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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6:1-14절) 이스라엘의 교만
한 아이가 먹을 것을 앞에 잔뜩 놓고 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먹을 것이 이렇게 많은데 왜 우니?*라고 물었더니, 자기는 너무 먹고 싶은데, *엄마가 절대로 먹으면 안 된다*고 했기 때문에 운다는 것입니다.
먹고 싶은 욕망과 엄마의 명령 사이에서 갈등하느라 그렇게 울고 있는 아이를 보면서, 저는 *어른보다 낫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중에야 어떻게 되든 일단 눈앞에 먹을 것이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참을 수 있겠습니까?그런데도 그 아이는 엄마가 *먹지 말라*고 했다는 이유로, 울면서도 꾹 참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40일 간 주리셨을 때, 마귀가 시험한 것은 *왜 이렇게 쓸데없이 고생하느냐?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고통 없는 하나님 나라, 십자가 없는 구원은 마귀의 가장 큰 유혹입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억울한 일이 무엇일까? 이유 없이 고생하고, 이유 없이 욕을 얻어먹고, 이유 없이 어려움을 당하는 이것입니다.
구약에서 이유 없이 고난당한 대표적 인물이 요셉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이유 없는 고난을 통해 가족들뿐 아니라, 많은 이방인들까지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불안정하게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불안정한 삶의 연속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불안정한 삶이 지긋지긋하고, 싫어서 세상적인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즉 북쪽 이스라엘은 돈을 많이 모았습니다. 물론 돈을 많이 모으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변할 정도, 즉 하나님에 대한 태도가 바뀔 정도로 돈에 집착했습니다.
남쪽 유다는 주위 여러 나라들과 군사동맹을 맺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조건 군사동맹을 맺지 말라고 막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변할 정도, 즉 하나님에 대한 태도가 바뀔 정도로 다른 나라의 군사력을 의지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들과 똑같은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 없는 영광을 택하고 싶습니다. 즉 아무 고생 없이 형통하게 살고 싶습니다. 이유 없이 고생하고 욕먹는 것이 억울합니다.
이런 불안정한 삶이 너무나 지긋지긋해서 인간적인 방법을 써서라도 안정되게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곧 고생 없이 잘 살려고 하는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유다 백성들에게 이유 없이 고생하고, 이유 없이 욕먹으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을 통해 그들의 가족과 주위 여러 민족들을 구원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은 원래 불안정한 땅이었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강대국들에 에워싸여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만 붙들면, 그들을 지켜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말(馬)이 없고, 무기가 없어도, 사나운 맹수들이 도처에 우글거려도, 말씀만 붙들고 있으면, 살아나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전에 말한 것처럼, 이것이 이론적으로는 쉬워 보여도 실천하기는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당장 오늘 저녁 끼니거리가 없는데, 당장 내일 이자 갚을 날이 돌아오는데, 어떻게 말씀만 붙들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이 성령 충만했을 때는 그 어려운 일을 해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지 못했을 때는 현실과 타협하는 쉬운 길을 선택했습니다.
머리가 나쁜 것은 죄가 아닙니다. 장사 잘하는 재주가 없는 것도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지 않은 것은 죄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불안을 이길 수 있습니다. 아무리 현실적으로 빠져 나올 길이 없는 상황이라도 말씀으로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절대로 못 견딥니다. 그래서 세상적인 방법을 택하게 되고,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잃기에 이룹니다.
오늘 성경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왜 그렇게 악착같이 돈을 모았느냐? 왜 그렇게 쉽게 군사동맹으로 안정을 취하려 했느냐? 믿음으로 좀 불안정하게 살 수는 없었느냐? 좀 고집스럽게 말씀만 붙들고 살 수는 없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그 무모한 모험을 한번 해 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불안정하고, 인간적인 생각으로 안 될 것 같다 하더라도 한번 밀어붙여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지 못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믿음의 모험을 감히 감행하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 인간적인 방법으로 안정을 추구함으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Ⅰ.이스라엘의 자기만족
하나님의 말씀만 붙들고 있는 동안에는 결코 자기만족에 빠질 수 없습니다. 실제로 남의 눈에 뜨이게 자랑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습니다.하나님의 말씀 외에 다른 것을 붙들고 있던 탓입니다.
