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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언트] 01
씬1. 프롤로그
(석양에 붉게 물든 1970년대 강남의 빈 벌판... 남서울 개발 공사를 알리는 푯말들이 드문드문 보이고...
황량한 벌판 한가운데 외롭게 길이 나 있다.
그 길을 걸어가는 세 아이.. 열세 살의 강모가 간난 아기를 등에 업고 어린 미주의 손을 잡은 채 걸어가고 있다.
막 시골에서 상경한, 지친 모습의 아이들의 그 모습위로 성인이 된 강모의 나레이션이 흐른다)
강모 : 강남... 한강의 남쪽.. 실개천이 흐르고 송아지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던 이 강남땅에서,
전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개발의 서막이 시작됐다.
(거대한 폭음과 함께 솟구치는 돌산의 흙더미들... 순식간에 빈 벌판에 솟아나는 빌딩들...
공중에서, 역동적인 부감으로 펼쳐진 서울 강남의 거대한 빌딩들이 화려한 불빛을 머금고 보석처럼 펼쳐진다)
강모 : (N) 불과 40년 만에, 강남의 땅값은 수십 만 배나 올랐다.
이 황금의 땅을 둘러싼 싸움은 그 어떠한 전쟁보다도 비정하고 처절했다.
(카메라가 서서히 줌인 되더니 빌딩 꼭대기의 한 사내에게 집중된다.
짙은 주름에 부랑자 형색의 한 70대 노인이 회한에 잠긴 눈빛으로 빌딩숲을 바라보고 있다. 조필연이다.
손에 들려있는 누런 붕어빵 봉지에서 권총을 꺼내드는 조필연... 천천히 자신의 머리에 겨눈다. 눈물이 고여 오고..
방아쇠를 막 당기려는 순간, 맞은편 빌딩에 걸린 대형 전광판에 이강모의 모습이 뜨며 그 밑으로 자막이 박힌다.
조필연, 표정이 굳어지며 머리에 겨누었던 권총을 내려놓는데...)
자막 - 한강건설 이강모 회장, 인터내셔널 비즈니스 어워드 올해의 경영인상 수상...
(조필연, 이를 악물며 광기어린 시선으로 노려보는데...)
씬2. 한강건설 본사 로비 (그 밤)
(이강모가 비서쯤의 박소태와 수행원들과 함께 들어서자 사방에서 터지는 카메라 플래쉬들..!
대기해 있던 수많은 기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고...)
기자 1 : 이강모 회장님.! 인터내셔널 비즈니스 어워드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기자 2 : 비즈니스계의 오스카상이라고 불린다던데, 소감 한마디 해주시죠.
기자 3 : 이번 수상으로 한강건설의 위상이 국제적으로 높아졌다는 평입니다.
소태 : 자, 자 비켜주세요.
(박소태와 수행원들이 길을 터주면 이강모, 당당한 걸음걸이로 기자들 사이를 지나 미리 대기해 있던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기자들, 그 앞까지 몰리며)
기자 1 : 그러지 마시고, 소감 한마디만 해주시죠, 회장님.
강모 : ... (잠시 좌중을 보다가) 튼튼하고 좋은 건물을 지으려고 노력했을 뿐입니다. 조심해서 돌아가십시오.
(강모, 정중하게 머리를 숙이면 요란하게 터지는 카메라 플래쉬와 함께 서서히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씬3. 엘리베이터 안
(박소태와 수행원 둘만 대동한 채...)
소태 : 조필연이 정신병동을 탈출했다는 소식입니다.
강모 : ... (이미 알고 있다)
소태 : 지독한 늙은이.. 이제 살날이 얼마나 남았다고... 그 인간, 혹시 회장님 찾아오는 거 아닙니까?
강모 : 회사에 남아있는 직원들 다 퇴근시켜.
소태 : 예? 예, 회장님.
씬4. 동, 펜트하우스 안
(실내등만 켜져 있어 어둡다. 한쪽 대형 창문의 블라인드가 서서히 올라가면 강남의 야경이 한눈에 펼쳐 들어온다.
강모, 잔에 얼음을 채우고 양주를 붓는다.
서서히 뒤쪽에서 다가오는 검은 그림자... 강모가 한 모금 마시려는 순간 머리에 권총이 겨누어진다.
강모, 흠짓, 놀라하다가 천천히 돌아본다. 어둠속에서 드러나는 얼굴... 짙은 주름에 광기의 눈빛을 띈 조필연이다)
강모 : (노려본다) 오랜만이군요. (술잔을 건네며) 한잔 하시겠습니까?
필연 : ...! (거칠게 친다. 바닥에 나뒹구는 술잔) 내가 이대로 무너질 줄 알았냐?
(권총을 들이대며) 똑똑히 봐.. 나 조필연이야. 나 아직 안 죽었어..!
강모 : ... (본다, 눈빛)
필연 : (야경 가리키며) 저거.! 저 강남 땅, 다 내가 만든 거야.
이 조필연이, 이 나라 발전을 위해서 뼈를 깎고 피를 말려서 이룩해 놓은 거야.!!
강모 : ...
필연 : 그걸, 다 네 놈이 빼앗았어. 내가 평생 동안 이뤄놓은 세상을 네 놈이 다 훔쳐갔어.
강모 : 당신만 아니었으면, 여긴 좀 더 사람들이 살만한 도시가 됐을 거야.
필연 : 뭐?
강모 : 당신들이 망쳐놨어. 개발이니, 발전이니 떠들면서 사리사욕을 채우느라 혈안이 되서...
필연 : 닥쳐..!! (당장 쏠듯이) 네 놈이 아무리 잘난 척 해봐야... 죽으면 다 끝이야.
강모 : ... (노려보며) 당신... 조금도 변하지 않았어.
필연 : 살려달라고 애원 해 봐.. 어서..! 내 앞에 엎드려서, 제발 목숨만 살려달라고 빌어보란 말야...!
강모 : ...
필연 : (조소하듯) 네 아버지한테도 목숨을 구걸할 기회를 줄걸 그랬어.
강모 : ..! (굳어진다)
필연 : 그때, 살려달라고 애원했으면... 내 손에 죽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강모 : (노려본다, 이를 악물며)
필연 : 단 한방에 끝나더군.. 머리에서 시뻘건 선지피를 쏟으며...
(그 순간 강모가 손을 비틀더니 권총을 빼앗는다. 조필연을 탁자 쪽에 몰아넣더니 머리에 총을 겨누는데..!
분노에 찬 강모의 시선...)
필연 : 네 아버진 벌레 죽이는 것보다도 쉬웠어. 비명조차 남기지 않았으니까... 그걸 네 놈이 봤어야 하는 건데...
강모 : ...!! (당장 쏠듯이)
필연 : 그래... 어서 죽여...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니 애비를 죽인 원수를 갚을 수 있어. 방아쇠를 어서 당겨..!
강모 : ... (총 든 손 끝이 떨리는데)
필연 : (비웃는다) 넌 날 못 죽여. 그럴 용기가 없거든. 살인..? 그거 아무나 할 수 있는 거 아냐.
강모 : .. (눈을 부릅뜬 채)
필연 : 배짱이 있거든 어서 날 쏴... 아버지 원수를 갚아야지... 어서... 어서... 어서...
강모 : ...!!
(철컥, 소리와 함께 손잡이 쪽의 권총 탄창이 쑥 빠진다)
필연 : ..!! (놀라며) 뭐하는 짓이야?
강모 : 당신은 죽일 가치도 없어.
필연 : (탄창을 집어 들고, 건네며) 어서 날 죽여, 어서..!!
강모 : 내 손에 당신 피를 묻혀서 날 파멸 시키려고?
미안하지만 당신 그 더러운 목숨... 내가 살아온 인생과 맞바꾸기엔 너무 하찮아.
필연 : 이놈..! (달려들며) 날 죽여..! 어서...! 날 죽이란 말이야.
(강모, 힘껏 밀치면 나동그라지는 필연...)
강모 : 당신은 오래 살아야 돼. 당신이 저지른 그 추악한 악행들...
내가 당신처럼 잘못된 길을 가지 않도록 두고두고 기억해야 하니까...
필연 : 이 놈..! 이강모, 이 놈..!!
강모 : (인터콤을 누른다) 여기 사람 좀 보내.
필연 : 이강모... 이강모, 이놈...!!
(강모, 술병을 집어 들고 천천히 마시며 창문 밖 야경을 바라본다)
씬5. 부산 전경
(다닥다닥 붙은 달동네... 그 너머로 바다가 펼쳐져 있고...)
자막 - 1970년, 부산
씬6. 강모네 집
(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방 안에서 후다닥 뛰어 나오는 강모... 뒤이어 성모가 뛰어 나오고...
