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육사12기출신 이영진씨(예비역 대위)가 미국 LA에서 신동아 편집실에 보내온 수기를 발췌한 것이다*
박태준(朴泰俊) 대령을 찾아가자!
그에게 찾아가 내 행동의 전말을 설명드리고 내가 잘못 생각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용서를 비는 수밖에 없었다.
이 판에 창피스러울 것도 주저 할것도 없었다.
나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로 박태준 비서실장을 찾아갔다.
사실 박태준대령과 나의 사연 또한 간단치 않다.
내가 처음으로 그를 만난 것은 1950년 9월 하순 이었다.
6·25 전쟁이 터지자 18살 애띤 중학생이던 나는 학도병으로 1군단정훈부에 들어가 일을했고 그때 1군단 인사처
보좌관이던 박태준대위를 만났다.
미남형의 얼굴생김새,새까만 눈썹 그리고 정겨운 인상인데다가 인사처 일은 보좌관이 다맡아 한다는 것이었다.
삭막한 영내 분위기속에서 아직 학생티를 벗지 못하고 정이 그리웠던 나로서는 알아주는 장교 한사람이 있다는
것은 어느모로 보나 행운이었고 마음의 위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육사에 지원키 위해 추천장을 써 달라고 했을 때, 그는 ‘육군본부인사국 보임과장 육군중령 박태준’ 이라고
당당하게 써주었다.
내가 516이 일어나기 전에 박태준대령을 마지막으로 본것은 육군본부본청 건너편에 있던 한 제과점에서 였었다.
우연히 지나치다 박대령을 보고 제과점 안으로 들어갔는데 내가 1군으로 가게 되었다고 말하자 단한마디 말했다.
“나는 그분(이한림장군)은 잘 몰라.”
내가 1군으로 갈 생각을 하게됐는지 묻지도 않았고 가지 말라고 말리지도 않았지만 박대령이 자신의 생각을 조금
이라도 피력해줬다면 나는 마음이 흔들렸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박대령을 원망해본 적은 한번도 없다.
박대령은 이미 내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듯해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부대를 무단이탈했다는 이유로 군법회의에 낸 연대장의 기소를 취하해달라는 서신을 연대장 H대령에게 써주었다.
박대령이 25사단에서 연대장으로 있을때 H 대령이 부연대장을 지낸 다음에는 육군본부 법무감실의 심사과장으로
있는 이응한(李應漢) 중령에게 나의 재심문제를 잘 처리해주도록 요청하는 서신도 함께 써줬다.
박대령은 5·16 직전까지 군수기지사령부 인사참모로 재직했는데 그 당시 법무참모가 이중령이어서 잘안다고 했다.
하늘이 도운 것이라고 밖에 달리 생각할수 없는 일련의 인연들과 박태준대령에게 마음속으로 감사하고 고마웠다.
두통의 서신을 들고 박대령의 방을 나오려는데 박정희의장의 전속 부관인 손영길선배가 나의 소매를 잡아 끌었다.
고향이 울산인 손선배와 경주가 고향인 나는 휴가 때면 함께 고향으로 내려가기도 했고 생도 시절에는 우리부대의
선임하사관 생도였던 관계로 다른 선배들보다는 좀더 가까운 사이였다.
나를 한쪽 구석으로 끌고 간 손선배는 편지를 한 통 꺼내더니 펼쳐놓았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각하라는 한문 제목으로 이한림장군이 감방에서 쓴 편지 같았다.
나는 편지내용을 보고 싶지도 않았고 보나마나 동기생이긴 하지만 입장이 달라져버린 친구간의 탄원서인 것이다.
국가재건최고회의 방은 확실히 재심청구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나에게는 별천지 같은 곳이었다.
나만 생각을 고쳐 먹으면 당장 혁명의 대열속에 끼어들수 있고 군인으로서 장래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가 없었고 내 양심이 허락지 않았다.
방에서 손선배와 작별후 밖으로 나오는데 이번에는 전두환소령과 최성택소령이 마주보고 앉아 바둑을 두고있었다.
최선배와는 별 인연이 없었지만 전두환선배와는 말이 시작만 되면 하루 이틀 가지고는 끝나지 않을 많은 얘기거리
가 쌓여 있었던 것이다.
전선배와는 특전감실에서 헤어진지 만1년 반 만에 처음으로 얼굴을 대하게 된 셈이다.
5·16이라는 정치적격동을 치르고나서 서로가 반대입장에서 마주쳤으니 말보따리를 풀자면 한없이 많았을 것이다.
