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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도 한 번 올렸던 영상이지만
많은 다른 영감있는 사진들이 많이 올라와서 다시한 번 올립니다.
앞 부분에 올린 동영상은 너무 잘 찍은 영상들이라
먼저 끝까지 보시고 끄지 마시고
그냥 두신채로 밑으로 내려가면서 사진 영상들을 끝까지 보시기 바랍니다.
동영상은 최고의 영상을 보여주고 있는 동영상입니다.
음악은 최고수준은 아니지만 여기 찍힌 영상은 정말 보기힘든
수 십대의 HD CAMERA를 동원해서 만든 영상이니
다 보신 후 음악을 계속 들으시면서 밑으로 내려 가시면서 보세요.
후회하지 않으실 것 입니다.
좀 긴 설명과 사진이 들어 있습니다.
학구적으로 자세히 아시고자 하실 때는 설명까지 다 보시고
아니면 사진만 봐도 많은 도움이 됩니다.
Barcelona - Sagrada Familia HD
바르셀로나의 상징이자 천재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 건축의 백미로 꼽히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건물은 너비 150 미터, 높이 170 미터로
1882년 착공하여 아직도 공사중으로 2035년 완공 예정입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건물은 그리스도의 탄생과 수난, 영광을 주제로한 조각과
믿음, 소망, 사랑을 주제로 한 파사드, 12제자를 상징하는 첨탑,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중앙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중 가우디가 완성한 것은
'그리스도 탄생'의 장식과 지하 성당 뿐입니다.
이 영상은 금년 초 이 성당에서 드린 대미사 장면을
수십대의 HD 카메라를 동원하여 여러 각도에서 촬영한 동영상으로
건물 내부를 구석구석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16분짜리 입니다
새계 건물 값어치 3위
성가족 성당 안토니오 가우디
세계적인 건축가 가우디의 미완성 작품으로 아직까지도 공사중에 있다.
엄청난 규모와 하늘을 찌릇듯한 첨탑, 그리고 미학과
온갖 아름다운 건축 기술의 총집합체로, 보는 사람들의 눈을 경악케하는 성당이다.
이 건물을 보자마자 그 황홀하고 경탄스러운 작품을 공부하는 시간.
그리고 132년 동안이나 성당을 짓고 있습니다!
세계 유명 건축물의 값어치를 알아보는 시간입니다.
안토니오 가우디에 대해서도 알아보겠습니다.
여기 보이는 사진은 세계 최고 수준의 영상을
WEB NINJA,SLAP BCN에서 뽑은 사진 입니다.
가우디는 어떤사람?
안토니오 가우디 이 코르네트는 1852년 카탈루냐 지방의 레우스라는 마을에서 태어나
구리세공을 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바르셀로나에서 건축학교를 고학으로 졸업한 그가
비로서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은 것은 1878년
파리 만국박람회 출품한 쇼케이스 디자인이었다.
이것을 눈여겨본 실업가 에우세비 구엘은 구엘저택과
구엘공원 등의 건축물을 가우디에게 의뢰하고 구엘자신은 후원자가 되었다.
"가우디는 바그너와 세잔 및 그 외의 예술가와는 반대로,
바르셀로나에서 혼자 혁명을 시작했다.
이리하여 우리는 지도 위에 카탈루냐의 위치를 표시하듯 미술사에서도
카탈루냐 지방의 위치를 표시함으로서,
다른 국가와 다른 분야의 천재들이 했던 모든 것,
앞서간 예술가들이 했던 모든 노력을
단 혼자의 재능으로 일궈낸 가우디를 발견하게 된다."
건축의 성자, 자신이 지은 최후의 역작에 묻히다
인용한 글은 1927년 푸란스시코 푸욜이
카탈루냐 출신인 가우디를 추모하면서 쓴 에세이의 마지막 문단이다.
약 일 년전인 1926년 6월 7일 가우디는
전차에 치어 3일 후인 10일 7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가우디는 너무 초라한 행색 탓에
아무도 이 거장을 알아보지 못해 너무 늦게 병원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말년에 건축 작업에만 몰두한 그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가우디는 로마 교황청의 특별한 배려로 성자들만 묻힐 수 있다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지하에 묻혔다. 가우디는 건축의 성자이면서,
실내 디자인과 장식 조각, 심지어 의자와 화장대에 이르기까지
제작한 20세기의 독창적인 예술가이다.
