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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의 소통 스크랩 나의 생각은 차茶 문화의 대중화와 종교
둘로스 추천 0 조회 687 06.08.01 14:42 댓글 108
게시글 본문내용
 

문화의 대중화와 종교



1. 차 문화의 대중화가 왜 필요한가?


  이 세대는 감성(感性)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대상(對象)의 가치를 부여하고 선택하는 일은 전적으로 오관(五官)을 통해서 감지된 정보에 의존한다. 아름다움의 가치는 철저히 시각에만 의존하고 음식의 가치는 오직 식욕과 미각에 의존하며 소리는 단지 귀로 들을 뿐이다. 좋고 싫음은 감성에 의존한 주관적인 가치기준에 따라서 결정될 뿐이다.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충족하기 위한 성형수술이 폭발적으로 행해지고, 식탐과 미각에 의해 좌우되는 식생활은 영양과잉과 불균형을 초래하여 성인병이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으며, 듣기 싫은 말에는 귀를 막고 저 좋은 말만 들으며 편을 가른다. 자기감정에 충실한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이 시대에 이성적 사고는 골치 아픈 것으로 치부되어 성도덕(性道德)이 문란해지고 느는 것이 술이요 마약이다. 이성이 마비되니 양심이 굳어지고 죄의식이 엷어져서 날로 범죄가 늘고 광포(狂暴)해 진다.


  폭음과 과음을 일삼는 우리의 음주 문화는 술 소비량에 있어서도 OECD 국가 중 최고라는 명예롭지 못한 기록을 세웠다. 술은 이성을 마비시킨다. 이성은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시켜 주는 인간의 본질적 특성이다. 술에 취해서 말투나 행동거지가 평소와 달라지면 그는 이성을 잃은 것이다. 음주는 개인과 사회를 병들게 할 뿐 아니라 경제적인 손실을 따져보아도 가히 천문학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잘못된 음주문화는 개선의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


  예(禮)는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할 도리이며 이는 곧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과 태도를 일컫는다. 그런데 요즈음 우리 사회를 들여다보면 예가 실종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무례(無禮)가 도를 넘었다. 이전투구(泥田鬪狗) 이합집산(離合集散)을 일삼는 정치인의 무례는 말할 것도 없고 버릇없는 아이와 이를 방치 옹호하는 부모의 행태는 다반사로 겪는 일이라서 더 이상 놀랄 일도 아니다. 인터넷상에서는 예를 약으로 쓰려고 해도 찾기 어렵다. 예를 생각하니 글 쓰던 손에 그만 힘이 풀린다.


  차는 매우 이성적인 음료이다. 차는 색향미(色香味)를 지니고 있지만 감성을 자극할 만큼 진하지 않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차분하게 음미해야 비로소 그 소박함과 그윽함을 감지할 수 있다. 따라서 차와 친해지려면 반드시 이성적으로 차를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며 이는 마치 진정한 벗을 사귀는 것과 같다. 장시간 동안 많은 양을 마실 수 있지만 술과 달리 마시면 마실수록 마음이 차분해지고 몸이 편해지며 머리가 맑아지기 때문에 이성적인 교제가 가능하다. 다도는 정신이나 행위에 있어서 예의 정점이니 예를 배우고 실천하는 일에 이만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차 문화를 보급하는 일은 이성이 마비된 우리 사회를 치유하고 올바른 인간관계를 형성케 하며 예가 물처럼 흐르는 순리적인 사회를 만드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우리의 차 문화가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은 미미하다. 최근 들어 차의 소비가 급격히 늘고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진정한 의미의 차 문화 확산은 아니다. 단지 건강음료로서 차를 선택하는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티백녹차나 차가공음료(茶加工飮料) 위주로 소비가 늘고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다도의 정신을 근간으로 하는 차 문화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다른 나라와 비해서 조금도 뒤지지 않는 오랜 역사와 훌륭한 정신을 지닌 우리의 차 문화가 아직도 특정한 소수 집단의 문화로 머물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큰 이유 중 하나는 허례와 허식에 물든 귀족적 패거리 문화를 조장함으로써 스스로 문을 닫고 빗장을 걸어 잠갔기 때문이요 다른 하나는 특정 종교 안에서 관습적으로 행해지던 차 문화를 고집함으로써 대중의 자연스러운 접근을 막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후자에 대한 문제를 생각해보기로 한다.