6:1절)화 있을 진저, 시온에서 교만한 자와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 곧 백성들의 머리인 지도자들이여 이스라엘 집이 그들을 따르는도다.”
여기에서 *시온*은 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 지금의 교회입니다.
찬송가 210장 *시온성과 같은 교회*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전과 달리, 자신감에 차 있었습니다. 그들이 교만했다는 것은 여유가 있었고, 자신감에 차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고,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주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그렇게 당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사마리아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무언가 믿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든든했습니다. 여기 *백성들의 머리*라는 것은 주위 여러 나라들 중에 가장 뛰어나다는 뜻입니다.
학생이 수학경시대회에서 우승하면, 어떻게 됩니까? 학교에서 인정해 주고, 친구들도 인정해 주고. 신문사에서도 찾아와 인터뷰를 합니다. 그럴 때, 그 학생은 아주 자신만만하게 행동할 것입니다.
그처럼 예루살렘 사람들과 사마리아 사람들 또한 예전에 찾아볼 수 없었던 자신만만함을 내보이고 있었습니다.
6:2절)너희는 갈레로 건너가 보고 거기에서 큰 하맛으로 가고 또 블레셋 사람의 가드로 내려가라. 너희가 이 나라들보다 나으냐? 그 영토가 너희 영토보다 넓으냐?"
여기서 *갈레*가 구체적으로 어디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아마 북동쪽 앗수르의 어느 도시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갈레는 한때 번창 하던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루살렘이나, 사마리아에 비해 형편없이 작은 도시가 되었습니다.
또 *큰 하맛*은 수리아에 있는 도시로서 앞에 *큰*자가 붙을 정도로 번창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마리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보잘것없어졌습니다. 블레셋의 대표적인 성읍 중 하나였던 *가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은 한때, 번성했던 앗수르나 수리아나 블레셋의 도시들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번창하고 있었고, 확장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처럼 번창하고, 확장된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닐까?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화 있을 진저*라고 하시면서 저주를 선포하시는 것일까?
그 이유는 그들의 번창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세상적인 방법을 취한 데서 비롯된 결과라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안정은 물질적인 안정이 아니라, 심리적인 안정입니다. 즉 큰 집을 사거나, 돈을 많이 벌어서 마음이 든든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날마다 나와 함께하심을 체험하기 때문에 마음이 든든한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생활도 불안하고, 그런 생활에서 벗어날 길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내 귀에 들리고 있고, 하나님의 은혜가 내 마음속에 있을 때, *내가 아무리 부족해도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신다*
또 *내가 교만해지지만 않으면 나를 떠나지 않으신다* 는 확신과 함께 심리적인 안정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특징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무엇이라고 인사했습니까?
살후3:16절)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고 주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인들이 평강을 누리는 것은 아무 문제나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눈에 보이는 것만 생각한다면, 걱정이 되어 견딜 수가 없을 정도로 문제도 많고 어려움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강을 누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모든 사정을 다 알고 계시며, 나와 함께하신다는 그 한 가지 사실 때문입니다.
빌4:6-7절)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평안하고, 든든했던 것은 이처럼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믿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따로 믿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북쪽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는 모아 놓은 돈이 있었고, 남쪽 예루살렘 사람들에게는 군사동맹을 맺은 이웃 나라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긴장입니다. 밖에서는 계속해서 어려움이 다가오지만,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신실하심을 붙듦으로써 매 순간 그 도전들을 이겨 내는 긴장, 마치 고무줄을 힘껏 잡아당기고 있는 듯한 팽팽한 긴장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신선하게 지켜 줍니다.
그러나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 백성들은 그 긴장이 싫어서 인간적으로 편안 한 길을 선택했습니다.
Ⅱ.자기만족의 증상
하나님의 백성들이 말씀으로 평안을 얻지 못하고, 세상적인 것을 의지함으로써 평안을 얻었을 때, 나타난 증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교만과 사치였습니다.