마당에서 헝겊 인형을 업고 있던 미주를 사이에 두고 두 아이가 두어 바퀴 돌다가 대치하며..)
성모 : 이강모, 너 이리 안와?
강모 : 형, 나 돼지저금통, 손 안댔어. 진짜야.
미주 : 작은 오빠가 훔쳐간 거 다 알아.
강모 : 이게.. (머리를 꽁 때리며)
미주 : 아얏, 왜 때려.
성모 : 그 돈, 엄마 생신 때 선물해 줄려구 나하구 미주하고 모은 돈이야. 얼른 안 내놔?
강모 : 어휴, 치사하다, 치사해... 이깟 돈으루 뭘 산다구..
(강모, 포기하고 주머니를 뒤져서 한 움큼의 지폐와 동전을 꺼낸다. 미주가 냉큼 받고...)
성모 : (강모의 귀를 잡아 땡긴다) 니가 치사하지 우리가 치사하냐?
강모 : 아, 아퍼..! 형.
(이때, 만삭의 엄마가 미역 줄기가 가득 든 대야를 들고 들어오며...)
미주모 : 강모 너 또 무슨 말썽을 피웠길래 형한테 혼나?
미주 : 엄마, 둘째 오빠가 돼지저금통 뜯어서...
강모 : ... (냅다 밖으로 도망쳐 나가고)
미주모 : 강모야, 너 또 어디가...?
씬7. 항구, 하역장
(트럭 한 대가 세워져있고, 강모 아버지, 이대수와 다른 인부들이 미군 보급품 상자를 싣고 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분주한 분위기...)
씬8. 동, 트럭 안
(강모가 운전석 뒤쪽 공간에서 초코렛을 맛나게 먹고 있다. 입가에 잔뜩 묻힌 채...
이때, 군무원 두 명이 차 안에 들어서자 얼른 그 뒤로 몸을 숨긴다)
군무원1 : 어휴, 추워... (차창 밖 이대수를 가리키며) 어때? 이씨, 저 사람이라면 믿을 만하겠지?
군무원2 : 성실하다고 평판이 자자하니깐 괜찮을 거야. (은밀하게) 이번 주말에 확실하게 금괴가 들어오는 거지?
군무원1 : 걱정 마... 난, 이번 한탕만 하고 밀수에서 손 뗄 거다.
강모 : ..!! (밀수란 말에 먹다가)
(이때, 이대수가 창문을 툭툭 친다. 군무원들, 차에서 내리면...
좌석 뒤쪽 공간에서 고개를 내미는 강모... 이야기를 다 듣고는 놀라서..)
씬9. 동 밖
대수 : 다 끝났습니다.
군무원1 : 수고했어. 이 보급품들, 부대에 넘겨주고 들어가.
대수 : 예... (트럭에 오르는데)
군무원1 : 참, 이번 주말에도 보급품 들어오는 거 알지? 그날도 이씨가 수고 좀 해 줘.
대수 : (활짝 웃으며) 여부가 있겠습니까?
씬10. 달리는 트럭 안
(비포장 길을 운전 중인 대수...)
강모 : (입가가 지저분한 채로 고개를 내민다) 아버지...
대수 : 깜짝이야..!! (힐끔 보고) 너, 언제 탔어? 이눔 시키, 또 초코렛 훔쳐 먹었구나?
강모 : 아까 그 아저씨들, 밀수꾼이야.
대수 : 갑자기 뭔 뚱딴지같은 소리야?
강모 : 내가 여기 숨어서 똑똑히 들었는데... 그 아저씨들이 이번 주말에 금괴를 밀수한대.
(대수, 급브레이크를 밟는다, 놀란 채 강모를 본다)
씬11. 군부대 앞
(위병들의 삼엄한 경계...)
조필연 (E) : 금괴밀수?
씬12. 동, 보안 반장실
(보안 반장, 조필연이라는 명패가 보이고... 군복 차림에 대위 계급의 조필연과 소위 계급의 부관 고재춘이 있다.
강모와 대수가 당도해 있고...)
필연 : 틀림없이 금괴라고 그랬니?
강모 : 예...
필연 : ... (생각)
대수 : 군무원들 일이고 해서, 보안반장님을 찾아왔습니다.
필연 : 잘 하셨습니다. 우리도 군 내부에서 밀수를 한다는 정황을 포착하고 있었습니다.
헌데, 밀가루나 사카린도 아니고, 금괴라니..
재춘 : 경찰이나 헌병대 손을 빌릴 것도 없이, 우리 보안대에서 직접 해결해 버리시죠.
필연 : 그래야지. (강모에게) 이름이 뭐니?
강모 : 이강모예요.
필연 : 그래... 강모, 네가 이번에 아주 큰일을 했구나.
(조필연, 서랍에서 뭔가를 뒤적거리더니 돈 봉투를 꺼낸다)
필연 : 이거, 얼마 안 되지만 포상금이야.
대수 : (정색) 괜찮습니다. 당연히 신고 할 걸 신고했는데요.
필연 : 국가 경제가 어려운 이때에, 이 아이가 큰일을 한 겁니다. (강모에게) 어서 받아.
강모 : (넙죽 받으며) 고맙습니다.
씬13. 거리, 금은방 앞 (부산)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 퍼지고 있고 산타클로스 복장의 구세군의 종소리...
강모와 교복 차림의 성모가 전화부스 앞에서 권투시합 시늉을 하며 장난을 치고 있다.
그 일각의 금은방 앞... 인형을 업은 미주-인형을 늘 지참하는-가 엄마와 함께 진열장의 반지를 바라보고 있고..
유독 시선이 가는 금반지 하나...)
미주모 : (혼잣말) 빛깔 좀 봐... 곱기도 하네...
(그 일각의 공중전화 부스 안... 아버지 이대수가 어디론가 전화 중이다.)
씬14. 건설사 사무실 안 (서울, 명동)
(작업복 차림의 황태섭이 전화중이다. 명패에 만보건설, 황태섭의 이름이 박혀 있고...
다른 테이블에서 문성중이 어디론가 전화중이다)
태섭 : 여긴 아주 잘 돌아가고 있으니깐 걱정 마. 조금만 기다려 보라니깐. 자네가 산 강남땅이 곧 금싸라기 땅으로 변할 테니까.
그래... 그때, 보자구.
(태섭,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금방 표정이 어두워지며)
태섭 : (문성중에게, 마음 급하게) 어떻게 됐어?
성중 : 은행에선 더 이상의 대출이 불가하답니다.
태섭 : (버럭) 이자, 따불로 주겠다고 해..!
성중 : 잔금 치루기로 한 날이 이번 달 말까집니다. 은행만 믿고 있다간 그동안 부지공사 했던 땅을 몽땅 빼앗기고 말 것입니다.
(이때, 양복 차림에 건장한 모습의 주영국이 들어서자마자)
태섭 : 어서 와. 왕십리 박영감은 뭐래?
영국 : 말도 마, 돈 얘기 꺼내자마자 문전박대를 당하고 오는 길이야.
태섭 : 명동 최사장은?
영국 : 아예, 만나주지도 않아.
태섭 : 이런 젠장..! (옆에 놓여있는 안전모로 책상을 내리치는데)
씬15. 거리, 금은방 앞 (부산)
(대수가 성모, 강모와 함께 다가온다. 미주모, 여전히 진열장을 보고 있고..)
대수 : 뭘 그렇게 봐?
미주모 : (얼른 말 바꾸고) 맘에 드는 게 하나 두 없네... 니들 배고프지? (대수에게) 우리 뭐 사줄 거야?
(대수, 물끄러미 반지를 본다. 성모와 미주, 뭔가 마음이 통한 듯 시선 마주치는데... 강모, 그 모습을 보고 입을 삐죽거리며...)
씬16. 국밥집 안
(가족들이 원탁에 둘러 앉아 있다)
대수 : 여기 국밥 네 개요.
강모 : 사람이 다섯인데, 왜 네 그릇만 시켜?
대수 : 미주, 다 못 먹잖아. 공기밥 하나 더 달라구 그러면 돼.
미주 : 싫어. 나 한 그릇 다 먹을 거야.
미주모 : 엄마꺼 나눠먹자. 엄마 다 못 먹어.
성모 : 그래두 엄마 생신인데...
강모 : 아버지, 우리 고기 먹으러 가. 돼지 갈비 먹구싶어.
대수 : 이것두 고깃국이야. 배부른 건 마찬가지니깐 잠자코 먹어.
미주모 : 엄마, 요즘 소화가 잘 안되니깐 그냥 먹자, 응?
강모 : ... (불만스럽게)
성모 : .. (미주에게 눈짓하면)
미주 : (반지 곽을 내놓는다) 엄마, 생신 축하해.
