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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고전15:12~22)-2021.4.4
기독교 신앙의 뼈대는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세우는 양대 축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무엇보다 부활은 우리 믿음의 결정적인 근거가 됩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나름대로 사람들을 설득 시킬만한 교리를 가지고 있지요. 그 안에 윤리성이나 도덕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른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만한 나름대로의 종교성을 갖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모든 종교가 결국은 같은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한마디로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것은 선한 것이라는 의미이지요. 그런데 선을 추구한다는 것만으로 모든 종교가 하나라는 것은 언어도단이요, 궤변입니다.
선은 세상의 기준이나 사람의 기준, 혹은 종교적인 기준으로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선악의 기준은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고 상대적인 기준입니다. 한마디고 선악의 기준점이 없는 것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선의 기준은 모호하고 가변적입니다. 그때그때 다릅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선악을 분별할 능력이 없고, 선악을 판단할 능력도 없습니다. 선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만 선악을 분별하시고 판단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종교가 기능적으로는 비슷하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본질이 같은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세상 모든 종교와 기독교가 생리적으로 같을 수 없고 본질적으로 절대 같을 수 없습니다. 기원이 다르고, 과정이 다르며 결론이 다릅니다. 기능도 다르고 본질이 다릅니다. 한마디로 모든 것이 다 다릅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부활은 세상 어떤 종교가 교리를 만들어서 사람들을 호도한다 할지라도 모방할 수 없습니다. 세상 어떤 종교도 부활에 대한 흔적이 없고, 증거도 없습니다.
그냥 교리로서의 부활은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교리나 이론적인 부활은 말장난에 불과하지요. 세상의 대부분의 종교는 나름대로는 미래에 대한 안전보장을 제시합니다. 이른바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영혼의 문제를 다루지요. 나름대로 그들만의 천국을 제시하는 것이지요. 왜냐면 사후 세계에 대한 영원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종교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이 아니거든요. 생각해 보세요. 죽은 다음에 자기 영혼에 대한 안전성을 보장받을 수 없다면 더 이상 그 종교를 믿어야 할 근거가 있겠습니까? 그런 차원에서 영혼에 대한 보장이 없는 종교는 종교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만들어 낸 종교는 절대 사람의 영혼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만일 보장한다고 주장한다면 영혼을 담보로 사기 치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만들어낸 종교는 우리 영혼의 영원함을 책임질 수 없고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만들어낸 종교는 모두가 허구입니다. 피조물을 믿는 세상의 모든 종교는 100%가 사람의 영혼을 속이는 사기라는 말입니다. 세상을 만드신 창조자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모든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시공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불투명하고 불완전한 미래에 대한 영원함에 답을 줄 수 있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온 세상이 기뻐하는 부활절이지요. 부활은 세상을 사랑하신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시고 다시 살리사 영원한 생명을 확보해주신 생명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다가 그대로 끝나버리는 인생이라면 세상이 얼마나 허무하고, 인생이 얼마나 무의미할까요? 만일 우리에게 부활의 축복이 없다면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이 자리에 앉아 예배드릴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믿음의 근거도 부활이요, 소망의 근거도 부활이며, 사랑의 근거 역시 부활입니다. 한마디로 부활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하나로 통폐합하는 구심점이요, 최고봉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절을 믿는데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비극적인 일이지요. 사실 1년 365일을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부활의 감격으로 살아야 하는데 기껏해야 1년에 한번 있는 부활절예배를 드리기 위한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릅니다. 만일 1년에 한번 드리는 부활절을 위한 부활의 믿음이라면 어쩌면 우리는 부활의 믿음을 갖고 있지 않은지 모릅니다. 부활의 믿음은 부활절예배를 드리기 위한 악세서리가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불과 하루를 위한 부활의 믿음을 갖고 사는지 모릅니다. 이른바 한 시간의 부활절 예배를 드리기 위한 부활의 믿음을 갖고 사는지도 모릅니다.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교회와 성도들이 불편한 진실을 갖고 있습니다. 오늘 부활절이 지나가면 우리는 또 다시 부활의 주님을 잊어버릴지 모릅니다. 더 이상 부활의 메시지도 듣지 못하고, 부활의 찬송을 부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내년 부활절까지 우리는 부활의 메시지를 저장해놓고, 부활의 찬송가를 덮어둘는지 모릅니다. 사실 교회가 그동안 그렇게 훈련되어졌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평상시 부활찬송을 부르는 것이 왠지 어색하고 쑥스럽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고난에 관한 메시지는 심심치 않게 선포하고, 고난에 관한 찬송은 자주 하는데 왜 부활의 메시지나 찬송은 부활절 하루 한시간에 고착되어 있는 것일까요? 어쩌면 이것이 부활의 믿음을 희석시키는 사단의 궤계가 아닐까요?