6:3-6절)너희는 흉한 날이 멀다 하여 포악한 자리로 가까워지게 하고,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 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잡아서 먹고. 비파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에 대하여는. 근심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부자로 태어나서 부유함이 몸에 밴 사람과 가난하게 살다가 갑자기 부자가 된 졸부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원래 부자로 태어난 사람은 어렵고 가난한 사람들의 형편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지만, 돈 많은 표시는 잘 내지 않습니다.
그들 삶의 질을 높이는 쪽에 관심을 많이 기울입니다. 그래서 오페라를 감상한다든지, 예술 작품을 수집한다든지, 문화적인 방면에 돈을 많이 씁니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이 갑자기 졸부가 되면, 꼭 부자된 표시를 냅니다. 우선 그동안 먹지 못했던 비싼 음식들을 전부 먹어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가구나 장식품처럼 눈에 보이는 물건들을 마구 사는 데, 돈을 많이 쓰고, 몸에 좋다는 것은 무엇이든 먹거나, 바르거나 쓰려고 합니다.
돈만 많이 벌었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배울 기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가난하게 살다가 여로보암 2세 때에 이르러 갑자기 돈을 벌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흉한 날이 멀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제*고생은 끌났다*는 것입니다. 즉 이제부터는 마음껏 먹고, 마시고 즐기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포악한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즉 아무 두려움 없이 폭언을 하고, 폭력을 쓰면서 자기 권리를 주장했습니다.
원래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자기 권리라는 것이 없습니다. 애굽에서 노예로 있다가 빈손으로 나온 민족이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즉 아무 거리낌 없이 토공처럼 가난한 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면서 자기의 것을 챙기고 있습니다.
또 그들은 얼마나 게을러졌는지, 상아(象牙)상에 누워서 딩굴었고, 침상에서 기지개를 켰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아온 생활방식이 아닙니다.
양을 치는 사람들에게 상아상이나, 침상이 어디 있습니까? 또 농사짓는 사람들이 어떻게 실컷 자고, 기지개를 켜면서 일어납니까?
군대에서 기상나팔이 울릴 때처럼 재빨리 일어나, 밭으로 가야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처럼 실컷 자고, 늦게 일어날 수 있었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고생스럽게 목축을 하거나, 농사를 지을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지금까지 그들은 긴장하며 살았습니다. 혹시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게 되지는 않을까? 혹시라도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은 아닐까? 늘 긴장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인간적인 방법으로 행복해지는 길을 선택하면서, 가장 먼저 그 긴장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즉 긴장 할 필요 없이 실컷 자고, 기지개를 켜면서 느지막이 일어나니까 그렇게 편하고,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양 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취하여*먹었습니다.
즉 영적인 긴장을 잃고 나니까 관심이 온통 먹는 데로 쏠려 버렸습니다. 그들은 최고로 맛있는 것만 골라서 먹었습니다. 혀가 즐겁지 않으면, 기분이 안 좋았습니다.
어린양과 송아지도 그냥 먹는 것이 아니라, 가장 맛있는 부위로 골라서 먹었습니다. 이들에게는 혀가 우상이요, 똥배가 우상이었습니다.
그리고 5절)비파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지절거리며”라는 것은 술에 취해서 아무 의미 없이 흥얼거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랩 비슷한 것을 알아듣지도 못하게 지껄여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은 지꺼릴 순 없습니다. 이들이 부른 노래는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나, 경배가 아니라, 퇴폐적이요, 경박한 노래였습니다. 즉 실컷 먹고, 마시고, 나서 기분이 좋으니까 아무 노래나 흥얼거린 것입니다.
이들은 5절)...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자기 악기를 만드는 데, 돈이 많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돈이 많았기 때문에 유행처럼 자기 악기를 만들었습니다.
다윗도 자기 악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자기 악기를 가진 것과 이들이 자기 악기를 가진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다윗은 전문 음악가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항상 연주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악기를 만들어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잔치때마다 흥이 나는 대로 춤추고, 놀기 위해 악기를 만들었습니다. 또 돈이 생기면, 비싼 가구부터 사 놓고, 혀를 즐겁게 하고, 가라오케를 틀어 놓고 술을 마시면서 노래 부르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 같습니다.
