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태복음 23장 1-12절 높은 자리에 앉기를 원하는 자들에게 하시는 경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많은 공격을 받으셨던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써 그들의 입을 막으셨습니다. 그렇게 진리의 승리를 보이신 예수님께서는 무리와 제자들에게 그들이 겉모습에 치중함으로써 진정한 내면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한마디로 경건의 모양만 있지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며 산다는 사실을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2-7절을 보면 예수님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악의 실체를 드러내십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는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그들이 율법을 가르치는 자리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지 말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들이 가르치기만 하고 자기들은 행하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3절을 같이 읽어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성경을 잘 가르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행하지도 않고 가르치기만 하는 것은 자신이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기들의 지식을 뽐냈지만 그러나 자기들이 가르친 내용대로 살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계속해서 무거운 법을 만들어 내고는 그것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것을 중세의 로마 카톨릭이 답습했습니다.
그들은 각종 종교법을 만들어 사람들의 등에 짊어지게 했으며 꼼짝달싹 못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통해 진리로 자유케 하신 것을 그들은 각종 종교법을 만들어 그 자유를 빼앗은 것입니다. 그렇게 빼앗은 것을 가지고 자신들의 사치와 풍요를 누렸습니다. 그로인해 종교개혁과 더불이 각종 개혁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로인해 일부는 진리의 바른 길을 찾아 예수님께 돌아왔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인본주의에 빠져 하나님을 완전히 떠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4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아예 행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행하기는 했지만 하나님께 보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행한 것입니다. 5절을 봅니다.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이것 때문에 산상수훈을 보면 예수님께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하신 말씀은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희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입니다. 예수님 그 실례로 기도나 금식이나 구제등 여러 가지의 예를 드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행하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잠시 칭찬을 받는 것으로 끝나지만 하나님 앞에 보이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상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기도나 금식이나 구제 뿐만 아니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사람에게 보이고자 경문의 띠를 넓게 하며, 옷 술을 길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시장에 나가면 사람들에게 “랍비님 오셨습니까?”하는 인사를 받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선생님 오셨습니까?”하는 말이지만 교회에서 직분을 통해 칭찬과 존경심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 역시 바리새인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목사라고 목에 힘주고 다니거나 장로 권사라고 목에 힘을 주거나 안수집사라고 목에 힘을 주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전에 침례교회에는 장로와 권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교단에는 장로와 권사직분을 주니까 아얘 교단을 옮겨버립니다. 그런 일들이 많이 일어나니까 결국 침례 교단도 역시 안수집사를 주면서 “장로”라고 부르자는 의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침례 교단에 “호칭 장로”제도가 생긴 것입니다. 공식적으로는 집사로 하되 부르기는 장로로 부르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장로가 엄연히 있습니다. 교회의 덕을 끼치는 신앙의 모범이 되며 사람들을 바르게 인도할 능력을 가진 사람을 장로로 세우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보느냐 때문에 장로나 권사 직분을 받으려고 애를 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행동은 성도다운 행동조차 하지 못하면서 말입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교회 생활은 위험합니다. 그들은 천국에 가는 데 매우 장애가 되는 것이 바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자 사람들에게 보이는 행동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경계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높이 여김을 받고자 하며, 존경심을 얻어내고자 하는 것을 경계하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높임을 받는 것으로 여겨지는 호칭이 바로 랍비, 아버지, 지도자라는 칭호입니다.
랍비는 선생님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나라의 식으로 하면 스승이나 선생님입니다. 어쩌면 목사님으로 부름을 받는 것도 역시 경계해야할 일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만약 목사라고 안불러줘서 서운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위험한 것입니다. 자기를 대우 안해준다고 서운해 한다면 그는 위험한 것입니다. 마귀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가 가지고 있는 배경을 통해 높임을 받으려는 교만한 마음을 잘 알기에 계속해서 그의 배경을 자극시키고, 부각시키는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교만이 넘어짐의 앞잡이 인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점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8-10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진정한 선생은 성령님 한분 뿐이요, 진정한 아버지는 하나님 한 분 뿐이며, 진정한 지도자는 오직 그리스도 한 분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높임을 받으실 분도 한 분 하나님 이시며, 진정으로 존경을 받으실 분도 역시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도, 아무리 좋은 일을 많이 하는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작은 지식을 가졌을 뿐이고, 아무리 존경을 받는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들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하나님을 높이고 존경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합니까?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낮아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오히려 낮추는 사람을 하나님은 높여주시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4장 10절을 보면 자꾸만 높임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사람 앞에서는 자기와 타인을 비교함으로 자기를 높이려는 유혹을 계속 받습니다. 그런 마음의 유혹을 받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내 앞에서 너 자신을 들여다보고 스스로 낮추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의 삶입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의식하면서 살며 신앙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을 의식하시면서 낮고 겸손한 마음을 품고 섬기면서 사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자신보다 다른 사람들을 더 높이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기억하시고 높여주셔서 세상의 본보기로 삼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축복이 여러분 모두의 것이 되길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