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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시험하는 바리새인들(1-4)
그리스도인들에게 배우는 일은 자신을 알아가고, 자신을 지으시고 통치하신 분을 알아가는 일입니다. 자신이 믿는 분을 잘 모른다면 자신의 믿음은 자신의 신념이고 자신의 바램일 뿐입니다. 주님을 잘 알고 잘 믿어야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 삶을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배우려하지 않고 시험만 하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입니다. 배울 준비가 안 되었습니다.
1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 강 건너편으로 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 가르치시더니 2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3대답하여 이르시되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4이르되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1-4)
바리새인들은 겉으로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제 가면을 벗고 대놓고 예수님을 대적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과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비유하셨습니다. 실제 하나님과 백성이 맺은 언약은 결혼식 때 신랑과 신부가 맺은 혼인서약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스라엘은 바람난 신부와 같았습니다. 음란한 신부로서 신랑을 버리고 우상숭배를 일삼는 나라였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음란한 신부인 이스라엘을 그들이 떠받들던 앗수르와 바벨론에 넘겨 버리셨습니다. 하지만 영영 버리신 것은 아닙니다.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보여주셨듯이 신랑 예수님을 보내셔서 이제 회개한 신부들과 새로운 언약, 새로운 결혼 과계를 맺게 하셨습니다. 혈통적인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방인이라도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온 자들은 예수님의 신부가 될 수 있었습니다. 과연 이스라엘은 이 신랑을 잘 영접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것이 오늘 본문에 배경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거의 도착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갈릴리 지역을 떠나서 헤롯 안디바의 관할하는 유다 지역으로 들어오십니다. 그런데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고, 요단강 건너편 길로 내려오십니다. 예루살렘이 가까울수록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예수님의 발언도 강해집니다. 더욱이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 사람들의 반응도 더 노골적입니다.
이곳, 유다 지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긍정적인 감정과 부정적인 감정을 가진 두 종류의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변함없이 무리를 가르치셨다고 소개합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무리를 치유하셨다고 소개하고 있고(마태복음 19:2), 마가는 예수님께서 무리를 가르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치유와 가르침은 예수님의 사역으로 분리될 수 없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곳에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교묘하게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가르치시고 계신 예수님께 시험하기 위해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라고 이혼에 관한 질문을 던집니다. 이 질문을 직역하면 ‘남편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적법한 것입니까?’입니다. 이 표현에는 두 가지 숨은 뜻이 들어 있었습니다.
먼저 바리새인들은 신명기 24:1-2(1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2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의 관점에서 이혼이 합법적인지를 질문합니다. 이 질문을 통해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게 죄를 덮어씌울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또한 이 질문은 당대 정치적인 상황과 연관해서 특별히 헤롯 안티바스는 자기 형제의 아내를 취했고, 이 일(이혼 문제) 때문에 세례 요한의 강도 높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결국 마가는 요한이 이 일과 연관되어 죽임을 당했다고 기술합니다(6:14-29). 그러므로 이 이혼의 이슈는 당시 역사적 맥락에서 매우 민감한 사안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도리어 모세가 무엇을 명했는지 되묻습니다. 이에 바리새인들은 신명기 24:1-4에 근거해서 이혼 증서를 주고 내버리기를 허락했다고 답합니다. 사실 신명기 말슴은 이혼에 대한 명백한 명령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담긴 사악한 의도를 드러내려는 의도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신명기 말씀은 특정한 조건이 만족되었을 때 이혼을 실제 가능한 것으로 보기는 하지만, 실제 삶을 영위해가기 위한 허용의 차원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신명기 율법은 불법적인 이혼과 재혼을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약자인 여성들을 보호하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이혼을 명령하신 일이 없었습니다. 다만 악한 인간들의 행위 때문에 허락하섰을 뿐입니다. 그러나 질문을 던지 바리새인들은 이혼이 하나님의 명령인 듯 다루었습니다.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그들의 논리적 모순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결혼에 대해 가르치신 예수님(5-9)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들의 공통점은 ‘사랑’이 주제입니다. 남녀 간이나 부모 자녀 간에 사랑이든 등등 사랑이 주제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소설이나 연극들의 구성을 사랑하나 때문에 모든 것을 다 버린다는 내용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반대로 보면, 가장 슬픈 이야기들도 공통점이 있습니다. 다른 것에 욕심을 부리다가 정작 제일 중요한 한 가지, 이것을 놓쳐버리는 것을 듣습니다.
5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6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7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8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9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5-9)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혼을 허용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사람들에게 이혼을 허용하셨는지를 밝히십니다. 그 이유는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들의 몰이해와 사악함을 함께 연결시키십니다.
