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시절
아마도 제 기억이 맞다면은.
정읍, 중사동 황새둠벙 우리집에서 상사동 탱자나무집으로 가는 길로 걸어오르는
전봇대 옆을 지나시던. 1974년의 어느 날에 뵈었던.
삐쩍 마르신 호남고등학교 국어 선생님. 강동길 시인 선생님의
모습이 제겐 첫 인상으로 또렷이 있습니다.
(이 곳 누리집. 맨 아래 소개된 젊은시절 사진보다는 한 5년 전 모습이
황새둠벙 소년의 추억 속 모습이었습니다.)
동네 형들은 수근댔습니다.
저 분이 가수 박인희 친구분이시고 시인이신대 하얀 조가비 가사를 쓰셨다고.
박인희 하얀조가비
내쳐서
중사동, 황새둠벙 소년은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교육대학 시절을 보내고, 청춘의 장년의 중년의
시기를 더하면서도 시인 선생님의 근황을 인연따라 찾아 나섰지만
47년 여 세월이 흘러서야
그 인연이 구글의 사진 한 장에서
강인한 시인 선생님이 실마리가 되어 따순 정감있으신 목소리까지
듣고 뵈었으니 행복한 지난 금요일이었습니다.
영사운드의 등불을 쓴 시인이시라는 사실도.
옆 집 내친구네 외삼촌 댁이 탱자나무집 이었는대
왜 그집에서 사셨다고 생각되는지는 기억 속에 희미합니다.
그 부인은 맏며느리감의 표본이셨고 참 따뜻하신 정서를 가지셨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사모님께서 자녀분을 지금의 서양식 배낭같은 걸망에 엎고 다니 실 때
일본, 오사카와 규슈에서 몇 년 사셨던 우리 어머니는 추억삼아
앞으로 아이를 안듯이 매야한다는 덕담을 건내셨던 바로 그 자리에 있던
제 어린시절 기억도.
바로, 그 전봇대 앞 우리들의 놀이터 공간 앞이었습니다.
나, 선생님되어. 저 강동길 선생님 모습처럼 퇴근 길.
그리할 수 있을까?
도란도란, 중사동 황새둠벙 소년의
그 선망의 모습을 오늘 또 안아보았습니다.
그 한 해 전.
1973년 어느 날, 정읍동초 모든 학생이 성림극장에서 10원의 입장료를 내고 보았던
신성일, 윤정희 배우분 주연의 '작은 꿈이 꽃 필 때'로
이미 선생님의 꿈을 가졌던 저는 바로 1974년의 시인 선생님을 뵈면서
왼 날개, 오른 날개 되어 마냥 기분 좋은 허공을 날고 있었습니다.
그 시절 시인 선생님의 얼굴을 사진으로 만납니다.
깡마르신,
빼빼한 키에
가방들고 퇴근하던 양복신사 국어선생님.
선망의 대상이셨던 이 어른을 사진으로
시로 만나는 오늘. 참 행복합니다.
'저 선생님 처럼 나도 될 수 있을까?'
선망.
그 꿈 하나가
선생노릇하는 지금을 축하해주는 듯
"잘했어`"라는 소리.
평생 어짜꼬 어짜꼬 두런거려서 붙은
댁호 어짜꼬 댁 담장에서도 들립니다.
영사운드가 노래한 등불도 시인 선생님의 자식이라니
세상에, 세상에 참 새롭기도 했으며
서정성에서 제 마음을 하얀 조가비와 함께
사로 잡았습니다.
(시인 선생님의 작사 곡과 소월의 시를 노래한 곡을
지금껏, 지금도 무척이나 좋아하고 있거든요. )
이 소식을 금요일,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선후배님 몇 분과
학교 직원들과도 함께 나누었습니다.
교육 이야기, 삶을 이야기하는 자리에 등장 했던
영화 '작은 꿈이 꽃 필 때' 포스터와 함께
이제는 시인선생님의 사진과 시집과 시어도 등장 할 것입니다.
금요일 통화와 월요일 출근과 동시에 놓여 있는
시인선생님의 문예바다 서정시선집 2
' 당신의 연애는 몇 시입니까?'를 받아 읽으며
이 감흥을 소개하고자 붓을 들었습니다.
저 또한 선생노릇의 꿈을 이뤄
1970년부터 지금 껏 학교에서 생활하니 부러울 것 없는
한 삶을 살고 있으며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1984년. 첫 발령. 곰내미 그 산 골 학교에서 만난 우리 반 친구 신용목 시인의 여러 편의 시가
강인한 시인 선생님의 평론에 소개에 등장해 있는 모습을 보면서
인연의 따스한 손 잡음을 체감합니다.
참으로 고맙습니다.
어찌 어찌 한 번, 두 번의 인연에 머물더라도
제 유년, 그 해 1974년 시인선생님의 모습과 일화.
1973년 영화 섬마을 선생님, '작은 꿈이 꽃 필 때'를 생각하며
선생님, 사모님 모시고
맛 난 것 대접해드리고픈 마음
다음 날의 인연으로 소중히 간직하고 있겠습니다.
저 또한 제 교직생활 중 남은 교육일기 더 따뜻하게 써가겠습니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좋아요. 좋아요. 잘하셨어요."
