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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양동 물봉골 이야기 둘☆]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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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 물봉골 이야기 둘]
신순임 시집 / 시문학시인선 539 / 시문학사(2016.08.30) / 값 1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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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귀정 눈꼽재기창
신순임
두둥실 흘러가는 보름달 따라
밤 마실 나섰는데
흐끄므리한 안강평야 뒤로
고층건물 야경 물어 나르는 반딧불
회화나무 꽃등 켜 밤길 밝히네
솟을 대문 앞에 서서
인기척 안으로 실어보내어도
문지기 소식 없어
행랑채 눈꼽재기창 밀어보니
성독*소리 취한 반딧불
상쇠 상모 돌리듯 빙빙 뜰 돌리고
배롱나무 걸터앉은 보름달
한자 한자 받아 적으며 글월 훔치느라
모기가 물어도 모르는 데
누누에 오르니 무성한 나락 그림자
독락당 가는 길 가리어
옥산길 가늠도 아니되는 데
회재*할배 시 두 수
‘영귀정을 오르며’가
달빛에 도드라지네
*성독 : 글을 소리 내어 읽음
*회재 : 이언작(1491~1553)의 호
설천정사
신순임
경주를 연이은 완만한 산세
흐르는 강물도 유하게 하는데
안락교 넘어 한적한 숲길 들어
향양문 밀치면
회재할배 섯째손자 높으신 위엄
기단석도 머금고 있는 설천정사
설천공* 할배 장수지처* 던 곳에서
살짝 시선 담장 밖으로 돌리면
바둑판 같은 안강 들 거쳐
아스라히 뵈는 경주 들머리
어른들 말씀으론 설천공 할배 음성은
경주 다 간 하인도 돌아보게 한댔는데
일찍이 두 형님 보내고
문중기강 다시 세우느라 애쓰신 향념은
소실된 정침 주춧돌에서 복원될 날 기다리고
하루 몇 번씩 지나는 기차는
정사에 서린 할배의 기개를 일깨워
대성가의 귀감으로 삼으라 하네
*설천공 : 이의활(1573~1827)
*장수지처藏修之處 : 머물며 공부하던 곳
사호당
신순임
비가 좀 낫게 왔다 하면
어김없이 청석이 속살 드러내어
발 디딜 자리 살피게 하더니
황토포장으로 믓 나그네의 자전거 걸음도
쉬이 드나들게 하는 인골 진사*댁
트임 ㅁ자에 一자형 이어진 사랑채에
감실을 들인 사호당
대문간에서 올려보는 안채 대청
후덕한 안주인 뜨락 내려서 반가움 표하고
두루마리 가사 술술 풀어내며
안방 공개할 것 같은데
뒷산 상수리나무 그림자가
봄바람 불러 고적한 놀음 중이라
사랑채 눈썹지붕 돌아보며 나오노라니
검붉은 목단꽃잎 떨어지고
하늘매발톱 금낭화가 고택에 화색 칠한다고
벌까지 놉해 수선하기 그지없는데
머릿방 마루 석 섬지기 독
미국 간 주인양반 기다리다 우미량* 곡선미 취해
흰 거미줄로 드리운 머리채
마루 부틀 사이 끼여도 아픈 줄 모른다네
*진사 : 이능승(1827~1881)
*우미량牛尾梁 : 소의 꼬리처럼 생긴 기둥
양동리 182번지
신순임
지기 센 천석꾼의 집
사회주의 이념 대소가 파고들어
숙질같이 철조망 건너가고
화마 덮친 고택 사당 담만 남겼네
역동댁 유복자 키우며 못 쓰고 갈무리한 재산
피일*에서 부동산 임대업으로 불린다고 화색 감추지 못하며
북에서 교장선샘 된 주인양반의 방문 소식 기다린다 했는데
반갑잖은 치매 먼저 찾아들어 이도저도 모른다네
주변 정지 작업으로 잡목 캐어내는데
6.25 동란 이후 주인 노릇한 아카시
정침 주춧돌 아래 뿌리 뻗으며
곳간 사당까지 일가 이루더니
담장 넘은 오죽에게 세 밀려 뒤란으로 물러앉은 사당 자리애서
한철 향내 피우고 주제자 행세 하길래 씨도 없이 정리했더니
빈터 지키며 수호신 된 사랑마당 향나무
남북 하나 되는 날 금의환향할 주인 대신
그 큰 몸 흔들어 연신 고맙다는 인가 건네는데
남북의 창으로는 숨소리도 들리지 읺는 지금
빈터에는 여전히 기다림만 여물어가네
*피일 : 안강 읍내의 마을 이름
내외법
신순임
선외가에서 오신 손님
연비연사 꿰뚫으며
풀어놓는 범절 보따리
밭양반 출타 중이라
내당 드시잔 소리도 못하고
그 양반도
안녀자와 수작 뻐젓잖아
데면데면대다가 돌아갔는데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 더 많은 법
안다고 지키려면
모르는 사람 경우 없게 만들도
모른다 하기엔
알고 있는 양심이 찔려
이래저래 어려운 내외법
어겼다고 과태료 나오는 것도 아니면서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줄타기시키는
양동에서는 제일 무서운 법
항렬
신순임
집성촌에서 성장하여 아픈 기억 많은 항렬
재미있게 동두깨비* 살다가
맛있는 밥상 차려두고
엄마 아부지 언니 순서 정할 때면
맨날 막내로 심부름만 시켜 울기도 여러 번