세상의 모든 사람은 죽음을 공감합니다. 어느 종교, 어떤 사람도 인간의 죽음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 이후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할 뿐입니다. 그런데 그 문제는 인간의 고민으로 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수고나 노력으로 풀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나 어떤 종교도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것은 인간의 영원을 결정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영원한 세계를 결정하는 문제이기 때문이에요. 영혼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세에 속한 모든 영혼은 하나님께 달린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믿음의 본질은 여러 가지지만 가장 핵심적인 본질은 죽음 이후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죽음 이후의 문제를 어떤 사람이나 어떤 종교가 해결해 줄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하나님만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해결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시어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다시 사는 부활을 통해 영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요, 영생의 종교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세상의 종교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지요. 굳이 우리가 예수를 믿어야 할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부활하셨습니다(마16:21,17:23, 20:19, 고전15:3). 그리고 부활의 확실한 증거를 갖고 계십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그 주님을 그리스도로 믿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는다는 말이지요. 다만 우리의 이성이나 지성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믿어지는 믿음으로 부활의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터툴리안이라는 교부는 “나는 성경이 불합리한 것인 고로 믿는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는 만일 성경이 인간이 사고하는 수준의 책이라면 어찌 성경을 믿을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인간은 성경을 통해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습니다. 이른바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경험하는 것이지요.
부활은 무엇입니까? 사전적인 의미로는 다시 사는 것입니다. 다시 사는 것은 반드시 전제조건이 필요하겠지요? 무엇일까요? 죽음입니다. 죽음은 부활의 필수조건입니다. 그렇다면 부활의 성경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새 창조입니다. 고린도전서15장 42절부터 44절까지 말씀을 참조해 보십시오. 42절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여기서 죽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썩을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사는 것은 무엇입니까? 썩지 아니할 것입니다. 썩지 아니할 것이 새 창조입니다. 썩지 아니할 것이 부활인 것이지요. 물론 엄밀히 말하면 부활체의 모습입니다.
43절도 같은 맥락입니다. 욕된 것은 죽어야 할 것이요, 영광스러운 것은 부활이라는 새 창조입니다. 약한 것은 죽어야 할 것이요, 강한 것은 새 창조의 부활입니다. 44절의 육의 몸이 죽어야 할 것이요, 신령한 몸이 새 창조의 부활입니다. 이른바 부활은 새 창조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다시 살리는 새 창조의 부활을 누가 하신다는 말입니까?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다는 것입니다(45절). 주님은 살려주는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산 영과 살리는 영은 전혀 다릅니다. 산 영은 살리는 영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결과물이에요.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 영이 된 사람들이에요.