그 마음 잃지 않고 살아가겠습니다.
고등학교 재학시절, 시인 황길현은사님의 앙가바리의 반항,
서시, 그리고 다시도 추억으로 자리하게 되어
무척이나 기뻤습니다.
이 좋은 인연 속에서
제 삶의 원류를 찾은 듯 설렘 가득했던 지난 금요일을 추억합니다.
시인 선생님의 시집을 알라딘에 신청했고
하제 도착합니다.
시인 선생님과 신성일, 윤정희 선생님의 포스터를
인쇄하여 시집의 머릿말 부근에
색동 치마, 저고리 예쁘게 입혀서
선물하고자 합니다.
바로, 오늘 월요일.
바쁜 새벽 일정이 생겨
수원에서 한남대교 건너, 성북동 대사관로, 길상사, 하늘재 돌아
다시 수원 교육일터로 돌아와 책상에서 만나는
시인 선생님의 친필과 마음을 담은 시집을 맞잡으며
귀한 제 마음 속 풍금 같은 인연에 감사한 마음 담아 인사 올립니다.
항상 더 행복하시고 건강하세요.
늘 평화가 함께 하시길 두 손 모아 기원하겠습니다.
참으로 고맙습니다.
1974년, 중사동 황새둠벙 소년이 감사인사 올립니다.
"시인 선생님. 행복하세요. 참 고맙습니다."
첫댓글 반갑습니다. 50년 가까운 아주 아득한 추억 속의 모습을 소환한 류 선생님, 고맙습니다. 1973년 동양방송(TBC) 주말의 '신가요박람회'를 라디오로 들으며 건전가요 가사 공모에 시인이 아닌 자연인 강동길로 나는 가사를 써서 응모하였습니다. 열 편 정도가 입선 내지 우수작으로 뽑혔지요. 그 중에서도 지금까지 음반으로 남아 있는 건 '하얀 조가비'와 '등불'입니다. 박인희가 곡을 짓고 노래도 부른 '하얀 조가비'는 대학 시절 강릉 경포대에 처음 가본 옛날의 추억을 쓴 것이었습니다. 조가비는 조개 껍데기의 또 다른 말. 패각(貝殼)은 그 한자말이고. 밤톨만한 조개 껍데기 도톰한 윗 부분에 녹두알만한 크기의 동그란 구멍. 마치 정밀한 기계로 뚫은 것처럼 모양도 크기도 일정한 조가비의 구멍들. 훗날에야 알게 된 건 실은 끔찍한 사연이었습니다. 갯우렁이 조가비를 구멍내고 조갯살을 빨아먹은 흔적이 그것이었습니다만.
'등불'은 영싸운드가 노래 부르고 그룹 중의 안치행 씨가 작곡한 것.
그대 슬픈 밤에는 등불을 켜요
고요히 타오르는 장미의 눈물
하얀 외로움에 그대 불을 밝히고
회상의 먼바다에 그대 배를 띄워요
창가에 홀로 앉아 등불을 켜면
살며시 피어나는 무지개 추억
요즘도 맥주집이나 카페에서 이따금 들을 수 있는 곡이 강동길 작사, 안치행 작곡, 영싸운드 노래의 '등불'입니다. 아래의 가사는 그 2절.
그대 슬픈 밤에는 등불을 켜요
정답게 피어나는 밀감빛 안개
황홀한 그리움에 그대 불을 밝히고
회상의 종소리를 그대 들어보아요
창가에 홀로 앉아 등불을 켜면
조용히 들려오는 님의 목소리
저 가사 한 편의 당시 고료가 시 원고료의 열 배가 넘었던 기억만 또렷합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고향의 봄과 진달래 꽃 동요가 들려옵니다. 이 귀한 인연에 감사합니다.
항상 더 행복하시고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소년의 작은 추억 하나를 따뜻하게 감싸 안아 주셔서 참으로 고맙습니다.
등불 가사 속 회상의 먼 바다와 회상의 종소리가 황홀한 그리움에 불을 밝힌 소중한 추억이 되었으니
참으로 고맙습니다.
감동입니다.
제자 선생님은 참으로 행복하신 분이십니다.
학창시절 시인 선생님을 은사님으로 뵙고 수학하고...
소식에 먼 저도 눈물이 납니다.
그 기쁨이 얼마나 크실지...
감사합니다
황길현선생님의 시 한 편을 찾아 읽어 보았습니다. 전주 8경을 노래한 시라고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또랑새비, 어쩌면 좋아, 시어가 마음에 사로잡힙니다.
동포귀범(東浦歸帆)
어쩌면 좋아
맑고 밝게 서해로 트인 풍광
철철이 이어진 철새들의 축제를
멋과 맛이 어울린 풍요
바람의 돛은 돌아와 머물고
참한 평강과 온달
착한 선화와 맛동
예쁜 춘향과 몽룡
미쁜 농투산이와 땜장이들
부푼 보부상들
돛대에 걸린 그들의 노을이 곱게
불타고 있는 것을
허지만 화암사 진묵의 종소리에 여울진
백제 고혼의 한은 열리고
갯버들 풀뿌리에 얼기설킨
다슬기와 또랑새비의 마그냇 몸부림을
어쩌면 좋아
출처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http://www.jja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