미주모 : 이게 뭐야? (곽을 열면 은반지다) 은반지네? 이거, 니들이 산거니?
미주 : 작은 오빤 아니구, 나하구 큰오빠가 샀어.
강모 : (흘겨본다)
미주모 : 니들이 돈이 어딨다구... (손에 껴보며) 너무 이쁘다.
대수 : 반지 이리 내 봐.... 얼른?
미주모 : (빼서 건네면)
대수 : 이거, 당신한테 안 어울려. (주머니에 넣는다)
성모 : 아버지?
미주 : 아빠?
강모 : 아버지 말이 맞아. 그 반지, 너무 촌스러.
성모 : 넌 입 다물어, 인마... 아버지, 그거 우리가 산거예요.
대수 : 어울리지도 않는 반지, 뭐 하러 손가락에 껴. 돈 아깝게?
미주 : 아빠 너무 구두쇠야, 스크루지 영감 같아.
대수 : 서울로 이사 간다고 했지. 쓸데없는 데 돈 쓸 생각들 말어.
미주모 : (잠시, 대수를 흘겨보다가, 얼른) 아빠 말이 맞다. 그 돈으로 보리쌀 몇 봉지 사는 게 나아. (째려보며) 당신이 바꿔 와.
(이때, 국밥이 나온다)
대수 : 자, 배고프다, 먹자.
미주모 : 근데... 당신 친구, 그 황태섭이란 사람 믿을 만 한 거야?
대수 : (먹으며) 말했잖아. 난리 통에 같이 피난 내려온 고향 친구라구.
미주모 : 고향 친구라구 뭐 다 믿나, 뭐? (먹는)
씬17. 사진관 안
(허름한 사진관이다.
대수와 만삭의 강모 엄마, 교복차림의 성모, 개구쟁이 모습의 강모와 인형을 안은 어린 미주가 카메라 앞에 어색하게 앉아 있다)
사진사 : (촬영하려다가) 다들 오늘 처음 만났능교? 웃으이소, 마.
가족 : ... (어색하게 억지 미소)
사진사 : 울지 말고 웃으라니까네?
강모 : 형, 모자 나 주라. (성모, 쓰고 있던 교모를 벗어주면 강모, 폼 나게 쓰고는...)
사진사 : 자, 찍습니더? 하나... 두울... 셋..!
(찍으려는 순간 대수가 강모의 모자를 손으로 툭 친다.
일그러지는 강모의 모습과 활짝 웃는 아버지, 가족들의 환한 미소에서 사진으로 박히고...)
씬18. 군부대, 반장실
(어디론가 통화를 막 끝낸 조필연이 전화기를 쾅, 소리 나게 내리친다. 고재춘이 급히 들어서며)
재춘 : 방금 국방부에서 인사발표가 났습니다.
조필연 : ... (알고 있다, 씩씩대며)
재춘 : 너무하는 거 아닙니까? 실적으로 보나 뭐로 보나, 진급 시켜줘도 모자를 판에 삼척으로 오지 발령을 내다니요.
필연 : ...
재춘 : 반장님 떠나시면, 저 군복 벗겠습니다.
필연 : 재춘아... 너, 옷 벗을 각오로.. 출세 한번 해보지 않겠냐?
재춘 : 예?
필연 : 군복을 입고 출세를 하려면, 중앙에 줄을 대야 돼. 줄을 대려면 돈이 있어야 하고...
돈 없고 빽 없는 우리 같은 놈들, 말년까지 군화 끈이나 고쳐 매면서 지방을 전전할 수밖에 없어.
재춘 : 하지만, 무슨 돈이 있어서..?
필연 : 금괴...
재춘 : 예?
필연 : 이번에 군무원들이 밀수하려는 그 금괴 말이야... 그것만 있으면, 청와대든, 국방부든, 중앙정보부든,
어느 요직이라도 다 갈 수 있어.
재춘 : ..! (놀란다) 반장님? 그러다가 만에 하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필연 : 우리가 직접 나서서는 곤란하지. 대신 손에 피를 묻힐 사람이 필요해.
재춘 : ... (심각해져서) 마땅한 사람이 있습니까?
필연 : 적임자가 한명 있긴 한데... (생각한다)
씬19. 건설사 사무실 안
(황태섭이 혼자 전화중이다. 탁자 위에 반병 남은 소주와 멸치쪼가리가 놓여 있고... 혼자 술을 마신 분위기다)
태섭 : (수화기 들고) 아직 못 구했습니다... 지금 부산으로 내려오라구요? 여기 사정이 급해놔서 다음에...
(하다가) 예, 예 알겠습니다. (수화기 내려놓고) 남은 목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데 왜 또 오라가라야?
(태섭, 점퍼를 집어 들고 일어서는데.. 이때 보자기에 싼 찬합을 들고 오남숙과 어린 정연, 정식이 들어선다)
남숙 : 여보... (보자기 풀며) 어디, 가?
태섭 : (힐끔 정연을 보며) 정연이 왔냐?
정연 : ... (대꾸 없이)
정식 : 아부지.. 저두 왔어요.
남숙 : (찬합에서 고구마를 꺼내들고) 이것 좀 잡숴봐. 밤고구만데 어찌나 달고 폭신한지...
(껍질 까며, 다정하게) 정연이 너두 얼른 먹어 봐.
정연 : ... (시큰둥)
태섭 : (생각난 듯) 당신, 친구 있다구 그랬지? 동양염색, 황사장 마누라... 혹시 급전 좀 변통할 수 있어?
남숙 : 걔 작년에 바람 피다 이혼 당했어. 이것 좀 먹어 보래두. 자, 아... (입 벌리라고)
태섭 : (버럭) 지금 고구마 먹게 생겼어, 이 여편네야..!!
남숙 : ..! (화들짝 놀라고) 에구 깜짝야.
태섭 : (밖으로 급히 나간다)
남숙 : 고구마 좀 먹어 보란 게 뭐 그리 큰 잘못이라구..
정연 : ... (남숙이 까놓은 고구마를 먹는데)
남숙 : (냅다 빼앗으며) 뭔 계집아이가 그렇게 먹는 걸 밝혀. (정식에게) 정식아.. 얼른 먹어 봐.
정식 : 응, 엄마. (받아서 먹는다)
정연 : ... (노려본다)
남숙 : 뭐야? 너 지금 나 째려보는 거니?
정연 : 울 엄마 어딨어요?
남숙 : 니 엄마, 여깄잖아.
정연 : 계모 말구, 나 낳아준 진짜 엄마요.
남숙 : 뭐? 계모? 이 기집애가 듣자듣자 하니까...
정연 : 우리 엄마, 쫓아내고 아줌마가 들어온 거잖아요.
남숙 : (기가 막혀) 너,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해. 내가 쫓아낸 게 아니라, 니가 밖에서 낳아서 굴러 들어온 거야.
정식 : 엄마, 또 줘.
남숙 : (얼른 어조 바뀌고) 어, 그래. (껍질 까며) 정, 니 엄마 보고 싶으면 대전 가서 찾아봐.
제 손으로 버린 자식인데, 널 퍽이나 반겨주겠다.
정연 : ... (노려본다)
씬20. 바닷가 (부산)
(한적한 해변가... 지프차가 세워져 있고 조필연과 황태섭, 단 둘이 차 안에 앉아있다)
태섭 : 저두 답답해서 미칠 지경입니다. 당장 이달 말까지 잔금을 못치르면..
필연 : 답답할 거 없소. 내 돈 도로 내놓고, 위약금 내시오.
태섭 : 반장님?
필연 : 황사장 말만 믿고, 없는 돈 다 털어서 투자했어. 나한테 손해 입히고, 당신 무사할 것 같아?
태섭 : 이번 고비만 넘기면, 제게 투자 한 돈, 열배, 아니 수십 배 까지도 벌 수 있습니다. 반장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필연 : 그럼 심장을 꺼내 팔아서라도 고빌 넘기든가.
태섭 : 그럴 수만 있다면, 심장뿐만 아니라 오장육부를 다 꺼내 팔고 싶은 심정입니다.
필연 : ... 방법이 한 가지 있긴 한데...
태섭 : ..! 돈을 구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필연 : ... (본다)
태섭 : 말씀해보십시오. 이번 공사만 끝낼 수 있으면 저,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습니다.
필연 : (낮게) 곧 이곳 항구에 밀수된 금괴가 들어올 거요.
태섭 : ...?
필연 : 놈들을 체포해버리면, 그 금괴는 국고로 들어갈 것이고.. 눈 한번 질끈 감으면 우리 것이 될 수 있어.
