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영휘원(永徽園)과 숭인원(崇仁園)
< 서울 동대문구 홍릉로 90 >
2026.7.23(목) 조선왕릉 유네스코 문화유산 경종과 계비 선의왕후 무덤인 의릉 탐방에 이어 영휘원과 숭인원을 찾는다(17:10~17:30)
서울특별시 동대문구에 위치한 대한제국 황실의 무덤군(群)이다.
고종의 후궁이자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황귀비 엄씨의 무덤인 영휘원(永徽園)과
영친왕의 장남 이진의 무덤인 숭인원(崇仁園)이 자리하고 있다.
원래 이곳은 명성황후의 능인 홍릉(洪陵)의 두 번째 장지였다.
처음 명성황후의 능은 현종과 명성황후의 능인 숭릉 근처에 있었는데 1897년 10월에 이곳으로 이장했다.
그러나 1900년 고종의 명령으로 또다시 이장이 결정되며 공사가 시작되었고
그 와중에 1911년 순헌황귀비 엄씨가 사망하여 이곳에 안장되며 잠시 홍릉과 영휘원이 함께하게 되었다.
이후 1919년 고종이 사망하자 남양주시 금곡동에 마련한 자리에 두 사람을 합장하며 영휘원만 남게 되었다.
이후 1922년 영친왕의 장남 이진이 사망하고 할머니 옆에 안장되며 지금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1991년 대한민국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현재는 국가유산청 조선왕릉중부지구관리소에서 관리하고 있다.
지정면적 5만 5015㎡. 한 묘역 안에 영휘원과 숭인원이 있다.
서울 영휘원과 숭인원 및 주차장 이용안내도
영휘원과 숭인원 매표소
입장료 1,000원(65세 이상 경로 무료)
숭인원 안내도
숭인원의 홍살문, 정자각, 비각
숭인원 향로 옆의 판위(版位)
숭인원의 신도(神道)와 어도(御道)
숭인원의 비각
비각 안에는 1개의 표석이 세워져 있다. 표석에는 '원손 숭인원(元孫 崇仁園)'이라는 글씨가 전서체로 음각되어 있다.
태어날 때부터 망국의 황손이었던 데다 불과 7개월 만에 요절했던 탓인지 표석에 적힌 글도 단순하고 내용도 빈약하다.
뒤편에는 생년월일과 이름 등이 적혀있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해당 부분이 훼손되어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다.
비각안 비석에는 원손 숭인원(元孫 崇仁園)이라고만 음각되어 있다.
숭인원 전경
봉분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였고, 문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호 1쌍을 배치하였다.
전체적인 모습은 영휘원과 비슷하지만 봉분과 석물의 크기는 영휘원에 비해 작다.
조선왕릉의 석물들을 보면 요절한 인물의 능(陵), 원(園)일수록 석물의 크기가 작고
더욱 해학적으로 표현되는 경향이 보이는데, 숭인원의 석물은 유독 그러한 경향이 강하다.
특이하게도 정자각 앞에 향로만 마련되어 있고 어로가 없다.
할머니의 무덤인 영휘원의 정자각과 비교하면 더욱 두드러지는 차이점이다.
묘에는 호석(護石)이 없고 양(羊)도 없는듯하다.
숭인원은 영친왕과 이방자(李方子) 사이에서 태어난 진(晋)의 원소(園所: 왕가 산소의 다른 이름)이다.
영휘원과 비슷하나 봉분과 석물의 크기는 작게 조성되었다.
의민황태자와 황태자비 이방자의 첫째아들로 일본에서 태어났다.
1922년 황테자와 함께 귀국하였으나 일본으로 돌아가기 하루 전 덕수궁 석조전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순종은 원손의 죽음을 슬퍼하여 장례를 후하게 치르게 하고 현재의 자리에 숭인원(崇仁園)이란 이름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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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휘원과 숭인원 사이에 있는 영천(靈泉)
임금에게 올릴 물을 긷는 우물(어정)
영휘원 안내도
영휘원의 홍살문, 정자각, 비각
영휘원의 홍살문 옆에 판위(版位)는 없다.
영휘원(永徽園)의 신도(神道)와 어도(御道)
영휘원 기신제 진설도
영휘원 전경
영휘원은 조선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사친(私親)인 순헌황귀비 엄씨의 원소이다.
순헌황귀비는 증찬성 진삼(鎭三)의 딸로 1854년(철종 5) 태어나 1859년에 입궁해
민비가 을미사변으로 시해당하자 아관파천(俄館播遷)때 고종을 시봉(侍奉)하였으며, 1897년 영왕을 낳고 1903년 황귀비로 책봉되었다.
엄귀비는 양정의숙,진명여학교,명신여학교(현 숙명여대)의 설립에 참여하는 등 근대 여성교육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1911년 순헌황귀비 엄씨가 장티푸스로 사망하자
명성황후의 홍릉이 있던 지금의 자리 근처에 장지를 마련하고 원호(園號)를 영휘라고 하였으며
위패는 덕수궁 영복당(永福堂)에 봉안되었다가 경복궁 서북 측에 있는 칠궁(七宮)으로 이안(移安)되었다.
이후 1919년 홍릉이 남양주시 금곡동으로 이장하며 지금의 모습이 갖춰졌다.
영휘원은 조선시대 왕의 생모의 무덤을 조성하는 제도인 궁원제에 따라 조성되었다.
봉분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고 호석(護石)만 둘렀고, 문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각 1쌍을 배치하였다.
비각에는 표석이 1개 세워져 있다. 표석에는 '순헌귀비 영휘원(純獻貴妃 永徽園)'이라는 명문이 전서체로 음각되어 있다.
표석을 자세히 살펴보면 망국의 아픔이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인 조선왕릉의 표석에는 서두에 조선국(朝鮮國) 혹은 대한(大韓)이라는 국호를 기재하나
순헌황귀비가 사망한 이후 영휘원이 조성된 시점은 경술국치 이후인 1911년이었기 때문에 국호가 따로 적혀있지 않다.
대신 표석 뒤편에 사망할 당시 일본 천황의 연호가 새겨졌는데 이는 광복 이후 지워졌다.
또한 표석에 순헌황귀비가 아닌 순헌귀비라고만 적혀있는데
이 역시 경술국치 이후 대한제국 황실이 이왕가로 격하되면서 호칭 역시 전부 제후국의 것으로 바뀌며 빠진 것이다.
표석 순헌황귀비 영휘원
재실과 전시실
원래 陵의 제실은 능앞에 있는데 이곳은 안쪽 깊숙한 곳에 있다.
재실은 목욕재계하고 제사를 준비하던 건물이다.
조선 마지막 국모인 순헌황귀비의 재실(齋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