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젠 38도.
지하철 안에는 '지금 에어컨을 최대로 가동시키고 있습니다'
라는 방송이 계속 나오고 있지만, 선풍기를 틀어놓은 정도였다.
'오늘 외식시켜드릴테니 나가지마시와요!'
3일 전에 큰 냄비 한가득 끓여놓은 김치찌게를 사발에 퍼담고,
72시간 경과 표시가 있는 밥통을 열고,
조심 조심 살피며(말라빠진 밥알은 늙은 이빨 망가트린다)
사발에 밥을 퍼담은 후 김치찌게에 마구 비벼 아점을 먹고나니
어느새 10시. 베란다 창을 뚫고 쏟아져 들어오는 햇볕은 이미 30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어제 저녁에 씻어서 빨래 건조대 틈바구니에 널어두었던 내의와 양발, 손수건을 집어들고
내방으로 들어가는데, 마님께서 오늘 대단한 선심이라도 베푸시는 듯 유쾌한 목소리로 선언하셨다.
순간 난 착각을 했다. '이 더운 날 무슨 외식? 나 이달치 용돈 다 떨어져서 밥 살 돈 없구만요.'
'누가 자기보고 사래? 내가 쏜다니까요!'
엥? 왠일이래? 계 탓나? 며칠 김치찌게만 쳐드시게 한 게 미안하긴 했구나.
암~ 아무리 좋은거라도 편식은 니쁜거야! 오케이, 갈게요.
어디로 가나요? 대학로! 택시비는 자기가 낼거지?
네, 당연히 각오하고 있습니다.
대학로 어느 골목 2층에 있는 이딸리안 파스타집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전부 잘 어울리는 젊은 커플들이다. 전혀 어울리지 않은 늙은 커플은 딱 우리뿐!
'옷 좀 챙겨 입으라니까! 뭐야 꼴이?' 실내를 휘이 둘러보시더니
마님 슬쩍 들릴랑 말랑 날카롭게 한 말씀 쏘셨다.
'왜? 제들도 나랑같은 반바지와 얇은 티 한장 입었잖아요? 난 정장 모자도 썼는데?'
'니가 애들이냐? 옷도 나이값하는거야. 에이 챙피해!'
그런 마님은 이 더운날 제대로 차려입긴했다.
하긴 외출 준비를 2시간 했으니... 난 잠실 롯데 신관 꼭데기로 가는 줄로 알았다.
거기 가도 난 이 차림 그대로지만.
난 서비스 더딘 레스트랑에 이미 숙달되어 있다.
파리에서 십년 수도했다. 근데 마님은 아니다.
벌써 세번째 호출 벨을 눌렀다.
하긴 우리를 안내해준 웨이러가 안보인다. 들어온 지 십분 쯤 됐는데?
어쩌다가 비상구 쪽을 보니 짜식 비상계단에 턱하니 걸터앉아
다리까지 쭉 뻗고 통화중이다.
복잡한 시간 피한다고 점심시간 지나서 온 우리 잘못이긴 하지만 너무했다.
짜증을 우아하게 참아내시는 마님이 안타까와 나가서 불러와 마님 앞에 대령시켰다.
'주문받으셔야죠? 냉수도 좀 주시고.'
입장한 지 시간반만에 어렵게 어렵게 해물 파스타로 배를 채우고
마님 당당하게 계산서 집어들고 카운터로 가신다. 난 마님의 그런 모습이 왠지 불안했다.
카운터에 계산서를 놓자마자 어느새 꺼냈는지 50,000원이라고 인쇄돼있는 종이티켓을 그 위에 놓았다.
'손님이 드신 해물파스타는 이 티켓으로 안되는데요? 피자만되요. 요기 써있잖아요'
마님 얼굴에 노기를 띄고 눈 크게 뜨시더니 티켓을 받아서 웨이러가 가르키는 곳을 뚫어지게 살피셨다.
거긴 5포인트 정도되는 크기의 글자가 빼곡하게 인쇄되어 있는데, 제일 끝에 그 내용이 적혀있었다.
정보를 파악한 마님 평상적인 마음 상태로 급변하신 후 수상하게도 넉넉한 미소까지 보이시며
나보고 티켙 확인하라고 건내셨다.
안경을 벗고 눈을 찡그려 겨우 확인해서 마님께 주려는데
어? 마님 화장실 가셨나? 안보인다. 웨이러는 두손 벌린 채 기다리고,
내 뒤엔 다른 손님들이 기다리고, 나보고 어떡하란 말이지?
