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등 절에 들어서면 법당 앞에 탑과 함께 서 있는 것이 석등이다. 어느 절에서나 쉽게 볼 수 있지만 대개는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라. 돌로 만들었지만 정성을 들인 이 등불은 불을 피우기에는 매우 과학적이니 구조로 되어 있으며, 하나 하나의 조각은 만들어진 시대의 예술성을 보여주고 있다. 나아가 불교에서 이것을 만들어 놓은 이유가 무엇인도 조금만 생각하면 추측해 낼 수 있다.
1.1 빛에 담긴 의미
본래 석등은 중국 고대부터 무덤을 만들 때 비석 등과 함께 사용되었으나, 불교에서는 진리를 밝히는 지혜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져 여러 종류와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석등은 부처를 상징하는 탑과 더불어 사찰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처음에는 탑 앞에 세워졌던 석등은 나중에는 스님의 무덤인 부도 앞에도 세워지고, 이후 고려.wtjstleo에는 임금과 고위 관리의 무덤 앞에도 절의 석등과는 다소 다르지만 장명등이란 이름으로 세워졌다.
1.2 석등의 형태
석등을 보면 적당한 높이에서 등불을 피워 빛을 발하도록 되어있다. 등불을 피우는 것으로는 가장 적당한 조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석등에서 말하는 빛은 부처의 진리의 빛을 상징하고 있는 만큼 여러 가지의 의미가 담겨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8각형석등으로 상하 비례의 교묘함이나 조각의 정교함에서 신라 석등 중에서도 손꼽히는 걸작이다.(국보17호)
석등의 구조는 부도와 비슷하나 더 단조로운 모습이며, 조각도 간편한 편이다. 석등은 기단부와 불을 켜는 모체 부분인 불집 그리고 그 위를 덮는 옥개석, 지붕돌 위에 올려지는 장식인 상륜부로 되어 있다. 기단부의 중심부분은 기둥같이 길게 되어 있어서 간주석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석등의 가장 전형적인 형태는 8각형 양식으로 이를 취한 것으로는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을 비롯하여 장흥 보림사 석등 그리고 청도 운문사 금당 앞 석등 등이 대표적이다. 전체적으로 8각형을 이루고 있는 것은 불교의 여덟가지 실천덕목인 팔정도를 상징한다고 한다. 팔정도는 바르게 보라, 바르게 생각하라, 바르게 말하라, 바르게 행동하라, 바르게 생업을 유지하라, 바르게 수행하라, 바른 신념을 가져라, 마음을 바로 잡아라‘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1.3 변형된 석등
간주석을 두 마리의 사자로 조각한 쌍사자석등은 보은 법주사 쌍사자석등과 국립광주박물관으로 옮겨지니 중흥산성 쌍사자석등이 유명하다. 8각 기본형으로부터 완전히 변형된 특이한 모양의 석등도 있다. 여수 흥국사 석등은 하대석에 복련 대신에 거북이를 조각하여 놓았다. 고려시대에는 4각형의 석등이 나타나는데 논산 관촉사 석등이 대표적이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사찰이나 부도 앞에 석등이 많이 세워지지 않았다.
국내 최대의 2층 법당인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에는 크기에 걸맞은 석등이 있으니 높이가 6.4m나 됩니다. 통일신라 때 건립된 석등은 요즘 건물 2층 높이로 세계에서 가장 큽니다. 국보 제12호인데 이름은 그냥 '각황전 앞 석등'이랍니다.
글.그림=김영택(펜화가)
<남원 실상사-석등>
통일신라의 고복형석등으로 그 전체적인 형태는 화엄사 각황정 앞 석등과 유사하다. 현재 남아있는 석등 가운데 유일하게 오르내리는 돌계단이 남아있다.
(보물 35호)
<보은 법주사-쌍사자 석등>
두마리의 사자가 화사석을 받치고 있는 모양으로 간주석에 변화를 준 창의성이 돋보이는 통일신라시대의 걸작
(국보5호)
<논산 관촉사-석등>
화사석이 4각형 모양을 하고 있어 이전 8각형 석등과는 다소 다른 모습이다. 만든 시기는 고려 광종때로 추정된다.
<양주 회암사-나옹선사부도앞 석등>
고려말 이후로 임금의 능이나 정승의 무덤에 장명등이란 이름으로 4각형의 석등이 많이 세워진다. 이 석등도 장명등의 성격을 띤 것으로 보인다.
<구례 화엄사 4사자 3층석탑 앞 석등>
이 석등은 간주석의 안쪽에 석탑을 향해 공양을 하는 모습의 승려상이 배치되어 있어 독특한 모습이다. 이 상은 화엄사를 창건했다는 연기조사라 알려져 있다.
1.4 의상대사를 사랑한 선묘낭자
<영주 부석사 선묘각>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가 창건한 부석사에는 의상을 사랑했던 한 여인의 애절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이 여인의 그림을 모신 조그만 건물이 무량수전 뒤편에서 답사객을 맞이하고 있다. 당나라로 불교를 배우기 위해 배를 타고 신라를 떠난 의상은 그곳에서 어느 신도의 집에 며칠을 머무르게 되었다. 그 집의 딸 선묘는 의상을 사모하여 결혼을 요청하였으나 의상은 오히려 선묘를 감화시켰고 선묘는 불교에 귀의하여 의상이 뜻을 펼치는데 도움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의상은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다시 선묘의 집을 찾아 그동안 베풀어준 편의에 감사를 표하고 곧바로 배에 올랐다. 의상에게 전하고자 준비한 옷가지 등을 전하기도 전에 의상이 떠났다는 것을 뒤늦게 안 선묘는 급히 부두로 달려가 저만큼 떠나가는 배를 향해 옷상자를 던지니 상자가 물길을 따라 배에 닿았다. 그리고나서 선묘는 바다에 몸을 던져 의상이 탄배를 보호하는 용이되었다. 용으로 변한 선묘는 의상이 신라에 도착한 뒤에도 줄곳 보호하고 다녔다. 의상이 뜻을 펼칠수 있는 땅을 찾아 봉황산에 이르렀으나 이미 도둑의 무리들이 그 땅에 자리잡고 있었다. 선묘 용은 이번에는 커다란 바위로 변하여 공중에 떠서 도둑의 무리를 위협함으로써 그들을 모두 몰아내고 절을 창건할 수 있도록 했다. 의상은 뜬바위가 절을 지을 수 있도록 했다고 절 이름을 부석사로 했다고 한다. 지금도 부석사의 무량수전 뒤에는 부석이라고 새겨진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가 선묘 용이 변화했던 바위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