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학원은 병영과 다름없었다. 학생들은 자치권을 빼앗긴 채 학도호국단체제에 편입되어 있었고, 각종 관제데모에 강제동원 되었다. 그러나 전쟁의 큰 파도가 휩쓸고 지나간 상황에서 학생들이 이승만 정권의 폭압에 저항하기는 쉽지 않았다. 1957년 4월 서울대 법대 학생들이 이승만의 양자 이강석의 입학에 반대하여 동맹휴학을 전개한 적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학생들의 저항은 미미한 편이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의 폭압이 갈수록 심해지면서 학생들 사이에서 점차 저항의 기운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 1960년 2월 28일 경북고등학교를 위시한 대구지역 고등학생들이 이승만 정권에 대한 항거의 첫 봉화를 올렸다. 사건의 원인은 자유당 경북도당이 민주당 부통령 후보 장면의 선거 유세에 학생들이 참가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학교장들에게 지시하여 일요일에도 강제로 학생들을 등교시킨데 있었다. 학생들은 ‘학원의 자유를 달라’, ‘학생들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는 구호를 외치며 경북도청 앞까지 시위를 벌였다. 3월 5일에는 서울에서도 시민, 학생 천여 명이 ‘공명선거 실시하라’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선거가 실시된 3월 15일 전국 각지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소리가 높은 가운데 마산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였다. 시민, 학생이 중심이 된 시위대에 경찰이 총격을 가하면서 이날 9명의 사망자와 80여 명의 중상자가 발생하였다. 전국으로 확산되었던 시위가 잠시 주춤해진 4월 11일 마산 중앙부두 앞에 한 구의 시체가 떠올랐다. 3월 15일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행방불명되었던 김주열의 시체였다. 시신에는 최루탄이 눈에서 뒤통수까지 관통되어 있었다. 분노한 시민들이 시내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3만 여 명으로까지 늘어난 시위대는 마산시청, 파출소, 자유당사 등을 파괴하면서 이승만의 퇴진을 요구했다. 경찰은 또 총격으로 맞섰다. 이 날 또 2명의 시민이 사망하였다. ? 4월 18일 정오 서울 안암동 고려대학교 교정에 3,000여 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학생들은 ‘민주역적 몰아내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국회로 나아갔다. 총장 유진오의 설득으로 학생들이 학교로 돌아오던 7시 20분경 시위대가 종로4가를 지날 때 이정재, 유지광 등 휘하의 정치 깡패들이 학생들을 습격했다. 거리는 순식간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학생들로 가득 찼다. 그리고 4월 19일 서울의 거리는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대학생, 고등학생들로 가득 찼다. 시민들까지 가세하면서 시위대는 10만을 넘었다. 1시 40분 경 시위대가 경무대를 향하자 경찰의 총부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시위대는 총격에 쫓겨 후퇴했다가는 다시 대열을 정비하고 진격하곤 하였다. 그때마다 경찰은 총격으로 응수하였다. 시위대는 중앙청 앞과 세종로 일대를 휩쓸고 다녔고 이제 그 수도 20만이 넘었다. 오후 3시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시위대는 해산할 줄 몰랐다. 서울에서 시위가 종료된 것은 새벽 1시 무렵이었다. 이 날 부산, 광주 등 전국적으로 전개된 시위에서 도합 186명의 사망자와 6천 명이 넘는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 19일의 시위로 이승만과 자유당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4월 21일 계엄사령관 송요찬은 “데모대는 폭도가 아니다”라고 하였고, 미국 대사 매카나기는 “미국은 이 시위가 공분의 반영이라고 믿으며 비상계엄으로 사태가 수습되리라고 보지 않는다”라고 밝혔다. 그런데도 이승만은 권력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4월 25일 300여 명의 대학교수들이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에 나섰다. 