옆으로 다가가서 바둑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서 있는 나를 힐끔 쳐다본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박태준 대령이 이영진이를 잘 알더군!”
딱 그 말 한 마디뿐이었다.
‘잘 알다마다. 잘 알기만 해?’
그러나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때를 가만히 음미하면 ‘박대령님도 잘아는 처지인데 다시 잘 지내자’라는 뜻이 내포돼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사실 그의 성품에 내가 좋아하는 점이 전연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나름대로 정의감이 있었고 부하를 사랑할 줄도 알았다.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없는것...
예를 들어서 이지적인 성품을 지닌 사람을 몹시 좋아하고 그에게서 배우려고 하는 면도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나는 그날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자리를 떠났다.
분수를 모르던 그의 행적이 생각나서 그만 말문이 닫혀버린 것이다.
나는 박태준대령이 써준 두통의 편지를 들고 양평과 서울을 바쁘게 뛰어다녔다.
그 편지를 받아본 28연대장 H 대령은 박태준대령만 꽉 잡고 매달리라고 했다.
재심과 선고 유예
1962년 4월12일 오후 드디어 내 문제를 다룰 중앙계엄 고등군법회의가 육군본부 법정에서 열렸다.
나는 법정에서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중위 계급장을 달고 법조문만 따지려 드는 젊은 검찰관과 입씨름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혁명을 하는 판에 무슨 놈의 무단 이탈이야, 무단 이탈이…?’
이 재판은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재판 다음날인 4월13일자 조선일보 3면에 실렸던 기사 제목은 희귀한 구형, 3일간 미역(懲役)’ ‘군재(軍裁)
10분 만에 선고유예판결’이었다.
선고유예로 육군대위 신분을 찾게된후 1962년4월13일 인제에 주둔하던 보병제6사단으로 보직을 받았다.
사단에서는 예하7연대 2중대장으로 보직되었다.
그 해 10월말에는 나의 미국 유학경력이 참작되어 육군보병학교의 교관요원으로 광주의 상무대로 전출됐다.
나는 보병학교의 교관에서 육군정보학교의 학생으로 있는 사이에 폐가 나빠져서 육군병원에 입원키도 했고
정보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아주과에 파견나가서 월남 정치담당 장교로 근무했다.
나는 사이공에 주월한국군사령부가 창설된다고 해서 자원했다.
친구들은 만류했지만 내 군법회의 기록 때문에 소령 진급에 번번이 누락되는 것을 만회해볼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낯선 월남땅을 밟은 보람도 없이 네번째 진급에서 누락되자 나는 군대 생활을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이미 육사1년 후배들이 소령으로 진급한 마당에 더 이상 군에 남아 있을 수 없었다.
나는 1966년 7월에 월남에서 귀국한 다음해인 1967년 7월에 예비역에 편입됐다.
전역후 회사 몇군데를 전전 하다가 창설을 서두르던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에 3급 사원으로 취직했다.
그때가 1969년 3월의 일이다.
나를 취직시켜준 박태준 사장은 나를 불러앉혀놓고 제철회사에서 경험을 쌓아나갈수 있도록 몇달에 한번씩
일터를 바꿔줄 테니 마음잡고 일해보라고 당부도 했다.
나는 이것이 내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내가 생각하듯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우선 5·16으로 신분상의 손해를본 사람들과 어떻게든지 혁명과업수행을 방해하려는 구정치인들 측에서 나를
가만두려 하지 않았고 하마터면 원충연사건에 연루될 뻔한 일도 있었다.
다음으로는 “네가 5·16 주체세력들에게 정규육사 출신들의 이미지를 망쳐 놓았으니 책임을 지라”고 협박하는
육사 선배도 있었다.
최고회의,정보부니 해서 초창기 혁명정부에 협조하고 있던 소수 동창들의 축에도 끼지 못하고 있던 사람들이
나 같은 사람을 괴롭혀서 그 사람들에게 환심이나 사보려는 수작이었다.
결국 나는 취직한지 꼭1년이 되는 1970년 3월, 포철에 사표를 내고 두달 후 미국으로 떠났다.
-끝-
그동안 읽어주신 동문들께 감사 드리고 곧 이어서
논픽션 "10.26 전야의 숨막히는 이야기" 를 올립니다.
雲 峰
첫댓글 이영진씨의 수기를 읽어보니 인생의 수레바퀴를 보는것 같아 씁쓸합니다
그동안 수고 많이 하셨고,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 작품이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