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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찾아서
이 순 원
“그럼, 지금 나보고 봉평에 가달라는 겁니까?”
통화 중간 나는 나도 모르게 왠지 화가 나 있었다. 전혀 화를 낼 일이 아닌 데도 그랬다.
“꼭 가셔야 되는 건 아니고요. 안 가시고도 쓰실 수 있으면 그렇게 하셔도 됩니다. 안 가셔도 2박 3일간의 취재비와 취재 수당은 저희가 따로 드리고요.”
그러니까 저쪽 편집자의 말은 웬만하면 거절하지 말고 꼭 좀 써달라는 뜻일 것이다. 어떤 일이든 내가 하기 싫으면 그만이긴 하지만, 사실 그런 조건으로 쓰는 원고라면 이제까지 내가 받은 어떤 사보*들의 청탁보다 좋은 조건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처음부터 그 일을 하지 않을 핑계를 찾고 있었다. 아마 며칠 전에 꾼 말 꿈 때문일 것이다. 그때 본 말이 아직도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 회사는 돈이 그렇게 많습니까? 가지 않은 여행비까지도 주고.”
이번에도 내 말은 가시를 달고 나갔다.
“그런 게 아니라 처음 그런 기획을 할 때부터 책정해놓은 경비니까 저희들로선 그렇게 드려도 문제가 없다는 뜻입니다. 선생님께서 좋은 원고만 주시면…….”
“그러니까 거기 나오는 노샌지 나귀 얘긴지만 확실하게 써달라?”
“예, 독자들이 작품과 작품 배경을 이해하기 쉽게 작품 얘기 반, 작품 무대 얘기 반, 그런 식으로요.”
“그렇다면 다른 사람 찾아보지 그래요. 나는 안 가보고도 쓸 수 있을 만큼 봉평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그걸 쓰자고 지금 거기 다녀올 시간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니까.”
“저희들은 선생님이 가장 적임자라고 생각해서 전화를 드린 건데. 고향도 그쪽이고 해서…….”
“적임자가 따로 있겠소? 가서 보고 쓰면 그게 적임잔 게지.”
나는 저쪽에서 무어라고 더 말을 하기 전에 서둘러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러나 사실 봉평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 가슴속에 묻어두고 있는 이야기가 많았다. 어린 날 보았던 봉평 장터에 대해서도 그렇고, 「메밀꽃 필 무렵」 속의 허 생원과 그의 나귀, 또 그들이 걸었던 봉평에서 대화로 가는 80리(그러나 실제로는 60리밖에 되지 않는) 산길과 그 길 옆에 끝없이 펼쳐져 있던 메밀밭에 대해서도 그랬다. 다만 내가 지금 그 얘기를 하고 싶지 않은 것뿐이었다. 그 얘기를 하자면 나는 어쩔 수 없이 작품 속의 나귀가 아닌 또 다른 나귀와 아부제 (양아버지) 얘기를 해야 할 것이다.
“어디 전환데 그렇게 받아요?”
전화를 끊고 나자 옆에 섰던 아내가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긴요? 원고 청탁 전화 같던데……”
“원고 청탁 전화면 왜?”
“전화를 그런 식으로 받으니 그러지요. 애써 전화한 사람 무안하게……”
“말 얘기를 해달라니까 그렇지. 정초부터 말 꿈을 꾼 것도 부족해 말 얘기를 해달라고…….”
“작품 여행 얘기가 아니고요?”
“그 얘기가 그 얘기지. 「메밀꽃 필 무렵」에 말 얘기가 안 나와? 나귀 얘기가 말 얘긴 거지.”
“이제 그만 생각해요. 나쁜 꿈도 아니 라면서……”
“그래도 내가 언짢으니까 그렇지.”
며칠 동안 말 꿈으로 내가 신경을 쓰는 걸 보아서인지 아내도 더 이상 뭐라고 말하지 않았다.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아내도 지지 않고 그 속에 나귀 얘기가 나오긴 하지만 「메밀꽃 필 무렵」을 어떻게 말 얘기라고만 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중요한 건 그게 말 얘기든 나귀 얘기든 지금 내가 그 원고를 쓰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정초에 그런 꿈까지 꾼 다음 또 다른 나귀 얘기와 어린 날 아부제를 찾아 봉평에 갔던 얘기를……
그 꿈을 꾸었던 것은 연말에 아이들을 강릉에 보내고 아내와 함께 모처럼 여행을 떠나 철원에 갔을 때였다. 한 해가 가는 마지막 날이었던 그날 우리는 이제 막 얼어붙기 시작하는 삼부연폭포와 한때 임꺽정이 은신하고 있었다는 고석정. 김시습이 누각을 짓고 자신의 호를 따 이름 붙였다는 매월대, 철원옵 홍원리의 궁예성지 등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아무리 피곤하기도 하고 또 밖에 나와 자는 잠이라도 그렇지, 어쩌다가 새해 첫날 그런 꿈을 꾸었는지 모르겠다. 꿈에서 본 말은 내가 잠을 깬 다음에도 여전히 히히힝, 소리를 지르면서 달려와 앞발을 쳐들고 겅중겅죽 뛰듯 내 주위를 맴돌았다. 새해 첫 꿈으로 말 꿈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왠지 언짢은 기분부터 들었다. 차라리 나귀거나 노새였다면 또 모르겠다. 그랬다면 나도 어린 시절 늘 그걸 보고 자랐으니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다른 데까지 연결시켜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틀림없는 말이었다. 다리가 내 가슴 높이까지 오고, 앞발을 쳐들고 이리저리 겅중겅중 띌 때 한 뼘 반도 넘는 길이로 휘날리던 검은 갈기도 나귀나 노새의 꼇이 아니라 말의 것이 틀림없었다. 말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나귀와 노새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 잘 아는 내가 그게 말인지 아니면 나귀거나 노샌지 구분 못할 까닭이 없었다. 그놈이 등에 갖춘 안장과 고삐두 없이 자르르 윤기 흐르는 붉은 맨몸으로 내게 다가와 무어라고 히히힝, 소리를 지르듯 주위를 맴돌던 중 잠을 깨고 만 것이었다. 그런 모습이 내게 우호적이었던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머리로 나를 떠받을 만큼 성이 나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냥 그놈은 저만큼 멀리 들판에서 내게로 뛰어왔고, 뛰어와선 이리저리 갈기를 휘두로며 내 주위를 겅중거렸던 것 이다.
그놈인가……
나는 누운 채로 위로 손을 더듬어 머리맡에 둔 담배를 꺼내 물었다. 나로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본 적이 없는데도 껄끄럽게 짐작이 가는 한 놈이 있었다.
“일어났어요?”
아내는 아직 잠결에 물었다.
“응―.“
“몇 신데 벌써 일어나서 그래요?”
아내도 머리맡으로 손을 올려 시계를 더듬었다.
“다섯 시잖아요. 더 자지 않고…….”
“이상한 꿈을 꿨어 .”
“어떤 꿈인데요?”
“말 꿈…….”
“그럼 나쁜 꿈도 아니네요 뭐. 난 또…….”
아내는 다시 잠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그때부터 아내가 다시 깨어날 때까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눈을 감아도 눈을 뜬 것처럼 그놈이 나타나고, 그래서 눈을 뜨면 이번엔 눈을 감았을 때처럼 머릿속에 그놈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혹시 궁예가 타던 말이 당신에게로 온 것 아니에요? 어제 당신 궁예성지를 둘러보며 연신 아쉬워하더니……”
아침에 일어나서도 내가 계속 말 꿈에 신경 쓰자 아내가 말했다.
“아니야, 그런 말이.”
“당신이 어떻게 알아요? 그 말이 맞는지 아닌지.”
“봤으니까 알지.”
내가 생각하는 건 아까 꿈에서 막 깨어났을 때의 생각대로 내 의식 한구석에 껄끄럽게 남아 있는 바로 그 말이었다. 철원평야와 그곳 풍천원 도성터를 달리던 궁예의 말이 아니라 꿈에서 본 것 말고는 달리 직접 눈으로 본 적도 없고 출신도 모르는 일본 오사카 어느 교외의 후미진 마구간에서 자라 소나 양처럼 죽어 우리 곁으로 왔던……
그러나 그 이야기를 아내에게 하지 않은 채 여전히 찜찜한 마음으로 학저수지와 그곳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도피안사, 철원 토성을 둘러보는 듯 마는 듯 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혹시, 꿈에서 본 것처럼 갑자기 헛것이 보이듯 말이 내가 운전하는 자동차 앞에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싶어 그곳을 돌아다닐 때에도 그랬고, 서울로 돌아올 때에도 나는 나보다 한참 운전이 미숙한 아내에게 키를 내주었다.
“왜 그래요? 자꾸…….”
집에 도착해서도 자꾸 먼 산을 바라보듯 꿈에 본 말 생각을 하자 아내가 말했다.
“모르겠어. 새해 첫날 말 꿈을 꾸었다는 게 영 기분이 좋지 않아서 그래.”
“말 꿈이 나쁜 것도 아니잖아요. 우리가 그냥 생각해봐도…….”
“그런데도 나한테는 자꾸 언짢은 생각이 드니 그렇지.”
