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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약력 | 기사입력 2014-06-07 16:32:51
들어가며
인간의 역사적 행동은 경제적·사회적 실생활에 의해 전개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잘못된 위서(僞書)의 공허한 관념에 의해 역사가 펼쳐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민족의 흥망을 결정하는 것은 문화사상이다. 따라서 역사는 문화사상을 중심으로 다루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선구적 학자 중에도 한민족의 문화사상을 발견하지 못하고 무사(武士), 즉 영웅의 승패
를 논하는 기록에 그친 역사서를 볼 때는 마음이 아프다. 신채호(申采浩) 선생이 민족사를 찾아내려고
애쓴 것은 일제가 우리 역사를 지우는데 대한 자주독립을 지향함이었기에 그 충정을 잘 알 수 있다.
그렇기때문에 한민족의 문화사상연구에는 시대적 상황과 시간적·공간적으로 충분치 못한 점은 아쉬운 일이다.
선생이 오월춘추(吳越春秋), 해상잡록(海上雜錄), 갓쉰동전(傳) 등 위서(僞書)에서 취재(取材)한 것도 있어
논란도 있다. 그러므로 한국사는 자주독립의 민족사를 찾아내는 방향으로 연구하고, 문화사상을 중심으로
다루어야 하는데 우리는 이점을 소홀이 하고 있다. 특히 학노(學奴)들이 위서(僞書)에서 취재하며 과학적
검증이라고 일제의 논리를 앵무새같이 되뇌이는 것은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역사연구는 위서(僞書)를
제쳐두고 진서(眞書)에서 취재해야 한다. 그러나 진서(眞書)에도 오류(誤謬)가 있을 수 있기에 역사연구는
인류 발달사를 기준으로 해야 오류를 최소화 할 수 있다. 인류발달사는 보편적 역사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편적 역사를 살피면서 한민족의 특수성을 발견해야 한다. 인류발달사에 치우쳐(偏向) 한민족의 특수성을
무시하는 방법으로는 한국사를 찾지 못한다. 즉, 한국사를 찾는 방법은 진서(眞書)에서 취재하고 다시
인류발달사를 원칙으로 하면서 한민족의 특수성을 바탕으로 다루어야 한다. 그런데 이 진서(眞書) 수십만
권을 불태워버린(焚書) 중국, 일본의 야만(野蠻)적 행위는 역사규명을 어렵게 하고 있어 문제다.
오늘은 하(夏)나라를 세웠다는 하우(夏禹-서기전2205~2203)와 앞으로의 역사전개를 위해 중국민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하우(夏禹)는 요순(堯舜)의 신하였다
하우(夏禹)는 요순(堯舜)의 신하로 그는 요(堯)임금 때 치수사업을 하던 곤(鯀)의 아들이었다.
중국의 사기(史記)는 우(禹)가 수레, 배, 썰매를 타며 산길을 갈 때는 나막신을 신었고 모든 치수장비를 들고
사방을 열심히 다녔다고 하고 있다. 구주(九州)를 일구고 구주(九州)를 통하는 길을 텄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토목에 익숙한 사람인 것 같다. 이 우(禹)사공이 도산에서 고조선으로부터 오행치수법을 전수받은 사실은
중국 기록에는 찾아 볼 수 없다. 그래서 사기(史記) 기록을 전적으로 믿는 것은 위험하다. 사마천은 순임금
을 죽인 장본인인 우(禹)에 대해서도 요, 순, 우(禹)이전의 인물에 대해서는 많은 사료가 있음에도 어떤 사안
에 대해서는 너무 간단하게 다루거나 아예 지워버렸다. 그 이유는 삼황오제 등 요, 순, 우 임금에 대해 말하다
보면 이들이 동이족인데다 지난 배달국과 고조선의 역사에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애매하게 쓰고 있다.
