에서 벗어나 주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깨닫게 하시고 오직 주를 위하여 내 한 몸을 드리되 산 제물로 드리게 하소서.
이 죄인이 주께 고백하오니 이 종은 오직 주의 것임을 믿나이다.
나를 주의 복음의 도구로 사용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본문 / 롬 12:1-8
제목 :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않게 하소서.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니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7.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8.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 나의 묵상
나는 신학을 하기 전에 직장생활을 하였으며 또한 학원을 경영하는 등 사회생활을 하면서 사회에 대한 풍부한 경험을 쌓았다.
또한 교회에서는 집사, 교사, 찬양대 지휘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섬기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신학에 대한 강렬한 이끄심이 있어서 신학교에 들어갔다.
그런 나는 생각하기를 내가 목사가 되어 목회를 하면 적어도 나로 인하여 시험 들거나 상처받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나는 평신도로 섬겨보았기 때문에 평신도의 마음을 잘 알고, 사회생활을 해보았기 때문에 직장생활을 하는 평신도들의 고충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나는 내 주장만 하는 고집불통도 아닐 뿐 아니라, 보편적으로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편이고, 무엇보다 남에게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목회를 직접 해보니까 현실은 나의 생각과 전혀 달랐다.
나 때문에 시험 들고, 상처 받고, 힘들어 하고 심지어 교회를 떠나는 이들까지 생겨나는 것이다.
나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깊이 생각해 보았다.
결론은 내가 아무리 성격이 좋다고 해도 나는 완전한 자가 아니었다.
사회생활, 평신도를 경험하고 목사를 해도 나 역시 연약한 지체에 불과했던 것이다.
나는 사회생활 경험과 평신도의 경험, 그리고 자칭 성격이 좋다는 착각으로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었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고 하셨는데 말이다.
(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나는 이런 사회적 경험을 토대로 하여 목회를 잘 할거라 생각했지만, 보기 좋게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자기 과신이요 교만이었으며 또한 나의 욕심의 결과였다.
많은 목사들은 특히 이런 교만과 착각에 잘 빠진다.
왜냐하면 목사들은 뭐든지 잘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이다.
목사는 실수해도 안 되고, 잘못해도 안 되며, 부족해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목사 자신은 수퍼맨이나 만능 엔터테이너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생각은 목사 자신만 아니라 교회의 성도들 역시 자기 교회 목사가 바로 그런 사람이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착각, 그것도 큰 착각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몸에는 지체가 많고 지체의 기능 역시 각각 다 다르다.
(4-5)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목사를 비롯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모든 성도들은 성품도 다르고 능력도 은사도 그리고 믿음의 분량도 다 다르다.
목사인 나 역시 그런 연약한 지체의 한 사람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것을 인정할 줄 모르고, 그저 일(사역)에만 집중하였던 것이다.
물론 목사로써 일과 사역에 열심을 내야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나와 형제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며, 또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라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결국 사역에 욕심이 생기게 된다.
그러면 이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 형제 등 지체를 다그치게 될 것이고, 그 욕심을 채우지 못하면 짜증이 나고 나무라거나 추궁하게 될 것이다.
그런 모습은 결국 하나님이 기뻐하시지도 않을뿐더러 성도도 목사도 모두 기쁨을 상실하게 되며, 또한 행복하지도 않게 된다.
중요한 것은 사역과 사역의 결과물이 아니다.
목사의 가장 중요한 사역이 무엇일까?
큰 교회로 성장시키는 것일까?
그래서 노회나 총회에 가서 목에 힘주고 어깨를 높이기도 하며 노회장이나 총회장을 해보는 것일까?
성도들을 부자로 만드는 것일까?
분명한 사실은 그런 것이 목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성도들이 이 세상을 본받지 않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아는 것, 곧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목사가 해야할 가장 중요한 사역이 아닐까?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나는 사회생활을 하고 평신도로써 열심히 주를 위하여 섬기며 주의 일들(?)을 하는 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주님의 뜻은 전혀 몰랐다.
주를 위하여 일을 하는 것은 그야 말로 열심히 몸으로 때우는 수많은 일들(?)로 착각하였던 것이다.
(요 6:28-29)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들)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그러나 진짜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은 그런 것이 아니라, 아들 안에 있는 생명을 얻어 날마다 이 땅에서부터 영생을 누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요, 또한 이를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 땅에 오셔서 철저하게 아버지의 명령과 그 뜻대로 행하신 것이다.