“그럼 물어봐요. 그런 국이 좋은 꿈인지 나쁜 꿈인지.”
“누구한테?”
“누구긴요? 강릉 어른들한테 물어보면 알겠죠.”
“강릉 어른?”
그렇게 되묻다가 나는 아버지의 얼굴보다 아부제의 얼굴을 먼저 떠올렸다. 다른 건 아버지가 더 많이 알지 몰라도 말에 대해서라면 아부제가 더 많이 알고 있을 것이었다.
“아이들이 지금 어디 있는지도 물어보고요. 위에 있는지 아래에 있는지.”
전화기의 번호판을 누를 때 다시 아내가 말했다.
“여보시오.”
아부제였다.
“아부제?”
“어, 그래. 서울이나?”
“예.”
“서울이야?”
“예.”
아부제가 먼저 서울이나? 한 것은 전화를 거는 사람이 나냐고 묻는 말이었고, 나중에 서울이야? 하고 물은 것은 지금 전화를 거는 곳이 집이냐는 뜻이었다.
“어제 어데 갔다가 완?”
“예, 어디 좀 둘러볼 데가 있어서요.”
“그런 걸 전화를 하니 자꾸 다른 여자가 받지. 에미 목소리도 아니구.”
“다른 여자가 아니고 전화기가 그러는 거예요. 집 비울 때 거기 얘기할 게 있으면 하시라고.”
“그건 아는데 목소리가 다루니 난 다른 여자가 느 집에서 전화를 받는가 하고…… 그래서 잘못 걸어 그렇나 해서 또 걸으니까 같은 목소리 잔.”
다른 때 외출할 때면 보통 내 목소리를 녹음해두거나 아내 목소리를 녹음해두곤 했다. 그런 걸 엊그제 철원에 갈 때 전화기 안에 내장되어 있는 기계음으로 자동응답 버튼을 눌러놓고 간 것이었다.
“요즘 아부제는 어디 편찮으신 데 없지요?”
“없어. 하는 일도 없이 노는 기 뭐 펜찮을 데가 어데 인? 그래 전화는 왜?”
“아부제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구요.”
“새해는 무슨, 이제 개설 지난 걸 가지구.”
“그래도요. 어머니도 건강하시구요.”
“그래. 우리야 늘 조심하지 뭐. 어멈도 자나깨나 느 걱정 말고는.”
“그런데 아부제.”
“어.”
“꿈에 말을 보면 어때요?”
“니가 말을 봤더나?”
“예. 전에 집에 있던 그런 말이 아니고 큰 말요. 사람이 타고 댕기는……”
“좋은 거다, 그거. 뭐 좋은 일이 있을라는 모냥인데, 니한테.”
“말이 내 앞으로 뛰어와 자꾸 겅중겅중 뛰더라구요.”
“타라고는 안 하고?”
“그러지는 않는데 내 주위를 빙빙 돌면서요.”
“그랬으믄 더 좋았을 거르. 니를 떠받거나 해코지는 안 하구?”
“예.”
“그럼, 그것두 좋은 거야. 말을 봤으믄. 느는 양력으로 세월 가는 걸 아니까 정초 꿈이래도 괜찮구.”
“애들은 지금 어디 있어요?”
“점심 먹고 나서 위에 올라갔잔. 즈 사촌들이 시내서 올라오니 모두 어울레서. 오던 날은 위에서 자고 어제는 여기서 즈 할미하고 자고.”
“인사만 하고 내려와 자라고 그러지 그러셨어요. 어제는 올라가 자더라도 오던 첫날은.”
“나두어. 게서 자믄 어때서. 즈 애비 생가 댁에서 자는 건데.”
내가 아이들의 잠자리를 첫날과 둘째 날을 분별해 말하자 아부제는 금방 마음이 뿌듯해오는 모양이었다. 한결 푸근해진 목소리로 위에는 전화를 했더나? 하고 물을 때 아뇨, 이제 해봐야죠, 하고 대답하자 표현을 하지 않아도 그 뿌듯함은 전화선을 타고 이쪽으로 와 거실 전체를 가득 채우는 듯했다.
“그럼 위에도 얼른 전화를 하잖구.”
“예. 그런데 아부제.”
“어.”
“말고기를 입에 대는 건 어때요?”
“꿈에 말이나?”
“꿈이라도 그렇고, 생시라도 그렇고요.”
“그런 꿈 꿨더나?”
“아뇨, 그런 꿈을 꾼 건 아니고요.”
“괜찮아, 것두. 꿈이라도 괜찮구 생시라도 괜찮구. 나야 그 짐승 부렸으니까 안 그랬지만 사람이 개고기는 안 먹든? 뭐든 없어서 못 먹는 거지 일부러 가릴 건 없어.”
“그런 꿈 꾸고 나니 왠지 기분이 좀 그래서요.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말이 겅중겅중 뛰면서 자꾸 빙빙 돌던 게·……”
“좋은 거랄수록. 타라고는 안 해두 니한테로 와서 겅중겅중 뛰고 했다믄. 니가 평소 말한테 해코지한 일도 없을 테구. 하기야 요즘은 뭐 그러고 싶어두 그럴 말이라도 인?”
“그럼, 해코지한 다음 그런 꿈을 꾸면요?”
“그기사 좋을 게 없겠지만서두. 사람이나 짐승이나 해코지한 다음 다시 본다믄 아무래두 그렇지 않겐?”
“예에.”
“괜찮아, 니가 꾼 꿈은. 좋은 거니까 그렇게 알구 어여 끊구 위에 아버지 계신데 전화나 혀.”
“예.”
“애들한테두 즈 사촌들 와 있는데, 안 떨어지려구 하는 겉 괜히 억지루 여게 내려와 자라구 하지 말구, 게서 그냥 어울레 놀다 자게 두구.”
“예.”
“에미 몸은?”
“괜찮아요, 저흰.”
“그럼 끊어. 끊구 위에다 전화하구.”
나는 아부제의 전화를 끊고도 여전히 개운한 마음이 아니었다. 아니, 혹을 떼려다 혹 하나를 더 붙인 듯한 느낌이었다. 내가 그놈의 고기를 입에 댄 다음, 꿈에 나타나 내게 모습을 보인 거라면 아부제 말대로 그건 좋은 꿈일 수 없었다. 살아 있을 때 해코지를 한 것은 아니지만, 죽은 다음 고기를 입에 대고 나서 꿈에 그놈을 본 것이라면 살아 있을 때 해코지를 한 것이나 다를 게 없었다. 더구나 말을 끌던 아부제가 예전 유일하게 가리고 금기하던 고기가 그것 이었다. 그런 걸, 그러고 나면 내가 먼저 께름칙해지고 말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때 어떻게 그것을 입에 댔던 것인지 모르겠다. 그것도 익힌 것이 아닌 날 것을.
두 달쯤 전 일본에서 열린 어떤 문학 심푸지엄에 갔을 때였다. 어느 지방 소도시에서 나흘간의 공식 일정을 마치고 일행 모두 오사카로 왔다. 첫날은 버스 여행에 지쳐 방 배정을 받기 무섭게 잠을 자고, 아마 다음 날 저녁때였을 것이다. 호텔 뒤편에 작은 술집들이 많았다. 일행 중 다섯 명이 함께 갔는데, 처음엔 저마다 입맛에 따라 데운 청주나 맥주를 시키고 안주로는 메뉴판의 그림을 보고 꼬치 안주와 철판에 구운 해물 안주를 시켰다.
“그런데 저건 뭐지?”
한참 술을 마시던 중 누군가 내가 앉은 자리의 뒤쪽 벽에 붙어 있는 안주 이름을 가리켰다. 돌아보았을 때 내가 아는 글자는 거기에 씌어 있는 마(馬) 자 한 자뿐이었다.
“글쎄, 말고기라는 뜻인가.”
한자로 ‘馬’라고 쓴 아래 일본 글자 세 자가 더 붙어 있었다.
“가만있어 봐. 말 사시미……”
누군가 그 일본말을 읽었다.
“사시미라면 회를 말하는 거고, 그러덛 이거 말고기 생 거라는 얘기 아니야?”
“그래, 그럴지도 모르겠다. 쇠고기 육회처럼.”
“이야, 여기선 그런 것도 먹네. 정말 별걸 다 먹어.”
그러자 일행 중 제일 나이 든 선배가 사막 여행 때 낙타고기를 먹어봤다는 얘기를 했고, 그 얘기 끝에 사막 도마뱀 요리에 대해 말했다. 아니, 요리라는 말을 붙일 것도 없는 그냥 사막 도마뱀 얘기를 했다.
“느 그거 알아?”
“뭘요?”
“난 안 먹어봐 모르겠는데, 중동에 일꾼으로 나갔다가 들어온 노인네가 도마뱀 때문에 다시 중동에 나간 얘기 말이야.”
“그게 그렇게 맛있나. 한번 먹으면 다시 안 먹고 못 배길 만큼.”
“그게 아니고, 사막 도마뱀이 이거에 아주 최고라는 거야.”
선배는 탁자 위로 내민 팔뚝을 끄덕여 보였다. ˙
“그럼, 중동에서 돌아온 다음 양기가 떨어져서 다시 나간 모양이죠 뭐.”