그 뒤를 이은 시위대의 수는 1만에 달했다. 26일 이승만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2월 28일 대구지역 고등학생들의 시위로 시작하여, 3월 15일 1차 마산 항쟁, 4월 11일 2차 마산 항쟁, 4월 18일 고려대생 시위, 19일 전국적인 민중항쟁, 25일 교수단 시위로 이어진 4.19혁명은 마침내 이승만을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일단 끝났다. ? 이승만의 퇴진으로 4.19혁명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민주주의와 민족통일로 나아가는 일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그러나 4.19의 주역 학생들은 그 뿌리에서 볼 때 이승만 정권과 별 차이 없는 민주당에 그 모든 과업을 맡기고 학원으로 복귀하였다. 4.19혁명의 과업을 사실상 방기한 것이다. 이는 당시 학생운동의 역량 상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학생들은 이승만의 퇴진 이후를 대비한 목표와 방향 그리고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조직을 갖고 있지 못했다. 4.19의 과실은 민주당이 모두 가져갔고, 그럼으로써 4.19의 빛은 서서히 바라기 시작했다. ? 학생들은 학원으로 돌아가 우선 학내민주화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학생들을 옥죄었던 학도호국단이 해체되고 학생회가 조직되었다. 학내 어용교수에 대한 퇴진운동도 광범하게 전개되었다. 4.19 이후 학생들이 관심을 갖고 전개한 또 다른 운동은 국민계몽운동과 신생활운동이었다. 학생들은 ‘조국과 민족의 복지 달성의 근본은 신생활, 신도덕에 있다’고 인식하고 국민에 대한 대대적인 계몽운동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명백한 인식의 오류였다. 민중이 헐벗고 굶주리는 것은 그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사회구조에 일차적인 책임이 있었다. 당시 학생운동은 아직 사회를 과학적으로 인식하는 수준에까지 이르지 못했다. 이는 운동의 초기 단계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 그러나 학생들은 점차 자신들의 오류를 깨닫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민주당 정권에 의해 4.19가 퇴색되어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거룩한 3,4월의 항쟁은 정치지도조직의 허약성과 전환기 이론의 빈곤성 등이 그 항쟁을 중지시켰다’고 인식하게 되었고, ‘특권의식에 찬 그들에게 정권을 되돌려주는 실패를 가져왔다’는 것을 깨달았다(1961년 서울대 4.19선언). 그들은 4.19의 종국적인 길이 ‘반봉건, 반외세, 반매판 민족통일’임을 밝혔다(1961년 고려대 4.18선언). 이런 인식 하에 1960년 11월 서울대에 민족통일연맹이 결성되었고, 61년 2월에는 성균관대를 비롯한 전국 10여 개 대학에서 민족통일연구회가 발족하였다. 분단구조를 타파하는 것이 4.19의 궁극적 목표임을 깨달은 것이다. 학생들의 통일운동은 5월 5일 민족통일 전국학생연맹 결성대회에서 남북학생회담 개최를 요구하는 데서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일당에 의해 군사쿠데타가 발생함으로써 이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 학생들은 처음에는 5.16군사쿠데타를 나세르가 주도한 이집트 군사쿠데타와 유사한 것으로 착각하기도 하였다. 쿠데타가 일어난 지 일주일만인 5월 23일 서울대 학생회는 5.16에 대해 지지 성명을 발표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박정희 일당에 대해 점차 의구심이 늘어갔다. 1963년 3월 서울대생들은 자유수호 궐기대회를 열고 군사정부의 군정연장 움직임에 대한 반대의 뜻을 분명히 했다. 5월에는 경북대에서 군정연장 반대 시위가 일어났다. 학생들과 박정희와의 사이에 점차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으나 아직까지 전면 대결의 분위기는 아니었다. ? 박정희 정권과 학생간의 대결이 본격화된 것은 1964년 한일국교정상화가 추진되면서부터였다. 한일국교정상화는 미국의 동북아 전략의 관건적 요소였다. 미국의 전폭적 지원과 압력 하에 박정희는 군사정부 시절부터 한일 국교정상화를 위한 교섭에 착수하였다. 