태섭 : ..! 금괴를... 빼앗잔 말씀이십니까?
필연 : 어차피 신고할 물건도 아니니 먼저 갖는 놈이 임자가 아니겠소?
태섭 : 하지만, 그걸 어떻게...?
필연 : 내가 뒤를 봐 줄 테니.. 황사장, 당신이 해.
태섭 : ..! 제가요?
필연 : 황사장도 살아야 할 것 아니오. 어때, 목숨 한번 걸어보겠소?
태섭 : 제가... 할 수 있는 일입니까?
필연 : 세상에... 사람이 마음먹어서 못할 일은 없소.
태섭 : ... 어떻게 하면 됩니까?
씬21. 다방 안
(대수와 고재춘이 뭔가 은밀하게 이야기 중이다. 대수, 고재춘이 일러주는 대로 진지하게 듣는 모습에서...)
씬22. 그 바닷가
(지프차는 없고, 황태섭 혼자 망연하게 바다를 보고 있다. 품속에서 조심스럽게 권총을 꺼내 보는 황태섭... 그 위로...)
조필연 : (E) 트럭운전사가 금괴를 운반할 것이오. 그 자를 죽이고 금괴를 강탈하시오.
태섭 : 젠장... 꼭 이 짓 까지 해야 하나? 나 보고 사람을 죽이라고? (울먹) 뭐, 일이 이따위로 돌아가는 거야, 옘병...
씬23. 대폿집 (밤)
(황태섭이 혼자 막걸리를 마시고 있다. 이때, 대수가 들어선다. 급히 다가와 앉으며...)
대수 : 연락도 없이 갑자기 여긴 어쩐 일이야?
태섭 : (취기어린) 어, 왔어? 자, 한잔 해... (술을 따라준다)
대수 : (살피듯 보며) 너, 무슨 일 있지? 얼굴에 다 쓰여 있어. 말해봐.
태섭 : 그냥... 세상사는 일이 녹록치가 않아서...
대수 : (픽 웃고) 새삼스럽긴... 우리가 전쟁 통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생각해 봐.
맨몸으로 삼팔선 뚫고 와서 여까지 온 것만 해두 태섭이 너, 대단해.
태섭 : 그래... 우리 눈앞에서 참 많이들 죽었어. 전쟁터라고 생각하면 돼. 그까짓 사람, 죽고 죽이는 거.. 그거 별거 아냐.
대수 : (마시려다가)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태섭 : 나...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성공할거야. 뭐든 개같이 벌어서 정승처럼 쓰면 되는 거 아냐?
할 수 있어... 이 황태섭이... 해 낼 수 있어.
대수 : ...
태섭 : 너, 나 믿지? 나, 뭐든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거 알지?
대수 : 뭔 일인지는 모르지만... 세상에, 황태섭이 못하는 일이라면 그 어느 누구도 못해.
태섭 : 고맙다... 나한텐 역시 대수, 너밖에 없어.
대수 : 내일 아침 일찍 일 나가야 돼. 자, 얼른 한잔해.
태섭 : .. (술잔을 털어 넣으며)
씬24. 부대안, 반장실 (그 밤)
(조필연과 고재춘이 단 둘이...)
필연 : 트럭 운전수한텐 한 치의 착오도 없이 일러두었겠지?
재춘 : 수사에 협조하는 줄 알고 있으니까 염려 안하셔도 됩니다.
필연 : ... (생각)
재춘 : 그보다도 황사장 쪽이 더 불안합니다. 차라리 제게 맡겨주십시오.
필연 : ... (본다)
재춘 :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제 손으로 직접...
필연 : 이번 일에 황사장을 끌어들인 이유가 따로 있어.
재춘 : ...?
필연 : 앞으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우리한텐 든든한 돈줄이 필요해.
재춘 : 그럼...?
필연 : 이번일이... 황사장한텐 평생 벗어날 수 없는 약점이 될 거다.
재춘 : 황사장이 그자를 못 죽일 수도 있습니다.
필연 :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눈빛 번뜩이며) 황사장도 그 자와 같은 운명이 될 거야.
씬25. 강모 집 전경 (새벽)
(멀리 바다가 보이는 달동네의 작은 판잣집이다)
미주모 : (E) 꼭 이 꼭두새벽에 가야 돼?
씬26. 동, 방 안
(만삭의 미주모가 대수에게 점퍼를 걸쳐주고 있다.
강모와 미주가 이불을 걷어 차내고 잠들어 있고... 그 옆에서 성모가 옷을 주섬주섬 걸치고 있다)
미주모 : 어젯밤 꿈자리가 영 안 좋아서...
대수 : ... (잠시 미주모를 보다가) 당신, 손 줘 봐.
미주모 : 어? (얼떨결에 손을 내밀면)
(대수,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내 미주모의 손에 끼워준다. 미주모가 금은방에서 봤던 그 금반지다. 성모, 놀라서 보는데..)
대수 : (손을 꼬옥 잡고) 고마워.. 당신, 나 만나서 한 번도 맛난 거 못 먹고, 따슨 옷 못 입고.. 그래도 불평 한 번 없이 살아줘서..
미주모 : (눈물 고인다) 고생은 당신이 죄다 했지 뭐...
대수 : 조금만 참아. 압구정동에 땅값만 뛰면 방 세 칸짜린 충분히 얻을 수 있어.
그 땐 우리, 돼지갈비두 실컷 먹구, 애들 대학두 보내구, 멋지게 살자.
미주모 : ...고약하게... (눈물 훔치며) 꼭두새벽부터 사람 짠하게 해, 왜.
성모 : ... (미소 지으며 보는데)
미주모 : (반지 보며) 이거 비쌀 텐데... 갑자기 돈이 어디서 났어?
대수 : 에이, 말하면 안 되는데.. 사실은 그거, 강모가 산 거야.
성모 : ..? (본다)
미주모 : 걔가 돈이 어딨어서?
대수 : 국가 경제에 큰 일을 했다고, 상금 받았어.
미주모 : 무슨 말이야, 그게?
대수 : 그런 거, 있어. 나중에 말해 줄게.
성모 : 아부지, 얼른 가세요.
대수 : 넌 집에 있으라니깐?
성모 : 강모한테 얘기 다 들었어요. 아버지가 밀수꾼들...
대수 : ..! (얼른 입을 막는다)
미주모 : 무슨 얘기?
대수 : 어, 아냐... 갔다 올게. 밤늦게나 들어 올 거야. (나가면서)
미주모 : 당신 좋아하는 김치찌개 끓여놓을게.
대수 : 이왕이면 소주도 한 병... (사라지고)
성모 : ... (강모를 본다. 이불을 덮어주며, 미소) 짜식.. 니가 나보다 낫다. 다녀오겠습니다. (나가면)
미주모 : ... (미소 지으며 잠시 보다가 배에 통증) 어이구, 배야...
씬27. 어느 배 안, 창고
(어둠 컴컴한 내부... 군용 박스가 쌓여있다. 군무원들이 후래쉬를 비추며 박스 하나를 뜯어내면 양담배가 가득하고...
군무원 1, 그 중 한 개를 뜯어서 담배 갑 안을 살피면 담배 대신 누런 금괴가 들어있다. 시선들 마주치며...)
씬28. 항만 하역장
(대수와 성모, 다른 인부들이 트럭에 박스를 싣고 있다. 군무원들 네 명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고...
어느새 트럭에 잔뜩 실려 있는 군용박스들... 대수와 성모가 트럭위에 올라타고...)
군무원1 : 우리 차 따라오게.
대수 : (내심 긴장, 슬쩍 성모를 보고는) 예... (시동 걸면)
성모 : ... (긴장)
씬29. 한적한 외각 길
(산중의 울퉁불퉁 비포장 길이다. 헤드라이트로 산길을 밝히며 지프차 뒤를 따라가는 트럭...)
씬30. 동 트럭 안
(운전 중인 대수와 성모... 내심 긴장 한 채...)
성모 : 나중에 저 놈들이, 우리가 신고한 줄 알고 해코지 하면 어쩌죠?
대수 : 그딴 게 무서우면, 세상에 옳은 일 하려는 사람이 한명도 없을 거다.
성모 : ...
대수 : 성모야.. 넌 우리 집 장남이야. 아버지가 늙으면 곧 네가 가장이 될 거다.
집 안의 가장이 되려면 제일 중요한 게 뭔지 알아? 용기..
성모 : ...
대수 : 내 가족을 지킬 수 있는 용기... 먹여 살릴 수 있는 용기... 가족을 위해서 희생 할 수 있는 용기...
용기가 있어야 가장이 될 자격이 있는 거야. 아버지 말, 꼭 명심 해.
성모 : ... 예.