“그러면 애초 얘기도 안 되는 거지.”
“그럼요?”
“거 왜 옛날 서울고 자리에 현대그룹 인력본부가 있었잖아. 중동으로 나가는 노무자들 뽑아서 교육하는 데 말이야. 거기서 어떤 사람이 실제로 들은 얘긴데, 지난번에도 중동에 나갔다 들어온 사람 둘이 거기서 다시 만났거든. 한 사람은 늙수구레하고 한 사람은 좀 젊고 말이지. 그래서 젊은 사람이 나이 든 사람한테 우리야 젊으니 돈 더 벌려고 나간다지만 당신은 이제 그만 쉬지 뭐 하러 나가냐니까 도마뱀 애기를 하더라는 거야. 말도 마라고, 마누라가 죽겠다고 떠밀어서 다시 나간다고 말이지.”
“마누라가 왜요? 그거 먹어 힘도 좋을 텐데.”
“좋아도 너무 좋아노니 탈인 거지. 이 사람이 먼저 나갔을 때 그게 좋다는 얘기를 듣고 틈날 때마다 거기서 그걸 잡아먹었거든. 그런데 거기선 그걸 써먹을 데가 없어서 몰랐는데 귀국해 들어와 마누라를 안아보니 대번에 효과가 나타나는 거라. 그러니 젊은 나이도 아니고 쉰이 훨씬 넘은 나이에 밤마다 해젖히니 동갑내기 마누라가 배겨나나. 마누라가 보기에 이게 중동에 나가 뭘 먹고 왔는지 사람이 아니라 완전히 짐승이거든. 그래서 남편한테 아주 대놓고 하소연했다는 거야. 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말이지 당신 하자는 대로 밤마다 그렇게 하다간 제명에 못 죽을 것 같으니 다시 거기 나가 뱀을 잡아먹든 뭐를 잡아먹든 더 늙은 다음에 들어오라고 말이지.”
“에이……”
“에이는 이 사람아, 남 힘들게 얘기하는데. 저 말 사시미라는 것도 좀 그런 게 있는지 몰라. 말도 이게 크잖아. 소보다는 덩치가 작아도 이거 크기는 몇 배로 더 크고 말이지.”
“그럼, 우리도 한번 시켜보죠 뭐.”
“그럴까?”
“그래요. 많이는 말고 하나만.”
도마뱀 얘기를 거치는 동안 조금 끈적해지기는 했지만 얘기는 다시 자연스럽게 말 사시미 쪽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래서라기보다는 처음부터 다들 말 사시미가 어떻게 생긴 것인지 궁금해하는 눈치들이었다. 나도 누군가 말 사시미라는 말을 읽어준 다음 그것이 어떻게 생긴 것이며 또 어떤 모습으로 나오는지 궁금했다. 그러면서 마음 한편으로는 어린 시절 집에서 키우던 말 생각으로 말 사시미라는 말만으로도 왠지 께름칙해지는 기분이었다.
“어이, 어이, 스미마센.*”
누군가 장난 반의 서툰 일본말로 40대 여자 종업원을 불러 ‘호스사시미’를 시켰다. 여자는 ‘호스’의 뜻을 못 알아듣다가 벽에 붙여놓은 안주 이름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고 나서야 하이, 하이, 하고 물러났다. 잠시 후 작은 접시에 나온 그 말 사시미는 마치 당근을 얇게 썬 것 같은 모습으로 길쭉한 다섯 장의 꽃잎 모양으로 놓여 나왔다. 색깔도 고기 결도 꼭 그런 모양으로 저며 내온 쇠고기 같았다.
“말고기라니 우리 생각에 좀 그렇게 보이는 거지 생긴 건 쇠고기하고 똑같네.”
나이 든 선배가 불빛에 이리저리 고기 접시를 비춰보며 말했다.
“그래서 옛날에 말고기를 쇠고기라고 속여 팔았다지 않습니까?”
그다음으로 나이 든 선배가 말했다. 두 사람 다 본인이 직접 말고기를 보거나 먹어본 적은 없지만 6·25 때만 해도 그걸 먹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어디 6·25 때뿐이겠는가. 나 역시 고기는 본 적이 없어도 그보다 썩 후에까지 아부제한테 말고기를 먹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은 적도 있고, 죽은 말고기를 가지러 집으로 온 사람들을 본 적이 있지만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럼 쇠고기가 말고기보다 비쌌던 모양이지? 살아 있는 건 말이 비싸도 말이지.”
“아무래도 그렇잖겠습니까? 맛이야 그게 그거라 해도 기분상 차이가 있는 거니까.”
“하긴……”
“그런데 이걸로 봐선 잘 모르겠는데, 사실 쇠고기와 비교했을 때 말고기가 더 삘겋답니다.”
그러면서 그 선배는 ‘사쿠라’에 대해서 말했다. 우리가 변절 정치인을 ‘사쿠라’라고 부르는 것이 사실은 벚꽃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말고기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이었다. 말고기가 쇠고기보다 붉고, 그래서 쇠고기라고 속여 파는 말고기를 ‘사쿠라’라고 부르고 변절 정치인을 가짜라는 뜻으로 그렇게 불렀던 것인데, 우리는 그 말이 당장 일본 국화 벚꽃을 가리키는 말이니까 거기에 친일파라는 뜻까지 넣어 변절 정치인을 그런 의미로 해석 해 부른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건 붉지 않고 좀 희끗희끗하네. 노새고긴가?”
“냉동했다가 얇게 썰어서 그런 모양이죠, 뭐.”
“니 이제 보니 많이 아네. 느 집 옛날에 노새 푸줏간 했나?”
그 말에 다들 웃었지만 나는 나를 보고 하는 말이 아닌데도 나에게 한 말을 못 들은 것처럼 시침을 떼느라 얼른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내 물었다.
“가마이 있어봐라. 칠백 엔이면 이거 우리 돈으로 만 원 넘는 거 아이가. 비싼 돈 주고 시켰으면 먹어야제. 우리가 다섯이고 이게 다섯이고, 그럼 딱 맞네. 한 앞에 하나썩.”
“그래요, 먹읍시다. 우리가 안 먹어봤던 거지 못 먹는 음식도 아니고……”
그래서 가장 용기 있는 한 사람이 먼저 젓가락을 가져가고, 그걸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뭐, 먹을 만하네, 하니까 또 한 사람이 나는 누가 먼저 젓가락만 대면 그게 지렁이라도 따라 대니까, 하면서 젓가락을 가져가고…… 그러다 끝에 한 점 남은 게 접시째로 내 앞으로 오게 된 것이었다.
“야, 이수호, 그래 빼지 말고 니도 함 먹어봐라.”
“좀 이따가요…….”
“먹어봐라. 먹고 죽는 거 아니니까.”
“그래, 이럴 때 먹는 거지, 언제 다시 우리가 말고기를 먹어볼 기회가 있겠다고.”
아마 공범자 의식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얼굴에 먼저 검정을 묻히고 나면 아직 안 묻히고 망설이는 사람에게 저절로 그런 채근을 하게 되듯 모두들 한마디씩 거들고 나섰다. 나는 젓가락만 접시 위로 가져갔다가 뺐다가 했다.
“하, 이제 보니 비위 되게 약하네. 니, 쇠고기 육회는 먹나?”
“그거야 이거하고 다르죠.”
“그러면 이거라고 못 먹을 게 어디 있나. 말고기 먹으면 안 될 내력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닐 테고.”
“내력이 어디 있습니까? 옛날부터 소 키우던 집 소 잡고. 말 키우던 집 말 잡는 거지.”
‘사쿠라’ 얘기를 하던 선배였다. 알고 한 말은 아닐 테지만 그 말이 무얼 알고 한 말인 것처럼 묘하게 가슴에 와 걸렸다. 남들처럼 일찍 젓가락을 가져가지 않아 그런 소리까지 듣고 보면 언제까지 같은 채근을 받으며 접시를 앞에 두고 앉아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걸 입에 대고 나면 한동안 께름칙한 기분에서 벗어나지 못할 걸 알면서도 당근을 썰어 만든 꽃잎 같은 그것을 젓가락으로 집은 다음 질끈 눈을 감고 입에 넣었다. 그리고 어금니 한번 눌러보지 않은 채 다른 손에 들고 있던 맥주로 그것을 삼켜버렸다.
“잘 먹네. 하나 더 시켜줄까?”
그때까지 나는 이제까지 마시던 맥주를 옆에 미뤄두고 그 집을 나올 때까지 연신 맥주잔에 ‘사케’라는 일본 소주를 부어 마셨다.
탈은 당장 다음 날 아침에 있었다. 새벽부터 속이 쓰리며 자꾸 헛구역질이 나던 것이다. 과음하긴 했지만 평소 경험했던 술탈과는 다른 무엇이 계속 속을 볶아대고 머릿속을 휘저어대고 있었다. 말이었다. 그날 관광 코스였던 나라(奈良) 지역이 대체 어느 나라 어느 지역에 붙어 있는 것인지 모를 정신으로 일행을 따라다녔다. 나라 공원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사슴 떼를 볼 때에도 말 생각이 났고, 그 사슴들에게 주는 전병* 모양의 사슴 과자를 볼 때에도 어제 먹은 말 사시미 생각에 속이 울렁거리고 거북했다.