그의 전 작품에 드러나는 우아하고 기괴한 곡선과 다양한 자연의 이미지를
건축에 사용한 그의 '집'들은 피카소의 그림과 견줄 수 있는 건축 작품이기도 하다.
그의 거대한 영혼과 작품은 당대보다도 세월이 지날수록 더 높은 평가를 받는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위치한 대성당. 번역하면 '성 가족 대성당' 정도 되겠다.
천재 건축가로 알려진 안토니오 가우디가 설계한 건축물로,
기존 성당 건축의 특징을 잘 계승하면서도
가우디 특유의 개성이 잘 융합된 건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1882년부터 착공에 들어간 이래 13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 건축되고 있다.
이 밑에도 여기에 안 나오는 좋은 영상들이 많으니
동영상은 끄시지 마시고 계속해서 밑으로 내려가면서 보세요.
왜 이리 오래 짓나 ?
사실 이렇게 오래 걸리는 이유로
"동시대에 비견될 다른 건물 이상으로 복잡해서 만들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일단 1936년 시작된 스페인 내전기간 동안 건축은 중단되었던 탓도 있으며
1950년대에 와서야 건축이 다시 진행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만년의 가우디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건설하는 데 전념하며 소박한 생활을 보냈다.
1926년에 전차에 치어 사망했을 때는 너무나 초라한 복장으로
부랑자와 다름없었다고 한다.
가우디의 장례에는 그의 재능을 사랑한 시민들뿐만 아니라
그에게서 동냥을 받은 많은 부랑자들도 장례식에 함께했다.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i)의 예술혼이 살아있는 도시 - 바르셀로나
출생: 1852년 6월 25일, 스페인 레우스
사망: 1926년 6월 10일, 스페인 바르셀로나
스페인의 건축가이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인
안토니오 가우디 Antonio Gaudi 는 바르셀로나를 걷기만 해도 그의 작품을 볼 수 있다.
가우디는 1852년 스페인 레우스에서 태어나,
1926년 바르셀로나에서 전차에 치여 운명을 달리했지만 바르셀로나 곳곳에 남아 있는
그의 작품과 아름다움을 느끼러 바르셀로나를 찾는 여행자들의 미소와 웃음을
볼 수 있어 좋습니다.
여기서 부터는 지상의 실내 천장 작품
또한 대량의 자본조달과 인력조달만 된다면
현대의 기술로는 성당 건축에 이렇게까지 오래 걸릴 이유는 없다.
다만 건축가가 사망한 상태에서 남아있는 불완전한 설계도를 해석하여
건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성당 건축의 완성도를 위해
꼼꼼한 과정을 거치는 것 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적은 인원으로
공사를 진행시키기 때문에 오래 걸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바로 그 점이 역설적으로 관광의 세일즈 포인트가 되기도 한다.
성당 건축비는 상당부분 관람비에 의존하기 때문에
관광객의 유치는 건축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다.
다만 스페인 정부에서는 최근에 가우디 서거 100주년이 되는 2026년까지는
완공하도록 노력하고 있다는 발표를 했으며,
장비와 인원을 늘려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완공까지 22세기는 커녕 200년이 더 걸린다는 말이 나오는 시점에서
참 다행스러운 일이라 할것이다.
살아서는 볼 수 있을 것 같아!
하지만 이런 움직임에 우려를 표하는 사람들도 많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이 치밀한 완성도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소수 인원과 충분한 시간을 통해 작은 부분을 조각하는 것에 있어서도
충분한 검토 후에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자금과 건설 인력은 충분하지만,
세세한 부분까지 손대지 못하지 못하고 계속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우려가 있다.
그러므로 200년 걸려서 지어요
원통형 첨탑 여덟 개는 마치 거대한 옥수수들이 하늘로 치솟은 듯 보인다.
주변에 높은 건물들이 없어서 원래 높이보다도 더 높게 보이는 느낌.
Sagrada Familia (성가족성당) 내부
가우디는 30세부터 사망할 때까지 약 40여 년간 이 성당을 짓는데만 몰두했다고 한다.
베드로성당을 만들던 미켈란젤로처럼 그의 일생도 순탄하지만은 않았던 생각이든다.