가장 중요한 말씀이 다음절에 나옵니다.
6:6절)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에 대하여는 근심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그들은 몸에 좋은 것은 다 마시고,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요셉의 환난*이 무엇일까? 의(義)로운 자의 환난입니다. 요셉은 형들의 시기심 때문에 이방 나라로 팔려가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그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흥청망청 잘살고 있는 동안 그들에게 진 빚을 갚지 못해 이방 나라로 끌려가 고통스럽게 살고 있는 이들의 고통이 곧 요셉의 환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지 몸에 좋다는 것은 무엇이든 하면서도, 바로 자기들 때문에 다른 나라로 팔려가 고생하고 있는 이웃의 고통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었던 신학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고난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흉한 날은 멀고, 요셉의 환난은 자기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백성의 비밀은 요셉의 환난 속에 들어있습니다. 즉 하나님 백성의 모든 좋은 특징은 환난을 통해 만들어집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은 *환난을 통해서 겸손을 배우고, 인내를 배우며, 하나님의 위대하심을*배웁니다.
물론 환난을 자청해서 겪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살다 보면, 환난을 겪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요셉도 꿈만 꾸지 않았더라면, 환난을 겪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담긴 꿈 때문에 엄청난 환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환난을 통해 가족들의 죄를 그에게 전가시키셨습니다.
요셉 자신이 그 사실을 얼마나 인식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환난을 통해, 그의 형들의 죄를 용서하기 원하셨고, 수많은 애굽 사람들과 가나안 사람들을 구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유 없이 고통당하고, 이유 없이 오해받고, 이유 없이 욕먹는 사람들의 고난을 통해, 그의 가족들의 죄를 오래 참으시고, 그들을 기다려 주시며, 구원하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유지되고 있는 것은 이유 없이 고난당하는 그리스도인들 덕분입니다. 본인들은 자기가 왜 이렇게 고생을 해야 하고, 왜 이렇게 눈물을 흘려야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고난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종종 정반대로 생각합니다.
*안 믿는 친척들보다 잘살아서 돈도 보태주고, 집도 사 주고, 차도 사 주어야 믿는다는 것이 부끄럽지 않을 텐데, 나는 왜 이렇게 지지리도 궁상으로 살아야 하나?* 하면서 속상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의 이러한 환난 때문에 그들에 대해 오래 참아 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나의 이러한 환난을 통해 그들을 구원할 계획을 세워 놓고* 계십니다. 신학적으로 대표성 원리입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절대로 고난 없는 행복을 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절대로 *십자가 없는 영광을 붙잡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붙잡으면, 긴장이 사라집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푹 퍼진 라면처럼, 늘어져 사는 것은 재앙입니다. 상아 침대에 자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또 스프링 침대가 없으면, 상아 침대에서 잘 수도 있습니다.
그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영적인 긴장을 잃어버리는 데 있습니다. 그러면 급격하게 부패해 버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팍 퍼진 행복보다는 좀 살기 힘들어도 긴장하는 삶을 추구하십시오. 그리고 늘 나에게 어려움을 주심으로써 기도하게 하시고, 긴장하게 하시는 것에 감사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려움과 고난을 통해 요셉의 비밀을 알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Ⅲ.하나님의 반응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자기만족에 빠져서 고난 없는 행복을 택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반응을 보이십니까?
6:7절)그러므로 그들이 이제는 사로잡히는 자 중에 앞서 사로잡히리니 기지개 켜는 자의 떠드는 소리가 그치리라”
하나님께서 가장 듣기 싫어하신 소리는 *이 집 저 집에서 기지개를 켜는 소리*였습니다.
지금은 기지개 켤 때가 아닙니다. 바짝 긴장하면서 하나님을 붙들어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팍 퍼져서 기지개나 켜고, 하품이나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가장 먼저 사로잡혀 가게 하심으로써 그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 시대는 여부스 족속들이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윗의 공격에 *절름발이나 소경이라도 너희를 물리칠 것*이라고 조롱했습니다. 그만큼 예루살렘은 견고한 성이었습니다. 다윗은 나중에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 소경과 절름발이들부터 죽입니다.