서울로 돌아오면 나아지겠지 했지만 돌아와서도 기분은 여전히 그랬다. 처음보다 나아지기는 했지만 수시로 그 말 사시미가 나를 괴롭혔다. 식탁에 오른 쇠고기를 볼 때에도 그랬고, 얇게 썰어 구운 돼지고기를 볼 때에도 그랬다. 그렇다고 그걸 누구에게 이야기할 수토 없는 노릇이었다. 일본에 가서 말고기를 먹어 그게 가슴에 얹히고, 앞으로도 당분간 내 의식의 한끝을 껄끄럽게 지배할 것 같다고……
말 꿈도 아마 그래서 꾸었을 것이다. 꿈을 꾸다 깼을 땐 차라리 나귀거나 노새였다면 어린 시절 늘 그걸 보고 자랐으니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해 다른 데까지 그걸 연결시켜 생각하지 않았을 거라고 했지만, 일본에서 말고기를 먹은 일 없이 그런 꿈을 꾸었다 해도 나는 그 꿈을 좋은 꿈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말에 대해서 한 번토 좋은 생각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건 아부제 집에 양자로 들어가기 전부터 그랬다. 집에는 안 들어가 살고 어른들이 그냥 아부제의 양자 아들로만 정해놨을 때에도 내 별명은 이미 ‘노새집 양재’ 였다. 집 나간 아부제를 찾아 봉평에 다녀온 다음엔 밥도 거기서 먹고 잠도 거기서 자고 학교도 거기서 다니는 ‘노새집 아들’이 되었다. 그때까지는 아부제라고 부르지 않았다. 당숙*이라고 부르거나 아재라고 불렀다.
전화로 힘들게 거절했던 그 사보의 원고는 결국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먼저 전화를 했던 담당자가 다시 전화를 해서 잠깐만요 선생님, 우리 과장님 바꿔드릴게요, 하고 전화를 바꾼 사람이 예전 학교 다닐 때 같은 대학 교지 편집실에 있던 후배였다. 후배도 그냥 후배였던 것이 아니라 여름방학 동안 ‘한국의 장터를 찾아서’라는 기획기사를 취재하며 대화에서 봉평, 또 봉평에서 진부까지 「메밀꽃 필 무렵」 속의 무대를 함께 걸어 여행했던 친구였다. 1970년대 후반의 일이었다. 그때엔 허 생원처럼 나귀를 끌고 다니는 장돌뱅이*는 없었지만 젊은 날 벌어놓은 게 없어 조 선달처럼 등짐을 지고 이 버스 저 버스 눈총 받으며 옮겨 타고 다니는 나이 든 장돌뱅이들이 아직도 5일장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거긴 언제 갔는데? 그 회사에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지난 연말에 이쪽 부서로 자리를 옮겼어요.”
“그랬어?”:
“그러니까 내가 여기 있을 때 하나 써줘야지요. 내가 일부러 형한테 전화를 걸라고 시킨 건데. 우리 전에 그렇게 다니기도 했었고. 형, 그때도 그러지 않았나? 어릴 때에도 그 길 걸어봤다고. 나귀가 끄는 마차를 타고…….”
아마 이럴 때 쓰는 말이 빼도 박도 못한다는 말일 것이다.
“임마, 그럼 애초에 니가 전화를 했어야지.”
“놀라게 하려고 일부러 그랬지요. 오랜만에 전화를 하면서 원고 얘기를 하는 것도 좀 그렇고 해서…….”
“바빠, 요즘. 해야 할 일도 많고.”
“그래도 써요. 하루저녁이면 할 일을 가지고. 옛날 거기 취재 떠났던 일도 생각하면서. 그리고 원고 다 되면 나와서 저하고 소주도 한 잔 하고요. 원고 핑 계 삼아 술 한잔 하자는 얘기니까.”
그러니 무작정 거절할 수만도 없는 일이었다. 처음엔 몰라서 못 쓴다고 그랬지만, 후배의 전화까지 받으면서 더 어떻게 뻗댈 수가 없었다. 그 친구에게 꿈 얘기를 할 수도 없는 일이었고, 직접적이든 직접적이지 않든 말 얘기라면 그것과 연관되는 어떤 것도 지긋지긋하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날 저녁, 말고기를 맥주로 삼키듯 하기 싫은 일 차라리 단매*에 끝내고 말지 하는 생각으로 책상에 앉았다.
대관령 아래에서 태어나 대관령의 산그림자를 보고, 대관령의 물을 먹고 자라면서도 한 번 그 영을 넘어보지 못한 내가 처음 그 영을 넘었던 건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봉평우체국에 근무하는 친척 누이를 찾아서였다.
대관령 아래 면 소재지 마을까지 20리를 걸어 나가 강릉에서 올라오는 대화행 완행버스를 타고 면지 풀풀 날리는 아흔아홉 굽이 고갯길을 넘어 세 시간 반 만에 장평에 도착해 거기서 다시 차를 갈아타고 한 시간 만에 가 닿은 곳이 봉평이었다. 차를 탄 건 네 시간 반 동안이었지만, 차를 타기 위해 걸어 나온 시간, 차를 기다리던 시간, 또 차를 갈아탈 때 지체했던 시간 때문에 아침 일찍 나온 걸음이었는데도 오후 늦게야 그곳에 닿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때 너무 어려서 내가 처음 큰령을 넘어 찾아간 그곳 봉평이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의 실제 무대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건 그곳의 늦은 장 풍경과 누이를 따라 처음 들어가 본 ‘남포다방’의 풍경이다. 마침 가는 날이 장날이라 누이가 퇴근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그곳 장터의 난전*도 구경하고 나일론 양말과 나일론 옷들을 파는 포목전의 옷 가게들도 구경하고, 장터 곳곳에 매어져 있는 장돌뱅이들의 나귀도 구경하고, 어른들의 눈을 피해 그 나귀의 왕자표 노새 자지를 툭툭 건드리며 나귀를 못살게 구는 각다귀 떼들(장터 아이들)도 구경 했다. 그리고 누이가 퇴근한 다음 따라 들어가 본 ‘남포다방.’ 다방 이름이 ‘남포다방’이었던 것이 아니라 내가 중학교 1학년이던 1969년 때까지 봉평도 큰령 아래의 우리 마을과 마찬가지로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장터가 있는 면 소재지의 단 하나뿐인 그 다방도 그렇게 밤이면 남폿불*을 켜놓고, 작은 화덕에 숯불로 커피를 끓여 팔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아직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을 읽기도 전 그 소설의 무대를 거의 원형에 가깝게 보았던 셈이다. 작품이 쓰인 건 1936년의 일로 내가 본 것보다 30여 년 전의 일이었지만, 당시 강원도 내륙 지방의 사람살이와 도로 사정도 그렇고, 전기가 들어오지 않은 마을의 장터 풍경이란 그렇게 달라진 것이 없을 것이다. 아마 달라진 것이 있다면 숯불로 커피를 끓여 파는 다방이 들어서듯 허 생원과 조 선달이 피륙을 팔던 드팀전*이 그때 막 대중화되기 시작한 나일론 양말들과 나일론 옷들을 파는 포목전으로 바뀌듯 몇 가지의 물건들이 시절에 따라 좀 더 현대화된 것과, 또 생원이니 선달이니 하고 불리던 장돌뱅이들의 호칭이 허 씨, 조 씨 하고 불리던 것들일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등짐이 아니면 나귀에 물건을 싣고 이 장 저 장을 떠돌아다녔다. 하루에 고작 몇 행보씩 다니는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가 그들의 짐을 받아줄 턱이 없었다. 장터의 음식점이나 술집 이름들도 두세 개의 중국집을 빼면 여전히 ‘충주집’ ‘제천식당’이 아니면 ‘진부옥’ ‘강릉옥’ 들이란 간판을 반은 기와지붕, 반은 초가지붕 처마에 내걸고 있었다.
그러나 시작부터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그때 봉평우체국에 근무하는 친척 누이가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나는 그 누이를 찾아갔던 것이 아니라 몇 달째 집을 나가 있는 당숙을 찾아 봉평에 갔던 것이었다. 내 양아버지인 당숙은 그때 이미 나이가 마흔이 넘었는데도 밑에 아이가 없었다. 결혼한 지 15년이 넘는데도 당숙모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이었다. 유일하게 ‘애비’로 불리는 말이 있다면 그건 ‘노새 애비’라는 차라리 쌍욕보다 못한 호칭뿐이었다. 그때 당숙은 ‘은별’이라는 노새를 끌고 있었다. 붉은 기운이 도는 갈색 몸통에 정수리 한가운데만 별처럼 흰 털이 난 노새였다.