오랜 시간을 공들였지만 갑자기 사망하고 완성을 못본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생전에는 보질 못했지만 세상에 남아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전통적인 고딕 양식을 기초로 해서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만든 걸작을 감상하고 있으니
아쉬운것은 스페인의 내전 동안 가우디의 드로잉을 보관하고 있던 작업실이
불에 타버려서 공사가 중단되었고
이 위대한 건축가의 작품을 이을 사람들이 없었다는것.
스페인에서 가장 인기 높은 관광명소로서 한해 유료입장객수가 2백만명을 훌쩍 넘습니다.
교회 건축물들이 널리고 널린게 유럽입니다만
그 독창적인 형태는 어떤 것과도 유사하지 않은 강한 개성을 갖고 있어서
호불호가 갈리기도 합니다만 건축조형예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꼭 봐둘 필요가 있습니다.
성가족성당 내부 천장의 모습 - Sagrada Familia nave roof
수난의 문
가우디가 죽은지 60년만에 완성된 두번쩨의 문이다.
성당 입구의 암호문자와 우측에 조각되어져 있는 글자중엔
비밀의 문자 "Criptograma와 JESUS라고 조각 글자도 보인다.
'
■ 건축양식과 종교적 심성
가우디의 건축 아르누보의 맥락에서 탄생했지만,
강렬한 개성 때문에 그는 아르누보의 전형적인 특징으로부터 벗어났다.
가우디의 건축에는 현대의 다른 양식들을 예시하는 요소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면 그가 자재를 사용하는 방식은 표현주의와 관련이 있다.
그의 작품에서 나타난 유연성은 후대에 유기체주의 건축가들이 더욱 개발하게 되며,
그의 독특한 상상력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맥락과 잘 어울린다.
예컨대 건축가 프랭크O, 게리느 가우디에게 적극 동조한다.
여기서 부터는 외부건물을 중심으로..
정면에서 역방향으로 돌면서 찍은 사진들.
성당에 새겨져 있는 비밀같은 암호-Criptograma Sagrada Familia
파밀리아성당에 만들어져 있는 블친님이 이 숫자판을 매우 궁금해하셨다. 숫자가 빠져 있다고~
그런데 이 숫자는 가로 혹은 세로, 또는 사선으로 더하기를 해보면 공교롭게도 더한 숫자가 33이 나온다.
예수 그리스도가 33년간 공생애를 마치고 돌아가신 나이가 33이었던것이다 .
이 글자를 Criptograma 라고 한다.
사그라다파밀리아
시대 : 1882년부터 장소 : 스페인 카탈루냐의 바르셀로나
이것은 최후의 교회가 아니라 새로운 개념에 입각한 최초의 교회다. [안토니 가우디]
그것은 역설적일지도 모르지만 실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해야 할 것이다.
19세기 내내 바르셀로나에서는 진보의 이름으로 교회들이 무너졌고,
종교적 건물에 대한 방화와 약탈, 파괴가 잇달았다.
하지만 바로 그 도시에서 19세기 말경에 옛 고딕 성당의 이념을 되살리고
현대 종교 건축물의 위대한 실례들 중 하나가 될 기념비적인 교회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이렇듯 포스트모더니즘의 혁신적 발상과 구상으로 건설하기 시작한
사그라다 파밀리아가 기본적으로 고딕 양식의 건물이라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가우디는 평형을 중시하는 고딕 역학 원리를 채택하고,
그것을 중세의 어느 건축가보다도 더 철저하게 추구했다.
회중석의 교대는 안으로 기울어 그 자체로 비팀벽이 되는데,
이는 추력과 반추역 체계의 논리적인 연장이다.
가우디는 줄과 끈으로 실내의 개략적인 모델을 만든 뒤 그것에 석고를 입혀 거꾸로 매달았다.
석고를 뒤집으니 현재의 설계가 나왔다.
이러한 구조적 아치를 전문 용어로 현수(懸垂)아치라고 한다.
가우디 건축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형상적인 발명의 능력이다.
아무렇게나 생긴 듯한 형상들이 실은 엄격한 논리적 추론에 입각해 있는 것이다.
사그라다파밀리아의 건축은 입체기하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전체 건물은 고정된 비례 체계에 따라 조정되었다.