2. 불가佛家의 차 문화와 차 문화의 대중화


  우리의 차 문화에서 불교라는 종교의 색채가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는 중국에서 선불교와 함께 발달한 차 문화가 끽다거(喫茶去), 다선일미(茶禪一味)라는 중국 선승들의 화두와 함께 이 땅의 뿌리를 내렸고 현재까지 1000 년이 넘는 오랜 역사 속에서 차와 불교가 성쇠(盛衰)를 함께했기 때문이다. 불교 의식에 사용되는 공양육물(供養六物) 중에 차가 있고 대웅전에서 드리는 불공에는 필히 다기(茶器)를 모셔야 하며 차가 사용되는 불공에는 다게(茶偈)라는 염불이 있으니 불교를 모르고는 차 문화를 언급할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 무승불차(無僧不茶) 명사출명차(名寺出名茶)라는 말이 있으니 더 이상의 부언이 필요 없다.


   또한 가깝게는 해방과 6.25 전쟁을 거치며 봇물처럼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 서양문화에 치여 붕괴 직전에 있던 우리의 차 문화를 계승 보존한 이들이 효당 최범술을 비롯한 불교계 인사들이었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현재까지도 불교인들이 차 문화계의 주류를 이루고 있으니 우리의 차 문화는 불교의 색채가 강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불교와 함께 그 맥을 이어온 우리의 차 문화는 근래 들어 대중화를 위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차 관련 단체들이 표면적으로는 종교를 가리지 않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나 활동 내용을 살펴보면 불가의 차 문화를 거의 그대로 전수 보급하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다. 따라서 비종교인이나 타종인은 크건 작건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으며 깊이 관여하기 어렵다. 이는 차와 관련된 인터넷카페의 경우도 별반 다르지 않다. 어느 카페는 불교공부방을 개설한 직후 하루 만에 500여 명의 회원이 탈퇴하는 일이 있었다. 아래는 어느 단체의 인터넷홈페이지에 실려 있는 단체장의 인사말이다. 이 단체는 국가가 인정하는 공식교육기관임을 자처하며 한국 전통 다례 법을 보존, 교육, 전파한다고 하지만 그 이면에는 불가의 차 문화를 계승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次善 사상과 한국불교의 禪脈은 마조도일>남전보원> 철감>사자산문을 열어온 임제禪은 대흥사 차풍으로 이어져 서산대사, 아암 혜장선사를 거쳐서 초의선사로 전해오고 있음을 밝혀서 ○○선생께서는 ○○암 복원사업(○○사 ○○암, 1979년)을 하셨습니다...... (중략) ...... 올바른 우리의 전통차문화를 일반인들에게도 보급되어 훌륭한 문화민족으로의 자긍심을 일깨워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차 문화의 불교적인 색깔에 대한 거부감이 외부적으로 표출되는 경우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거의 없었다. 그 이유는 우선 차 인구가 매우 적었던 데다가 그나마도 대부분이 불자(佛子)여서 대중적 가치평가의 대상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특기할만한 이유로는 위의 인사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른바 전통(傳統)이라는 방어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불교가 장구한 세월에 걸쳐 민족문화 형성에 끼친 영향이 지대했고 이로 인하여 대중은 불교적인 차 문화를 전통이라는 관점에서 관대한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상황은 달라졌다. 우선 차를 즐기는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서 1990 년 국민 1 인당 10 g에 불과하던 차 소비량이 2003 년도에는 80 g에 이르렀고 금액으로는 300억 원에 불과하던 시장이 4,500억 원의 시장으로 커졌다.(전라남도농업기술원 차 시험장 2004 년 발표) 종교 인구의 분포도 크게 변했다. 기독교가 20 세기를 거쳐 오늘에 이르면서 빠른 속도로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면서 우리의 문화 전반에 걸쳐 엄청난 변화를 일으켰다. 게다가 세계의 다양한 문화가 빠르게 교류되는 시대적 정황은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상호간의 문화를 존중하는 문화다원주의(文化多元主義)를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국면에서 전통이 가지는 방어력은 현저히 약화되었고 불교적인 차 문화에 대한 거부감이 구체적으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의 차 문화가 대중문화로 승화함에 있어서 걸림돌임이 분명하다. 바야흐로 ‘불교의 색채를 그대로 지니고 있는 차 문화가 대중문화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라는 명제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해야할 시점에 이른 것이다.