난 일단 물러서서 뒤 사람에게 계산을 양보하고 마님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때 딩동 폰 문자가 들어왔다.
'빨리 계산하고 바로 밑에 아이스크림 집으로 오세요. 자기 좋아하는 이탈리 아이스크림이네. 내가 쏠게.ㅎ'
38도 폭염에 오만윈짜리 파스타 먹으로 택시 타고 대학로를 가다니!
마님이 쏜다고 할 때 당연히 의심 하고 '육천원짜리 모밀 냉면이나 사주세요. 아니 ㅈㅔ가 쏠게요.' 이랬어야 했는데...
귀가 하는 택시 안에서 마님 미안하신지 인심 크게 쓰셨다.
택시비도 마님이 계산, 그리고 피자 공짜로, 무려 5만윈 어치나 먹을 수 있는 티켙까지 하사하셨다.
이게 왠 날벼락같은 횡재!ㅠ
첫댓글 현명하고 똑똑한 마나님이 시네요ᆞᆢ
눈밖에 나지 않게 조신하게 사세요ᆞᆢ
더운때 쫒겨나면 모냥 망가집니다ᆞᆢ ㅎ ㅎ
그래서 늘 쪼들리는 머슴입니다.
그냥 쫒겨나고 싶어요.ㅠ
재미있네요....ㅎㅎㅎ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
그 주머니나 저 주머니나 그게 그거 아닌가요?ㅎ
남편의 체면살려주려고,마님께서 엄청애쓰시네요.ㅋ
이런 폭염에 체면 안세워줘도 되는데 말이죠.
좋은 게 좋은 건가요?ㅎ
제 나이 40대는
백화점 가면
지름신이 강신하사 눈빛이 빛나며 지칠줄 모르는 체력으로 이리뛰고
저리 뛰고
피겨 빙상 선수처럼
잽싸게 층을 누비며
계산할때는
남편 에게 코맹맹이 소리 하며 마구 마구
질렀습니다
롱 어고우ㅡㅡㅡ
현재는
귀밑 머리 허여 허여한
고아된지25년인
그분에겐 털어바야
먼지뿐인 남편
줄어든 사나이 배짱
그저 절약하고
삽니다
저는 아직 현직에 있어서 수입이 있지요
이젠 치사하게
바가지 씌우는 짓 안해요
ㅎ
착한거 맞 쥬?
전에 그랬으면 착한건데,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지금 털면 사금이라도 쏟아지게 해주시면 안될까요?ㅎ
@골드문트 안되욧
연금 받는 남편
자기 기분으로 살게 둡니다
@지적성숙 오 정말 착하네요. 인정!
ㅎㅎㅎㅎㅎㅎ
'말라빠진 밥알은 늙은 이빨 망가트린다' 에 빵 터졌습니다.
눈물 나도록 웃었습니다.
怒하신다면 죄송합니다.
저도 오늘 횡재했는데 딸아이의 생일인데 원래는 엄마가 미역국을 먹어야 하는 날이라며
손자들 떼 놓고 둘이서만 전통일식집에서 고급스시 먹고 왔습니다.
낼 부터는 저를 막 부려먹겠지만요.^^
그 정도면 착한 딸입니다.
우리 마님은 안부려먹으면 찾지도 않는다고 삐지던데요?ㅎ
제가 말라 빠진 밥풀 때운에
요즘 귀중한 앞니가 흔들거리거던요.ㅠ
골드문트님 횡재한 티켓은 혼자 슬쩍 하시면 아니되옵니다
나 피자 무쟈게 좋아하거든유.
일단은 문트님 꼬리잡고 늘어집니다.
도망가지 마시고 함께 가는겁니다.....
나가 누군지는 아시지요
그거 거금 투자한거라 딸년에게 팔겁니다.
전 피자보다 돈을 더 좋아하거던요.ㅎㅎ
마누라한테는 죽어나 사나 없는척 해야 합니다.
후환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암요^^^
진리 말씀. ㅎ
ㅎㅎ
웃을 일 없었는데 웃습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있어서요
공짜 티켙 사건인가요? 아님 남편 바가지?ㅎ
더운날
시원한 팥빙수 한 그릇
먹은 기분입니다.
재미있네요.^^
감사해요.ㅠ
남편들의 자존심?
생각 좀 해봐야겠어요
자존심이라기 보다, 농락당했다는 느낌.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