고대중국은 상고시대 시원(始原)역사가 없고 배달국 동이역사가 있을 뿐이다. 중국 화하족(華夏族)은
변방민족으로 지배를 받는 집단이었기 때문에 사마천은 생전에 배달국과 고조선 동이겨레에 대한 기록들이
산재함에도 그의 130권이나 되는 방대한 역사서는 그 가치가 있다해도 의도적으로 배척, 축소, 거짓꾸미고
지운 휘치필법(諱恥筆法)의 원칙 아래 역사를 썼다. 따라서 허구가 너무 많고 거짓꾸민 것이 중국역사다.
중국의 역사기록은 믿을 수 없는 위사(僞史)라는 것이다.
우(禹)에 대한 중국 쪽 사기(史記) 등 기록들은 순(舜)에 충실했던 우(禹)가 각종 치수사업과 토목사업에
큰 공을 세웠으나 아버지 곤(鯀)이 치수사업에 실적부진으로 처벌을 받아 산동성 우산으로 귀향 갔다가
죽어 우(禹)가 원한을 갖게 됐다고 나와 있다. 또 우(禹)는 전국을 구주(九州)로 나누어 다스렸다고 했다.
그리고 중국 쪽 기록은 우(禹)가 임금으로 즉위한 후 도산(塗山)에서 모든 제후를 소집했는데 모두 옥과
비단 등 공물을 들고 모였다고 했다. 그리고 우(禹)임금은 나중에 회계산(會稽山)이 옆에 있는 회계(會稽
-절강성에 있는 도시)에서 두 번째 제후들의 회합을 가졌는데, 이 때에 공물을 바친 제후가 2만명에 이르
렀다고 허황되고 떠벌이게 쓰고(記述)있다.
반면 우리 쪽 기록인 부도지(符都誌)에는 제후인 우(禹)가 요임금과 순임금이 죽은 후 도읍을 옮기고
무리를 모아 방패와 창을 보수하고 유호씨에게 항거해 자칭 하왕(夏王)이라고 했다고 나와 있다.
즉, 종주국 단군조선에 대해 반기를 든 사건이다. 우(禹)임금은 요, 순의 영토를 이어 받아 국가의 형식을
갖추었다. 당시 기록들을 보면 북방의 대국인 조선을 빼고는 중원 곳곳에 존재했던 세력 있는 나라들이
수십여 개 있었다. 이들 또한 동이겨레가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당시 동방족과 화하족(華夏族)은 서로
언어풍속이 달라 같이 섞여 살지 않았고 가깝거나 멀리 떨어져 살았음이 틀림없다. 부도지(符都誌)에
보면 ‘우임금이 부도(付都)를 배반하고 도산(塗山)에 단을 설치하였다’고 했다. 이 행위는 제후국(諸侯國)
으로서 대조선국에 순종하지 않고 항거한 행위다. 부도(付都)는 하느님에게 제사를 드리는 나라 수도의
제단이라고 보면 된다.
중국은 하(夏)를 첫 왕국으로 보나 위사(僞史)가 많다
이에 유호씨가 우를 단단히 타일렀으나 말을 듣지 않고 항거하며 오히려 조선(유호씨)에 공격하였다고 하였다.
우(禹)는 여러 차례 유호씨를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모산(茅山)의 전투에서 죽었다. 이렇게 하왕(夏王)
이라던 우(禹)는 조선에 대한 침략전쟁을 일으켰다가 죽었고, 그의 아들 계(啓)가 대군을 이끌고 싸웠으나
계속 깨지고 물러갔다. 그런데 중국기록에는 우(禹)의 탁월한 능력을 보고 제위를 물려 줬다고 나와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우(禹)는 순임금을 죽인 장본인이다. 중국 쪽 기록들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상당부분에
떠벌임과 거짓꾸밈이 너무 많다.