1964년 3월 박정희가 한일회담 타결 방침을 천명하고, 이어 김종필-오히라 메모가 세상에 공개되면서, 학생들은 굴욕적인 한일회담에 반대하여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다. 1964년 3월 24일 서울대, 고대, 연대 학생 5,000여 명이 한일회담 즉각 중지를 외치며 시위에 나선 후 시위는 전대학가로 확산되었다. 3월 30일까지 일주일 동안 전국 38개 지역에서 37개 대학, 163개 고등학교에서 학생 21만여 명이 시위에 참가하였다. 학생들의 거센 항의에 놀란 박정희는 일본에 가 있던 김종필을 소환하고, 학생 대표들을 만날 수밖에 없었다. 학생들은 박정희를 만나고 난 후 일단 정부의 입장 변화를 기다리며 학원으로 복귀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방침이 시간을 벌기 위한 기만책임이 분명해지면서 4월 17일 서울대의 시위를 시작으로 학생 시위가 다시 재연되었다. 박정희가 “일체의 시위를 허용치 않을 것이며, 위반자는 엄벌에 처한다”고 협박하였으나 학생들의 시위는 갈수록 격렬해졌다. 5월 20일 서울대 교정에서는 한일굴욕외교반대 학생총연합회 주최로 박정희가 주창한 소위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장례식이 끝난 후 1,300여 명의 학생들이 민족적 민주주의의 죽음을 상징하는 관을 메고 시위에 들어갔다. 5월 27일 전남대 학생들은 ‘애국충정이 있거든 하야로 보답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박정희의 퇴진을 요구하였다. 이는 학생들에 의해 제기된 최초의 박정희 퇴진 요구였다. ? 5월 30일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이 교내 4.19 기념탑 앞에서 한일회담에 반대하며 단식농성에 들어가면서 시위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6월 2일에는 비가 내리는 가운데 3,000여 명의 학생들이 ‘박 정권 하야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격렬한 가두시위를 벌였다. 6월 3일이 되자 단식에 참가한 학생들이 300명을 넘었고, 그 중 6명은 실신까지 하였다. 이 날 서울에서는 학생 2만 여 명이 시내에 쏟아져 나와 격렬한 가두시위를 벌였다. 시위의 구호는 ‘박 정권 하야’로 통일되었다. 오후가 되자 시민들이 시위에 가세하였고, 시위대는 청와대 근처까지 진출하여 경찰과 공방전을 벌였다. 시위는 4.19와 비슷한 양상으로 발전하였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박정희는 서울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투입하여 시위를 해산시켰다. 군은 이번에는 중립을 지키지 않았다. 박정희가 군을 확실히 장악하고 있었고 미국 또한 박정희를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6.3한일회담 반대투쟁은 이렇게 해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 그러나 이것으로 한일회담 반대 투쟁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1965년 2월 20일 한일기본조약이 가조인되면서 한일협정 비준반대투쟁이 시작되었다. 3월 26일 동국대의 시위를 시발로, 4월 2일에는 원주 대성고등학교 학생들이 시위에 나섰고, 4월 7일에는 서울의 대학생 대표들이 ‘평화선사수 학생연합투쟁위원회’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4월 16일에는 동국대 학생 김중배가 경찰의 곤봉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시위가 날로 격화되자 박 정권은 전국 34개 대학, 119개 고등학교에 4월 24일까지 휴교령을 내렸다. 5월이 되면서 학생들은 한일회담을 뒤에서 조종하는 미국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5월 10일 서울대 법대 학생들은 미국에게 한일회담에 개입하지 말 것을 촉구했고, 6월 27일 이화여대 학생들은 「워싱턴 데일리뉴스」에 한일회담을 간섭하는 미국을 규탄하는 서한을 보냈으며, 6월 29일 고려대 시위에서는 ‘양키여 침묵하라(Yankee Keep Silent)’는 구호가 등장하기도 했다. 8월 14일 한일협정 비준안이 국회에서 날치기 통과되면서 학생들의 투쟁은 다시 격화되었다. 