지배적인 형상에는 포물면과 쌍곡면이 포함되는데,
가우디는 이것을 경험적으로 만들어냈지만
오늘날에는 컴퓨터 보조설계인 CAD를 이용한다
또한 사그라다파밀리아에서는 가우디 건축의 또다른 측명인
종교적 찬양의 짙은 감성을 확인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그를 정통으로 여기지 않기로 하지만,
2000년에 가톨릭 교회는 가우디에게
시복(諡福,성인 이전의 단계)을 내리는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사그라다팔밀리아는 교회가 현대 세계의 모순과 격변에 대해
승리한다는 표현으로서 설계되었으며,
이 때문에 가우디는 교회의 위치가 바르셀로나의
스카이라인에서 잘 보이는 곳이기를 원했다.
이러한 종교적 동기와 자연을 모방한 가우디의 건축적 구상을 아는 것은
그 건축물의 짙은 상징성을 이해하는 기초가 된다.
법정에서 중재하는 모습.
■ 계획과 상징
교회는 산을 연상시키는 것처럼 계속 높이 치솟는다. 실제로 이 교회는 바르셀로나 인근에 있으며
종교적으로 신성시되는 몬세라트 산에 비유되기도 한다.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맨 꼭대기에는 대형 규폴라나 돔이 설치될 예정인데,
완성되면 전체 높이가 170미터나 된다.
또한 주위에는 아직 세워지지는 않았지만 130미터짜리 뾰족탑 네 개가
복음서의 네 저자를 나타낼 것이며,
높이 140미터로 교회의 앱스 위로 건설될 다섯 번째 뾰족탑은 성모 마리아를 상징한다.
세 파사드의 꼭대기에 각각 네 개의 탑이 올려지면 수직 구조가 완성된다.
이 열 두 개의 탑은 12사도를 뜻하는데, 높이는 100미터가 될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시점에는 여덟 개까지 완성되었다.
해가 뜨는 동쪽 파사드는 예수탄생을 의미하며,
해가 지는 서쪽 파사드는 예수수난을 나타낸다.
남쪽의 주요 파사드는 신의 영광에 바쳐진다.
교회의 실내는 숲을 닮도록 했으며,
나무처럼 보이는 기둥들이 떠받치는 둥근 천장에는
별 같은 형상들이 기하학적으로 배열되어 있다.
가우디는 1890년경에 마스터플랜을 제출했고,
1892년에는 예수탄생 파사드의 공사를 시작했다.
그각 직접 감독하여 완성된 것은 이것뿐이다.
사망할 무렵 그는 예수수난 파사드와 회중석의 상세한 계획을 완성했고,
교회 전체를 위한 상징과 도상에 관한 계획도 끝마쳤다.
주요한 전거로 1:10과 1:25의 축척으로 제작된 모형이 있었는데,
이것들은 1936년 스페인 내란 때 사그라다파밀리아가 약탈당하면서
파괴 되었다가 나중에 복원되었다. 1936년부터 1952년까지는 건설 작업의 중단되었다.
공사가 재개되자 가급적 가우디의 계획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새로운 기법과 콘크리트 같은 새로운 자재를 사용하기로 했다.
그 와중에 사그라다파밀리아 건설에 반대하는 견해도 나왔으며,
계획의 타당성이 정기적으로 의문시 되곤했다.
그 의문은 종교적인 것도 있었고
(현대 세계에서 기념비적인 교회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새로운 예술적 언어를 포함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건설 작업은 크고 작은 여러 단계를 거치고 있다.
후원자들이 오로지 기부와 개인적 유증을 통해서만 재원을 마련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1976년에는 예수수난 파사드와 네 개의 탑이 완성되었으며,
조각가 조셉M, 수비라크스는 1986년부터 이 파사드의 조각을 맡아 일하고 있다.
2002년에는 회중석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데, 일부분은 완성되었다.
사그라다파밀리아가 언제 완공될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성가족 성당을 건축한 안토니 가우디는
1852년 6월25일 바르셀로나의 남쪽 레우스 (Reus) 에서
가난한 구리 세공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레우스는 지중해를 끼고 있는 작은 시골마을이다.
류마티즘, 관절염으로 늘 몸이 허약했던 가우디는 같은 또래 아이들과 뛰놀지 못하고
근처 숲과 바다에서 자연을 벗삼아 놀곤했다.