신명기 말씀에 근거해서 아내를 버릴 구실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완악함의 표현입니다. 이것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대적하는 율법 남용 사례에 해당합니다. 지금 바리새인들은 법을 제정하시고 수여하신 하나님의 원래 의도를 망각한 채 개별 규정에 집착해서 법을 남용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완악함에 대항해서 예수님께서는 결혼의 원리를 설명하심으로써 이혼 문제를 다루십니다.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최초의 모범으로 돌아가서 그 원리와 모범을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진정으로 반영하는 윤리는 허용되는 원리가 아니라 근본적인 창조의 원리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그 원리는 창세기 1:27과 2:24로부터 출발하는데, 이 본문들은 부부의 성적 결합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요, 유일하면서도 깨어지지 않는 원리임을 나타냅니다. ‘한 몸’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결혼이 인간의 편리나 사회적 관습 이상의 훨씬 깊은 뜻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내십니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해서 예수님께서는 이혼에 관해서 단호하게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유대인들은 어떠한 근거 위에서 이혼을 허락해야 하는지를 논한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이혼을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해치는 것으로 이해하십니다. 이것은 그레코만 관점과 유대적 관점에서 보면 매우 급진적인 관점입니다.
이러한 원리들에 대한 예수님의 호소는 필연적으로 성경의 어느 한 본문을 다른 본문과 대치시키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느 한쪽을 더 선호해서 다른 한쪽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각의 본문에는 고유한 기능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이상적인 뜻을 말하는 본문도 있고, 인간의 죄성으로 인해서 허용된 본문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의 제자도는 매우 급진적입니다. 이것은 당대의 이혼 풍조를 뛰어넘는 혁명적인 가치관입니다.
가르침에 대한 결론(10-12)
어떤 상황을 보면서 사람들은 해석이 다릅니다. 한 사건이지만 긍정적으로 해석하는가 하면, 번대로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경우를 봅니다. 이 해석의 차이는 매우 큽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긍정적인 상황을 중심에 놓고 해석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10집에서 제자들이 다시 이 일을 물으니 11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 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12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 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10-12)
이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원래 목적을 언급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서 제정된 결혼의 기본 원리를 제시하심으로써 이혼의 부당함을 확고히 밝히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급진적 가르침의 결론으로 이혼과 재혼을 간음으로 규정하십니다. 이혼과 재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영원한 연합을 새로운 성적 연합으로 대체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혼 동기가 완악한 마음이었다면 재혼은 그 완악한 마음이 열매를 맺은 것에 해당합니다.
이런 맥락 하에서 예수님께서는 남편과 아내 모두에게 같은 원리를 적용하십니다.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것도 간음이요,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 시집가는 것도 간음입니다. 이러한 원리는 당시 남성 주도 사회에서 매우 충격적인 가르침이며, 예수님께서 이 땅에 가져오신 하나님 나라 복음의 정신을 정확하게 반영하는 가르침입니다. 복음의 가치는 사회적 약자인 여자의 인권을 반영하면서도 공평한 윤리적 적용을 시도합니다. 인간의 패역함이 있는 곳에 불평등이 그 결과로 드러나지만, 복음은 그 패역함을 회복시켜 평등한 인간됨을 여과 없이 드러내 줍니다.
제자도를 가르치신 예수님(13-16)
어떤 사람을 알려면, 그 사람이 어떤 상황 대체를 보면서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무엇에 대해 민감한지 살펴보면, 그 사람의 가치관을 알 수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무시당하면 발끈한 사람은 자존감이 부족함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떤 상황에서 기뻐하시고 화내셨겠습니까?
13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6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13-16)
본문은 당시의 관습을 반영한 것 같습니다. 유대 관습에 따르면, 대속죄일 저녁에 아이들을 장로들에게 데려와서 기도와 축복을 받게 하곤 했습니다(미쉬나 소페림 18:5). 하지만 사람들이 데려온 아이들을 제자들이 또 막아섭니다. 그 이유를 마가는 분명히 제시하는 않고 있습니다. 다만 9:33-37의 문맥에서 제자들은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누가 더 큰지에 대해 다툰 이력이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를 세워서 하나님 나라의 섬기는 가치관을 설명하신 적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이 가르침을 받은 후에도 어린아이를 데려온 사람들을 막은 것은 여전히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음을 사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사회에서, 심지어 제자들로부터도 무시당하던 아이들을 소중하게 받아들이십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소중한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사람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무시당하고 거절당한 사람들(병든 자, 소외된 자, 이방인, 여자, 어린이)이 인정받고 소중하게 여겨지는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져오신 하나님의 나라는 당시 전통적이고 남성 주심적인 가치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샬롬의 나라’이고, 그 ‘샬롬’은 사람들 사이에서 평등이라는 가치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죄악된 세상적인 가치관에 길들여진 자들이 이런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배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신뢰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시며 어린이 한 명, 한 명을 안수해 주셨습니다(16).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결혼마저 거래의 대상이 되는 시기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과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여, 하나님 정하신 질서대로 관계를 맺지 않으면, 아무도 결혼을 통해 행복을 누릴 수 없다고 하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은혜가 어니면 불가능한 것이 신실한 결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