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청과 서경파들이 추진한 서경천도 운동이 단재 신채호 선생의 평가 때문에 실제 이상의 고평가를 받아 요즘도 서경으로 천도 했어야 했다는 사람도 가끔 만나는데, 다 떠나서 그 사람들은 현실파악을 제대로 못했고 실무 능력도 없었습니다.
1. 대화궁 입지 조건
대화궁터가 지금도 남아있는데 이 대화궁을 세운 위치가 한나라의 중심 궁궐이 들어설 위치조건이 전혀 아니고 무슨 산 골짜기에 둘러싸여 있는 형태..... 사실 원래 고려궁궐들 위치가 그렇기는 했습니다만(만월대도 산위에 있음), 그걸 감안해도 대화궁은 현 평양에서도 한~참 떨어진 산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임용한 선생님은 대체 뭔 생각으로 여기다가 궁을 지었는지 이해가 안되고, 인종이 대화궁 거림찍해 한게 다 이유가 있었다고 하시더군요
2. 유제(劉齊)와의 연합 주장
개인적으로 이들의 외교적 안목이 얼마나 꽝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가장 황당한 정책입니다.
금나라가 정강의 변으로 황제 둘을 끌고 가는데 성공했지만, 얼마뒤에 황천탕전투 등으로 남송과의 대치가 안정적이 되자 당장은 화북을 직접 지배할 여건이 되지 않았다고 판단해서 중간단계로 세운 괴뢰국이 바로 유제(劉齊 혹은 위제(僞齊)라고도 함)입니다.
원래 현 산동성일대인 제남의 지부였던 유예(劉豫)라는 사람이 금나라에 항복하자 그 사람을 황제로 책봉시켜주고 화북통치를 일임시킨 건데 이런 나라하고 연합을 해서 금나라를 치겠다는 발상은 대체 어떻게 나타나는 건지 -_- 차라리 만주국의 푸이가 장개석하고 연합해서 일본군하고 싸운다는 발상이 더 합리적;;
3. 군사적 무능
반란 초반에는 서경과 주변고을에 있는 관리들을 죽이고 현 평안남도 일대 대부분을 장악하는데까지는 성공. 하지만 중앙 정부군 일부가 자비령을 막아 서경방군의 남하를 저지하고, 주력군이 남쪽에서 부터 치고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동쪽으로 우회하여 동북쪽 일대에서부터 쳐내려오자 순식간에 서경이 포위당해버림. 발발 1달만에 반란군 내부에서 묘청을 살해하고 수급을 진압군에 가져다 바침.(다만 중앙의 삽질로 반군세력에게 불신감을 줘서 서 다시 반란이 일어남)
훗날 발발하는 조위총의 난이나, 미국 남북전쟁기 남군과는 달리 묘청등 반란군 지휘부는 군사적 능력도 전혀 없어서 중앙에 제대로 된 반격도 못하고 반란 개시 1달만에 중앙군에게 우세를 내어주고 패배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주도해서 금나라 정벌을 실제로 시도 했었다가는 대체 뭔 꼴을 봤을런지.......
사실 여러 말 할 것도 없이 이자겸집권기에 한국 역사상 최강의 소드마스터라 불리는 그 척준경이 왜 일찍부터 금나라와의 사대에 찬성했었는지 생각해보면, 칭제건원과 금나라 정벌을 주장하던 서경파들이 얼마나 외교 군사 관련해서 현실파악 못하고 실무능력이 떨어졌는지 알 수 있죠. 서경파 무신 최봉심이라는 작자는 군사 1천명만 주면 금황제 모가지를 따오겠다고 -_-;;(그랬으면 척준경이 했겠지)
하긴 뭐 김부식도 이자겸 집권기에는 잘 몰랐다가, 이자겸의 난 이후에 송나라 건너가서 체험을 하고 난 뒤에야 현실 파악을 한 거기는 합니다만.
뭐 요즘 정치라고 크게 다를 것도 없으니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