당시 레우스에는 로마네스크(Romanesque), 고딕(Gothic), 바로크(Baroque) 등
여러 양식으로 건축된 성당들이 많았다. 인근에는 타라고나(Tarragona) 유적지,
그리고 북쪽으로는 카탈루냐의 성지 몬세랏산(Montserrat, 4,054 feet )이 있었다.
몬세랏산에는 하늘로 치솟은 수많은 봉우리들과 바위, 나무 등이 있다.
가우디는 자라면서 늘상 보아온 주변의 풍경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가우디는 대장간을 운영하는 삼촌으로부터 철을 다루는 방법과 주조술,
석고 뜨는 법을 배웠다. 목공과 유리공예, 조각, 장식 제조술 등은
전문 장인들을 통해 익혔다.바르셀로나의 명문 건축학교를 우여곡절 끝에 졸업한 가우디는
파리 세계 박람회에서 우연한 기회에 에우세비오 구엘 (Eusebi Guell)을 만나
교분을 다졌고 구엘은 가우디의 평생 후원자가 되었다.
구엘의 재정적 도움을 받으며 가우디는 그동안 쌓아왔던 실력을 마음껏 발휘하게 된다.
1906년 2월 밀라의 작업 의뢰를 받고 가우디는 카사 밀라 공사에 착수했다.
카사 밀라는 다른공사와 비교해 매우 복잡하고 특이해 많은 화제를 뿌린 끝에 완성됐다.
하지만 적지않은 비난과 조롱이 따랐다. 물결치는 듯한 카사 밀라의 건축 리듬은 직선,
직각 일변도의 다른 건물 들과는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었다.
사례금을 제대로 받지 못한 가우디는 밀라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돈을 받았고
전액을 카톨릭 단체에 기증했다.당시 조롱을 받았던 카사 밀라는 1984년 구엘 공원 ,
구엘 저택과 함께 세계 문화유산에 지정됐다.
1883년부터 43년간 가우디는 성가족 성당 공사에 혼신의 힘을 쏟아 부었다.
15일 이상 금식하며 몸과 마음을 맑게했다.
운명하기 8개월 전 부터는 작업실도 아예 성당으로 옮겨 인부들과 숙식을 함께 했다.
그러던1926년 6월7일 저녁 가우디는 평소처럼 산책에 나섰다가 전차에 치이고 말았다.
그런데 가우디의 남루한 행색 때문에 4명이나 되는 택시운전사들이
부상당한 그를 병원으로 옮기는 것을 거절했다.
가우디는 고통 속에 오랜 시간 길거리에 그대로 방치되다
뒤늦게 빈곤층을 위한 병원으로 옮겨졌다.
다음날 친구들과 성당 관계자들이 찾아와 좋은 병원으로 옮기려 했으나
가우디는 자신도 주변 환자들과 같은 빈곤자라며 거절했다고 한다.
가우디는 이틀후, 성체 세례를 받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여’ 라고 말한 후 운명했다.
그의 장례식 날 경찰, 사제, 건축가, 건축학교 학생, 교회 기술자, 시민등
수많은 사람들이 장례행렬을 따랐다.
성가족 성당에서는 스페인 아빌라 출신으로
로마악파의 거장인 ‘토마스 루이스 데 빅토리아’의 레퀴엠이 엄숙하고 장엄하게 울려퍼졌다.
가우디의 전재산은 유언대로 성가족 성당에 기부됐고,
관은 교황의 허가를 받아 성당 지하 납골당 (Crypta)에 영원히 안장됐다.
안토니오 가우디, 그는 고통과 가난을 동반해야 고차원적 예술이 나온다고 생각하고
행동에 옮겼던 겸손한 건축가 였다.
이 원대한 계획은 성 요셉을 숭배하는 작은 종교단체에서 나왔다.
그 회장인 요셉 마리아 보카벨라는 성가족, 예수, 마리아, 요셉을
모든 그리스도교 가족의 모델로서 받드는 교회를 건립하겠다는 구상을 발표했다.
이 교회는 속죄의 성격을 지니며, 오로지 자선과 기부로만 재정을 충당하기로 되어 있었다.
최초의 모금액은 옛 도시 중심 부근에서 토지를 구입하기에도 모자랐으므로
당시에는 바르셀로나 외곽이었던 엔산체가 선정되었다.
1959년에 토목기사 일데폰스 세르다의 도시 계획에 힘입어 도시는 급속히 팽창하고 있었다.