이담에 시집은 꽃 항렬 보고 갈기라고
벼르고 별렀는데 공수표 된 지금
대소가 다 모인 명절
재종숙과 동갑인 아들은
나이가 같으면 친구지 왜 아재가 되냐고
철들 때까지 똑같은 대답 반복하여
인간 안 된 게 항렬만 높다는 말로
위안 삼았던 미성시절 생각나 실실 웃음 흐르는데
지구촌으로 생활권 넓어지면서
계촌 따질 겨를 없으니
세월 아니 먹는 나는 평생 새 새댁이로다
*동두깨비 : 소꿉질
문외배
신순임
전통문화 이어가고 있다는 자부심 앞
현실과 타협해야 하지 않느냐는 물음
거침없이 몸이 던져 목젖이 뜨끔뜨끔하던 날
대청에서 문중회의가 있었는데
뜻 모르는 아이에게 문외배 시킬 때
한번 만에 계촌 짚어주기 어렵고‘
어쩌다 한 번씩 뵙는 어른 분 호칭을
숙지하고 있으라고 강요하기도 어렵고
연세 드신 분들
한복과 양복 사이에 헷갈리는 아이 눈살미
자꾸 닦아주기도 어렵고
지금이사 한옥에 사니 문 밖이 마루라 괜찮지만
아파트라면 현관이 대문인데
절 받으시라고 방 안으로 들어가시라 하기도 그렇고
똑같은 삼촌인데 외삼촌과 이모는 어머니와 동석했을 때만 한다는 친족 위주의 범절 보며 퇴색되어가는 가가예문家家禮文 애써 유지하려다 세대 간 갈등 조작하는 것은 아닌지
안 그래도 구닥다리란 소리 종종 듣는 사람이 아이들 장래 걸림돌이나 되지 않아야 할 터인데
지키고 산다는 것이 때론 무거운 짐이다
손 없는 날
신순임
만사형통 꿈꾸며
동그라미 쳐 찾는
손 없는 날
집안 대소사 관장하는
시어머니다
나뭇꾼과 선녀
신순임
헤까리* 매달린 대봉 감 속살에
단맛 심는 찬기운이고
버억 아라기* 벌려 풍구 돌리는
서울 댁
간 큰 파리나 앉을 가마솥에
배태도 못한 생 속
서리서리 풀어 푸욱 고으는
귀농일기 훔쳐본다
강산 한 바퀴 돌리고도 남은 시간
흙 만지고 나무 다듬으며
날개옷 깊숙이 감춘 나뭇꾼과
수졸공 할배 선덕 찾는 산식구들
때맞춰 먹이 챙기는 선녀
가초가초* 푸성귀와 야생화로
성주봉 정기 품은 두동골에
동화 속 주인공으로 새긴 꽃 수
향기 만발이네
*헤까리 : 서까래
*버억 아가리 : 부엌 아궁이
*가초가초 : 갖초갖초
아름다운 분륜
신순임
밤낮없이 인산인해라는 동부사적지
유채가 절경이라는데
따뜻한 한 잔의 차 더 그리운 이웃들
아랫목 발 묻고
남해 쓸고 올라온 꽃놀이 갔다 온 듯
생생하니 전하며 꽃샘추위 꼬랑지 붙들고
속닥풀이 하던 중
전화벨 주인장 불러내더니만
조차비중 뚫고 나오는
어이, 딸 뭐해
예, 어머니 그냥요
오늘 좀 왔다 가
미역 건져 놨어
이웃들 부러움 속 샛노랗게 웃음꽃 피워
아름다운 분륜 새기는 김여사 고부
퍼내도퍼내도 마르지 않는 자정의 샘 속
헤엄쳐 다녀오신 시어머니
며느리 딸 만들어 땅 속 깊이 숨겨두고
용왕님 몰래 가초가초 해산물 거둬다가
제일 좋은 것만 먹으라신다
유모차 운전수
신순임
양졸정에서 무첨당으로 양자 들어
시조부와 삼종반 간이신데
중국에 큰집이 있는 걸로 확인되어
애매모호하게 복 벗은 대소가인 황개이댁
근친 간 회가 다 돌기를 기다렸다가 솜씨 자랑해
고부가 언덕 올라갔을 때나
스무 해 지난 지금이나 별반 다른 게 없는데
간간이 가스 불 사고 좀 치더니
지난 가을 손자 차타고 대구 간 걸음이
유모차 운전수 졸업날이었는데
축담에 우두커니 서서 늙어가는 유모차 보니
긴 치맛자락으로
골목길 깨끗이 쓸며 경로당 오가던 운전수
차라리 밀지 말고 탔더라면
밉상스런 나이랑은 만나지 않았을 걸
우리 고부에겐 큰집 주인이라고
더없이 후했던 인심
족친간의 정 뜨시게 끌어안으며
치매 이길 장사는 없노라 항변한다
홍해댁 내외분
신순임
고갱이 속 빨간 양단 복주메이
불룩하면 좋으련만
늘 간당간당한 밭양반 담뱃값 타령으로
하루치 품삯 미룰 수 없는데
동네 안의 일 모르는 게 없고
상례 제례 범절*과 종가 향념은
일반인 범접할 수 없어
윗대 월남할뱀 대 이은 범절의 결정체인데
길 가다 집에 아이들 만나면
빈 주메이라도 털어보여야 맘 편하고
하루 열두번 보아도
“새아지멘교”하는 인사 꼭꼭 건네어
외부인들은 이상하게 여기는데
정월 대보름 줄다리기할 때
세월도 가도 늙지 않는 밭양반 육두문자는
절대로 아랫마을이 이길 수 없는
비장의 무기인데
양동에서가장 금슬 좋고 행복한 내외는
마을 걸음에도
서너 걸음 쳐져 걷는 범절 묻어 있다
*범절 : 예의나 법도에 맞는 모든 절차나 질서
구봉침
신순임
칸살 너른 무첨당 4대가 사는 건 기본이라
한 울타리 안 삼종반 난다고
시조모랑 손부가 같이 거처하다가
손부의 합방일이 잡히면
산실 방 교대로 들여보냈다던데
한 칸 산실 방은 새새댁들이 돌아가며 들었으니
시집 올 때 해온 혼수도 제각각이라
아랫사람들 얼매나 혼란스러웠을까
새살림 보면 그 또한 얼매나 부러웠을까
아침 일찍 요강 들고 나오는 것이
제일 민망했다던 종조모
영주 줄포 천석꾼 정씨 가문에서
열일곱에 무첨당 둘째로 입문하시어
평생 바깥으로 도는 할뱀 대신 손에 바늘 들고
3남1녀 지극정성으로 바라지하시고‘천수를 누리시는데
세상에 없는 종손자 구봉침 보시고
새색시 손 마주 잡아 흔들며
상서로운 기운 지닌 봉황을 아홉 마리나 새겼으니
그 복록 다 누리실 축원축원 하여 주셨지
* 구봉침 : 봉환 아홉 마리 새긴 베개로 신랑 각시가 같이 벤다.