  불가에서 의식이나 음용을 목적으로 차를 이용하는 것은 종교적 관습으로서 불교의 전통이다. 그런데 이를 그대로 대중문화로 보급하는 것은 한 종교의 전통을 민족 전부의 전통으로 오해한 소치라고 할 것이다. 물론 불교의 생각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최소한 그렇게 보인다.


  전통은 반드시 연속성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그 시대 사람들의 주관적인 가치판단에 의하여 재평가된다. 따라서 어느 시대에 전적으로 잊혀졌던 것이 후대(後代)에 이르러 전통으로 되살아나는 일은 흔하다. 따라서 전통을 연속성에 의지하여 대중문화로 보급하려고 한다면 이는 잘못이다. 더구나 그것이 특정 종교의 관습이라면 더욱 그렇다. 특정 종교의 관습은 엄격한 평가를 거쳐서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으며 그 종교의 울타리 안에서 계승 보존될 수 있다. 전통이 대중문화로 승화되려면, 살아있는 문화로서 진화를 거듭하며 가치를 인정받고 대중적 지지를 얻어야만 비로소 가능해 진다.

 

  영국의 인류학자 E.B.타일러는 저서 ‘원시문화’(Primitive Culture. 1871)에서 ‘문화란 지식, 신앙, 예술, 도덕, 법률, 관습 등 인간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획득한 능력 또는 습관의 총체’라고 정의를 내리며 ‘문화는 전파, 접변, 평가, 진화하는 생명력을 갖는다.’고 했다.


  문화는 살아 있는 생물체와 같다. 따라서 문화의 창조적 진화를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가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전래되는 과정에서 토착종교나 다양한 사상체계(思想體系)와 만나고 접변, 평가, 진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그 세를 확장해온 것은 종교라는 특수한 문화가 지닌 생명력에 의한 것이었다. 그런데 차 문화를 대중에게 보급하는 것은 불교의 경우와 다르다. 차 문화 자체는 종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의 색채가 짙은 우리의 차 문화를 대중화 하려면 차 문화와 종교를 분리해야 한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불교의 색깔을 벗겨내는 것이다. 이는 불교가 우리 차 문화에 끼친 영향을 폄훼하는 것이 아니다. 불가의 차 문화는 불가의 관습으로서의 가치를 인정하는 한편, 종교와 상관없이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차 문화를 보급하기 위해서 즉 차 문화의 대중화를 위해서는 종교의 색을 벗겨내고 창조적으로 변해야한다는 것이다.



3. 미래의 복병伏兵 기독교적(?) 차 문화


  문화관광부가 발행한 ‘2005 년도 문화정책백서’에 따르면 기독교 인구는 신 구교를 합해 1,150여만 명에 달하여 약 1,030여만 명으로 추산되는 불교 인구를 추월했다. 이러한 종교 판도의 변화는, 차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한 1980 년 대 이후에 증가한 차 인구의 일부가 기독교인일 것이라는 최소한의 추정을 가능케 한다. 이런 상황에서 2000 년 말에 개신교 목회자와 신자로 구성된 기독교○○○○회가 창립된 것은 결코 우연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는 전통으로 포장된 불가의 차 문화에 대하여 이질감을 느끼는 기독교 차 인구가 늘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보인다. 그러나 차 문화에 대한 기독교의 관심이 아직도 일부 소수 교회와 신자에 머물러 있는 현 상황에 비추어 보면 조금 이른 감이 있으니 여기에도 차 문화계의 고질적인 병폐인 분파주의가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다인 중에 누군가가 자기의 입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기독교를 부추겨 이용함으로서 현상을 앞당기는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불교인들이 차 문화의 불교적 색채를 당연시하며 이를 대중문화로 보급하려한다면, 그동안 우리 차 문화계에서 어정쩡하게 주변인으로 머물던 기독교인들이, 불교적인 차 문화에 대한 부담으로부터 벗어나 신앙적으로 떳떳한 그들만의 차 문화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은 상대적으로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회는, 전통을 표방하며 우리의 차 문화를 대변해온 불가의 차 문화를 종교적으로 개혁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함으로써 그 도를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우상타파와 선교’로 요약되는 본 협회의 설립목적을 인터넷홈페이지를 통해서 확인해 보았다.