부도지(符都誌, 26장)에는 ‘고조선이 하(夏)나라가 돌아오기를 시도했으나 이도(異道)가 성해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했다. 하(夏)나라는 우(禹)임금에 의해 시작해 계, 태강, 중강, 제상, 소강, 제귀, 제망, 제세,
제부강 등으로 이어지며 이때부터 왕국 체제가 세워지고 임금의 세습제가 정착됐다고 하는데 틀린 지적은
아니다. 하(夏)는 초기에 섬서, 남부 후에 남쪽(강소성·안휘성 추정)으로 이동해 독자적 문명을 발전시켰다.
원래 하(夏)나라의 뿌리는 동이계였으나 이미 하(夏)나라 시대에는 동방의 조선, 동이(東夷)와의 말과 의식주,
문화풍습이 다른 문화집단이 몽땅 늘어나 그들 나름대로 중화문화적 세력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화하(華夏)라는 문화언어집단을 가리키는 용어가 씌인 것으로 보고 있다. 이 화하(華夏)의 지배층
은 동이(東夷)족의 혈통과 문화의식을 갖고 있었으나 이민족(異民族)과 한족(漢族)과 더불어 살게 되면서
점차적으로 화하족(華夏族=漢族)의 나라로 변했다.
중국은 한족(漢族)의 조상들이 황허상류 임분이라는 곳에서 왔다는 등 섬서성 남부설, 한수(漢水)지역 설,
중원이 아닌 중국 남부설, 동남아시아 등 여러 기원설(중국 서부의 곤륜산맥, 타림분지 등)이 있다. 이들은
중국어 어순, 발음이 동남아 계통인 것이 특징이다. 하(夏)나라는 마지막 걸(傑) 때 폭정으로 망하나 중국은
이 하(夏)나라를 중국의 첫 왕국으로 중요시 하고 있다. 이 우(禹)도 동이족으로 후대의 월지족일 가능성이
크다.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중국이 거짓꾸민 사서(史書)와 지도(地圖) 따위에 속지 말아야 한다. 중국의
역사는 날조 그 자체이고 지도와 지명은 몇 번이고 바뀌었다. 그렇기때문에 역사고증은 신중해야 한다.
또한 중국에서는 고대에 내세울 것이 없기에 좋은 책이 나오면 중국을 내세우기 위해 무조건 주(周)나라
문왕이 썼다고 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따위 주장에도 속지 말아야 한다. 중국의 상고사서에서 우리 조선과
삼한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이는 없앴거나 의도적으로 빼버렸기 문이다. 그들의 역사기록은 위한중국
휘치필법((爲漢中國諱恥筆法)에 근거했다. 다시말해 한족(漢族)과 중국에 대해서는 부풀리고 높이면서
다른 나라의 역사는 최소화했다. 더불어 한족(漢族)의 부끄러운 역사는 숨기며 중국을 위주로한 역사를 썼다.
옛날에는 중국이라는 명칭 자체가 없었다. 중국이라는 국명(國名)은 1910년 손문(孫文)의 중화민국 건국
때부터 씌어진 것이며, 옛 문헌에는 중국이라는 말은 찾아 볼 수 없으며 분명치도 않다. 중국의 한(漢)도
우리의 한(韓)의 크다는 뜻으로, 한(漢) 또는 칸(汗)과 같은 말이다.
중국 한족(漢族)은 어떤 민족인가
여기서 중국 한족의 계통을 살펴보면 중국 한족은 중국의 저명한 학자들도 인정하듯이 이들은은 북방동이
족과 서쪽에서 이동해온 통칭 화하족(華夏族=支那族, 인도차이나 족)이 피를섞어 이루진 복합민족이다.
그래서 현재도 중국 안에서는 남과 북의 중국인 언어가 서로 통하지 않고 한자로 의사가 통용되는 것은
이를 뒷받침 해준다. 글쓴이도 15년 전 한국비교노동법학회와 국제노동법학회를 중국인민대학과 북경대학
에서 공동으로 주재하며 중국어로 회장인사말을 했으나 알아듣지 못해 통역을 내세워 인사말을 한 적이 있다. ‘이’라는 발음만도 142개나 되니 정확한 사성(四聲) 발음을 제대로 말하는 것은 어렵다.