도포
신순임
문헌상으론 임진왜란부터 보인다는데
아랫사람에겐 언감생시이고
없는 집 양반은 가난 덧대인
누더기라고 걸쳐야 외출했다는데
남성복 중 가장 겉옷이며 예복이라
푸새 자주하면 하얘져
은은한 치자 물들여 새옷같이 입는데
수의에도 들어가고
제사나 서원 행사에는 필수인 베옷
혼인할 때 안어버이는
발이 너무 고와도 세어서도 아니 된다고
베 짜는 금소마을* 찾아
바닥 좋은 걸로 사서 손수 지어주시어
제사와 묘사 문중행사 마치면
얼른 보자기 싸서 높이 올려 보관하는데
대마 잘게 갈라 무르팍 다 닳도록 비벼
삼 줄 이어 묵묵히 베짜던 여인네들
양복지에 명성 다 주고도 살아남은 걸 비루어 보면
전통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잊혀져 가는 것이고
애써 지키려는 이들이 있기에 미래가 보인다
*금소마을 : 안동시 임하면 금소리
행전*
신순임
가을걷이 끝머리에 연이어진 묘사
무명 옷 삶아 빨고 풀 먹여 다듬이질해
때깔나게 만져낼라치면
제수 장만하는 것보다
의복 장만하는 것이 더 골몰이라
깊은 산 묘사라면
어김없이 빨래를 만져야해
초상 때 치던 행전 손질하여 내었더니
아랫도리 말쑥하게 한 철 넘어가
행전사랑 애틋한데
구한말 의병장 같은 밭양반 뒤태에
날리는 두루막 고름이 큰 소리로
개으른 내자는 집에 있소라니
좀은 찔리지만
침모 따로 없으니 어쩌리
*행전 : 바지 고의를 입을 때 정강이에 감아 무릎 아래에 매는 물건. 보행에 편리하도록 사용
몸빼
신순임
일제강점기 여성의 노동력 착취 위해 강제로 입히어
젊은년들 갈구쟁이 쳐들고 나다닌다는 수모 속
숱한 고생한 앞세대의 노동복으로
여성 하의 변형의 첫 주자로 등극하여
절하기 편하다는 잿빛의 절복으로
연세 드신 분들에게 편한 옷으로 칭송 자자한 몸빼
높낮이 심한 한옥 살며
치맛단 안 스실리는 것만 해도 반일 더는 거라
허드렛일 할 땐 즐겨 애용하는데
올 봄 만발한 분홍 안개꽃 혼자 보기 아까워
가까운 지인에게 화분 째 보냈더니
은은한 향내 피우는 생명초 받아들고
촌 할매 몸빼 같다고 해서 큰 웃음 산 옷
엄마는 절대 몸빼 차림으로 있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는데 이제사 알 듯하다
그 깊은 심증을
매자*
신순임
잘 되면 술이 석 잔이고
못 되면 빠마리* 석 대라는 중매를
저출산 문제로 정부가 공무원 맞선 주선한다니
봉반이 숙질이 되기두 하구
질녀가 손부 질부가 되기도 하구
세 자매가 같은 곳으로 시집 와
계촌 따지기 버겁게
연비연사로 얽힌 반가의 혼맥 두고
글로벌시대
자우연애로 딱히 매자 역할 별로 없지만
공공연히 매겨진 금이 난감한데
대소가 아재를 참한 규수에게 소개해 혼사 성사되니
현금 일백만원 전달되어 섭섭하다는 말과 함께 되돌렸더니
석 잔 술 이름으로 대문 들어서는 고추포대 하도 커
반송이 어렵게 생겼다니
매자 섭섭하게 하면 못 산다더라며
숨소리도 못 나오게 입 봉하고
생전 중매 세 번 성사 시키면 천당 간다는데
매자의 첫째자격으로
인격이 구비되고 신실한* 사람이라야 한다니
천당 가려면 이 또한 숙제로구나
*매자 : 중매인
*뼈마리 : 뺨
*신실하다 : 믿음직하고 착실하다
신행날
신순임
끔인 듯한 신혼여행 끝 하룻저녁 친척들과 새신랑 다루며 놀고 일찍이 사당 들어 인사올리고 시댁으로 향하는데 대소가 어른들 면면히 손잡아주며 눈물 속 배웅 “잘 살아야 된데이”가 걸음걸음 따라 붙었다
황도포에 관탕 하신 아부지 앞서시고 폐백 보따리 든 오빠 따라 솟을대문 앞 헛기침 던져 손 왔음 알리고 잠시 기다리니 대청과 내당으로 안내했다 짚단에 붙은 불이 미성적 생각일랑 죄다 내리고 시댁 범절 익히며 새 삶으로 다시 나라 며 화르르 타는데 새색시더러 뛰어넘으란다
무첨당 새 주인 들어온다며 고운 모시한복 입으신 어르신들 뜰로 내려와 맞아주시는데 덜컥 내려앉는 가슴 두고 종부의 삶으로 돌진하는 또 다른 내가 보였다
한칸 방 들려온 큰상
대반 드시는 재종조모 동서분과 새댁 구경 온 친척들로 후끈 단 열기는 뜨거운 떡국을 데펴 몇 숟갈 받아먹도 못하고
이사람저사람 올림머리 고정 핀 꽂았다 뺐다 하는데 쓰라리기 그지없고 한복치마 동여맨 가슴은 노란 본견 저고리에 소금지도 그리는데 원삼까지 갖춰입으니 꼭꼭 싼 한여름 내 몸 구석구석 후벼내었다
낭자 튼 큰 머리는 목아 버텨라 하고 위태위태한 족도리는 조금만 움직여도 그림자를 바꾸어 온통 신경 곤두세운 현구례
맏며느리 절 받으며 곡 하시는 시어머니
엿물 밴 밤, 대추 한 홉을 본견치마 위로 던지는데 폐백그릇이고 춤추라는 어른분네 성화로 울다 웃는 분위기가 혼을 빼앗는다
삼촌 숙모는 방안에서
재종숙모까지 마루에서
문중원들은 뜰에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하늘이 뱅뱅 돌고 기운이 땅속으로 쑤욱 둘러빠지려 할 때 누군가 찬물을 쳐주어 간신히 정신차리고 나니 대 성가 종부의 책무가 비녀 끝에 떨고 있는데 어른 들이 낭자를 풀고 원삼을 벗기고 한바탕 수란을 떨고 나자 곧 배별상이 들어왔다