 

  “....... 우상문화가 장악한 전통 문화를 차(茶)문화 선교로 개혁"하자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깨끗하고 건강한 문화로의 전환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또한 차(茶)문화가 불교적인 느낌이 강하게 배어 있는 것은 다례(茶禮)에 쓰이는 찻잔이나 주전자 등 에 모두 불교양식인 연꽃잎이나 만(卍)자가 새겨져 있어서임을 깨닫고 차도구를 기독교화 하는 작업을 실행 중에 있으며, 기독교적 차 문화를 확산시키기 위해 "다향지"의 발간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한국기독교○○○○회는 이같이 차(茶)를 통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을 한국과 세계에 전도하고자 합니다......”


   저들이 말하는 기독교적 차 문화는 무엇인가?  설립목적에서 밝혔듯이 차 문화에 기독교의 색깔을 덧입히겠다는 것이다. 기독교 화된 차 문화를 만들어 선교의 수단으로 삼겠다는 의지는 비장하기 까지 하다. 그러나 불교와 함께 유입된 차 문화가 오랜 세월에 걸쳐 불가의 관습으로 내려오며 우리 차 문화의 견인차 역할을 한 것에 비하여 기독교는 그 어떤 연결고리도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적 차 문화를 운운하며 선교의 의지를 드러내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아직은 기독교 내에서 지극히 소수의 목소리이기 때문에 크게 우려할만한 단계는 아니지만 교조주의적 호전성(好戰性)을 드러내는 것을 보니 실로 걱정스럽다.


   기독교가 차 문화에 매력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기독교 신앙생활의 핵심이 ‘사귐’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차는 사귐의 매개체로서 너무나 훌륭하기 때문이다. 특히 술을 금하는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차는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명상 혹은 묵상을 하느님과 교제하는 수단으로 여기는 기독교에 있어서 차는 불교 수행자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의 도구요 벗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차 문화를 수용함에 있어서 그 이유나 목적을 어디에 두어야하는가? 그것은 ‘신앙생활에 유익하기 때문이라는 것’ 이상으로 비약해서는 안 된다.


   차 문화는 불교의 색을 벗겨내더라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정행검덕’(精行儉德) ‘화경청적’(和敬淸寂) ‘중정’(中正)을 차 문화의 보편적인 정신이라고 볼 때 이는 불교 뿐 아니라 건전한 종교라면 어떤 종교든지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차 문화의 형식이나 의식(儀式)을 기독교화 함으로써 대중화에 역행하는 또 하나의 모습을 만들기보다 차의 정신을 기독교 정신에 입각하여 해석하고 다인으로서의 고결한 인격을 닦으며 이웃을 위하여 사랑을 베푸는, 다시 말해서 차의 정신을 추구하고 이를 실천하는 기독교 차 문화를 이루어가야 한다는 말이다. 기독교가 종교를 초월하여 차와 함께 사랑을 나누는 아름다운 사귐의 모습을 보인다면 기독교는 차 문화와 함께 대중의 부러움을 사고 칭송을 받을 것이요 이는 결과적으로 선교에도 큰 보탬이 될 것이다.



4. 종교를 초월한 차 문화


  차는 여느 음료와는 다르게 언제 어떤 문화와 만나든지 탁월한 효능에서 비롯된 가치를 인정받으며 고상한 문화를 만들어 냈다. 불교와 차의 만남에서 비롯된 불가의 차 문화도 역시 그렇게 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불가의 문화로 대변되던 우리의 차 문화도 다양한 문화와 만나면서 대중적 가치평가에 따라 새롭게 변화하며 발전해 나갈 것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대중적 가치를 대중적 선호도를 뜻하는 것이라고 볼 때 특정 종교로 채색된 문화는 문화유산으로서는 관심을 끌 수는 있겠지만 대중이 참여하고 향유할 수 없다. 개인의 다양한 생각이나 종교를 존중하는 현대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따라서 차 문화의 대중화는 누구나 그 가치를 인정하고 부담 없이 공유할 수 있는 문화로 발전해 나갈 때에만 가능해 진다. 그러므로 우리의 차 문화가 대중문화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특정 종교의 색을 벗겨내야 한다.