씬31. 강모네 집, 방 안
(산파 할머니가 와 있다. 미주모가 땀에 흠뻑 젖은 채 힘을 주고 있고... 미주가 옆에서 엉엉 울며...)
미주 : 엄마... 죽지 마, 엄마...
할머니 : 힘 주그래이..! 퍼뜩..!
미주 : 엄마... (엉엉)
할머니 : 정신 사납다, 가스나야. 고마 나가 있그라..! 힘 주라카이..!
(강모가 펄펄 끓는 양동이를 들고 들어온다)
할머니 : 니, 지금 국?炷犬?? 퍼뜩 가서 찬물 섞어 오래이.
강모 : (얼른 양동이를 들고 나간다)
할머니 : 니 아부진 어디 가서 자빠져 있노?
씬32. 산길 / 트럭 안
(두 갈래로 나누어지는 길이다. 승용차가 한쪽으로 들어가고, 트럭이 막 들어서려는데
가파른 길옆에서 통나무들이 우르르 굴러 떨어지며 길을 가로막는다.
대수가 깜짝 놀라 차를 세우는데.. 이때, 오토바이 한 대가 옆에 다가오고... 헬멧을 쓴 황태섭이다.
트럭 쪽에다가 손짓을 하고 옆길로 가면... 대수, 얼른 핸들을 꺾고... 오토바이를 따라가는 트럭...)
씬33. 산길, 승용차 쪽
(급정거하는 승용차. 군무원들이 차에서 내리고 보면 뒤쪽의 길이 막혀있다)
군무원1 : 차 돌려, 어서...!
군무원2 : 길부터 뚫어..!!
(군무원들이 달려들며 통나무를 치우려고 난리다)
씬34. 폐광 앞
(산중의 은밀한 폐광이다. 오토바이와 함께 트럭이 다가와 서고..)
대수 : 넌 나오지 말고 여기 있어. (밖으로 나간다)
성모 : ... (나오려다가)
(대수가 트럭에서 내려 다가오고... 오토바이 헬멧을 벗으면 황태섭이다. 두 사람, 서로 놀란다)
태섭 : 대수, 니가 여긴 어쩐 일이야?
대수 : 내가 물을 말이야. 보안대에서 보낸 사람이... 태섭이, 너냐?
태섭 : ...!! (놀라서, 망연하게)
대수 : 자초지종은 나중에 얘기하고... 우선, 이 물건들부터 내려. (급하게 박스를 내리려는데)
태섭 : ...!! (팔을 잡아챈다)
대수 : ...? (본다)
태섭 : 왜 하필 너야.. 허구 많은 인간들 중에, 왜 하필 대수, 너냐구..!!
대수 : 너, 왜 그래?
태섭 :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 지금 우리, 밀수사건 수사하는 게 아냐. 이거, 그 놈들이 다 빼앗으려는 거야. 알아듣겠어?
대수 : ..!! (굳어진다)
태섭 : 지금 당장 식구들 데리고 서울로 가. 여기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깐 얼른 도망쳐.
대수 : 그럼 넌..? 처음부터 저들하고 짜고 이 짓을 하고 있는 거야?
태섭 : 난 돈이 필요해. 니가 사둔 강남땅, 지금 다 날리게 생겼단 말야...!
대수 : ...
태섭 : 어서 가... 시간 없어, 어서..!
대수 : 이거, 고대로 경찰서에 갖다 줄 거야. (가려는데)
태섭 : (잡으며) 야, 이대수..!
대수 : 알거지가 돼도, 내 자식들한테 떳떳하지 못한 아버지 되고 싶은 생각 없어.
태섭 :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어? 이러다가 너 죽는다니깐..!!
(이때, 지프차가 다가와 선다. 차 안에서 대수와 황태섭을 노려보는 조필연의 날카로운 눈...!
황태섭, 잠시 당황하다가 총을 빼내 대수에게 겨눈다)
대수 : ..!! (놀라며) 이봐.. 태섭이...?
씬35. 그 곳, 트럭 안
(밖을 살피던 성모가 크게 놀란다. 급히 뒷좌석을 살피더니 짤막한 쇠파이프를 뒤져 꺼낸다.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마음 급하게...)
씬36. 동 폐광 앞
(태섭이 식은땀을 흘리며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총을 겨누고 있다)
대수 : ... 너 미쳤냐?
태섭 : ...
대수 : 정신 차려, 제발...!
태섭 : .... (조필연 쪽을 의식하며 낮게) 도, 도망쳐...
대수 : ....
태섭 : 내 손으론... 널 못 죽여... 그러니... 어서 도망쳐..
(대수, 급히 뒤돌아서서 도망치려는데 총소리와 함께 머리통에서 피가 솟구친다)
씬37. 강모 방 안
(악 ..! 하는 미주모의 비명에 섞여서 터지는 우렁찬 아기 울음소리...
강모와 미주가 눈이 휘둥글 해진 채...!)
씬38. 폐광 앞 / 트럭 안
(고목나무처럼 눈을 부릅뜬 채 쓰러지는 대수...
황태섭이 놀라서 뒤돌아보면, 어느새 차에서 내려 대수 쪽으로 총을 겨눈 조필연의 모습...
트럭 안... 쇠파이프를 든 성모가 주먹으로 입을 막으며 눈물 고인 채... 성모의 시선으로 총을 쏜 조필연의 모습이 보인다.
조필연과 재춘이 황태섭 쪽으로 다가오고...
성모, 넋이 나간 듯 허둥지둥 대다가 팔꿈치로 자동차 경적을 울리고 만다. 빠앙-- 울리는 경적소리..!!
성모, 화들짝 놀라는데.. 동시에 놀라는 트럭 밖의 사람들..)
필연 : ...! 거기 누구야?
(성모, 반대쪽 문으로 뛰어내리더니 냅다 산 쪽으로 뛰기 시작한다)
필연 : ...! 어서 잡아..!!
(재춘이 권총을 빼어들고는 트럭 뒤쪽으로 뛰어간다.
잠시, 그쪽을 바라보던 조필연과 황태섭이 서로 시선을 마주친다. 잠시 미묘한 기류가 흐르다가...
조필연이 권총을 황태섭에게 겨눈다. 동시에, 조필연에게 권총을 겨누는 황태섭...
두 사람의 총 끝이 서로의 머리에 마주 닿을 거리다. 극도의 긴장감이 흐르다가...)
필연 : 그러니까... 내가 나서기 전에... 그 총으로 저자를 쐈어야지.
태섭 : ... (겨눈 채)
필연 : 내가 죽인 걸 봤으니... 당신, 살려둘 수가 없어.
태섭 : 좀 더 솔직해 보지, 그래... 처음부터, 이용만 해먹고 날 죽일 작정이었어. 안 그래?
필연 : ... (본다)
태섭 : (이를 악물며, 식은땀) 하지만, 번지수가 틀렸어... 난 저 친구처럼... 호락호락하게 안 죽어.. 아니, 절대 못 죽어..!
필연 : 그래? 그럼 어디 한번... 해볼까?
태섭 : ... (부들부들 떠는 손)
필연 : ... (긴장한 채)
태섭 : 나... 당신이 이렇게 죽이기엔 아까운 놈이오.
필연 : ... (본다)
태섭 : 나 같은 장사꾼 하나 곁에 두면... 저깟 금괴보다... 더 큰 돈을 벌게 될 거요.
필연 : 난 야망이 아주 커... 당신이 과연 내 욕심을 다 채워줄 수 있을까?
태섭 : (총을 겨눈 채, 눈물 고인다) 살려만 준다면.... 개가 되어서라도.. 당신한테 충성을 다 하겠소.
그러니 제발 날 죽이지 마시오.
필연 : ... (본다)
태섭 : ... (보는데)
필연 : ...
(총을 겨눈 채, 권총을 달라고 한쪽 손을 내민다)
(황태섭, 침을 꿀꺽 삼키며 망설이다가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권총을 건넨다.
조필연, 여전히 황태섭의 머리에 총을 겨눈 채 노려보다가...)
필연 : 방금... 개가 되어서라도 충성을 다하겠다는 그 말... 죽을 때까지 잊지 마시오.
태섭 : 하늘에 맹세하고... 내 뼛속에 새겨 놓겠습니다.
필연 : (총을 거둔다) 우린 이제부터 동업자요. 강남에 개발 중인 사업을 번창시키시오.
돈을 아주 많이 벌란 말이오, 알겠소, 황사장?
태섭 : ....
씬39. 어느 산중 (몽타주)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성모.... 비탈에서 구르기도 하면서... 권총을 들고 그 뒤를 악착같이 쫓는 재춘... 긴박한 상황이다.