고대 우리 한민족은 중원의 주인이고 여러 지역에서 나라를 세우고 국가경영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고대
부터 기름지고 물이 풍부한 중원(中原)을 80%나 차지한 대국이었다. 때문에 이 중원(中原)을 두고 화하족
(華夏族)과 끊임없이 전쟁과 갈등의 시대를 지내 왔으며 두 민족은 때로는 화친도 하고 영역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도 치러왔다. 동이족과 화하족이 서로 반목대립을 해온 것은 근본적으로 서로 말이 통하지 않은
데 있다. 그러나 선천적으로 두 민족은 야만적 기질이 없었고 얼굴이 서로 비슷하며 같은 동양문화를 공유
하고 있었기 때문에 원수와 같이 극도의 적개심은 없었다.
중국사서도 동이족에 대해 ‘유순한 성질을 지녔다’고 했다.
역사적으로 우리는 중원을 5분의 4를 지배했기 때문에 상, 고, 중세의 중국 사가들은 동이족의 역사를 동이족
독자적인 역사 활동의 주체로 적지 않았다. 신채호(申采浩) 선생이 지적했듯이 “위서(僞書)가 많기로는 중국
같은 나라가 없다”고 할 정도로 허황된 기록들이 중국에는 너무 많다. 때문에 오늘 중국의 역사서는 거의
잘못된 위서(僞書)임을 알고 대처해야 오류를 방지 할 수 있다.
우리 역사는 구석기시대부터 신석기, 청동기, 철기시대의 문화단계를 거치면서 발전해 왔음을 고증하였다.
그러나 중국은 상고시대 나라자체가 없었다. 그래서 중국은 역사가 없기 때문에 자국을 높이기 위해 사실이
아닌 것도 사실처럼 꾸며서 적은 점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전세(前世)의 사서에는 거짓이 없는 반면 후세
사가들이 새로 사서를 쓸 때 문구를 고치고 곡필(曲筆)을 휘두르며 엉뚱한 역사로 둔갑시켰다.
한족과 중국을 위한 희한한 발상에서 역사를 거짓꾸미게 되었다.
인류역사를 보면 민족이 있으면 문화가 있고 문화가 있으면 역사가 있으며, 투철한 역사의식의 강하고 약함은
곧 그 민족과 국가의 흥망성쇠와 직결되는 까닭에 역사의 중요성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 까닭으로 중국
은 우리역사를 가져가 자신들의 것으로 꾸미고 있다. 민족자존의 독자적 민족의식, 민족사상, 민족문화를
올바르게 간직하고 이를 더욱 승화·발전시켜나가는 역사적 능력이 그 민족의 장래와 미래를 좌우한다.
중국이 없는 역사를 조작하는 이유다. 중국은 상고사가 없고, 중원을 1000년 밖에 지배하지 못했다.
우리 역사와 문화가 필요한 까닭이다. 하지만 언어도단이다. 그들의 뻔뻔스런 역사왜곡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더욱이 근래에 와서 우리가 일궈놓은 문명의 기록과 흔적을 모두 자기들이 한 것인냥 바꿔놓고 있다.
이것이 중국 민족성인가 생각하게 한다. 반면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손을 놓고 있는 형세다. 이에 위정자들의
각성을 촉구한다. 상고사의 역사를 본래 우리 것으로 세우는 일에 중국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 이 글은 최태영 ‘한국상고사’, 최인 ‘한국학강의’, 한창건 ‘환국·배달·조선사신론’, 이강민 ‘대한국고대사’,
박영종원 ‘한국인-자부심 문화열차’, 최진열 ‘대륙에 서다’,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한창호
‘한국고대사 발굴’, 한정호 ‘조선민족사’,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 ‘世界史
史料集’, 盛O度 ‘新 漢民族から大和民族’, 秋山謙藏 ‘日本の歷史’ 을 참고하고 퍼왔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