토지 구입 비용은 17만 페세타(약 700파운드)이고,
첫 삽을 뜬 시기는 공교롭게도 성 요셉의 축일인 1882년 3월 19일이었다.
공사는 건축가 프란시스코 빌라르 이 로사노의 지휘 아래 시작되었다.
원래의 신고딕식 설계는 이탈리아의 로레토 성당에서 직접 영향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1883년 말에 빌라르 대신 안토니 가우디가 책임을 맡으면서 계획은 전면적으로 재편되었다.
1878년에 건축가 면허를 취득한 가우디는 자신의 경력이 막 꽃피기 시작할 무렵에
사그라다파밀리아를 맡아 1926년에 사망할 때까지 이 계획에 긴밀히 관여했다.
1918년 이후부터 그는 오로지 사그라다파밀리아 건축에만 매달렸고,
집과 작업실도 그 건설 현장으로 옮겼다.
그래서 이 교회는 가우디 건축의 정점에 해당하며,
그의 경력 전체에서 나온 모든 경험의 혁신이 집적된 성과라고 볼 수 있다.
지하로 내려가서 보는 예술작품,
스태인드 글라스
완공 상상도 |
사실 사진에 보이는 부분은 동쪽에 있는 첨탑이며,
성당의 정면이 아니다.
이 성당이 완공되고 나면 주된 이미지로 쓰이는 부분이 바뀔지도 모르는 일.
현재 완성된 것은 지하 예배당과 중앙 지하실 정도이다.
완성된 도면에 따르면 높이 100m 정도의 탑이 12개가 들어서는데
이외에 중앙에 세워지는 170m의 가장 큰 탑은 예수를 상징하고
탑과 탑을 이어주는 돔은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고 있다.
또 별도의 돔 4개는 4명의 복음 성인(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을 나타낸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성스러운 가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부분까지는 전체 건축 시리즈에서 일부분에 불과하다.
동쪽 전면의 '나시미엔토(예수의 탄생)'라는 건축 주제는 완성된 상태이고
서쪽의 '파시온(예수의 수난)' 도 대략적으로 완성된 상태이다.
가장 중요한 남측 정면의 '글로리아(영광)'는 2002년부터 건축이 시작되고 있으며,
이 성당 건축의 정점을 장식하는 170m 높이의 예수 그리스도 탑이 그 뒤에 지어질 예정이다.
현재는 공사중이기 때문에 성당 내부에는 시멘트 포대와 공구가 여전히 흩어져 있다.
성당 내부는
가우디가 숲속을 걷는 듣한 느낌을 주도록 설계되어 있어서 상당히 이색적이다.
특히나 내부의 색은 흰색인데 이는 스테인글라스가 햇빛에 비치면
그 색을 그대로 벽면에 새겨지도록 설계한 것이다.
동쪽면의 나시미엔토 면의 조각들은 가우디가 조각했는데
여기에 인물상들은
모두 가우디가 살던 동네 사람들을 일일이 석고로 본을 뜬후
그대로 돌로 조각해서 만든 것들이라고 한다.
가우디가 제작한 파트가 바로 나시미엔토 면이며
이 부분은 세계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반대쪽에는 가우디가 죽고 30년후인
호세 마리다 수비라츠라는 모더니즘 조각가가 조각을 시행했다.
그래서 가우디가 설계한 파트와는 조금 다른 느낌을 준다.
이 성당을 구성하는 외벽 선은 거의 모두가 곡선 형태이다.
이는 그 당시의 서구 건축역사에서 보기 드문 개념이었다.
고딕 양식 특유의 부벽에 대해 '보기 딱한 목발'이라고 불렀던 가우디는
부벽을 덧붙이지 않으면서도 건물의 안전성을 높이기 위해
곡선 형상에 적합한 구조 역학까지 배려해 건축을 진행했다.
그는 성당의 모형을 만들기 전 실을 천장에 매달고
모래주머니 또는 납추를 중간중간에 매달아 휘어지는 강도를 측정했는데,
이 작업을 통해 그가 원하는 곡선이 도출되면 설계에 반영했다.
높이 170m의 이 거대한 건물은
바르셀로나의 '스카이라인(산이나 건물이 하늘에 그리는 윤곽)'을 바꿨다는 평을 받고 있다.