다시 말해 그분께 붙어 있는 자는 그분이 공급하시는 생명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 나오는 포도나무의 비유처럼 말입니다. 포도나무 가지는 포도나무에 붙어만 있으면 절로 과실을 맺습니다. 마찬가지로 가지된 우리도 포도나무이신 주님께 붙어있으면 자동적으로 주님이 공급하시는 생명을 누릴 수 있는 것이지요. 주안에 거하는 자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공급하시는 생명을 누릴 수 있다는 말이에요. 한마디로 살리는 영이신 예수님께 붙어 있기만 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산 영이 된다는 말이지요.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산 영이 되게 하시는 능력은 부활에 있습니다. 우리를 산 영이 되게 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살리시는 영이세요. 주님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로 부활하신 거예요. 부활하신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가장 먼저는 천사들에게 나타나시고, 게바와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와 제자들, 오백여 문도들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했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 어떤 종교에서도 볼 수 없는 가장 확실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반드시 죽습니다.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도 죽음을 통과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을 믿는 모든 자들에게 부활의 생명을 공급해 주신 것입니다(요11:25-26절). 그래서 부활을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에게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금생에 가장 불쌍한 자가 될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이 2차전도 여행을 통해 세운 교회입니다. 그는 고린도에 일년 육 개월 동안 머물면서 두려움과 떨림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여러 가지 문제가 드러났습니다. 대표적인 문제는 교회론과 성령론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은사가 넘치는 교회였지만 파당이 심각했지요. 또한 십자가에 대한 잘못된 오해를 가지고 있었고, 성령에 대한 무지와 공중예배와 우상의 제물문제, 그리고 법정의 송사문제, 근친상간의 윤리적인 문제, 도덕적인 태만과 결혼과 이혼문제 등 수많은 문제들로 복잡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지요. 한마디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교회였던 거예요. 아마 우리 시대의 교회 모습이 아닌가요? 솔직히 지상에 있는 모든 교회는 불완전한 교회입니다. 문제없는 교회가 없습니다. 만일 내가 속한교회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지상의 있는 모든 교회는 지금도 지어져가는 중이거든요(엡2:22). 그래서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거지요.
그런데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부활에 관한 문제였지요. 성경 어디에도 고린도전서15장같이 부활에 대해 자세히 다루는 곳은 없습니다. 이곳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성, 부활의 확실성, 부활의 의미와 본질, 부활의 결국까지 매우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부활신앙이 그만큼 큰 이슈였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헬라철학의 영향을 받아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고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부활에 대한 논쟁이 끊임없이 있었던 거지요. 부활은 인간의 논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부활을 믿든지 믿지 아니하든지 부활은 실재입니다.
(1) 부활은 반드시 있습니다(12-13절)
부활은 있습니다. 반드시 있습니다. 인간이 자기의 작은 머리만 가지고 부활의 유무를 논쟁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부활은 우리의 이성이나 지성으로 결정되어지는 것이 아니거든요.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에게 허락하신 하나님 사랑의 결정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의 작은 생각으로 논쟁하는 것은 미련한 것이지요. 한마디로 하나님의 위대한 선물 부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은 바보들의 논쟁에 불과할 뿐이에요. 감히 우리가 부활이 없다한들 부활이 없겠습니까?
성경에는 부활을 믿지 못하는 대표적으로 무식한 집단이 있었습니다. 사두개인들입니다. 그들은 영적존재에 대해서는 믿지 못하는 불신자 그룹이었지요. 인간의 합리적인 사고로 성경을 이해하려는 사람들이었지요. 그래서 부활도 믿지 못하고, 천사도 믿지 않으며, 영도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만 인정하는 불신자 그룹이었던 것이지요.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히11:1). 그러므로 보지 못하는 것을 믿지 못하는 믿음이 전혀 없는 자들이었던 셈이지요.
물론 오늘날도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느 시대나 엉뚱한 사람들은 항상 있었지요. 문제는 기독교 신앙을 가졌다는 사람들 속에 이런 자들이 부지기수라는 말이에요. 얼마나 불쌍합니까? 하나님이 있다하면 있는 것이고, 하나님이 없다면 없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알면 얼마나 압니까? 무엇을 압니까?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냥 알량한 지식을 가지고 자기 생각만 피력할 뿐입니다. 때로는 자기도 모르는 말들을 토해내며 살뿐이지요. 세상의 모든 지식이나 학문으로는 하늘의 신비로운 지혜를 깨달을 수 없지요.
하다못해 우주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한 개의 은하계 안에 보통 일천억 개의 별들이 있다합니다. 그런데 우주 안에는 그런 은하계가 일천억 개가 있다고 합니다. 감히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방대한 세계를 우리 인간이 무엇을 안다고 입방아를 찧을 수 있단 말입니까? 감히 하나님의 심오한 부활의 신비를 어떤 인간이 논쟁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엉뚱하게 튀는 발언으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켜보려는 불쌍한 영혼들의 잡소리에 불과할 뿐이에요.