  그러나 이는 불가에서 관습으로 내려온 차 문화를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다. 또한 애초부터 불교를 표방한 단체나 행사에서 행해지는 불가의 예나 의식을 그만두라는 것도 아니다. 단지 특정종교를 표방하지 않은 단체나 행사에서는 고의든 아니든 짖은 종교 색을 드러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뜻이다. 장삼에 붉은 법단의 가사를 두른 승려들이 나서서 차 문화의 대중화를 운운하는 것은 ‘다인은 곧 불자여야 한다.’고 설법하는 것 같아 매우 부담스럽다. 불가의 예와 의식이 일방적으로 행해지는 것도 참석자들을 모두 불자로 여기는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해진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차 문화의 대중화를 바란다면 이런 것들이 충분히 고려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불가의 차 문화는 사찰 안에서 혹은 불자들끼리 향유할 것이요, 기독교적 차 문화가 아직은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것이 기독교 색을 덧칠한 것이라면 그 것 역시 교회 안에서 혹은 신도들끼리 행하여야한다. 차 문화의 대중화를 논하려거든 먼저 종교의 색깔이나 냄새를 지워야한다. 그러나 종교를 초월하여 다인이라면 누구나 공히 선명하게 드러내야할 할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차의 정신을 추구하는 고결(高潔)한 인격과 삶이다.


  차의 정신은 너무나 아름답기 때문에 건전한 종교라면 결코 포기할 수 없다. 기왕에 기독교 차 문화에 대하여 언급했으니 기독교 정신으로 이를 풀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정행(精行)은 의를 추구하는 마음이요 검덕(儉德)은 가난한 마음이요 화(和)는 친밀감이 넘치는 마음이요 경(敬)은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이요 청(淸)은 청결한 마음이요 적(寂)은 생사(生死)를 넘어선 의연하고 조용한 마음이요 중정(中正)은 원칙에 충실하면서도 법을 초월하는 사랑이다. 이는 타 종교에서도 별로 책잡힐 것이 없는 해석이라고 여겨진다.


  근래 들어서 ‘종교 간의 화해와 협력’이 강조되고 있다. 종교적 대립으로 말미암는 소모전을 그치고 선한 일에 협력하여 종교가 가지는 사회적인 영향력을 극대화하자는 좋은 취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불교와 기독교가 종교 축절에 축하의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은 좋은 일이다. 종교의 색을 벗겨낸 순수한 차의 정신을 근간으로 이루어진 차 문화는 종교 간 화해와 협력의 장이 될 수 있다. 어떤 종교인과도 찻상을 마주보고 앉으면 다도 정신에 입각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가치 있는 삶과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어 가는 일에 대하여 대화할 수 있다. 종교를 초월한 교제와 협력을 이루는 데는 차 문화만한 것이 없으니 차 문화의 탈종교화는 필수적이다.


  차 문화의 탈종교화는 오히려 종교의 교세확장을 위해서도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어떤 종교든지 그 세를 확장하려면 비종교인이나 타종교인과의 접촉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법도를 배제한 찻자리는 많은 사람과 자연스러운 접촉을 가능하게 한다. 이는 각기 다른 신앙으로 승화된 다인(茶人)의 고결한 인격과 삶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그 종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할 수 있으니 포교나 선교를 위해서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을 것이다.



5. 맺음 말


  이미 1989 년부터 문화다원주의정책을 펴고 있는 호주의 한 사례는, 특정 종교의 색채가 강한 우리 차 문화의 대중화를 논함에 있어서 상당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퀸즐랜드주 보건당국이 비기독교인들에게 결례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병상에 비치한 환자용 성경을 치우도록 지시를 내린 일이다. 이는 호주정부가 문화다원주의 실현을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국가생존을 위한 영원한 과제로서 문화다원주의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폭넓게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상호간의 문화를 존중하는 현대사회에서 특정 종교의 색깔이 짙은 문화가 그대로 대중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 종교적 관습에 의하여 형성된 문화가 타종교인에게 거부당하는 것은 당연하다. 비종교인에게는 거부감까지는 아니더라도 부담을 줄 수 있다. 따라서 우리의 차 문화도 종교를 초월해야만 대중문화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차 문화의 대중화는 이미 언급한대로 우리 사회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고 절실하다. 종교와 상관없이 대중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차 문화, 검소하면서도 다도 정신이 충만한 차 문화가 이루어져야만 차 문화의 대중화는 가능해진다.  (월간 Tea & people 2006. 8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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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6.08.21 10:39

