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지승람(與地勝覽) (족보에 기록된 해주최씨에 관계되는 내용을 기록하였슴.) |
해주목(海州牧) |
1.건치연혁(建置沿革=고을을 설치한 연혁) |
원래 고구려의 내미홀군(內未忽郡)인데, 지성(池城) 또는 장지(長池)라고도 하였다. |
신라 경덕왕(景德王)때는 폭지(瀑池)라고 고치어 불렀다. |
고려 태조(太祖)가 「고을 남쪽으로 큰 바다를 임하였다.」하여 지금의 해주(海州)로 고쳤다. |
성종(成宗) 초년에 목(牧)을 설치 하였다가 얼마안가서 절도사(節度使)를 두고 해주 우신책군(右神策 軍)이라하며, 양주(楊州)와 함께 경기(京畿)의 좌우 보(輔)로 삼았다. |
현종(顯宗)때 절도사를 폐지하고 네 도호부(都護府)의 하나로 정하여 안서 도호부(安西 都護府)라고 불렀다. |
예종(睿宗때에는 대도호부로 승격 하였다. |
고종(高宗)때에 다시 목(牧)으로 고쳤다가 공민(恭愍)왕 때에 왜놈들이 목사인 엄익겸을 죽여 고을 아전 가운데 목사를 구하지 않은 자들을 모두 목베어 죽이고 주(州)를 군(郡)으로 강등 하였다가 나중에 다시 목(牧)으로 복원 하였다. |
조선 태종(太宗) 17년 평산부의 서쪽지경을 나누어서 예속 하였으며, 세조(世祖)때에 진(鎭)을 설치 하였다. |
2, 관원(官員) |
관원은 목사(牧使), 판관(判官), 교수(敎授)를 각 1명씩 두었다. |
3, 군명(郡名) |
내미홀,지성,장지,폭지,대령(大寧),서해(西海),안서(安西),수양(首陽)이라고 하였는데 수나라 배구전 (裵矩傳)에는 고죽(孤竹)이라고 하여 「고려는 원래 고죽국 이라 하였다.」고 씌어 있는데 이첨(李詹)이 말하기를 「지금의 해주이다.」라고 하였다. |
그를 근거로 하는 문헌은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 「연평부 서쪽 15리에 고죽국 임금을 봉한 땅이 있다.」 |
하였으며, 또 「해주성 서북쪽에 고죽국 세 임금의 묘가 잇고, 백이(伯夷),숙제(叔齊)의 사당이 있으니 이것이 고죽국인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배구는 아마도 백이(伯夷),숙제(叔齊)가 동이(東 夷)사람이라고 하여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닌가. 이첨이 해주를 고죽이라고 한 것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말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
4,지방(地方) |
동쪽으로 평산부(平山府) 경계까지 69리, 용매량(龍妹梁)까지 95리 이다. |
남쪽으로는 강령현(康翎縣) 경계까지 49리, 서쪽으로 옹진현(甕津縣)경계까지 94리, 장연현(長淵縣)경계까지 92리이다. 북쪽으로는 신천군(信川郡)경계까지56리, 재령군(載寧郡) 경계까지 41리 이다. |
서울 까지의 거리는 365리 이다. |
5,읍성(邑姓)= 읍에 거주하는 성씨(현재 본관). |
최(崔), 정(鄭), 오(吳), 민(閔), 림(林), 문(文), 경(景), 임(任), 욱(郁), 송(宋)씨가 있다. |
여지승람(與地勝覽)에 나타난 해주최씨 인물 |
●최충(崔冲) |
고을 아전 온(溫= 해주최씨 시조)의 아들인데, 풍모가 훌륭하고 지조가 굳었으며,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글을 잘 지었다. |
목종(穆宗)때 갑과(甲科)에 제 1등으로 급제하였으며, 벼슬은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수태사 겸 문하시중(守太師 兼 門下侍中) 상주국내사령(上柱國內史令)에 올랐고, 시호(諡號)는 문헌(文憲)이다. |
정종(靖宗) 묘정에 배향 되었다. |
「개성부(開城府) 고적(古跡)」조(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
고려 현종 이후에 병란이 겨우 그쳤지만 아직 문교(文敎)를 펼 겨를이 없었다. |
이 때에 문헌공 최충이 후진들을 불러보아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
드디어 자하동(紫霞洞)에 구재(九齎)를 베풀었다. |
구재(九齎)란 낙성재(樂聖齎),대중재(大中齎),성명재(誠明齎),경업재(敬業齎),조도재(造道齎),솔성재(率性齎),진덕재(進德齎),태화재(太和齎),대빙재(待聘齎)이다. |
이를 시중(侍中) 최공도(崔公徒)라고 하는데, 과거시험을 보러가는자는 반드시 최공도에 들어가서 배우게 되었다. |
최충이 죽은뒤에도 과거시험을 보는자는 모두 구재(九齎)의 학적에 이름이 올려져 있어야 했으니, 이들을 문헌공도(文憲公徒)라고 불렀다. 세상에 12도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최충도(崔冲徒)가 가장 성하였다. |
우리나라에서 학교가 세워진 것이 대개 문헌공에서 시작되었으므로 이때 공(公)을 해동공자(海東孔子)라고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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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유선(崔惟善) |
충(冲)의 아들이다. |
현종 때 을과(乙科)에서 제1등으로 급제하고 벼슬이 중서령(中書令)에 이르렀다. |
시호는 문화(文和)이며, 문종(文宗)에 묘정에 배향 되었다. |
아버지 문헌공은 나이가 많은 뒤에도 병이 없었다. |
임금이 나라의 원로들을 잔치할 때마다 두 아들(유선,유길)이 아버지 문헌공을 부축하여 들어가자 당시 사람들은 |
모두 성사(盛事)라고 하였다. |
한림학사 김행경(金行瓊)이 「상서령이 중서령을 모시고 을장원이 갑장원을 부축 하였네.」라고 시(詩)를 지어 축하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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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유길(崔惟吉) |
충(冲)의 둘째 아들이다. |
덕종 2년 을유(乙酉=1033)에 을과(乙科)에 장원급제 하였으며, 벼슬은 수사공섭 상서령(守司空攝尙書令)이다. |
여지승람에는 형 최유선(崔惟善)의 기록에서 볼 수 있으며. 고려사에서 그 기록이 나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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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사제(崔思齊) |
최유선(崔惟善)의 아들이다. |
문종 때 과거에 급제 하였다. |
벼슬은 문하시랑 판이부사(門下侍郞 判吏府事)에 이르렀으며, 시호(諡號)는 양평(良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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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사추(崔思諏) |