이것은 그가 장애인을 업신여겼기 때문이 아닙니다.
대개의 경우 장애인들은 건강한 사람들보다 순수하고 겸손합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여부스 족속은 장애인들까지 교만하여 자신의 힘을 믿고,다윗을 경멸했습니다. 다윗은 거기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사람들 앞에서 참으로 겸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단 한 시간도 살 수 없는 부족한 사람*이라는 마음으로 항상 긴장하며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겸손할 줄 모르고, 매일 늦잠을 자고, 일어나면서 기지개 켜는 소리나 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지개 켜는 것이 죄라거나, 피곤해서 늦게까지 숙변을 취하는 것이 죄라는 말이 아닙니다)
긴장을 잃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편하게 사는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진노의 심판입니다.
6:8절)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라. 주 여호와가 당신을 두고 맹세하였노라. 내가 야곱의 영광을 싫어하며. 그 궁궐들을 미워하므로 이 성읍과 거기에 가득한 것을 원수에게 넘기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여기에서도 자신의 정식 이름을 사용하고 계십니다. 즉 *주 여호와께서 당신을 두고 맹세*이것은 엄숙한 판정을 내릴 때, 사용하는 이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두고 맹세하셨습니다. 왜냐면 하나님보다 더 크신 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맹세하고 계시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분은 야곱의 영광을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성읍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멸망시키시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한 사람 한 사람 진정으로 회개하고, 죄된 생활에서 돌이킴으로써 부흥했다면, 하나님께서 그 부흥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회개없이, 십자가 없이, 죄에 대한 애통함 없이 인간적인 방법으로 부흥했다면, 그것은 야곱의 헛된 영광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부흥을 절대로 기뻐하지 않습니다. 즉 *죄를 해결하지 않은 축복은 부실공사로 지은 건물* 같습니다. 아무리 높은 빌딩을 짓고 행복하게 살아도 얼마 가지 않아서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거듭거듭 이야기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죄 문제를 해결해야 행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결혼하고, 유학을 다녀오고, 교수가 되고, 판사가 되고, 국회의원 되는 것은 부실공사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모습이 아무리 화려해도 야곱의 헛된 영광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영광을 싫어하시며, 그 궁궐들을 미워하여 그 안에 가득한 것들을 대적에게 붙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게 *인간적인 방법으로 성공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인간적인 방법으로 부흥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의 인도에 따라 고난을 통과해서 영광으로 나아오라는 것입니다. 즉 *한 사람 한 사람 복음으로 깨우치고, 눈물로 회개시킴으로써 부흥하라*는 이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궁궐을 태워 버리고, 그 안에 있는 것들을 모두 대적에게 넘겨주실 것*입니다.
6:9-10절)한 집에 열 사람이 남는다 하여도 다 죽을 것이라. 죽은 사람의 친척 곧 그 시체를 불사를 자가 그 뼈를 집 밖으로 가져갈 때에 그 집 깊숙한 곳에 있는 자에게 묻기를‘아직 더 있느냐? 하면 대답하기를‘잠잠하라!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못할 것이라’하리라”
우리 생각에 한 집에 열 사람이 남으면, 많이 남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 나오는 *한 집*은 한 씨족을 의미합니다. 한 씨족 전체에서 열 명 정도가 남을 텐데, 결국 그 열 명도 다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재앙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는 전염병에 죽고, 전염병에서 남아 있는 자는 굶어 죽고, 거기에서 살아남은 자는 포로로 끌려가다가 길에서 지쳐 죽을 것입니다.
6:11절)보라, 여호와께서 명령하시므로 타격을 받아 큰 집은 갈라지고. 작은 집은 터지리라”
그 원한의 집들, 즉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집들은 전부 터지고, 깨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모든 이야기는 끝이 나 버릴 것입니다.
Ⅳ.이 비극의 원인
이 모든 비극의 원인은 어디에 있습니까?