8월 17일 학생들은 실력으로 비준 무효화 투쟁을 벌이기로 결의하고 연일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 박정희는 군인을 투입하여 시위를 막았다. 8월 25일 오후 500여 명의 무장 군인들이 고려대에 난입하여 유리창을 부수고, 강의실에 최루탄을 던지며, 학생들을 곡괭이 자루로 패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26일에는 아예 위수령을 발동하여 주요 대학에 군인을 상주시켰다. 이로써 약 7개월간의 한일협정 비준반대투쟁도 또 다시 군인에 의해 실패로 막을 내렸다. 1964년과 1965년의 한일협정 반대투쟁은 결국 노동자, 농민이 참가하는 전민중적 항쟁으로 발전하지 못한 채 학생들만의 외로운 싸움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은 박정희 정권의 폭압성을 여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박 정권의 배후에 있는 미국이라는 존재에 대해 어렴풋하게나마 그 실체를 느낄 수 있었다. 이 투쟁은 이후 79년까지 지속된 박정희 독재와의 긴 투쟁의 실마리를 열었다. ? 무력으로 학생들의 투쟁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박정희는 용공조작도 서슴지 않았다. 1964년 8월 중앙정보부는 소위 인민혁명당 사건을 발표하였다. 6.3투쟁의 배후에 북한의 지령을 받고 움직이는 대규모 지하조직 인민혁명당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검찰조차 공소할 수 없다고 거부한 전형적인 용공조작 사건이었다. 이후 용공조작은 학생들의 대규모 투쟁이 일어날 때마다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된 단골 메뉴였다. ? 1967년 6월 실시된 총선은 공개투표, 대리투표, 무더기투표 등이 난무한 총체적 부정선거였다. 공화당 스스로도 8명의 당선자를 제명함으로써 사실상 부정선거였음을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총선 다음날인 9일부터 연세대를 시작으로 전국의 대학에서 부정선거 규탄 시위가 일어났다. 박정희가 휴교령으로 학생들의 시위를 잠재우려 했으나 6월 14일 서울의 10개 대학 12,000명과 4개 고등학교 3,200명이 시위를 전개하는 등 학생들의 부정선거 규탄투쟁은 7월 초까지 지속되었다. 박정희는 또 간첩단 사건을 조작하였다. 세칭 동백림사건과 민족주의비교연구회사건이었다. 그러나 이 또한 학생운동을 불순세력에 의한 체제전복운동으로 몰아 봉쇄하기 위한 음모였다. ? 1969년 1월 공화당 의장 서리 윤치영이 헌법 개정 의사를 밝히면서 우려했던 삼선개헌이 현실의 문제로 다가왔다. 삼선개헌은 장기독재냐 민주주의냐의 갈림길이었다. 1969년 6월 12일 서울 법대생 500여 명이 헌정수호 학생총회를 개최하며 삼선개헌반대운동의 봉화를 올렸다. 이어 전국의 각 대학에서 성토와 시국선언대회가 줄을 이었고, 7월 1일에는 8,000여 명, 2일에는 6,000여 명의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경찰과 공방전을 벌였다. 3일에는 고려대를 비롯한 서울의 9개 대학과 경북대학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고, 10일에는 대구지역 고등학생들까지 시위에 나섰다. 조기 방학으로 소강상태에 빠진 학생들의 시위는 개학이 되면서 다시 재연되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휴교령을 발동하여 대학의 문을 잠근 채 9월 14일 새벽 국회 제3별관에서 삼선개헌안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삼선개헌안은 10월 17일 국민투표에서 통과 확정되었다. 4개월간 전국 55개 대학, 37개 고등학교에서 총 15만 7,000여 명이 참가한 삼선개헌반대투쟁도 결국 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 거듭되는 실패는 학생들에게 큰 좌절감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실패가 꼭 좌절만을 가져다 준 것은 아니었다. 학생들은 거듭되는 실패 속에서 실패의 원인을 찾기 시작했다. 그동안 한국 사회에 대한 과학적 인식이 부족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사회과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서울대의 한국사회연구회, 후진국사회연구회 같은 이념써클이 조직되어 운동을 과학화, 조직화하기 위한 노력이 진행되었다. 학생만으로는 안 되겠다는 인식이 보편화되면서 역사 변혁의 주체로서 노동자, 농민 등 민중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형성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