상객 오시면 몇 날 묵으시며 사가 범절도 보시던 이전과 달리 무더위에 민폐라고 당일 돌아서시는 아부지 배별상 사이에 두고 사위 향해 신신당부하시길 아침잠 많으니 꼭꼭 깨워주라 하시곤 뒷문 나가시니 낯설고 어른들뿐인 시댁 소리내어 울 수도 없이 눈물이 앞을 가려 혼이 났다
그때부터 새사람 다시보자며 그 좁은 방 들어오시는 어른들이 나래비 서니 일어섰다 앉았다를 얼마나 했던지 다린 근육이 뭉쳐 아픈데 세 살 먹은 삼종시누이는 팔랑팔랑거리길 나비 같아 기합받듯이 섰다 앉았다 하며 안어버이 하시던 말씀 “아라고* 깔보지 말고 알은 척 해야 한다”가 땀 꽤나 뺄 때 고만 됐다 시는 시고모 확실히 실세임을 각인시키셨다
유월 열여섯새는 태어나서 제일 서러운 내 신행날
*아라고 : 얘기라고
회가回家
신순임
낯선 시집살이 서먹서먹한 기분으로
촌수대로 인사 나서는 걸음
먼 촌수 기별이면 동여맨 치마 말기
들숨 조절하는데
칠첩반상 받으면 숟가락 소리 또 얼마나 큰지
간장 종지도 밥그릇 만하게 보여
몇 숟갈 뜨지 못하고 엄전 떨기 일쑤인 회가
새사람 들어오면 대소가 돌아가며 청해
자연스레이 시댁범절 익히게 하는데
고부가 치맛자락 밟으며 언덕 오른 황개이 할매댁
융숭한 점심대접 말미 랑콤 화장품 쥐어주시며
해외여행기 풀어 계촌 파악 확실히 하고
큰집 주인이라고 뜨시게 대하시어
회가 돌며 든 정은 해가 묵어도 똑같은 무게라
손아래 동서들 맞아
큰 집의 무게 가득한 다과상 마주하고
격식 따지지 말고 들게로 허물 벗겨보지만
시간이 앉히는 묵은때는 시간만 안다
* 회가 : 갓 시집온 새댁이 집안 어른들을 집마다 찾아가서 인사드리는 일
겹사돈
신순임
드라마 소재로 종종 나오는 겹사돈 보며
저 일을 우짜꼬 했는데
그 옛날 왕실 둘러싼 겹사돈과
명문가의 반열 형성하는 정재계의
정략결혼으로
물리고 물려 도는 혼맥 보며
혼담 오가던 때
먼 윗대에 한번 있는 혼인
족보를 확인하고
고려양반과 조선양반이 만나
유전적으로 머리 좋은 후세가 날 것이라고
많은 덕담 나누시던 기억 새롭다
어야든동 내 딸 이쁘게 봐 달라고
음으로 양으로 빌고
주고 돌아서 또 주고 싶은 며느리
아들 흠 안 잡히게 챙기며
양쪽 표 안 나게 나누는 애간장
겹으로 포갠 어미 심정
어렵기로 단연 일번인 사돈간
어찌 나눴을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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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봉제사奉祭祀 접빈객接賓客 두고
지인들이 묻는다.
“어떻게 다 감당하느냐”고
제 직장이고 직업이라 여기면
잔업과 특근쯤 된다고 답한다.
사실 밖으로가 준 답인데
그 속엔
수많은 물봉골 이야기가 숨어 있어
얼른 펼쳐보고 싶은 맘과
주인공이 되고픈 부픈 맘이 어우러져
시간 나누기 분분한데
무참당無添堂의 맑은 기운 받고 자란
세 아이 눈에
재담 즐기는 에미
글 소재 삼는 모습이
가장 행복해 보이길 소망하며
새로운 이야길 전한다.
병신년 칠월의 무첨당에서
신순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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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임 詩集 [※양동 물봉골 이야기 둘※]
[ 해설 ] -
명가名家의 품격과 조건
- 신순임 시집. 『양동 물봉골 이야기 둘』
김유중 문학평론가
1. 유교적 정신문화의 산실, 그 시공간적인 배경과 의미
경주 양동마을에 터를 잡은 여강驪江 이씨 문중은 해동海東의 손꼽히는 명문가다. 조선조 성종成宗대 이래 이 마을에 정착하여 누대로 학문과 청렴을 벗 삼아 명가로서의 고고한 기풍을 이어오고 있으니 그 자부심 또한 남다를 수밖에 없다. 특히 동방오현東方五賢중 한 사람인 문원공文元公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 선생을 배출한 가문이라는 자신감과 긍지는 후손들에게도 그대로 전해져 내려와 사회적, 심리적으로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이 가문의 종택이 자리 잡고 있는 양동마을은 양반가의 기상이 서려 있는 전통 한옥 양식의 건물들과 그 밖의 유형무형의 문화적 유산들이 한데 어우러져 있어서 역사적 보존 가치가 매우 높다. 그런 관계로 일찌감치 정부와 학계의 주목 대상이 되었던 바, 이 마을이 국가지정문화재(1984년)등록에 이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2010년)에 등재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이다.