가우디 건축의 특징은 '건축물이 기본적으로 지녀야 할 기능은 반드시 유지하되
그 외형과 내부공간을 어떻게 구성하여 인간의 상상력을 최대한 자극시킬까'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흔히 건축물이라고 하면 고정되고 딱딱하고 위치가 바뀌지 않을 듯한 느낌을 주지만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마치 금방이라도 어디론가 움직일 듯한 모양새다.
특히 해가 질 무렵 붉은 노을을 받았을 때 성당의 모습은 황홀경 그 자체다.
가우디는 40년 동안 이 성당 건축에 혼신의 힘을 다했으며
1926년 전차에 치여 사망할 당시에도 성당 앞에서 상념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사후 그가 안장된 곳 역시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지하.
유네스코는 가우디의 또 다른 작품인 구엘 공원과 카사밀라 등을
세계유산으로 지정하면서
‘인간의 창조적 천재성이 과연 어디까지 뻗칠 수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라며 극찬했다.
반면 1984, 동물농장 등으로 유명한 언론인 조지 오웰은
스페인 내전 때 바르셀로나에서 의용군으로 복무 하면서 공화군 민병대들이
"다른 건물은 잘만 폭파하는데도 흉측하게 커다란 교회는
또 예술 작품이라면서 내버려 뒀다"라면서
수기집인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깠다(…)
사실 조지 오웰의 경우, 스페인 내전에서 힘있는
가톨릭의 기득권층들과 귀족, 자본가가 지지하는 프랑코에 맞서 싸운
공화국 민병대 참여자였으므로
이 성당에 대립하는 위치라 할 수 있기 때문에 비난할 수 있었던 것.
흔히 성당이라고 하면 당연히 석조라고 생각하겠지만,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석조 성당이 아니다.
처음에는 돌로 짓기 시작했지만, 1950년 경에 근처 채석장의 돌이 바닥난 뒤로는
철거된 석조 건축물의 자재를 재 이용하다가 지금은 인조석과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하고 있다.
분명 누군가는 실망할 소리겠지만, 애초에 가우디는 이 성당의 재료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지정한 적이 없으며, 콘크리트를 사용한다고 해서
건축물의 격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20세기의 걸작 건축물들은 거의 콘크리트를 가지고 만들어졌다.
사그리다 파밀리아'란 요셉, 마리아, 예수의 '성 가족'을 뜻하며
이 교회 자체가 돌에 새긴 성서라고도 할 수 있다.
가난한 종교 단체 산 호세 협회의 교회로 시작되었으나
처음 건축을 담당했던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비야르가 사임하자
1883년 31세의 가우디가 뒤를 이어
그의 평생의 작업으로 이 성당을 짓다 죽어 성당 지하에 묻혀 있다
가우디는 사망하기 직전까지도 늘 성가족 성당과 함께 했으며 죽어서도 무덤 속에서 성당을 짓고 있다는 이야기가 생길 정도로 가우디의 혼이 담긴 건축물이다. 가우디의 급작스런 사고로 결국 성당은 미완성으로 남겨졌지만 후대에 와서 다시 재건이 되고 있으며 성가족성당을 방문한 많은 관람객들은 아직도 완공까지 100년 이상이 남았다는 이야기에 혀를 내두르지만 전 세계인들의 입장료를 포함한 성금으로 오늘도 돌 하나를 쌓고 있는 이 성당은 미완성이란 타이틀로 더 유명세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20세기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 불리는 스페인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
고향인 몬세라트의 바위산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뾰족탑은누군가는 옥수수모양이라 표현을 하기도 했다.가우디의 성지가 되어 버린 바르셀로나!!성가족 성당(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으로 하여금끝없는 영광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건축 양식은 입체기하학에 바탕을 둔 네오고딕식이다.
구조는 크게 3개의 파사드(건축물의 주된 출입구가 있는 정면부)로 이루어져 있다
가우디가 죽을 때까지 완성된 파사드는 그리스도의 탄생을 경축하는 동쪽에 있는 탄생의 파사드뿐이다.
이 파사드는 가우디가 직접 감독하여 완성한것이다
나머지 두 개의 파사드는 서쪽의 수난과 남쪽의 영광 파사드이다.