충(冲)의 손자이다.(최유길의 아들) |
문종 때 과거에 급제 하였다. |
명문가의 자손으로서 배운 것도 넓고, 들은 것도 많다고 하여 임금이 내시성(內侍省)으로 불러 들였다. |
숙종 때 문하시중(門下侍仲)에 임명 되었다. 벼슬이 수태사중서령(守太師中書令)까지 이르렀다. |
부지런 하고 조심하였으며, 공정하고 청렴하였다. |
자기의 문벌과 지위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교만하지 않았으며, 조정에서 40여년간을 벼슬 하면서도 조그마한 잘못 없었다. |
정승이 되어서는 대체(大體)를 보존하는데 힘썼으며, 옛 제도를 경솔하게 고치지 않았다. |
문인이나 자제 가운데 자기를 찾아놔서 뵙는 사람이 있으면, 언제나 임금을 섬기는 도리를 교훈 하였다 |
사사로운 일은 말하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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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약(崔瀹) |
최사제(崔思齊)의 아들이다. |
예종 때 과거에 급제 하였다. 벼슬이 예부상서 한림학사(禮部尙書)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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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사량(崔思諒) |
나이 열 여덟에 과거에 급제 하였다. 최유길(崔惟吉)의 아들이며, 문헌공의 손자이다. |
문종 때 공부시랑(工部侍郞)을 지냈으며, 벼슬이 검교태사(檢校太師)에 이르렀다. |
좌복야(左僕射)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승진하였다. 몸가짐과 외모가 단호하여 조용하고 말이 적었다. |
국권을 잡고 문형(文衡)을 주관하여 명망이 당시에 상당히 중하였다. |
시호는 강경(康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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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의(崔允儀) |
문헌공의 현손(玄孫=5대 손)이며, 최약(崔瀹)의 아들이다. |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문하시랑 평장사 판이부사(門下侍郞 平章事 判吏府事)에 이르렀다. |
문벌이 높은 집안에서 성장하여 화려하고도 중요한 관직을 역임 하였는데 일을 논의할 때마다 사리가 명백하고 뜻이 강개 하였다. |
이부(吏部)의 관리 임무를 맡았을 때도 공평하고 정당 하였다. |
두 번이나 지공거(知貢擧=과거 시험관)가 되어 과거시험을 감독 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은 「잘 뽑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
「고금상정례(古今詳定禮)」라는 책을 50권 편찬 하였다. |
의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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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자(崔滋) |
충(冲)의 후손이다. |
젊었을 때 공부에 힘썼으며, 글을 잘 지었다. |
강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수태사 문하시랑 판이부사(守太師 門下侍郞 判吏府事)에 이르렀다. |
시호(諡號)는 문청(文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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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유엄(崔有渰) |
최자(崔滋)의 아들이다. |
천성이 청렴하여 벼슬을 구하지 못했다. |
10년동안 승진을 하지 못하였는데, 충렬왕이 오랫동안 그 이름을 들었으므로 여러차례 승진 시켜서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에 이르렀다. |
이때 원나라 황제가 우리나라의 신하가운데 어진사람을 보내라 하여 유엄이 왕의 명에 따라 원나라에 갔다. |
원나라에서 우리나라에 성(省)을 설치하고 세록(世祿), 노비의 법을 혁파하려고하자 유엄이 힘써 청원하여 그 계획을 그치게 하였다. |
유엄이 고려로 돌아오자 나라 안사람들이 손을들어 이마에 얹고 울면서 말하기를 「우리 삼한을 보존하신 최시중(崔侍中)이다.」하였다. |
벼슬이 정승에 오르고 다섯 임금을 내리 섬겨서 나라의 원로가 되자 조정이나 민간에서 모두 의지하며 중하게 여겼다. |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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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춘명(崔椿命) |
충(冲)의 후손이다. |
성품이 너그럽고 부드러우면서도 절조가 있었다. |
고종때에 자주부사레 임명 되었는데 벼슬이 추밀원부사(樞密院府使)에 이르렀다. |
●최홍윤(崔洪胤) |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문하시란 평장사 수무전대제학(修文殿大提學)에 이르렀다. |
시호는 경문(景文)이다. 사마시험을 개설하여 네차례나 고시를 맡았다. |
그가 뽑은 사람들은 모두 이름이 알려진 사람인데 경상(卿相)에 오른 사람도 많았다. |
세상에서 옥순문생(玉筍文生)이라고 불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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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함(崔함) |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중서시랑 평장사에 이르렀다. |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
●최만리(崔萬理) |
두차례나 과거에 급제하고 뽀혀서 집현전에 들어갔다. 벼슬이 강원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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