설창산 업고 성주봉 안은 경산서당
무첨공 할배 흠모하는 나그네
구도문 열고 찾아들면
우뚝 선 석등이 손님 맞는다
설창산 휘감은 청풍이 던지는 선문답에
성주봉 건넨 명월이
남인이네 북인이네
노론이네 소론이네
기 백리 멀어진 한양 소식 전하는 화두 속
이선당에서 새어나오는 소리
자네 본관은 어덴가
귀문의 선조께서는 학문이 대단하셨다네
그래, 사서삼경은 떼었을 터
한 수 읊으며 약주 한 잔 받게나
꽃자리 깔고 글동냥하는 회화나무 사이
청풍명월 소풍 나와
고매한 선비 그림자 데불고 놀고 질 때
담벼락 베고 누워 경비 서던 배롱꽃
배우는 자 반드시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는
학진재 숨은 뜻에 정색하고
본분을 되새긴다
-「경산서당 시경」전문
조선조 유림들은 경치 좋은 장소나 내력이 있는 건물에 이르러서는 어김없이 내면에 떠오르는 감회를 바탕으로 한 편의 글을 남겼다. 이를 본받고 따르기라도 하듯, 이번 시집에서 신순임 시인은 양동마을의 고택 하나하나를 소재로 삼아 서정적 정취가 담긴 텍스트들을 소개하고 있다.
눈여겨 볼 점은 이 경우에 시인의 의도는 단순히 주변 경관에 대한 주정적인 토로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에게 있어 텍스트의 배경이 되는 건물이란 그 자체가 선조들의 기품이 서려 있는 정신이며 가문의 영예가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는 역사다. 다시 말해서 양동마을에 관한 한, 장소나 건물이 가지는 공간적인 의미란 그 속에 배어 있는 시간적인 의미와 따로 떼어 생각할 수가 없다. 그런 까닭에 그 장소, 그 건물에 설 때면 매번 남다른 감회에 젖어 그곳에 스며 있는 기품을, 선대의 진지한 가르침을 다시 한 번 가슴 깊이 되새기고자 애쓴다.
세계문화유산 등재 이후 양동마을을 찾는 관람객들, 외지인들의 수는 부쩍 늘었다. 마을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은 물론 거기 사는 토박이로서는 자랑스럽고 뿌듯한 일이다. 그러나 그들이 보고 간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정신은 깨치지 못하고 다만 겉모습만을, 마을이 형세와 주변의 경치만을 수박겉핥기 식으로 훑고 간 것은 아니었을까. 다음 텍스트는 양동마을 안주인으로서 느끼는 그런 우려 내지 실망감을 솔직하게 드러내 놓고 있다.
세계문화유산 등재되고 좌우 문지기 된 해태
외지인들에게 모습 드러내어 입소문 타길
남 시선 안 받고 한바탕 놀아보기 좋은 곳이라니
고택 체험
그저 놀고 먹는 곳으로 자리매김 하여
선조들 고매한 정신유산 갈 곳 없어져
여관旅館으로 전락할까 우려되는구나
-「내곡정」부분
시인은 선조들이 애써 일구어낸 수준 높은 정신문화유산이 이 고장의 존재와 더불어 널리 알려지기를, 그래서 이곳을 찾은 사람들 마음속에 양동마을이 단지 먹고 놀다 가는 그저 그런 관광지로만 각인되지 않기를 깊은 곳으로부터 간절히 기원하고 있다. 그런 바람이야말로 진정한 명문가의 후예다운 발상일 것이며, 그런 바람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양동마을이 세계 속에 자랑할 만한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으로서 그 위상을 확고하게 굳혀나가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선대가 이룩한 지식과 지혜를 받들어 모시고 이를 대대손손 이어나가고자 하는 후손들의 지극정성이야말로 이 마을에서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그 어떤 유형의 유물이나 유산보다도 더 큰 문화적 자산이라고 하겠다. 사실 모든 것이 변화된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 조상이 물려준 유형, 무형의 전통적인 가치들을 보존하며 유지하기란 생각만큼 쉽지 않은 일이다. 굳이 물질만능, 금전만능의 시대상을 탓하고자 함이 아니다. 현대사회에서 적응하며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일정 정도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며 가치관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해야겠기에 하는 말이다.
그러나 주변의 모든 것들이 빠르게 변해가는 현대 사회에서도 지켜져야 할 도리와 흔들리지 않는 가치는 분명코 있는 법이다.
유복자로 나신 8대조 할배
생후 8일만 큰 집으로 양자 들리는
나랏님 명받아
핏덩이 내어놓으시던 할맴
죽어서도 그 피붙이 못 잊겠노라
달밭에 산소 써 달래셨다는데
설천정에서 무첨당으로 오시어
대과급제로
가문의 영광 다시 이어내시어
지금까지 생양가로 남다르게 지내는
신평아재 댁은 8대 봉사하시는데
큰집에 무슨 일 생기면
험하고 궂은일부터 해결하시고
셈이 빨라 문사 별임 도맡아 하시는데
약주가 늘 일 만들어
어느 게 참모습인지 헷갈리지만
늦은 밤 종가 손님 든다 해도
서슴없이 내당 들어오셔
상 들어주시는 향념
종가 지키는 힘이다
-「신평아재」전문
양자의 후손이 8대 봉사를 한다니 평범한 집이라면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사정임에도, 별 내색하지 않고 예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에 따라 묵묵히 받들어 모시는 <아재>의 정성이 놀랍기만 하다. 말이 그렇지 생가와 양가, 양쪽 집안의 대소사를 일일이 다 챙긴다는 것은 여간 정성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사실 바쁜 현대사회를 살면서 누구에게나 이런 일을 감당하라고 요구하기는 어렵다. 지키지 못한다고 해서 탓할 일도 아니고 또 적당히 한다고 해서 특별히 욕먹을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그걸 온전히 내 몫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감당하여야 할 일로 받아들이는 이가 있다는 것은 정녕 놀랍고도 아름다운 일이다. 여기서 천륜이 먼저냐 인륜이 먼저냐를 놓고 따지고 드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이 시대에도 변함없이 우리가 소중히 지키고 살아가야 할 전통적인 가치와 덕목들은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아재의 그런 넉넉한 모습에서 “종가 지키는 힘”을 읽는다. 그렇다. 그건 단순히 구성원 개개인의 문제가 아닌, 가문 전체의 수준이며 역량이고 의지이다. 후손들의 그런 자발적인 헌신과 정성이 보태졌기에 명문가로서의 권위는 보다 든든해지고 종가의 위상은 더더욱 빛나는 것이다.