(요 12:49-50)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 2절에서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는다는 것은 망나니 같은 삶을 살던 사람이 내적 치유를 통하여 부부관계를 회복하고 부모 자식간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요 옛 사람으로 태어나며 영적으로 죽은 자이다.
(고전 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런데 이처럼 아담 안에서 영적으로 죽어 옛 사람으로 살던 사람이 새 사람으로 완전히 탈바꿈하는 것, 이것이 바로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되는 것이다.
즉 3번 생명(아담의 생명)에서 1번 생명(아들의 생명)으로 바뀌는 것을 말한다.
옛 사람은 여전히 아담 안에 있는 죄성으로 사는 사람이다.
그러나 새 사람은 새 생명 곧 아들 안에 있는 생명을 얻는 자이다.
옛 사람은 변화시키는 존재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할 존재인 것이다.
걸레는 아무리 빨아도 걸레다.
너무 더러워져서 더 이상 빨아도 깨끗해지지 않는다면 과감하게 버리고 새 것으로 바꿔야 한다.
결국 마음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나의 옛 사람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주님이 무덤에 장사되신 것처럼 나 역시 무덤에 장사되어야 한다.
내가 장사되는 그 무덤, 나를 심판하시기 위하여 주신 상황적 관계적 존재적 무덤에는 나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주님이 먼저 와 계신다.
그곳에서 주님과 함께 말씀으로 교제와 사귐을 가질 때 그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게 된다.
그 영광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살아나심과 같이 나 또한 주님과 함께 새 생명으로 일으킴을 받아 새 사람이 되는 것이다.
(롬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이와 같이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은 죄로 가득한 옛 사람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것이며 내가 무덤에 장사되는 것이다.
그제야 비로소 아들 안에 있는 생명을 얻어 새 생명으로 일으킴을 받는데, 이것이 바로 거듭남이다.
이 거듭남은 나의 능력으로도, 무슨 방언이나 통변이나 예언의 은사나 병고치는 신유의 은사와 같은 것이 아니다.
거듭남은 철저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어지며, 이는 성령께서 항상 함께하시는 것이다.
(벧전 1:23-25)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요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이와 같이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사는 것은 곧 새 사람으로 아들 안에 있는 생명을 얻어 영생을 누리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산 제물이요 영적 예배이다.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결국 이 모든 일은 나의 열심, 나의 수고, 나의 헌신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되어진다.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창세전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과 함께 사람에게 영생을 주시기로 약속하신 것이다.
(딛 1:2)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이와 같이 아들의 생명을 얻어서 영생을 누리는 자는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않는다.
그리고 다른 지체의 믿음의 분량이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런데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 곧 욕심을 품는 순간 거기서부터 상처와 고통 그리고 아픔과 시험이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만큼 깨달으면 된다.
세상에 대한 욕심도 품지 말아야 하지만, 또한 영적 욕심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세상에 대한 욕심이든, 영적 욕심이든 그것을 품는 순간 우리 심령에 평강과 기쁨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각각 말씀으로 주님과 깊이 교제하고 묵상하며 주님과 사귐을 가질 때 성령께서 각자의 믿음의 분량만큼 깨닫게 해 주신다.
그것이 바로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런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 그리고 찬양을 올려드린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나는 주의 일들을 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고 했던 아주 몰상식하며 무지한 자였나이다.
몸으로 때우는 그런 일들이 곧 주님의 일인줄 착각하고 얼마나 그것에 목을 매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일들이 아니라 나의 존재를 원하셨습니다.
내가 존재로 주님 앞에 나아가 말씀으로 주님과 교제하기를 원하시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내 얼굴이 얼마나 화끈거리고 뜨뜻했는지 모르나이다.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으며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그저 재와 티끌에 앉아 회개하나이다.
주님...
이 종은 이제 세상의 교만과 욕심, 탐욕 그리고 착각에 빠져 사는 것을 포기하나이다.
그리고 나에게 주신 주님의 은혜의 분량, 그 이상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않고 오직 주님이 베푸시는 은혜에 감사하며 만족하여 그 안에서 참 평강과 기쁨을 누리나이다.
그것이야말로 하늘의 기쁨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오늘도 나에게 베푸실 주님의 은혜를 기대하며 또한 내 안에 하늘의 기쁨과 평강이 넘치도록 인도하소서.
주님께 영광을 올려드리오니 영광과 찬양을 받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