6:12-13절)말들이 어찌 바위 위에서 달리겠으며 소가 어찌 거기서 밭 갈겠느냐? 그런데 너희는 정의를 쓸개로 바꾸며. 공의의 열매를 쓴 쑥으로 바꾸며, 허무한 것을 기뻐하며. 이르기를‘우리의 힘으로 뿔들을 취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는도다”
말을 타고 바위 위를 달리는 것은 자살행위와 같습니다. 특히 여기에 나오는 바위는 절벽입니다. 말을 타고 절벽을 내려오는 것은 자살행위입니다.또 소로 아무리 바위를 간다 한들 농사를 지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헛된 짓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것이 바로 이런 헛된 짓들이었습니다. 즉 생명의 말씀을 붙들지 않고, 행복해지는 것은 말을 타고 절벽을 뛰어내리는 것처럼 위험한 짓이며, 또 소를 몰고 바위 위에 쟁기질 하는 것처럼 헛된 짓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물같이, 또 하수같이 흐르게 해야 합니다.
그 말씀이 아무리 나를 고통스럽게 하고, 힘들게 한다 해도 막힘없이 선포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의를 쓸개로, 공의를 독초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말씀이 선포되면, 자기 욕심대로 살 수 없으니, 말씀을 무력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말씀이 없으면 예수 믿는 것이 쉬워집니다. 즉 취미생활 하듯이 즐겁고, 여유 있게 신앙생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말을 타고 절벽을 달라는 것처럼 위험한 짓이며, 바위를 쟁기질하는 것처럼 헛된 짓입니다.
생명의 말씀을 막으면 안 됩니다. 생명의 말씀을 막으면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평생을 두고 찾아야 할 것은 곧 생명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말씀 듣느라 자기를 도와주지 않는다는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10:42절)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생명의 말씀이 없으면, 기복적인 신앙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고, 기복적인 신앙은 미신적인 신앙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신앙으로는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6:13절)허무한 것"은 히브리어 *로-데바르*로서, 영어 *nothing*와 같습니다. 즉 그들이 아무리 열심히 추구해도 남는 것이 하나도 없으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십자가를 통과한 영광이며, 고난을 통과한 행복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돈을 통해 안정을 찾으려고 했고, 예루살렘 사람들은 군사동맹을 통해서 안정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원하신 것은 말씀을 붙들고, 모험하는 이것이었습니다.
유다에는 가장 나쁜 선례를 남긴 왕, 솔로몬이었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굉장한 말씀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군사동맹과 결혼동맹을 수없이 맺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에 세상적인 방법들을 뒤섞었습니다.
즉 말씀도 있었고, 동맹도 했으니, 얼마나 마음이 든든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부패이 시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삶은 불안정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영적인 긴장이 있습니다. 긴장하는 사람은 죄에 예민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곧 죄에 대해 예민한 감각입니다.
그 감각을 놓치면, 죄에 삼키운 바 되어 결국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성공한 것처럼 보여도 그 성공은 *로-데바르*에 불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없는 영광을 거절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각 셀(cell)가족 공동체에게 바라시는 것도 그것입니다. *이유 없이 고난당하라*는 것입니다. 또 *이유 없이 욕먹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고난을 통해 불신에 빠져 있는 우리의 가족들을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을 긍휼히 여기시며, 북한에 있는 동포들까지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아-멘
롬8:18절)...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찬송가 336장 *환란과 핍박 중에도*
예언서 소선지서
다음카페 교회갱신 성경연구원 카톡선교회 제공
† 선한 동역자 안내
팬 카페 대표와 카페지기는 지인(知人)들을 회원으로 적극 초청하여 셀(cell)가족 공동체로 정착시키고. 진리의 복음 창고에 저장된 생명의 양식을 함께 공유하는 *가족같은 교회,교회같은 가족* 또는 전 세계 어느 누구에게나 상대편 카페에게 마우스로 영접기도부터 복음을 기도하고 전하므로 멸망할 소중한 영혼을 살리는 *하나님의 선한 동역자*가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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