2. 명문가 종부의 잘, 큰 자부심과 무거움
유서 깊은 가문의 종부로 살아간다는 것은 큰 광영인 동시에 한평생 벗지 못할 무거운 짐을 머리 위에 이는 일이다. 무첨당無忝堂 안주인이라는 자리는 실로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감으로 다가온다. 그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많은 것들을 짊어져야 하며 더불어 많은 것들을 내려놓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남편과 자식들 뒷바라지하며 몇 안 되는 시댁 식구들만 챙기면 되는 여느 여인네들과는 달리, 모셔야 할 분들과 받들어야 할 일들, 챙겨야 할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에 평소에도 그의 일상은 늘 긴장되고 조심스럽다.
삼촌 숙모는 방안에서
제종숙모까지 마루에서
문중원들은 뜰에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하늘이 뱅뱅 돌고 기운이 땅속으로 쑤욱 둘러빠지려 할 때 누군가 찬물을 쳐주어 간신히 정신차리고 나니 대 성가 종부의 책무가 비녀 끝에 떨고 있는 데 어른들이 낭자를 풀고 원삼을 벗기고 한바탕 수란을 떨고 나자 곧 배별상이 들어왔다
상객 오시면 몇 날 묵으시며 사가 범절도 보시던 이전과 달리 무더위에 민폐라고 당일 돌아서시는 아부지 배별상 사이에 두고 사위 향해 신신당부하시길 아침잠 많으니 꼭꼭 깨워주라 하시곤 뒷문 나가시니 낯설고 어른들뿐인 시댁 소리 내어 울 수도 없이 눈물이 앞을 가려 혼이 났다
그때부터 새사람 다시보자며 그 좁은 방 들어오시는 어른들이 나래비 서니 일어섰다 앉았다를 얼마나 했던지 다린 근육이 뭉쳐 아픈데 세 살 먹은 삼종시누이는 팔랑팔랑거리길 나비 같아 기합받듯이 섰다 앉았다 하며 안어버이 하시던 말씀 “아라고 깔보지 말고 알은 척 해야 한다”가 땀 꽤나 뺄 때 고만 됐다 시는 시고모 확실히 실세임을 각인시키셨다
유월 열엿새는 태어나서 제일 서러운 내 신행날
-「신행날」부분
예나 지금이나 신부에게 신행이란 약간은 부담스럽고 긴장되는 일이다. 그러기에 시댁에서는 가능한 한 따듯한 마음으로 대접하여 신부의 긴장감을 풀어주기 위해 애를 쓴다. 그러나 그 시댁이 명문대가요 더군다나 종손 집안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도 그럴 것이 종가 입장에서는 단순히 새 사람 하나가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장래 집안 전체를 책임져야 할 안주인을 맞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시댁 식구들은 새로 들어온 종갓집 맏며느리의 인물 됨됨이를 살피고자 했을 것이고, 이런 과정에서 아마도 신부가 껶었을 심리적 압박감과 피로도는 극에 달하였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신부는 그 날을 “태어나서 제일 서러운”날로 기억하고 있다. 각오야 이미 단단히 해 두었을 터이지만, 막상 그것을 직접 겪는다는 것은 또 다른 일이다. 어쩌면 그것은 앞으로 한 집안의 종부로서 무수히 헤쳐나가야 할 험난한 가시밭길의 예고편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희생해가며 주변 사람들을 돌보고 집안 전체를 챙기며 가문을 위해 봉사하는 삶, 그것은 종부 앞에 놓인 숙명이다. 그 숙명 앞에 신행날 신부의 몸은 지칠 대로 지치고 정신은 아득하기만 하다.
종부로서의 삶이란 일거수일투족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어디서든 보는 눈들이 있고 입들이 있고 귀가 있기에 잔일 하나하나에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시댁의 풍속과 예법이 지엄할진대, 매사에 그걸 익히고 실행에 옮기는 것도 여간 벅찬 일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본의 아니게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예컨대 이런 일이 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길사 때 입을
청색 갑사치마에 미색 삼회장저고리 맞추러
서문시장 나갔다가가
자주색에 엷은 자주색 삼회장저고리로
어머님 것도 같이 맞춰왔더니
탱자 가시 세운 어른들
너 시어마이가 어찌 삼회장저고리를 입느냐고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나무라시는데
철없는 며느리와 경우바른 어른들 사이에서
어른 것 챙길 줄 알아 고맙고
색이 고와 더 좋다시며
아래 위로 치인 애간장 슬며시 포장하시던 자애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고고창창한 법도 앞에서
-「삼회장저고리」전문
본래 반가의 미망인은 아무리 길사가 있다 하더라도 회장저고리를 입는 법이 아니다. 그러나 갓 들어온 새댁이 이런 예전의 법도를 어찌 알았겠는가. 애써 지어온 시어머님의 저고리를 두고 주위 어른들이 수군대며 한마디씩 거들고 나서는데, 이런 상황이야말로 진정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을 것이다.
이런 난감한 상황에 처하여 조금이나마 마음의 부담을 덜어 준 이가 바로 당사자인 시어머니였다. 전해져 내려오는 법도도 법도지만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어른 것 챙길 줄 알아 고맙”다고, “색이 고와 더 좋으시다”고 경험 없는 며느리를 두둔하고 나선 것이다. 종부에겐 그런 두둔이 한편으로는 고맙고 한편으로는 더욱 따갑게 느껴졌으리라. 나중에 생각해도 아찔했던 순간이건만, 그런 시어머님의 자애로운 가르침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무첨당 안주인으로서의 역할도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선대의 사랑과 가르침은 언제든 정해진 법도나 예절 이전에 이심전심으로 윗대에서 아랫대로 전해지며 그러한 가운데 더욱 은은하고 깊은 울림으로 다가오는 법이다.