어른들 사이에 내가 작은집의 양자로 정해진 건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일이었다. 우리 집엔 아들 형제가 많았고, 그때 당숙모는 몸의 다른 곳이 아파 병원에 입원했다가 처음부터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아파서 그런 게 아니구 애초 둘치*라는구만. 당숙모가 없는 앞에서 어른들은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나는 둘치라는 말이 짐승에게 쓰는 말이 아니라 당숙모 같은 사람들에게 쓰는 말인 줄 알았다. 아마 어른들이 나를 일찍 작은집 양자로 정했던 건 이제 앞으로도 당숙모가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된 것을 알아서라기보다는 그때 당숙과 당숙모의 실의를 나를 양자로 삼아 메워주려는 배려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그것은 또한 내 문제이기도 한데 모든 일이 나 모르게 이루어진 것이었다. 나한테 묻지도 않았고, 얘기해주지도 않았다. 할아버지와 작은할아버지를 포함해 그냥 어른들이 일방적으로 그렇게 정한 것이었다. 나는 마을 사람들이 나를 ‘노새집 양재’라고 할 때야 비로소 어른들이 그 일 때문에 늘 사랑에 모였구나 하는 것을 알았다. 작은집으로 가는 양자니까 큰아들이 갈 수는 없고, 나머지 세 아들 가운데 하나를 지목하라니까 작은할아버지와 당숙이 셋째아들인 나를 지목한 것이었다.
“그럼 작은형을 보내지 왜 날 보내?”
당숙의 양자로 정해진 걸 알고 내가 처음 어머니에게 따진 말은 그것이었다.
“작은집에서 널 들이겠단다. 아버지 어머이가 너를 보내는 게 아니라 누구를 들이겠느냐니까.”
나를 달래기 위한 말이 아니라 실제로도 그랬을 것이다. 그때 작은 형은 중학교 3학년이어서 집안에 무슨 일이 있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았을 테고, 노새를 끄는 작은집 (아니, 노새를 끌지 않더라도)에 자기는 죽어도 양자로 가지 않을 거라고 분명하게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짐작하고 있는 작은집에서도 일을 껄끄럽게 처리하는 것보다는 부드럽게 처리하자는 뜻에서 아직 무얼 모를 것 같은 나를 지목했을 것이다. 또 나를 낳고 나서 그 사이에 여동생을 낳은 다음 낳은 막내는 아직 젖먹이나 다를 게 없어 작은할아버지나 당숙이 보기에도 어느 세월에 절 받고 잔 받을까 싶었을 것이다.
“나는 양재 안 가.”
“누가 지금 가서 살라나? 나중에 작은집 제사만 맡으면 되지.”
“그래도 안 가.”
그러나 그게 어디 내 마음대로 될 일이던가. 그해 가을 덜컥 작은할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나는 단박 새로 지어 입힌 베옷을 입고 불려나가 어린 상제 노릇을 해야 했다. 게다가 탈상* 전 일 년 동안 보름과 삭망* 아침마다 작은집에 불려가 작은할아버지 궤연*에 당숙과 함께 잔을 올리고 절을 하고 와야 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말끝마다 ‘양재 안 가’를 입에 달고 살았다. 그냥 양자도 싫고 서러웠지만 ‘노새집 양재’ 는 더더욱 싫고 부끄러웠다.
“나 양재 안 가니까 도로 물려.”
작은집에 불려 내려갔다 오는 날마다 나는 어머니에게 떼를 썼다.
“니가 몰라서 그렇지 작은집 살림이 어디 적은 살림인 줄 아나? 어여 그러고 가만있으면 나중에 그게 다 니 것이 되는데.”
“나 그런 거 안 가질 거니까 도로 물려 오란 말이야. 노새집 양재 안 할 거니까.”
“말은 뭐 아무나 끌고 부리는 줄 아나? 다 있고 부지런하니 그러지.”
“그럼, 소로 끌면 되잖아.”
내가 참을 수 없는 게 그것이었다. 마을에 우차*를 끄는 종기아버지조차 노새를 부르는 당숙을 노새, 노새, 하고 부르며 은근히 깔보고 우습게 아는 것이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은 오죽했겠는가. 농사만 지어도˙ 될 일을 당숙은 농사일은 거의 작은할아버지와 당숙모에게 맡기고 아침마다 노새를 끌고 시내(강릉)로 나갔다. 작은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에도 그런 출입은 여전해, 시내로 나가 벽돌을 실어 나르거나 국유림 쪽으로 들어가 산판*⁕의 나무를 실어 날랐다. 원래 천성이 부지런하긴 해도 작은집의 살림이 그렇게 불어난 것도 당숙이 말을 부려서라고 했다.
그런 당숙이 완전히 집 밖으로 돌기 시작한 건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의 일이었다. 밖에 일을 나가도 밤이면 꼬박꼬박 집으로 돌아오던 당숙이 어떤 때는 닷새고 열흘씩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거봐라. 니가 그러니까 더 집 밖으로 돌잖는가.”
어른들은 내가 정을 붙여주지 않아 그런다고 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었다. 아니, 더 그렇게 해주길 바랐다. 나는 여전히 ‘양재 안 가’를 입에 달고 살았고, 어떤 때는 아버지와 어머니, 당숙과 당숙모가 함께 있는 자리에서도 서슴없이 그 말을 해 갑자기 분위기를 낯설게 만들어놓기도 했다. 아버지 어머니가 아닌 다른 사람의 아들이 되는 것도 싫었지만 남들이 까닭 없이 깔보고 우습게 아는 노새집의 ‘노새 애비’ 아들이 되는 게 싫었다. 나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길을 가다가 마차를 끌고 가는 당숙을 만났을 때 노새가 왕자표 통고무신 같은 자지를 배 밖으로 덜렁대고 있으면 내가 다른 아이들 앞에 옷을 벗고 그렇게 서 있는 것처럼 부끄러웠다. 동네계집아이들이 그 옆을 지나기라도 하면 그만 학교에 다닐 마음조차 싹 가시고 마는 것이었다. 그래서 저만치서 노새가 보이면 늘 내가 먼저 그 자리를 피하곤 했다.
어른들은 내가 크면 낫겠지 했겠지만, 다음 해 중학교에 들어간 다음 나는 노새를 끄는 당숙을 더욱 견딜 수 없어 했다. 중학교 때부터는 가르치는 데 큰돈이 든다 해서 교복도 작은집에서 지어주었고, 학비도 작은집에서 가져오는 돈을 어머니가 내게 주었다. 어머니는 내게 그걸 늘 고마워하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런 말부터가 싫었다.
“애초 그런 일 없었으면 집에서 줄 거 아니에요?”
“그래도 그러는 게 아니다.”
“암만 그래도 난 양재 안 간다니까.”
“누가 지금 가라더냐?”
“나중에도 안 간다구요. 누가 가는가 봐라 정말…….”
그게 아버지 어머니에 대해서도, 그리고 작은집에 대해서도 나의 유일한 유세였다. 당숙은 일을 하러 나가고 들어오는 길에 나를 만나면 늘 마차에 태우고 싶어 했지만, 나는 한 번도 마차에 타지 않았다. 함께 학교로 가고 함께 집으로 오던 다른 아이들은 당숙의 마차를 만나면 저희들이 먼저 태워달라거나 그런 말도 없이 달려와 가방부터 먼저 그 위로 던지고 냉큼 올라타곤 했지만, 나는 당숙의 마차가 아니더라도 마차만 보면 그 자리를 피하거나 그럴 틈이 없으면 고개를 팍 꺾고 내가 먼저 싫다는 뜻을 분명히 하곤 했다.
“남들도 타는 걸 왜 니는 안 타나?”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늘 어머니였다. 당숙은 그런 말조차 하지 않았다. 내가 싫다면 억지로 뺏어 실었던 가방을 도로 내주며 그럼 천천히 걸어오라고 했다. 당숙도 내가 노새를 끔찍이 싫어하는 걸 알았다. 아니, 노새를 끄는 당숙을 싫어하는 걸 알고 있었다.
“몰라서 물어요? 남들은 남이니까 타지. 나도 남이면 타고 댕긴다구요.”
“그래도 그러는 게 아니다.”
“아니면 지금이래도 작은형을 양재 보내면 되잖아.”
그러다 결정적으로 나빴던 건 어느 토요일 오후, 하굣길에서의 일이었다. 남대천에서 모래를 퍼 실어 나르다 길 옆 버드나무 그늘 아래 마차를 세우고 다른 마부들과 함께 담배를 피우며 땀을 들이던 당숙이 같은 반의 다른 동무들과 함께 둑길을 걸어오는 나를 보았던 것이었다. 내가 고개를 팍 꺾고 가면 그런 내 모습이 마음에 언짢더라도 못 본 척해야 되는데 그날은 웬일인지 그 자리에서 당숙이 나를 붙잡았다. 어쩌면 다른 마부들 앞에서 뭔가 낯을 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학교 마치고 오나?”
“야.”
나는 친구들 앞에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점심은 먹은?”
“토요일이잖아요.”
“가마이 있어봐라. 그래도 뭘 먹고 가야제. 안 봤다면 몰라두……”
그러면서 당숙은 품에서 빳빳한 백 원짜리 한 장을 꺼내 주었다. 나는 고맙다는 생각보다는 그 자리에서 얼른 벗어날 생각으로 돈을 받았다.
“어이, 은별이, 갸는 누구야?”