가우디 사후, 한동안 중단되었던 공사를 재개하면서
까딸루냐 출신인 조각가 수비라치가 지금 현재 이 공사를 맡고 있다
그러니 자연 삼면은 판이하게 다를 수밖에 없고 그것이 시대적인 상황을 배제할 수 없음일 것 같았다
수난의 파사드는 1976년에 완성되었고, 영광의 파사드는 지금도 공사중이다.
2005년에 탄생 파사드와 지하 예배당이 세계유산으로 등록됐다.
3개의 파사드에는 각각 4개의 첨탑이 세워져 총 12개의 탑이 세워지는데,
12개의 탑은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를 상징한다
중앙에는 170미터 높이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돔과 성모 마리아를 나타내는 140미터 높이의 탑을 세우고
그 옆으로 100미터 높이의 탑 열두 개로 설계되었는데 현재는 여덟개의 탑이 세워져 있다.
처음에는 자재를 주로 돌을 사용했는데, 지금은 이란등 다른나라에서
돌을 수입해 쓰거나 인공 석재와 콘크리트를 쓴다고 한다.
건축에 필요한 자금은 후원자들의 기부금만으로 충당되고 있어 진행이 더디다.
예수의 탄생을 상징하는 동쪽편 파사드(Native Facade). 3개의 출입문과 4개의 첨탑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쪽편 파사드는 건축가 가우디가 직접 관여한 부분으로 첨탑을 제외한 부분은 생전에 직접 감독하였다고 한다.
건축 양식은 입체기하학에 바탕을 둔 네오고딕식이다.
구조는 크게 3개의 파사드(건축물의 주된 출입구가 있는 정면부)로 이루어져 있다
가우디가 죽을 때까지 완성된 파사드는 그리스도의 탄생을 경축하는 동쪽에 있는 탄생의 파사드뿐이다.
이 파사드는 가우디가 직접 감독하여 완성한 것이다.
나머지 두 개의 파사드는 서쪽의 수난과 남쪽의 영광 파사드이다. 수난의 파사드는
1976년에 완성되었고, 영광의 파사드는 지금도 공사 중이다.
2005년에 탄생 파사드와 지하 예배당이 세계유산으로 등록됐다.3개의 파사드에는 각각 4개의 첨탑이 세워져 총 12개의 탑이 세워지는데, 12개의 탑은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를 상징 한다
동북쪽을 향하고 있는 파사드는 떠오르는 태양빛을 받게되는데 이 곳에 성육신의 신비를 상징하기위해
아기예수의 탄생과 예수의 유년시절을 타나내는 조각상들이 세워졌다.
왼쪽은 소망의 문을, 중앙의 문은 사랑을 오른쪽 문은 믿음을 상징하고 있다.
중앙 문인 사랑의 문
그리스도의 탄생을 경축하는 모습
스테인드글라스로 된 창문도 보이고 주변의 섬세한 조각들은
다른 건물에서는 볼 수 없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서쪽 수난 파사드는 직선 대신 자연의 곡선을 형상화한 가우디의 생각과는 참 다른 모습이다. 이것을 현대적이라고 생각해야 하는지 모르지만 가우디가 사망함으로
스페인 내전 중에 일어난 노동자 폭동으로 설계 도면과 고안물들이 소실된 것이란다.특히 수난의 문에 매달려 있는 예수상 등은 가우디 사후 설계자들이
너무 현대적으로 꾸며 놓아 균형감이 깨진 것 같다는 논란이 되고 있다.
* 자료 참조;
1. 스페인 & 포르투칼, lonely planet, 2009년
2. 엔사이버 세계문화탐방
3. 브리태니커백과
4. 위키백과
5. 가우디 예언자적인 건축가, 시공디스커버리총서, 필립티에보, 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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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성가족 성당 안토니오 가우디 (세계 건물 값어치 3위)
박안나 시인님!
역사적인 가우디의 위대한 건축물을 영상으로 보여주셔서
너무 고맙습니다 잘 보관하여 인류의 찬란한 건축문화를
주위의 지인님들과 감상하며 행복힐링으로 기쁨을 나누겠습니다
시인님 ! 신앙속에서 더욱 깊은 시의 세계를 기대하며
5월의 맑은 차 한잔 올립니다
죽선재에서 도명 합장
- 도명님 메일에서
<옮김>
첫댓글 안토니오 가우디 그 이름만으로 설레입니다~~우리 카톨릭 신자들에겐 더욱 더!!! ^^
언젠가 우리 아들들과 저 곳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