종부로서의 의무와 역할이 무거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에 비례하여 주변 분들의 종가에 대한, 그리고 종손과 종부에 대한 배려와 보살핌 또한 각별하다. 전통 사회에서 어떤 경우에도 종가집의 위상이란 절대적이어서, 종가의 경사란 그 자체로 가문의 경사이며, 종가가 겪는 애․ 흉사 또한 가문 전체의 그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만약 종가에 자그마한 흠결이라도 나는 날에는 그것은 그대로 가문 전체의 수치요 굴욕이라는 생각이 강했다.
아래의 텍스트는 양동마을 여강 이씨 집성촌에 아직까지 자리 잡고 있는 이러한 전통적인 심리와 정서를 잘 반영해주고 있다.
이웃에 개도둑 들어
겁 모르고 경찰서 신고해
범인 대질 신문하자고 찾아온 경찰에게
우리 종부 경찰서 보낼 수 없다고
이 사람은 그런 데 갈 자리 아니라며
당신 등 뒤로 숨기어
시대 거슬러 오르게 하시더니
소리 소문 모르게 영구차 타
알찌근했는데
-「벽동댁」부분
사정이야 어찌 되었건, 우리 집안 종부를 잡범들이나 출입하는 경찰서로 보낼 수는 없다. 설령 그것이 죄의 유무와 전혀 상관없는 일 때문이라고 해도 말이다. 종가는 종가로서 지켜야 할 체면과 위신이 있기에, 그런 일만큼은 절대 용납되어서는 안 될 일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위의 에피소드는 물론 일종의 과민 반응에서 비롯된 것이며 시인의 말처럼 “시대를 거슬러 오르”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런 행동, 그런 배려에서 우리는 종가와 종부를 받들고 보살피고자 하는 대소가 안팎 어른들의 단호한 의지와 깊은 사랑을 엿보게 된다. 비록 종부로서의 역할이 고되다고는 하나, 종가를 향한 친지 분들의 그런 각별한 정이 있는 한 그 역할에 조금이라도 소홀함이 있을 수는 없으리라.
3.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변하는 것과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어느 시대고 있기 마련이다. 과거의 것만을 고집하여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한다면 이는 우매한 일이며, 현재만을 중시하여 모든 것을 바꾸려든다면 또한 이는 불행한 일이다. 중요한 것은 양자가 지닌 장점과 단점을 잘 살펴 전자를 취하고 후자를 버림으로써 상호간의 조화와 균형을 취하는 일일 것이다. 말은 쉽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 이러한 원칙을 실행에 옮기기란 말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다.
선외가에서 오신 손님
연비연사 꿰뚫으며
풀어놓는 범절 보따리
밭양반 출타 중이라
내당 드시잔 소리도 못하고
그 양반도
안녀자와 수작 뻐젓잖아
데면데면대다가 돌아갔는데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 더 많은 법
안다고 지키려면
모르는 사람 경우 없게 만들고
모른다 하기엔
알고 있는 양심이 찔려
이래저래 어려운 내외법
어겼다고 과태료 나오는 것도 아니면서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줄타기시키는
양동에서는 제일 무서운 법
-「내외법」전문
지키면 좋고 안 지켜도 큰 흠이 될 것은 없다고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지켜야 마땅하다고 믿는 것도 있는 법이다. 양동마을에서는 내외법이 바로 그런 경우다. 남편 출타 중에 찾아온 외부손님을 맞아 어찌 할 바를 모르는 심경을 읊은 위 텍스트는 오늘날 일반인들의 기준으로는 얼핏 잘 이해가 되질 않는다. 멀리까지 일부러 찾아온 손님을 데면데면하게 돌려보내기란 상식적으로 예의에서 한참 벗어난 행동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그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남녀가 유별한데, 아무리 먼 인척이기로 남편 없는 시간에 한 자리에 앉아 오래 머무는 것은 민망한 일이기 때문이다. 마음으로야 집안으로 모셔 정성껏 대접하고 싶을 테지만, 사정이 이렇다보니 엉거주춤한 상태에서 그냥 돌려보낼 수밖에 없다. 그 마음인들 오죽 불편했으랴. 그럼에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은 반가의 법도가 그렇고 마을의 풍습이 그렇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예법과 풍습에 관한 한 과거와 현재는 언제든 어긋나기 마련이다. 그 틈바구니에서 갈피를 잡기란 생각만큼 쉽지가 않다. 더구나 그것이 명문가의 경우라면 더욱 그렇지 않을까.
전통문화 이어가고 있다는 자부심 앞
현실과 타협해야 하지 않느냐는 물음
거침없이 몸이 던져 목젖이 뜨끔뜨끔하던 날
대청에서 문중회의가 있었는데
뜻 모르는 아이에게 문외배 시킬 때
한번 만에 계촌 짚어주기 어렵고
어쩌다 한 번씩 뵙는 어른 분 호칭을
숙지하고 있으라고 강요하기도 어렵고
연세 드신 분들
한복과 양복 사이에서 헷갈리는 아이 눈살미
자꾸 닦아주기도 어렵고
지금이사 한옥에 사니 문 밖이 마루라 괜찮지만
아파트라면 현관이 대문인데
절 받으시라고 방 안으로 들어가시라 하기도 그렇고
똑같은 삼촌인데 외삼촌과 이모는 어머니와 동석했을 때만 한다는 친족 위주의 범절 보며 퇴색되어가는 가가예문家家禮文 애써 유지하려다 세대 간 갈등 조작하는 것은 아닌지
안 그래도 구닥다리란 소리 종종 듣는 사람이 아이들 장래 걸림돌이나 되지 않아야 할 터인데
지키고 산다는 것이 때론 무거운 짐이다
-「문외배」전문
아직도 문외배라니! 하고 탄성을 지를 만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엔간한 집이 아니고서는 이제 젊은 세대는 문외배라는 풍습도, 심지어는 그 말뜻조차도 모르고 자란 경우가 대다수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니 전통문화를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과 바뀐 시속에 따라야 하지 않겠느냐는 현실 감각 사이에서 갈등이 생겨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늘 그렇듯이 이 경우에도 어느 한쪽을 택해 결정하기란 쉽지 않다. 어느 쪽을 택하건 그 나름의 문제점은 있기 마련이고, 마음 한 켠 얼마간 아쉬움이 남는 것 역시 피할 길이 없다. 시인의 말대로 “지키고 산다는 것이 때론 무거운 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무겁다고 하여 어느 날 갑자기 내려놓는다는 것도 선뜻 내키지는 않는 일이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었으니 무조건 과거의 것만을 옳다하여 고집하고 살기는 어렵다. 변화된 시대에 맞추어 일정부분 예법도 따라 변해야 하는 것이니, 그러한 변화의 과정에서 어디까지 지켜야 하고 어디서부터 바꿀 것인지를 두고 고민이 없을 수가 없다.