당숙보다 대여섯 살쯤은 아래로 보이는 다른 마부가 당숙에게 물었다. 당숙 말고는. 대부분 말만 끄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서로의 호칭도 얼룩이, 점박이, 하는 식으로 노새의 이름으로 불렀다. 훗날 어이, 몇 호, 몇 호, 하고 자동차 끝 번호 두 자리를 이름 대신으로 부르던 택시 회사 사람들을 본 적이 있지만, 사람 이름을 은별이, 점박이, 하고 노새 이름으로 부르던 것도 내게는 낯선 일이었다.
“장래 우리 집 대주시다.”
“대주라니?”
“우리 맏상주라구.”
당숙은 보란 듯이 내 모자를 바로 씌워주면서 말했다.
“뭐야, 그렇게 큰 아들이 있었단 말이야?”
아들 소리를 듣자마자 갑자기 눈앞이 아득해져 오는 느낌에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돈을 당숙에제 도로 내밀었다. 대주니, 맏상주니 하는 말을 할 때만 해도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만 했는데 이제 동무들 앞에서 노새를 끄는 마부의 아들 소리까지 나온 것이었다. 아이들은 이제 대번에 그 사람 느 아버지나, 하고 물을 것이었다.
“뭘 사 먹고 가라니까.”
“싫어요. 나 이제 아재 양재 안 해요!”
나는 기어이 그 돈을 당숙 앞에 던지고 냅다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뛰었다. 뒤에 다른 마부들 앞에 당숙이 어떤 얼굴이 되었을까는 생각할 틈도 없었다. 당장 동무들 앞의 내 얼굴이 문제였다. 정말 그것만은 감추고 싶었고, 감추어왔던 일이었다. 나는 동무들에게 먼 친척 아저씨인데 아들이 없으니까 분수를 모르고 나한테 찝쩍거리는 거라고 말했다. 그러니 우리 동네 애들한테도 물어보라고. 내가 어느 집에 누구하고 살고 우리 아버지가 말을 끄는 사람인지 아닌지……
아마 그 일이 있고 나서였을 것이다. 처음엔 밤마다 술에 취해 마차를 끌고 들어오던 당숙이 어느 날 집을 나간 다음 한 달이 되고 두 달이 되고 방학의 반이 지나 세 달이 되도록 집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었다. 처음엔 집안 어른들도 무슨 일인가 몰랐다가 당숙모가 당숙이 떠나기 전의 일들을 얘기해 모두 그 일을 알게 되었다.
“집 나가기 전에 술을 잔뜩 먹고 와 그런 말을 하잖우. 어디 가서 여자를 사서라도 애 하나를 낳아 와야겠다구. 그러면서 또 나한테 그러잖우. 애가 오죽하면 아 못 낳는 자네 가슴에 못 지를 말을 하고 있겠느냐구, 그러면서 대구 울구…….”
아버지가 남대천 제방으로 나가 전에 함께 일하던 마부들에게 수소문을 하자 당숙은 봉평 어디의 산판장에 가 있다고 했다. 거기서 다른 살림을 차렸을 거라는 얘기도 있었고, 살림까지는 차리지 않았지만 좋아 지내는 술집 여자가 있는 것 같더라는 얘기도 있었다. 당숙모는 날마다 우리 집으로 올라와 아버지에게 당숙을 찾아 데리고 올 수 없겠느냐고 말했다. 당숙이 오지 않거나 거기서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리고 앉은 거라면 이녁*이 여기 있을 게 뭐가 있겠느냐며 올라올 때마다 눈이 붓도록 울고 내려갔다.
“거봐라. 저 귀해주는 어른 가슴에 못이나 지르고…….”
일이 그렇게 되자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가 양자로 아직 들어가 사는 것도 아니고 족보에 그렇게 올린 것도 아니니 늦게라도 셋째 양자에서 둘째 양자로 바꾸는 이야기까지 했지만, 그리고 이제 고등학교 졸업반인 작은형도 어른들도 정 그렇게 정하면 자신도 어른들의 말에 따르겠다고 했지만 그건 당숙모가 안 된다고 했다.
“지가 우리를 싫다 해두 그간 그 양반하고 내가 시째한테 붙이구들인 정이 얼만디요. 지두 그거 크면 어련히 알 거구…… 그러구 아버님 상세 나셨을 때 어린 지가 와서 장삿닐 다 했는데…… 아버님두 그래 알고 돌아가신 다음 절 받구 했는기…… 그간 정리를 생각해서두 난 시째 못 내놔요. 안 내놓는다구요.”
“봐라. 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버지는 아버지가 올라가 데리고 올 일이 아니라고 했다. 아버지가 가면 억지로라도 따라 내려오긴 하겠지만 이내 또 집 밖으로 돌거라고 했다. 그러면 나라는 얘기였다. 그간 지은 죄도 있고, 또 그때쯤 나도 가슴에 풀어지는 무엇이 있었다. 예전 중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노새집 양자는 죽어도 안 가겠다던 둘째형이 이제는 어른들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말하는 것을 듣자 이제까지 가졌던 노새집 양자에 대한 부끄러움과 서러움도 많이 녹아내리던 것 이었다.
“올라가거든 거기 우체국에 가서 경금집 영자를 찾아라. 그리고 량숙을 찾는 거야. 수소문을 해 찾더라도 사람 찾는 것보다 짐승을 찾는 게 더 빠를 테구. 한 파수*래도˙좋고 두 파수래도 좋고 찾아서 니가 잘못했다구 말하구 모시구 오너라. 그러잖으믄 또 올라갈 테니까.”
“살림하고 있으면요?”
철도 없이 그 말을 나는 당숙모까지 있는 자리에서 물었다.
“그런 일 없을 거다만 그런다 해도 닐 보면 마음이 달라질 거다. 그간 니한테 들이고 쏟은 정이 얼만데. 이번에 올라간 것도 달리해 올라간 게 아니라 니한테 노여워서 올라간 거니까.”
다음 날 아침 면 소재지까지 당숙모가 데려다주었다. 나는 교복을 입고 가기 싫었지만 어른들은 교복을 입고 가는 게 모양도 반듯하다고 했다. 얼마를 묵을지 몰라 따로 몇 가지 옷들도 챙겨 갔다.
“꼭 니가 데리고 내려와야 한다.”
“야.”
“니가 가자면 올 거다.”
‘야.“
“내려오면 내 인자 그놈의 짐승 없애라고 할 거니까.”
“……”
당숙모는 찐 계란 몇 개를 가방에 넣어주고, 집에서 차비를 받아왔는데도 백 원짜리 돈을 세지도 않고 열 닢도 넘게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차를 두 번 갈아타도 봉평까지의 학생 차비가 완행버스로는 백 원도 되지 않을 때였다.
“경금집 영자한테 신세 질 것도 없이 때 되면 혼자서라도 든든히 사 먹어라. 잠이야 한데서 잘 수 없으니 얻어 자더라도.”
“집이나 잘 설어(청소해)놔요. 안 쓰더라도 내 방도 하나 내놓고.”
어른들이 가르쳐준 것 말고도 나는 나대로 이 기회에 요량하고* 다짐하고 있는 게 있었다.
봉평에 가서는 위에 적은 것 그대로였다. 우선 우체국에 들러 영자 누나를 찾았고, 혹시 이곳에서 우리 당숙을 보았느냐고 물었다.
“보기는 봤는데…….”
봤어도 알은체는 하지 않은 듯했다. 양자로 들어간 내가 길에서 마주쳐도 그랬는데, 암만 친척이라도 그렇지 영자 누나도 스무 살도 넘게 먹은 처녀가 객지에 나와 남들 보는 앞에서 말을 끄는 당숙을 알은체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디 잘 가는지는 모르나?”
“저쪽 장터에 가끔 보이는 것 같던데. 가방은 나 주고 거기 가서 물어봐라. 진부옥이나 강릉옥이나. 그리고 이따가 이리로 와. 여기 와서 없으면 내가 저기 다방에 있을 테니까.”
“내가 다방에 어떻게 들어가나? 중학생이.”
“괜찮다, 여기는. 그냥 들어오는 게 아니라 나를 찾아오는 거니까.”
“우리 아재를 찾으면 아재하고 같이 와도 되나?”
“그래, 니하고 같이 있으면.”
“그런데 참 우리 아재 여기서 살림 한다는 얘기는 못 들었나?”
“살림이라니?”
“방 얻어서 딴 여자하고 산다는 얘기는 못 들었느냐고.”
“야, 수호야.”
“왜?”
“닌 어린 게 그런 말도 할 줄 아나?”
“그 말이 왜?”
“니가 그런 말을 하니 이상해서 그런다.”
“이상하긴. 몰라서 묻는 건데.”
나는 우선 장터와 장터 뒷길을 다니며 당숙의 노새가 있는지를 살펐다. 장터라고 해봤자 시골 너른 집 마당보다 조금 더 큰 정도여서 이쪽저쪽 뒷길까지 살피는 데 십 분도 안 걸렸다. 장꾼들의 노새가 몇 마리 보이긴 했지만 정수리에 흰 털이 난 노새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살림하는 집이 따로 있고, 거기에 노새가 매어져 있는 게 아닌가 싶어 마을 부근의 집들을 하나하나 다시 둘러보았지만 장터 주변 말고는 노새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천생 장터 거리의 술집이며 밥집에 들어가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때보다 일찍 강릉옥에 들어가 강릉에서 올라온 마부 이 씨를 찾는다고 했다. 당숙의 얼굴 모습과 노새의 특징을 함께 말했다.