그런데 지각이 없는 사람들은 죽은 소리에 민감해요. 얼마나 불쌍한지 모릅니다. 한번 여러분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여러분은 부활이 있다고 믿으십니까? 아니면 부활을 믿지 못하십니까? 여러분의 동의에 상관없이 부활은 있습니다. 우리 중에 부활을 믿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지라도 부활은 있습니다. 반드시 있습니다. 확실히 있습니다. 사실 부활을 믿는 것보다 부활이 없다는 것을 믿는 것이 훨씬 더 어렵습니다. 훨씬 더 힘든 일이에요. 분명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정한다는 것은 양심이 죽은 것이지요. 영혼이 죽은 거예요.
부활은 죽음 너머 저 세상에 영원한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시고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죽음 너머에 영원한 세계가 있다는 것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성경은 죽음은 끝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죽음을 '별세'라고도 말합니다. 별세는 이 세상과 이별하고 다음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음 세상이 있다는 말이지요. 바로 예수님이 부활을 통해 이 세상 이후에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부활의 능력이요, 소망입니다.
(2) 성경대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14-20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지내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떤 자들의 주장과 같이 영으로만 부활하지 않으셨어요. 분명히 예수님은 부활하신 육체를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내셨지요. 그러므로 예수님이 영으로만 부활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전혀 허무맹랑한 주장이요, 성경을 알지 못하는 궤변인 것이에요. 부활하신 주님은 당신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이것은 장차 믿는 자의 부활의 모습을 보여주시는 증거인 것이에요.
부활은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기독교는 이 세상으로 끝나는 종교가 아니라 영원한 세상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거듭남의 종교요, 영생의 종교입니다. 부활은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연결해주는 통로에요.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항상 부활 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부활은 현세의 믿음을 견고하게 해주고, 내세의 믿음을 공고히 해주거든요. 그래서 사단은 예나 지금이나 부활신앙을 방해하려고 발광을 하는 거예요. 지금도 부활의 믿음을 갖지 못하도록 훼방하지요. 부활을 희석시키려고 발광을 하는 거예요.
부활이 있다 없다는 논쟁으로부터 시작하여 부활을 의심하게 하고, 부활의 믿음을 갖지 못하게 합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원수마귀 악한 것을 이기시고 승리하사 부활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부활하셨습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 주님도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13절). 또한 우리 주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의 부활도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고, 우리가 지금까지 전한 복음이 헛된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14절). 그리고 우리의 믿음이나 복음이 헛것이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17절).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었다면 우리는 망하였을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은혜요, 능력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부활이 없다면 금생에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로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믿는 자는 주님의 부활에 참여한 자들이에요.
(3) 당신의 부활을 믿으십니까?
부활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생명의 부활이 있고, 심판의 부활이 있지요. 요한복음5장29절에는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믿는 자요, 악한 일을 행한 자는 불신자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부활은 신자의 부활이고, 심판의 부활은 불신자의 부활입니다. 그리고 신자의 부활은 영생의 부활이요, 불신자의 부활은 영벌의 부활인 것입니다. 이른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선한 일에 참여한 자는 영생을 얻기 위해 부활하고, 하나님의 선한 일에 참여하지 못한 악한 자들은 심판을 받기 위해 부활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부활은 믿는 자의 부활이요, 심판의 부활은 불신자의 부활입니다. 불신자도 심판을 받기 위해 부활합니다. 한마디로 불신자도 부활하여 심판을 받고, 영원한 지옥의 고통을 받으며 사는 겁니다. 하지만 믿는 자는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고, 우리 주님과 함께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되지요. 그러므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성도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부활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믿는 자의 부활은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부활입니다. 영생을 위한 부활이에요.