다른 산중... 급히 달려와 주변을 둘러보는 재춘.. 가까운 일각의 바위 뒤... 성모가 숨을 참으며 숨어있다.
재춘, 둘러보다가 화가 난 듯이 돌멩이를 걷어차는데.. )
씬40. 부대 안, 반장실
(진흙투성이에, 땀에 젖은 재춘이 돌아와 있다. 조필연과 황태섭이 앉아 있고... 무거운 분위기다)
재춘 : 죄송합니다.
필연 : ... (깊은 생각) 놈은 분명 우릴 봤을 거야. (황태섭에게) 혹시, 짐작 가는 자가 없소?
태섭 : (무겁게) 모르겠습니다.
필연 : ... 여기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 할 테니 서울로 돌아가시오.
태섭 : ...
씬41. 어느 길
(한적한 비포장 길... 여기저기 생채기가 난 성모가 기진맥진 한 채 뛰어 온다. 숨을 헐떡거리며 지친 듯이 털썩 주저앉고...
성모, 울음 섞인 채 아버지를 입 안으로 부르며...
이때, 멀리서 군용 지프차가 다가오자 얼른 몸을 숨기는 성모...
그 앞을 지나가는 지프 안의 조필연의 모습이 성모의 시선에 들어오는데...
지프가 지나가자 나오는 성모, 이를 악물며 다시 뛰어가는데...)
씬42. 경찰서 안
(들어서는 성모... 경찰들이 일제히 상처투성이에 진흙범벅인 성모를 심상치 않게 본다)
경찰1 : (훑어보며) 무슨 일로 왔니?
성모 : (복받쳐서 잠시 씩씩대다가) 제 아버지가...
(이때, 일각에서 등을 돌리고 서장과 이야기 중이던 조필연이 뒤돌아본다.
순간 성모, 얼어붙은 듯이 굳어진다)
경찰1 : 니 아부지가 뭐?
필연 : ... (본다)
성모 : 아버지가... 술에 취해서... (말을 못 이어가고)
경찰1 : 술에 취해서 니네 엄마를 패기라도 하냐?
성모 : (기어들어가는 목소리) 예...
경찰1 : 그래서? 우리더러 부부 싸움 좀 말려 달라고?
좌중 : (낄낄거리는 웃음)
경찰1 : 야, 우리 바쁘니까, 옆집 아저씨한테 말려 달라구 그래.
필연 : (일어서며) 그만 가보겠습니다.
서장 : 식사라도 하고 가시죠?
필연 : 아닙니다, 다음에 하죠.
(조필연이 성모 앞을 지나쳐 간다. 이때, 군복 위에 박힌 이름 석자, 조필연..
마당으로 나간 조필연과 서장이 친밀한 듯이 입가에 미소를 주고받으며 악수한다.
이를 바라보는 성모의 시선에 불꽃이 튀듯...)
씬43. 강모네 집
(다가오는 성모... 대문 앞에 금줄이 쳐져 있다. 성모, 얼른 마당으로 들어가는데... 기다리고 있던 군무원1이 일어선다.
강모와 미주가 마루에 앉아 있다가..)
강모 : 형...!
미주 : 오빠야...!
(어느새 다른 군무원들이 성모 뒤에서 막아서고...)
군무원1 : 니 아부지... 어딨어?
성모 : ... (방 쪽을 본다)
(열린 방문으로, 해산한지 얼마 안 된 미주모가 걱정스럽게 내다보고 있다)
씬44. 동네 일각
(멀리 바다가 보이는 달동네의 계단 쯤... 성모가 군무원들에게 둘러싸여 있고...)
군무원1 : 죽어? 니 아부지가 죽었다고?
군무원2 : (때릴 듯이) 근데, 이 자식이... 그 말을 지금 우리더러 믿으라고?
성모 : ...
군무원1 : 그래, 죽었다고 치자. 누가 죽였는데?
성모 : ...
군무원2 : 죽었으면 죽인 놈이 있을 거 아냐, 인마.
성모 : 조필연...
군무원1 : ..! 뭐? 조필연?
성모 : 틀림없이... 대위계급장을 단... 조필연이란 사람이에요.
군무원2 : 대체 이게 어찌된 거야? 그럼 보안대, 조필연 반장이..?
군무원1 : 틀림없이 조필연이냐?
성모 : (신경질) 그렇지 않으면, 내가 그 사람을 어떻게 알아요?
군무원들 : ..! (망연하게)
씬45. 강모 집 마당
(들어서는 성모... 미주모가 나와 있다. 산후직후라 추위에 오들오들 떨면서... 미주와 강모가 곁에 있고...)
미주모 : 말해봐. 아버진 어딨고, 아까 그 사람들은 누구니?
성모 : ... (눈물 고인다)
미주모 : 말해 보래두..! 니 아부지 어딨어..!
성모 : 돌아가셨어요.
강모, 미주 : ..!
미주모 : (멍해져서) ... 뭐?
성모 : 아버지... 죽었다구요.
미주모 : ...!! (그대로 실신한다)
성모 : (얼른 받아 안으며) 엄마..?
강모 : 엄마..!
미주 : (동시에) 엄마아.. 앙... (울음 터뜨리며)
씬46. 부대 안, 반장실
(조필연과 군무원들 네 명이 마주보고 있다. 재춘이 긴장한 채... 무거운 분위기)
필연 : 자네들이 여긴 어쩐 일들인가?
군무원1 : 돌려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 물건... 저희와 나누십시오.
필연 : ...! (본다)
군무원1 : 밀수품을 강탈했으니, 반장님도 우리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필연 : 나누면... 내 몫은...?
군무원1 : 우리 네 명과 반장님... 오분의 일입니다.
필연 : 오분의 일이라... 고맙군... 헌데, 자네들이 뭔가 착각을 한 게 있어.
(본다, 눈빛) 난 네 놈들이 불법으로 밀수한 금괴를 강탈 한 게 아니라.. 압수를 한 것이야.
좌중 : ..!! (놀란다)
필연 : 부관..! 이놈들, 금괴 밀수죄로 다 체포 해.
재춘 : 예, 반장님..! (권총을 빼든다) 꿇어, 이 새끼들아..!!
(재춘이 군무원들의 정강이를 걷어차며 꿇려 앉힌다. 순식간에 제압당하는 분위기... 어리둥절 하는 그들 앞에 조필연이 나선다)
필연 : 잘 들어... 네 놈들은 절대 날 물고 들어가지 못해. 내 말 한마디면... 네 놈들 인생은 그날로 끝이야.
군무원들 : ...
필연 : (본다) 니들... 그 동안 밀수한 돈으로 호강 시켜준 처자식들 있지? 네 놈들 매장되고 나면 아마 길거리에 나 앉아야 할 걸?
군무원1 : 금괴의 절반을 드리겠습니다.
필연 : 절반? (재춘에게) 이놈들 끌고 나가고 상부에 보고 해.
재춘 : 예, 반장님..! (잡아채려는데)
군무원1 : (다급하게) 원하시는 걸 말씀해 주십시오.
필연 : (손을 들어 재춘을 말리고, 본다)
군무원1 : 뭐든 다 해드리겠습니다. 원하시는 것이... 대체 무엇입니까?
필연 : (얼굴 가까이, 낮게) 너희 같은 쓰레기들... 각하께서 어렵게 혁명으로 세운 이 사회에서 영원히 추방하는 거...
부관..! 뭐하나..!!
군무원1 : 전부 다 드리겠습니다...!
필연 : (본다)
군무원1 : 아무런 조건도 없이... 전부 다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우릴 살려주십시오.
필연 : ... (잠시 보다가 그들 앞에 쪼그려 앉는다) 내가 정하지. 팔대 이... 내가 팔, 니들이 이...
목숨 값까지 치면, 절대 밑진다고는 생각 안들 거야.
군무원들 : .... (내심 억울하다)
필연 : 헌데, 트럭 안에서 날 목격한 자가 누구야?
군무원들 : ..?
필연 : (이상해서, 눈빛) 니들 중에 있는 거, 아니었어?
씬47. 강모 집, 방안
(갓난아기가 있고... 강모와 미주가 팔과 다리를 주무르고 있는데 기진맥진 누워있던 미주모가 벌떡 일어서며..!)
미주모 : ...!! 그 사람들한테... 얘기했니?
성모 : ...? (영문을 묻듯) 예...
미주모 : .... (잠시 놀란 채 생각하다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미주모, 벌떡 일어서더니 장롱을 헤집으며 문서들을 챙기기 시작한다)
성모 : (이상해서) 엄마?
미주모 : 니들도 어서 옷가지만 챙겨.
강모 : 왜 그래, 엄마?
미주모 : (울부짖듯) 밀수꾼이나 그놈들이나..! 경찰서장도 다 한패라며? 시간 없어, 옷 챙겨, 얼른..!