“그 사람은 왜 찾는데?”
찾아도 바로 찾아 들어온 셈이었다. 마흔쯤 되어 보이는 주인아주머니가 칼질을 멈추고 물었다.
“우리 아버집니다.”
“콧날이 우뚝하고, 여기 귓불 아래 어금니 자리에 팥알만 한 점이 있는 양반 말이제?”
“예.”
“노새도 은별인지 뭔지는 몰라도 장배기*에 허연 털이 나 있는 게 맞고…….”
“예.”
그 사람이 맞나는 모르겠다만 아들이 없어 그래 댕긴다고 하던데.”
“그러면 맞아요.”
“참 이상하네. 아들이 없다는 게 맞다면서 또 아버지라는 얘기는 무슨 얘긴데 시방?”
“지금 어디 있는지 아나요?”
“맞는지 아닌지는 모르겠다만 그 사람들 흥정산에 산판 들어갔는데 낼모레나 돼야 나올거르. 낼모레가 한 파수 간조*날이니까.”
“그럼 낼모레 여기로 오나요?”
“여기로 오든 어디로 오든 이곳으로 나올 기구만, 그래, 하루 지내곤 또 이것저것 준비해 들어가구……”
나는 영자 누나를 만나러 가기 전 그곳에서 이른 저녁으로 밥을 먼저 시키고 나서 소머리국 한 그릇을 나중에 시켰다. 영자 누나를 놔두고 혼자 밥을 먹은 건 잠은 거기서 얻어 자더라도 아침저녁으로 먹는 것까지 신세를 져선 안 된다는 어른들의 말도 있었지만 우선은 주인아주머니가 당숙 소식을 알려준 게 반갑고 고마워서였다. 밥을 먹으며 몇 가지 더 물어볼 말도 있었다. 그리고 밥을 먼저 시키고 소머리국을 따로 나중에 시킨 건 떠나올 때 아버지가 혹 국밥이 먹고 싶거든 그냥 국밥을 시키지 말고 꼭 그렇게 하라고 가르쳐준 때문이다. 장터 밥집들은 그냥 국밥을 시키면 먼저 먹던 손님들이 먹다 남긴 밥을 국에 말아 내오니 밥 따로 국 따로 시키라고 했다.
“강릉 큰 데서 학교를 다녀본 게 있어서 그렇나, 여게 아들 같지 않고 참 똑똑타. 혼자 아버지를 찾아와 이래 밥도 시켜 먹고.”
사기 사발 가득 국을 내오며 아주머니가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내가 밥 따로 국 따로 시켜서 하는 말일 거라고 생각했다.
“니 중학교 몇 학년이나?”
“1학년요.”
“그 양반이 정말 아버지가 맞나?”
“예.”
“의젓하구만…… 오늘 내려가지는 않을 테고 잘 데는 있나?”
“예.”
“어디서 자는데?”
“정해 놨어요.”
영자 누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영자 누나 이야기를 하면 이 사람들도 여기에 와 말을 끄는 당숙이 영자 누나의 가까운 친척이라는 걸 알게 될 것이었다.
“말을 끌어도 다른 사람들과 좀 다르다 했더니 아들을 보니…….”
“그런데 내일모레 언제쯤 오시나요?”
“아마 저녁 때 올거르. 거의 어두워서.”
그때 출입문이 열리고 주인아주머니보다 조금 더 나이 들어 보이는 아주머니가 안으로 들어왔다.
“야는 누구데?”
어린 게 혼자 시골 밥집에 앉아 있으니 별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거 왜 홍정산에 산판 들어가서 그 아래 버덩말 차 다니는 데까지 나무 끌어 내리는 말패들 있잖은가?”
“말패가 왜?”
“그 말패 중에 강릉서 올라온 이 씨 아들이래. 거 왜 코가 우뚝하고 눈이 서글서글한 이…….”
“아들이라고?’’
“그렇다니까.”
“아이구야, 그이 말로는 의지가지없어* 그래 댕긴다더니…… 진부옥 그치는 무슨 일이래?”
주인 여자가 찔끔 눈치를 주었다. 나는 못 본 체하고 숟가락으로 묵묵히 밥을 퍼 올렸다. 한 가지는 분명하게 안 셈이었다. 그리고 그간 당숙한테나 당숙모한테 내가 지은 죄 또한 분명하게 안 셈이었다. 나는 오히려 그들이 내게 더 많은 것을 물을까 봐 밥값을 계산하고 밖으로 나왔다.
다음 날 그곳에서 삼십 리 떨어진 곳에 있다는 홍정산까지 당숙을 찾아 들어갈까 하다 그만두었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보는 게 좋을 것 같었다. 일부러 진부옥엔 들어가지 않았다. 그런데도 내가 강릉옥에서 점심을 먹을 때 그곳에서 일하는 나이 든 아주머니가 내 눈치를 살피며 아닌 척하고 밖으로 나갔다가 잠시 후 들어올 땐 다른 여자와 함께 들어와 밥을 먹는 나를 살폈다. 나는 직감적으로 진부옥 그치라고 생각했다. 밥 먹는 일이 어떻게 하면 의젓하게 보일까마는 그래도 나는 의젓한 모습을 보여야겠다는 생각에 혹시 밥알이라도 흘리지 않을까 싶어 숟가락으로 밥을 꾹꾹 늘러가며 그것을 떠먹었다. 따라들어온 여자도 나이는 마흔쯤 되어 보이는데 인물로 봐선 거기 주인 같지는 않고 허드렛일을 하는 여자 같았다. 나는 그 여자가 내게 무어라고 묻거나 말을 시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잔뜩 긴장하고 있었지만, 두 사람 다 일부러 다가와 그러지는 않았다. 한편으로는 느긋한 마음도 생겨 나는 별로 먹고 싶지 않은 물까지 한 그릇 더 달래서 먹고 영자 누나가 얻어 있는 방으로 돌아와 오후 동안은 거기에 꼼짝도 않고 있었다. 내일 산에서 당숙이 내려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것만 곰곰이 궁리를 했다.
그런데 오후 늦게 영자 누나가 방에 들어와 나더러 지금 진부옥에 가보라고 했다.
“거기 느 아재 와 있다. 진부옥에서 나를 찾아왔더라. 닐 데리고 오라고.”
“강릉옥이 아니고?”
“진부옥이다.”
나는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영자 누나도 함께 가고 싶은 마음이 없는 듯했고, 나도 영자 누나와 함께 거길 가고 싶지 않았다.
“아재가 왔으면 바로 가야 할 것 같다. 가서 편지할게, 누나……”
“우리 집에도 내가 잘 있다고 말해주고…….”
“고맙다, 재워주고 오늘 아침도 해주고…….”
“니는 쬐끄만 게 별말을 다 한다. 어제부터…… 그리고 이건 우리 엄마 좀 갖다 드려라. 추석 전에 내가 내려간다고 얘기도 해주고.”
“알았다.”
나는 영자 누나가 주는 돈을 받아 주머니에 넣고 밖으로 나왔다. 강릉옥이면 편한데…… 그런 마음으로 진부옥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방 안에 당숙이 앉아 있었다. 시커멓게 수염까지 길러 행색이 산사람이나 다를 게 없었다. 나로서는 남대천 제방둑에서 보고 석 달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당숙은 방에 앉아 있고, 낮에 강릉옥으로 나를 구경 왔던 여자는 부엌 쪽에 있었다.
“왔네요, 아드님이…….”
당숙도 나를 보고 있는데 부엌 쪽의 여자가 말했다.
“언제 완?”
당숙이 방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아부제……”
나는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강릉에서 올라올 때부터 내내 입속으로 되뇌며 연습한 말이었다. 아버지가 있으니 아버지라 부를 수는 없고, 그러면서도 아버지라는 뜻을 불러야 하고. 이젠 당숙을 그렇게 불러야 하고 그렇게 불러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아부제가 놀라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지가 잘못했어요.”
“언, 언제 완?”
“어제요. 어머이가 아부제 모시고 오라고 해서요.”
“……밥은 먹은?”
“야, 내일 온다더니요?”
“여게서 들어오는 사람 편에 니가 왔다는 얘기를 들었잔.”
“진지는 드셨어요?”
“거게서 먹기는 해두 니가 뭘 안 먹었음 같이 먹을라구…….”
“말은요?”
“뒤 꼍에 매놨는기 이젠 그것두 힘을 못 써서……”
“아부제……”
“……”
“가요, 집에…….”
“오냐, 가야제. 니가 왔다 해서 다 챙겨 내려왔는기. 집은 다 펜한?”
“야.”
“느 숙모도?”
“야.”