믿는 자나 불신자나 동일한 사실은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가장 공평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죽음에 대해 동의하는 것은 이미 모든 사람들을 통해 검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담 이후 모든 사람은 죽음을 통과했습니다. 심지어 우리와 같이 육신을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마저 죽음을 통과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세상 이후에 저 세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의 공통의 관심은 죽음 이후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과연 죽음 이후 저 세상이 있느냐는 것이지요.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 이후의 세상을 인정합니다. 비록 믿음이 없을지라도 나름대로는 죽음 이후 세상을 인정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 이후의 문제를 풀기 위해 종교를 만들고 신을 만들었던 것이지요. 한마디로 자기들이 만든 종교를 통해 저 영원한 세상에 들어가는 안전망을 구축하고, 종교적인 보험을 들려는 무지한 시도를 끊임없이 해오고 있는 거예요. 죽음 이후 저 세상에서의 안전보장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세상 어떤 사람도, 어떤 종교도, 어떤 신도 인간의 영원한 문제를 풀어줄 수 없습니다.
사실 모든 인간은 지푸라기 하나라도 붙잡으려는 종교성을 갖고 있지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이에요. 다만 영원을 주신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데 세상에서 찾으려고 하니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어떤 사람도 하나님을 떠나서는 영원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거예요. 이생이나 저 생이나 모든 세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주인도 하나님이시오, 저 세상의 주인도 하나님이십니다. 다만 이 세상의 삶을 가지고 저 세상의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문제나 저 세상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만 알고 계십니다. 당연히 문제의 해답도 하나님만 알고 계시지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해주셨고,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저 세상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거예요. 한마디로 이 세상의 문제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해결하시고, 저 세상의 문제는 예수님의 부활로 보증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보다 죽음 이후의 문제를 견고히 해주는 것은 없습니다. 부활보다 영원한 저 세상의 문제를 확고히 해주는 것은 없어요. 부활은 영원한 저 세상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부활의 믿음을 가진 자가 복된 자에요.
모든 사람들에게 죽음이 있듯이 죽음 이후에 반드시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모든 사람은 반드시 한번 죽고, 반드시 부활한다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믿는 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반드시 주님이 깨워 주실 것이니까요. 그래서 믿는 자는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드려야 합니다. 죽음을 통과하면 더 좋은 천국이 예비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있습니다. 반드시 있습니다. 우리는 그 부활을 믿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의 부활은 나를 위한 부활입니다. 나에게 영생을 주시는 부활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부활에 대해 의심하거나 불신하는 것은 자기 영혼을 저주하는 망령된 자입니다. 결코 우리 중에 아무도 부활의 믿음을 갖지 못하는 어리석은 영혼이 되지 말고 주님의 부활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역시 주님과 함께 부활할 것을 믿는 믿음을 가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는 영혼들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들입니다. 부활을 몰라서 믿지 못하는 불신자들이나 부활의 소식을 알고도 믿지 못하는 자들이나 모두가 다 불쌍하지요.
그러나 무엇보다 더 불쌍한 자들은 부활을 인정하는 것처럼 말하면서도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른바 믿음의 공동체 속에 살면서 부활을 듣고 노래하던 자들이 부활을 인정하지 못하고 믿지 못함은 가장 불쌍한 영혼들이에요. 여러분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십니까? 그분 안에 나의 부활이 있음을 믿으십니까? 오직 주님 안에 생명의 부활이 있음을 확실히 믿으십시오. 그 사람이 최고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합니다. 우리 주님의 부활은 나를 위한 부활입니다. 우리 모두를 위한 부활입니다. 그 부활을 믿는 자가 복됩니다.
만일에 부활이 없다면 우리 주님의 죽으심이 없었을 터이요, 주님의 죽음심이 없다면 부활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가장 불쌍한 자일 것입니다. 부활이 없는 믿음, 영생이 없는 믿음 모두다 헛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어 생명의 부활에 참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무엇보다 주님과 함께 천년왕국을 누리기 위해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그것은 오직 나를 위한 부활입니다. 부활의 믿음을 가진 자가 행복한 자입니다.
다만 부활을 믿는 것으로 만족하지 마시고, 온 누리에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부활의 증인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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