문상 가서 사배 드리면
상주부터 왜 네 번씩이나 하느냐고
아직도 그걸 지키며 사느냐고 물어온다
양성평등 세상
남녀 똑같이 재배하면 안 되느냐는
신식교육 받은 아이들 물음
엄마까진 옛법 지킬 테니
성인도 시속을 따르랬으니
너들 땐 알아서 하라 이르고 돌아서노라니
전통문화 지킨다는 자부심이
세대 간 갈등의 골 파는 건 아닌지
한구석이 캥긴다
-「재배와 사배에 관하여」부분
농경사회 집성촌은 노동력 제공하며 미풍양속 지키고 유가의 범절과
전통의 맥 이으며 명분과 체면 중요시 여겼는데
산업사회에선 격식보다는 현실적으로 행동하는 서구문물에 편리성 더해
적당한 형식 갖추는 풍습
웃어른께 아침저녁 문안 여쭙는 게 뭐 그리 어려우랴 싶지만
모든 것이 낯선 시댁으로 들어온 훗날부터 높은 법도 아래
눈에 안 띄게 세안하고 치장하고 한복 갈아입고 상 차려
식전에 문안 여쭐려면 새새댁에겐 크나큰 부담인데
스무 해 전 밭어른 상중의 내 혼인식은 현대식으로 치르고 폐백은 구혼식 따랐는데 신행 이튿날 아침부터 상복 갈아입고 사관들이고 빈소 들어 상식 올리고 현사당 때는 다시 색복입고 사당 참배하고 상복으로 다시 갈아 입는데 곤혹스러운 것은 한복이 금방금방 땀에 젖는데 어른분네도 모시한복이래도 덥고 거추장스럽기는 마찬가지라 사흘 만에 대소사에서 모두들 돌아가시고 안어른께서도 그만 하라시어 멈췄지만 한 집에 살며 아침저녁 인사 안할 수는 없는 것이고 단지 음식 장만하여 한복 갈아 입지 않는 것이었다
-「사관들이기」부분
“성인도 시속을 따르”라는 옛말이 있긴 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참고 사항일 뿐이다. 불편한 것은 불편한대로 가급적이면 전통적인 가치와 예의범절을 지키고 싶고 따르고 싶은 것이 종부된 이의 심정이자 도리이다. 그러자니 불편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한편으로는 변화된 시대 인식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자신만 홀로 구습에 얽매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막연한 불안감에 싸이는 경우도 있다. 때로는 <전통문화 지킨다는 자부심이/세대 간 갈등의 골 파는 건 아닌지>하고 스스로 반문해보기도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세월이 흐르면 어차피 모든 것은 조금씩 변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여전히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웃어른을 공경하고 가문 전체의 명예를 중히 여기는 우리 전통 사회 본연의 고유한 가치관일 것이다. 이런 미풍양속까지 모두 시대 변화의 흐름에 휩쓸리게 된다면 그건 정녕 바람직스럽지 못한 결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물론 이 말은 형식 자체는 중요치 않으나 무시해도 별 상관없다는 말과는 거리가 있다. 때로는 형식이 곧 내용이요, 반대로 내용 속에 현식이 포함되어 있는 경우도 상당수 있는 까닭이다. 적절한 모습의 형식은 유지하되 지나치게 형식 위주로 흐르지 않도록 유의하는 것, 그리하여 시대 변화에 발맞추어 내용과 형식 간의 최상의 조화와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접점을 찾도록 노력하는 것, 즉 “현실적으로 행동하는 서구문물에 편리성 더해/적당한 형식 갖추는 풍습”의 창조야말로 오늘날과 같이 변화된 시대상에 대처하는 양동마을 여강 이씨 종가의 슬기요 지혜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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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4의 글 ◆
경주 양동마을에 터를 잡은 여강驪江 이씨 문중은 해동海東의 손꼽히는 명문가다. 조선조 성종成宗대 이래 이 마을에 정착하여 누대로 학문과 청렴을 벗 삼아 명가로서의 고고한 기풍을 이어오고 있으니 그 자부심 또한 남다를 수밖에 없다. 특히 동방오현東方五賢중 한 사람인 문원공文元公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 선생을 배출한 가문이라는 자신감과 긍지는 후손들에게도 그대로 전해져 내려와 사회적, 심리적으로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이 가문의 종택이 자리 잡고 있는 양동마을은 양반가의 기상이 서려 있는 전통 한옥 양식의 건물들과 그 밖의 유형무형의 문화적 유산들이 한데 어우러져 있어서 역사적 보존 가치가 매우 높다. 그런 관계로 일찌감치 정부와 학계의 주목 대상이 되었던 바, 이 마을이 국가지정문화재(1984년)등록에 이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2010년)에 등재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이다.
― 김유중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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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순임 시인∥
∙ 경부 청송 출생
∙ 월간『조선문학』시부문 등단
∙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원.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 시집 『무첨당의 5월』『앵두세배』『양동물봉골 이야기』
∙ 현재 양동마을 무첨당無添堂의 안주인으로 고택의 주변을 스케치하고 글과 사진으로 옮기며 전통문화를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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