아부제는, 나는 빈 몸으로 오고 아부제는 말을 가져왔으니 나는 차를 타고 내려가고 아부제는 내일 산에서 간조패들이 내려오면 돈을 마저 받은 다음 말을 끌고 내려오겠다고 했지만, 나는 나도 아부제하고 함께 내려가겠다고 했다. 가방까지 들고 나왔는데도 그날 하루 더 영자 누나 방에서 잠을 잤다. 아부제는 어디서 잠을 잤는지 모른다. 다음 날 영자 누나가 출근한 다음 아부제가 말하던 대로 열 시쯤 진부옥으로 다시 갔을 때 아부제는 이발을 하고 면도를 한 얼굴로 멀끔하게 앉아 있었다. 부엌 쪽을 살펴도 그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니 나하구 대화 가지 않으렌?”
“거긴 어딘데요?”
“차를 타믄 된다. 거긴 여기보다 큰 전방*들이 많으니 니 뭐 사구 싶은 것두 사구…….”
그날 아부제는 내게 시계를 사주었다. 내가 고른 것보다 아부제 마음에 드는 게 더 비쌌는데 비싼 그것을 사주었다. 큰형은 시계가 있어도 고등학교 3학년인 작은형은 아직 시계가 없었다. 라디오를 틀면 매시간마다 아홉 시를 알려드립니다, 열 시를 알려드립니다, 하는 오리엔트 야광 손목시계였다. 그 외에도 내 옷과 숙모 옷 몇 가지를 더 사고, 할아버지와 아버지 어머니의 옷가지도 샀다. 그리고 거기서 먹는 점심은 내가 내 식대로 아부제 것과 내 것을 시켜 먹었다. 아부제한테 내가 컸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봉평으로 돌아오니 해가 저물고 있었다. 아부제는 진부옥에서 돈만 받으면 떠날 준비를 하고 홍정산 간조패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 사람들은 우리가 저녁을 먹은 다음에 내려왔다.
“야, 느들 장래 우리 집 대주 봐라. 우리 아들 얼굴 얼마나 훤한가 한번 보란 말이다. 느 아들들이면 이만한 나이에 혼자 애비 찾아오겠나?”
아부제는 그들로부터 받아야 할 돈을 받은 다음 길을 떠나기 전 몇 잔 술을 마시며 연신 내 자랑을 했다. 어제까지는 내가 아부제라고 불러도 그 말을 드러내놓고 좋아하지 못하고 서먹해하더니 이젠 마음껏 그 말을 좋아했다.
“언제는 정 붙일 아들이 없어 돌아다닌다더니?”
“아들이 없기는, 내가 노새나? 아들이 없게. 애비 산에 가서 안 온다구 이렇게 여게까지 데리러 오는 아들이 있는데. 자, 이제 나는 아들하구 떠나네. 해 져서 선선할 때 떠나야지, 짐승을 끌구 가는 기……”
진부옥을 나온 다음 아부제와 나는 밤길을 걸었다. 아니 걷지 않고 마차 앞자리에 타고 밤늦도록 이목정까지 나왔다. 달이 없어도 별이 좋은 밤이었다. 아부제의 입에서 풍기는 술 냄새가 조금도 싫지 않았다. 노새는 연신 딸랑딸랑 방울을 울리고, 길 옆은 온통 옥수수밭이거나 감자밭, 얼갈이* 무와 배추를 뽑은 다음 씨를 뿌린 메밀밭이었다. 꽃향기도 좋고 저녁 바람도 시원했다.
“수호야.”
“야.”
“니가 날 데리러 완?”
“야, 아부제.”
“니가 날 데리러 여게까지 완?”
“야, 아부제.”
“수호야.”
“야.”
“니가 날 데리러 이 먼 데까지 완?”
“야, 아부제.”
“니가…… 니가·…‥ 나를 애비라구 데리러 완?”
“야, 아부제.”
돌아오는 길 내내 아부제는 그 말을 묻고 또 물었다. 나는 새로 찬 야광 시계를 보며 10분이나 20분 간격마다 지금 몇 시 몇 분이다,를 말했다. 자정 통행금지 시간이 다 되어 이목정 말먹이집에 닿았다.
다음 날 아침부터 걸은 길도 그랬다. 끓인 여물을 가마니에 받아 싣고 노새가 맥을 못 추는 한낮만 잠시 그늘에 피했다가 저녁 늦게야 대관령에 닿았다.
“자지 않고 떠나면 새벽이면 닿는다.”
“아부제.”
“어.”
“그러면 그냥 가요.”
“그라이자. 우리 맏상주 시키는 대로. 영 내려가다 중간 반정(半程) 집에 가서 뭐 좀 달래서 먹구.”
그리고 또 밤길을 걸었다. 아부제는 마차에 올라타기도 하고, 내리막 언덕이 심한 곳에서는 마차에서 내려 말의 고삐를 잡기도 했다. 그때면 나도 따라 내렸다. 아부제가 그냥 타고 있으라고 해도 그랬다. 그러면서 아부제와 나는 또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그 영을 넘어 왔던가.
“아부제.”
“어.”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그러믄. 누가 묻는 말이라구.”
“아부제가 진부옥 아주머이를 좋아했어요?”
“그래 보이더나?”
“야.”
“아니다. 내가 좋아한 게 아니구 그쪽에서 그랜 거지. 내가 이래 다 큰 아들이 있는데 아들이 없는 줄 알구. 그러니 니두 내려가 숙모한테 그런 말 하믄 안 된다.”
“야.”
“그러믄 나두 니한테 뭐 물어봐도 되겐?”
“야.”
“니 아버지 어머이가 이렇게 해서 날 데리구 오라구 시키든?”
“데리고 오라고 시키긴 했는데, 이렇게 데리고 으라고 시키지는 않았어요.”
“날 아부제라고 부르라구 시킨 것두 아니구?”
“야.”
“그럼, 니가 니 마음으루다 부른 말인?”
“야, 아부제.”
“그러믄 하나 더 물어두 되겐?”
“야.”
“니 내가 말 끄는 게 싫은?”
“……”
그 말만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부제도 그 말을 두 번 묻지 않았다.
“아부제.”
“어.”
“나 내려가면 이제 아부제 집에 가서 살려구 해요.”
“우리 집에?”
“야.”
“어른들이 그렇게 하라구 시키든?”
“아뇨, 지 마음으로요.”
“니 마음으로?”
“야, 그래서 올라올 때 하생골 어머이한테 내 방 하나 치워놓으라고 했어요.”
“수호야.”
“야.”
“아부제는 고맙다. 무슨 말인 줄 알제?”
“……”
“그래, 내려가믄 나두 이 짐승 치우지 뭐. 니 싫어하는 걸 계속할 게 뭐 있겐.”
“……”
“허, 이눔이 말귀 알아듣나. 절 치운다니까 대가리를 흔들게.”
“안 치워도 나 아부제 집에 가 살아요…….”
“그래, 치우지 뭐. 치울 거야. 이제 이거 힘두 제대루 못 써 사람 망신시키는 거. 늙어서 고집두 늘구……”
그날 아부제와 나는 온 하늘과 온 산이 붉게 동틀 무렵 하생골 집에 닿았다.
그러나 그날 밤길에도 그랬고, 먼저 살던 집에서 아부제 집으로 살림을 옮기듯 책상과 책가방, 입던 옷가지들과 내가 쓰던 물건들을 옮겨 온 후에도 끝내 말과는, 그리고 아부제가 그것을 끄는 것과는 화해가 되지 않았다. 예전보다 덜 부끄럽다고 해도 그랬다. 그때 나는 중학교 1학년이었고, 동네에서 아이들과 싸우다가도 ‘노새집 양재새끼’라는 말을 들으면 그 말을 이 세상에서 가장 심한 욕으로 느끼던 열세 살의 소년이었다.
그 말은 내가 중학교 3학년일 때까지 집에 있었다. 내가 저를 핍박하고 서러움 줄 때 그는 이미 늙어 있었다. 그가 죽던 마지막 모습도 그랬다. 말굽을 박았는데도 공사장에서 벽돌을 내릴 때 땅에서 바로 선 대못을 밟아 오른쪽 앞다리부터 못 쑤게 되더니 한 해 겨울을 한 쪽 다리를 늘 구부린 채 서서 앓다가 어느 날 배를 땅에 대고 만 것이었다. 알리진 않았는데도 어떻게 알고 시내의 마부들이 마차를 끌고 와 죽은 그를 싣고 내려갔다. 아부제는 따라가지 않았다. 마부들이 그럼 저녁때 고기라도 보낼까, 하고 묻자 아부제는 그러지 말라고 했다. 작은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그날 처음으로 나는 남몰래 감추는 아부제의 눈물을 보았다. 한지붕 아래에서 사는 동안 그는 내게 참으로 많은 설움과 눈총과 미움을 받았다. 내가 누리는 것 모든 것이 그의 등에서 나왔는데도 그랬다. 아마 그가 죽어 정말 하늘의 은별이 되었다 해도 나는 앞으로도 말에 대해 자유롭지 못하고, 그에 대해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결국 그 원고에 나는 그의 이야기를 쓰지 못했다. 그러나 언젠가 나는 그의 슬픈 생애에 대해 제대로 글을 쓸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다린다. 그는 태어나기로도 암말과 수나귀 사이에서, 온갖 핍박 속에 오직 무거운 짐과 먼 길을 걷기 위해 생식력 도 없는 큰 자지만 담고 나은 노새였고, 이름은 은별이었디
『상상』 11호(1996년 봄); 『은비령』 (생각의 나무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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