씬48. 부대안, 반장실
(조필연이 초조하게 서성거리며... 고재춘이 있고...)
필연 : 목격한 놈이 하필이면 그 아들놈이라니...
재춘 : 염려 마십시오. 곧 잡아들일 겁니다.
필연 : (버럭) 잡아와서 뭘 어쩔 건데?
재춘 : 예..?
필연 : 없애야 돼... 내가 죽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놈들은 다 없애야 돼, 알아들어?
씬49. 강모 집 방안 / 마당
(구둣발로 뛰어 들어오는 군무원1... 그러나 장롱이며 세간들이 헤집어져 있고 아무도 없다.
마당으로 나오는 군무원1.. 변소며 부엌을 뒤진 다른 군무원들도 마당에 모이고..)
군무원2 : 벌써 도망친 거 같은데?
군무원1 : (잠시 생각하다가) 기차역으로 가..! (뛰어나간다)
군무원들 : (뛰어나가고)
씬50. 기차 대합실 안
(개찰이 시작되고 있다.
사람들이 사이에서 아기를 안은 성모와 미주모, 강모, 인형을 든 미주가 개찰구로 줄을 서서 나가기 시작하고...
잠시 후, 군무원들이 급히 대합실 안으로 뛰어들더니 주변을 둘러본다)
군무원2 : 벌써 나간 거 같아.
(군무원들,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을 밀어내고 개찰구로 나가려는데 역무원이 막아선다)
역무원 : 뭡니까?
군무원1 : 사람을 찾는 중이오. 잠깐이면 됩니다. (나가려는데)
역무원 : (막아선다) 경찰이면 신분증 보여주세요.
군무원1 : 아니, 우린 경찰이 아니라...
역무원 : 가서 표 끊어오세요.
군무원1 : 잠깐이면 된다니깐요.
역무원 : (밀쳐내고, 다른 사람들의 표를 받으며) 서두르세요. 기차 곧 출발합니다.
(군무원1, 얼른 매표소로 간다)
군무원1 : (지폐를 툭 던져 놓으며) 어른 네 장...
여자 : (껌 찍찍 씹으며 빤히 본다)
군무원1 : 안 들려? 어른 거 네 장 달라니까.
여자 : 달나라 가는 거 드려요?
군무원1 : 뭐?
여자 : 어딜 가는지 말씀을 하셔야죠.
군무원1 : 이걸 그냥, 확..! (화 참고) 서울... 빨리..!!
씬51. 역사 안 탑승구
(미주모와 인형을 손에 든 미주, 성모, 강모가 기차를 타려고 한다. 이때, 군무원들이 선로를 가로지르며 뛰어온다.
놀라는 가족들... 차례로 급히 기차에 오르고 맨 마지막에 성모가 오르는데 서서히 출발하기 시작하는 기차...
군무원들, 멈추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달려오는데...
점점 속도가 붙기 시작하는 기차를 두드리며 쫓아오다가 이내 포기하는 군무원들.. 안도하는 가족들..
미주모, 아직 해산기가 남아서 기진맥진한 모습..)
씬52. 인써트
(선로 위를 빠르게 지나가는 기차... 긴 경적소리와 함께...)
씬53. 어느 국도 / 승용차 안
(군무원들이 타고 있다)
군무원1 : (마음 급하게) 더 빨리 못가? 있는 대로 밟으란 말야..!
군무원2 : 지금 밟고 있잖아..!
씬54. 기차, 객실 안
(성모와 강모, 미주가 풀이 죽은 채 앉아 있다. 아기를 안은 미주모가 잠시 아이들을 보다가...)
미주모 : (마음 다잡고, 딱 부러지는 어조) 다들 인상 펴.
아이들 : ...
미주모 : 우리 지금 서울로 가는 거야. 아빠가 강남에 사둔 그 땅만 있으면, 우리 식구들, 먹고 사는 거 문제없어.
아빠가 없어도, 이 엄마가 니들 다 대학 보내고 시집장가 보낼 거니까 아무 걱정 하지 마.
강모 : ... 아버진?
미주모 : (본다)
강모 : (울먹이며) 아버지 시신은 어떡하구 우리끼리 도망치냐구.
미주모 : (눈물 고이지만, 단호하게) 나중에 찾으면 돼. 나중에... 그 놈들 찾아내서 죄 값 받게 하고... 그때 찾아서 모시면 돼..
성모 : ... (눈물 참으며, 이를 악물 듯)
씬55. 야산, 봉분 앞
(막 쌓아올린 허름한 봉분 앞... 황태섭이 소주병을 이빨로 따더니 봉분에 뿌린다)
태섭 : 대수, 넌줄 알았으면.. 나, 거기 가지도 않았어.. 너, 내 맘 알지? 하필이면... 하필이면 왜 니가 내 앞에 나타나느냔 말이야..
(병째 벌컥벌컥 마신다, 격앙되기 시작하며) 그래, 나두 알아..! 나 때문에 죽었어. 널 죽인 건 나야..!
이 미련한 놈이 널 죽게 만들었어..!!
(황태섭, 벌컥벌컥 남은 소주를 마시고는 빈 병을 냅다 집어 던진다)
태섭 : (광기어린) 그래서 어쩔 건데..! 넌 이미 죽었어.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니 목숨까지 팔아서 잡은 기회야. 나, 이 황태섭이.! 보란듯이 꼭 성공할 거야..! 세상에 있는 돈이란 돈은 다 긁어모을 거야.
이봐 친구..! 구천에서 잘 봐두게...! 내가 어떻게 성공하는지..! 이 세상을 어떻게 먹어치우는지,
두 눈 똑똑히 뜨고 잘 봐두란 말이야..!! (피를 토하듯 울부짖으며)
씬56. 기차 안, 객실 (밤)
(미주모가 아기를 안은 채 지친 듯이 잠이 들어 있다. 미주가 엄마 무릎에 엎드려서 자고 있고...
객실 안에 안내방송이 울리고 있다)
방송 : 이번에 내리실 정차 역은 대전... 대전역입니다...
씬57. 동, 칸막이 사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유리문으로 그 모습을 보고 있는 강모...
성모가 벽에 기댄 채 망연하게... 서서히 열차가 정차하기 시작한다.
이때, 성모와 시선이 마주치는 낯익은 얼굴들... 군무원들이다. 성모, 놀라는데..!!)
씬58. 역사 안, 탑승구쪽
군무원1 : 저놈..! 저놈이다..!! (뛴다)
군무원들 : (일제히 뛰어가는데)
씬59. 동, 열차 안
(어느새 정차한 기차.... 급히 객실 안으로 들어오는 성모와 강모...)
강모 : 엄마, 일어나. 그놈들이야..!!
미주모 : ..! (깜짝 놀라서 깨어나고)
성모 : (아기를 받아들고, 강모에게) 미주 데리고 와. 엄마, 빨리요..!
(가족들, 일어서서 기차 앞쪽으로 도망치려는데 성모가 강모를 잡아 세운다)
성모 : 강모야, 내 말 잘 들어. 기차가 막 출발하기 시작하면 엄마하고 미주 데리고 내려, 알았지?
강모 : 형?
미주모 : 성모, 너는?
성모 : 지금 내리면 우리 다 잡혀요. (강모에게) 내가 반대쪽으로 유인하면서 시간을 끌어 볼 테니까,
어머니 모시고 먼저 서울에 올라가 있어.
강모 : 그럼 우리 어떻게 만나?
성모 : 이번 달 마지막 날에 서울에서 제일 높은 빌딩에서 만나자. 알았지?
강모 : .. 응.
성모 : 시간 없어, 빨리...!
강모 : (미주의 손을 잡아끌고 앞서간다)
미주모 : (머뭇거리며) 성모야..
성모 : 곧.. 찾아뵐게요.
(강모와 미주, 아기를 안은 미주모가 급히 기차 앞쪽의 객실로 간다. 성모, 반대쪽으로 급히 뛰어가고...)
씬60. 다른 객실 안
(막 기차에 탑승한 군무원들이 성모를 발견하고는 뒤쫓기 시작한다. 짐을 들고 타고 내리는 사람들과 부닥치면서...
기차가 서서히 출발하기 시작한다)
씬61. 탑승구 / 열차 안
(출발하기 시작하는 기차에서 내리는 미주모와 미주, 강모...
열차 안 객실... 쫓아오는 군무원들과 도망치는 성모... 칸막이를 막 지나려는데 애타게 성모를 찾던 강모와 시선이 마주친다)
강모 : 형...! (소리친다) 약속 잊지 마..! 꼭 다시 만나야 돼, 형...! 형..!!
