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만 39세가 되던해, 그러니까 23년전 있었던 일이다.
난 그해에 간부가 되어 충남예산 삽교지서장으로 근무하고 있었고
노태우 정권시절로 민주화 물결로 사회가 극도로 어수선한 시절이었다.
그때 난 젊다는 이유로 걸핏하면 데모진압 인솔자 내지는 지휘자로 천안이나
대전등으로 차출되기 일쑤였다. 그렇지 않고 좀 한가할때면 읍장이나 조합장등과 이다방 저다방으로 거들먹데던일이 하루의 일과였다.
그런 내 꼴이 보기 싫었던지 아내는 아이들 교육도 그렇고 하니 대전으로
전출희망 하라고 성화에 못이겨 형사(기동)대에 희망, 그해 발령이 났던 겄이다.
대전에 입성하려면 웬만한 빽 아니면 어려웠기 때문에 화염병이 난무하는
환경속에서 근무해야 하는 어려움을 감수하고........
내가 맡은 직책은 2소대장으로 유단자로 구성된 직업경찰관 50명에 대한
책임자로 늘 낮이면 화염병이 난무하는 학원가였고 밤이면 야간 방범활동
이었다.
그러던 88올림픽이 개최되던 어느여름, 소대원 약 40여명과 같이 11:00
까지 근무하고 숙소에서 잠이 푹 빠진 1시경 당직원이 날 깨웠다.
목척교 대우당 뒷골목에서 폭력사건 신고가 접수되었던 겄이다.
대원들이 곤히 잠들었던터라 두들겨 깨운겄이 10여명, 시간이 없어 그인원
으로 불야불야 현장으로 달려 갔던 겄이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폭력현장은 발견할수 없었다. 사건현장을 중심으로
수색하던끝에 다른골목에서 신형 검정색 그랜저 2대가 유유히 흐르는겄을
발견하고 누가 뭐라하기도전에 대원일부가 앞차를 정지시켜놓고 검문하려는
순간이었다.
아뿔싸, 이놈들은 일제히 사시미 칼로 대항하는 겄이었다.
이에 우리대원들은 휴대하고 있던 까스총으로 발포하기 시작했다.
참으로 대단한 위력이었다. 이들은 까스앞에선 사시미칼 따위는 속수무책이
었다. 벌어지 처름 꿈틀대는 이들 10명을 굴비엮듯 차안에 하나하나
실고 맆폰드 사시미칼 도끼등을 압수하는 쿠ㅐ거를 이루어 냈다.
그지역은 까스로 매쿠ㅐ하여 눈을 뜰수없을 지경이었다. 서부할극을
방불케 했다. 우린 이들을 대전경찰서 (현 대전중부경찰서) 형사과에 인계했다. 모든 정황을 보고하는등 시간적으로 아마 4시경 되었을 겄이다.
이때 어느정보 라인을 탓는지 중앙 지방기자들이 들이 닥치기 시작했다.
연신 터트리는 후라쉬에 정신이 멍 했다.
난 이런사실을 형사대장에게 보고했고 대장은 국(지금의 충남경찰청)에 보고
했던겄이다. 이런사실을 보고받은 청장은 몇몇대원과 날 즉시 청장실로
불러 격려 해줬다. 즉시 표창에 격려금 100만원.
그겄으로 우리소대는 흐무지게 회식한 기억이 나고, 이틋날 지방지 사회면에
대문짝만 하게 대전 "00조직 폭력배" 검거라는 기사가 실린사실이 있었다.
이들 조폭들은 기소되어 징역형을 선고 받은겄으로 아는데
대전지법에서 1차심리가 있었날, 난 증인으로 출석하게 되었다.
1차심리중 피의자 변호인인 박종배 변호사 (31기선배)가 나한테 무고한 국민에게 까스총을 쏠수 있느냐?
난 이렇게 답변했다. 그러면 변호사님은 검문하는 경찰관에게 사시미칼로 공격하는겄은 정당방위 입니까?
이에 변호사 "..........."
박종배 변호사는 대선배이자 같은동향(부여 석성)임.
첫댓글 직무를 성실이 수행하여 표창과 격려금까지 받고 아주 잘 했네.
민중의 짚팡이 친구한테 박수를 보내네.
2편도 있는가 모르겠네. 잘 읽어 보았소.
자기 맡은 직무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역력합니다. 우리사회에서 공권력은 절대로 존경받아야하고 우대받아서 법대로 집행할때 서민들이 편하게 살수 있는것입니다. 그간 수고 많았어요.
다큐멘타리로 연재하게나. 그동안 고생해서 지금 잘 살고 있지않는가.
나중에 보복은 없었던가? 질이 안좋은 조폭들은 출옥후에 보자고 협박한다던데, 몸조심하게
보복하면 경찰관 할 사람 어디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