    그리고 까페는 반드시 주인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분들께서 차를 수행의 한 과정에서 선택하고 사랑한 것이 지나쳐서 이렇게 까페를 차리게 되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말하자면 차를 빙자하여 포교를 함이 그 목적이 아니어서 모든이에게 실제적으로 열려진 공간이 되고 있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저는 천주교신자입니다. 지난 번 5월 직접 차를 만드는 행사에 참여도 했습니다. 스님이 두분 같이 가셨지만 어떤 종교적인 색채도 없었고 또 친구처럼 편안히 느껴졌습니다. 또한 각자의 종교에 관한 이야기는 제가 아는 한 없었습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모임을 관통하는 분위기는 상당히 절제있고 검약하고 겸손하였습니다.

  • 06.08.21 10:43

    제가 아는 차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져야할 덕목을 잘 갖추신 분들이 운영진에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실제적인 분위기가 차맛어때의 살아있는 강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차 맛어때를 그냥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우선 이 까페를 드나드는 사람의 기본적인 예의이고 또 어떤 부분은 그냥 문제삼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모두 완벽한 인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06.08.21 10:48

    그리고 종교적인 색채를 일단 띠고 토론이 시작되면 끝장은 피를 보게 됩니다. 현실은 보수 기독교인들이 같은 하느님을 믿는 아랍인들을 악의 축으로 까지 이야기하고 선량한 사람들의 머리위로 폭탄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제 입장은 이렇습니다. 항상 그렇듯이 차가 문제가 아니고 종교자체가 문제입니다. 사실은 제도화되고 권력화된 종교제도이지만요. 이 것은 예수때도 그러하였습니다. 종교를 빙자한 사기꾼들이 그 당시에도 지금과 같이 판을 치고 있었지요. 우리는 차 이야기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 06.08.21 11:00

    저는 차를 좋아하는 제가 왜 이렇게 한국의 차문화에 낯설어하는지 궁금합니다. 그것을 파헤칠 두뇌가 없어서 이렇게 둘로스님의 다음 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필력이 졸렬하지만 이렇게 답글을 굳이 다는 이유는 좋은 글에 대한 양쪽 모두에 대한 나름대로의 보답이라고 어여삐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 06.08.21 11:14

    _()_...모두들 차한잔 올립니다...^-^*_()_

  • 06.08.25 20:48

    많은 분들이 이글에 관심을 보여주시니 둘로스님의 글이 모처럼 좋은 생각거리를 제공해 준것 같습니다. 그런데 대화 도중에 이미 [대화가 아닌 설법을하고 있다]라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저는 이미 ....[둘로스님의 주장은 [종교색을 탈피하고 자연스럽게 이웃]과 어울리자는것이고 저의 주장은 종교색을 탈피하는 것은 임시 방편이고 종교가 다르다고 같이 차도 못마시고 ,말도 안하는 이 잘못된 문화를 바로잡는게 먼저다] 라는 주장입니다. ...06.08.16 20:23] 라고 정리를 한적이 있듯이, 서로의 주장이 다른 부분을 ....[설법을하고 있어서 대화가 어렵다]고 단언하는 것에는 실망감을 느낍니다.

  • 06.08.25 20:52

    상대를 내 마음대로 규정해 놓고 배척하는 태도가 바로 우리가 먼저 바로 잡아야할 [종교색채]일것입니다. 저는 차인들은 찻자리에서 차와 관련된 이야기만을 해야 한다는 태도가 바로 차를 종교화 하는 (배타적인 종교화)위험한 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차까페에서 차이야기 만을 하자는 것도 그렇습니다.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은 ,상황은 그러한 태도를 허용하지도, 용납하지 않는데도 우리는 그러한 관념을 실현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종교인, 차인,정치인 의 공통점 ..즉,[인간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이해하자]는 것이 차를 마시는 저의 태도란 것을 다시 강조합니다. ..()

  • 06.10.08 16:57

    공부하는데 도움이 될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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