(기차가 빨라지며 순식간에 멀어지는 성모의 모습...)
씬62. 달리는 기차 안 / 맨 끝 난간
(맨 끝 객실로 도망치는 성모... 군무원들.. 가죽장갑을 고쳐 끼며 맨 마지막 칸의 문을 연다.
성모가 난간 끝에서 독기어린 눈으로...)
성모 : 금괴는 조필연이 가져갔어요. 대체 우리한테 왜 이래요?
군무원1 : 네놈이.. 아버지 죽는 걸 보지 말았어야지.
성모 : ...!! (이를 악문다) 그래서..? 우릴 죽이려고?
군무원1 : 근데..? 다른 식구들은 어딨어?
성모 : (난간에 다리 한 짝을 걸쳐 놓는다)
군무원2 : 저, 저게 미쳤나?
군무원1 : 너, 얼른 이리 못 와?
성모 : 가서 조필연한테 똑똑히 전해. 아버지 원수를 갚으러... 내가 반드시 찾아가겠다고... (뛰어내린다)
군무원1 : 야...!
군무원2 : 저 미친 놈..!!
(군무원들이 급히 달려가서 보면 이미 어둠속에 묻혀 종적이 없고... 망연해 하는 군무원들...
빠앙-- 하는 기차 경적소리와 함께...)
씬63. 골목 안
(역 근처의 허름한 골목 안이다. 아기를 업은 미주모와 강모, 미주가 걸어 나오고...
미주모, 식은땀을 비 오듯 흘리며 정신이 혼미한 듯... 털썩 주저앉는데...)
강모 : 엄마..!
미주 : (이마에 손을 대보고) 오빠, 엄마가 너무 뜨거워.
강모 : ..! (주변을 둘러보는데)
(가까이에 보이는 허름한 여인숙 간판 불빛...)
씬64. 여인숙 안
(강모와 미주가 양쪽 옆에서 미주모를 부축하고 들어선다. 카운터에 앉아 있는 뚱뚱한 주인 여자가 뜨개질을 하다가...)
강모 : 아줌마, 방 좀 주세요...
주인여자 : (힐끗 보고는) 우리 집은 큰방 두 개밖에 없다. 여자 방 하나, 남자 방 하나...
강모 : 엄마... 먼저 들어가.
미주모 : 돈은.. 돼?
강모 : 어...
(미주모와 미주가 들어가고...)
강모 : (전대를 꺼내들고) 얼만 데요?
주인여자 : 두당 이백 원이니깐 팔백 원만 내.
강모 : 예? 그렇게나 비싸요?
주인여자 : 싫음 그냥 가구. 이따가 막차 들어오면 방 없어서 난리니깐.
강모 : 근데 왜 팔백원이예요? 세 명인데 육백 원이지.
주인여자 : 저 등에 업은 건 괴나리봇짐이냐?
강모 : 애기두 돈을 내요?
주인여자 : 자다가 빽빽거리고 울면? 손님들 다 쫓을려구? 생각해줘서 방 내줬더니..
(강모, 주머니를 뒤지면 돈이 얼마 없다. 만지작거리는데...)
주인여자 : 잘 거야 말거야?
강모 : 여자들만 세 명 꺼요. (육백 원을 건넨다)
주인여자 : 넌 안자구?
씬65. 동, 방 안
(제법 널찍한 방에 여자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잠을 자고 있다.
한쪽 구석에서 미주모와 인형을 안은 미주, 갓난아기가 누워 있고... 미주모, 식은땀을 흘리며 고열에 시달리고 있다.
바로 그 옆자리... 짙은 화장을 한 여자가 누워서 사진 한 장을 들고 보고 있다.
젊은 시절의 황태섭과 갓난아기, 여자와 함께 찍은 그 사진... 정연의 친엄마, 유경옥이다)
씬66. 황태섭 집 안 (서울, 그 밤)
(들어서는 황태섭... 남숙이 따라 들어와서 웃옷을 받으며...)
남숙 : 어디 갔다 이제와요? 며칠씩 연락두 없이...
태섭 : (소파에 앉아 양말을 벗으며) 피곤해, 목욕물 좀 받아 놔.
남숙 : (눈치 보며) 저, 여보... 정연이 말예요.
태섭 : 정연이가 왜?
남숙 : 내내 심통을 부리더니만.. 기어이 장롱 뒤져서 곗돈 들구 가출했어요.
태섭 : 뭐? (신경질) 걔가 갈 데가 어딨다구 가출을 해?
남숙 : 어딨는지 알면, 내가 이러구 가만있겠어요?
태섭 : 혹시... 지 엄마 대전에 있는 거 말한 거 아니지?
남숙 : 미쳤어요? 내가 주책없이 그런 말을 왜 해?
태섭 : (급히 나가려는데)
남숙 : 곧 통금시간인데 어딜 가려구요.
태섭 : 어디든 찾아봐야 할 거 아냐...!
남숙 : 그냥, 경찰에 신고하고 기다려 보자구요. 돈 떨어지면 들어오겠지 뭐.
태섭 : 도대체 여편네가, 집구석에서 뭐하는 거야..! 애 하나 단속 못하구..!
씬67. 대전 역, 대합실 안
(창문 틈으로 바람소리가 요란하다. 강모가 긴 의자에 쪼그려 누워서 잠을 청하고 있고...
신문지를 덮고 있던 맞은편의 노숙자가 화장실을 가자 강모, 얼른 그 신문지를 가져다가 덮는다.
이때, 막차에서 나온 사람들이 들어서고...
그들 중에 군무원들의 모습이 보이자 강모, 깜짝 놀라며 어른 신문지를 머리끝까지 덮는다.
잠시 뒤, 어린 정연이 들어선다. 잠시 대합실 안을 둘러보는데... 군무원들이 강모 앞에 선다)
군무원1 : 틀림없이 이 근처에 있을 거야. 내일 샅샅이 뒤져보자.
군무원2 : 그 놈은 어떻게 됐을까?
군무원1 : 지독 한 놈...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 내리다니..
강모 : ..!!
(이때, 노숙자가 돌아와 주변을 둘러보다가 강모가 덮고 있는 신문지를 신경질적으로 걷어간다.
강모, 화들짝 놀라며 얼른 뒤돌아 눕는데...
군무원들, 눈치 채지 못하고 다른 쪽을 보는 사이, 강모, 얼른 일어서서 여자 화장실에 숨는다.
숨을 헐떡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내다보는데.. 이때 강모 앞에 불쑥 얼굴을 들이미는 정연... 강모, 깜짝 놀라서...)
강모 : (낮게) 저리 가... 얼른..!
정연 : 여기 여자 화장실이거든? 나갈 사람은 너야.
강모 : ... (난처하게 바깥을 살피면)
(군무원들이 여전히 서성이고 있고... 정연, 강모의 시선을 따라서 보고는)
정연 : 너 소매치기지?
강모 : 뭐?
정연 : (행색을 잠시 살피다가) 좀도둑질 하려면 이 동네는 훤히 알겠네? 내가 사람을 찾으러 왔는데, 여기가 첨이거든?
나 좀 도와줄래?
강모 : ... (기가 막혀서)
정연 : 잘 데도 없는 거 보니깐 너, 돈 필요한 거 같은데... 천원 줄게.
강모 : 이 기집애가, 증말...
정연 : 이천 원... 그 이상은 안 돼.
강모 : 필요 없으니깐, 제발 내 앞에서 꺼져줘.
정연 : 그래? 그럼 할 수 없지. (바깥쪽에다가) 아저씨..! 여기....
(강모, 깜짝 놀라서 정연의 입을 틀어막고 벽 쪽에 세운다. 군무원들, 잠시 돌아보다가 대합실 밖으로 나가고...
강모, 정연의 입을 막은 채 살피고는 안도... 이내, 정연과 시선이 마주치자 노려보고 있는 정연의 매서운 눈빛..
강모, 얼른 손을 떼고 떨어지는데... 순간, 정연이 강모의 뺨을 후려친다)
정연 : 더럽게, 어디다 손을 대? 도둑놈 주제에... (가려는데)
강모 : ... (확 잡아챈다, 노려보며) 나, 도둑놈 아냐.
정연 : ... (지지 않고 노려본다) 그럼 뭔데?
강모 : 이강모... 우리 아버지가 나한테 지어준 이름이... 이강모야.
정연 : ... (본다)
강모 : ... (보는데, 눈빛에서)
첫댓글 초반에 시끌벅적한 일이 많은 드라마였는데, 그래도 대본이 탄탄해서 놀랍다.
근데.... 나중을 알고 있어서 그런지 1회 대본만으로도 눈물이 나려 한다. 성모 진짜 불쌍해. 흑.
감사히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