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모의 역사 속 반면교사]
명분에
집착해 현실 외면한 인조…
'통쾌한 외교'
가 병자호란 불렀다
인조가 놓친 10년의 기회
인조 정권, 청 침략 대비 군사력 미비
명분 집착 외교 협상 거부로 전쟁 유발
병자호란 참상, 현실 외교 교훈 남겨
국가와 조직의 운명은 때로
지도자의 잘못된 선택이나 결단의
부재에 의해 더 크게 좌우된다.
‘역사 속 반면교사’
는 역사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
(critical moment)을 세밀히
살펴봄으로써, 지도자들이 놓친
기회와 그 후과를 리더십의
관점에서 되짚어 본다.
---편집자 주---
< 일러스트=김성규 >
“1919년부터 1939년까지
20년간의 위기는 희망으로 시작해
참혹한 절망으로 끝났다.
현실을 외면한 유토피아가 무너진
결과였다.”
영국의 국제정치학자 E. H. 카는
‘20년간의 위기’
에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이
다시 전쟁에 이른 과정을 이렇게
평가했다.
조선에도 이와 비슷한
‘10년간의 위기’
가 있었다.
1627년 정묘호란에서 1636년
병자호란까지의 10년이다.
첫 번째 전쟁은 경고였고, 그 뒤의
시간은 국방과 외교를 정비할
기회였다.
그러나 인조 정권은 그 기회를
살리지 못한 채, 더 크고 참혹한
전쟁을 맞았다.
흔히 정묘·병자호란을 여진족이
일으킨 두 차례의 외침으로
묶지만, 두 전쟁의 성격은 크게
달랐다.
정묘호란은 성장하던 후금이
명나라와 전쟁을 벌이며
배후의 조선을 견제하려고
일으킨 전쟁이었다.
반면 병자호란은 만주와 몽골을
장악하고 명나라를 압박하던
청이 조선을 새로운 천하 질서에
굴복시키려고 일으킨
전쟁이었다.
한마디로 10년 사이 후금은
청 제국으로 성장했지만,
조선의 국력과 대외 인식은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었다.
----병자호란 3년 전인 1633년
‘인조실록’에 기록된 김시양의 상소.
“일을 마음에 통쾌하게 하면 후회가
따르게 마련인데, 다른 일은 저지르고
후회해도 되지만 이 일(단교)은 그럴
수 없다”고 간언했다가 처벌당했다----
< 국사편찬위원회 >
물론 인조 정권이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 시기의
‘인조실록’
을 보면 산성을 정비하고 군사를
재배치했으며 강화도 피난책도
논의했다.
그러나 급성장한 청군을 막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군사적으로 막기 어려웠다면
외교로 전쟁을 피하거나 준비할
시간을 벌어야 했다.
하지만 조정은 명에 대한 의리에
얽매여 현실적인 외교론을
배척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1632~1633년의
국교 단절 위기다.
후금이 명 사신과 동등한 대우와
막대한 예물, 큰 배 300척을
요구하자 인조는
“대의에 관계된 일이므로 다른
것을 돌아볼 겨를이 없다”
며 절교하려 했다.
이때 도원수 김시양이 절교 문서를
가지고 가던 사신을 의주에서
멈춰 세웠다.
후금의 목적은 당장 전쟁을
일으키기보다 교역을 확대하는 데
있으며, 조선은 아직 전쟁을
치를 준비가 안 돼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는
“천하의 일을 통쾌하게 처리하면
반드시 후회가 따른다”
며 목숨을 걸고 국교 단절을 반대했다
(인조실록 11년 2월 11일).
국가의 존망이 걸린 외교에서
순간의 통쾌함은 독약이 될 수
있다는 경고였다.
하지만 인조는
“장수가 감히 강화를 말한다”
며 김시양을 처벌했다.
대신들도 국왕의 분노에 편승해
그를 참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행히 후금도 국교 단절보다
교역의 지속을 원했기에 조선은
가까스로 전쟁을 피했다.
김시양의 판단이 옳았던 것이다.
그러나 인조 정권은 이 경험에서
배우지 못했다.
1636년, 후금이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홍타이지를 황제(청태종)로
추대하자, 조정에서는 척화론이
거세졌다.
장령 홍익한은
“청 사신을 죽여 그 머리를
명나라에 보내자”
고 주장했다.
인조도 청의 문서를 배척한 일을
팔도에 알리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강약과 존망의 형세를 헤아리지
않은 채 오직 정의로 결단했다.
도성 사람들도 청의 요구를 물리친
일을 통쾌하게 여기고 있다.”
국력의 강약과 국가 존망의
형세를 헤아리지 않고 정의를
위해 전쟁까지 불사하겠다는
인조의 이 선언은 기원전 416년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의
‘멜로스 협상’
을 떠올리게 한다.
약소국 멜로스는 강대국 아테네의
항복 요구를 거부하며
“700년간 지켜 온 자유를 포기할
수 없다”
고 맞섰다.
정의의 신과 동맹국 스파르타의
지원을 믿고 전쟁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기대했던 지원은 오지
않았고, 멜로스의 성인 남자들은
전부 살해되고 부녀자들은
노예로 팔려 갔다.
아테네의 침략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아테네 협상단이
“한 나라의 독립을 지켜 주는
것은 그 나라의 실력”
이라며
“생존이 걸린 순간에 공명심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고 경고한 대목은 냉혹한 국제
정치 현실을 보여준다.
인조 정권도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려면 그것을 감당할
국력부터 갖추었어야 했다.
청과 맞설 힘이 부족했다면
외교로 전쟁을 피하거나 준비할
시간을 벌어야 했다.
그러나 조정은 척화를 외치면서도
군사력을 충분히 기르지 않았고,
화친을 말하는 신하들을 의리를
저버린 자로 몰아세웠다.
싸울 힘도, 협상할 여지도
스스로 좁힌 것이다.
----청 태종은
“죄인은 정문으로 나와선 안 된다”
며 인조가 남한산성의 서문인
우익문(右翼門)을 통해 삼전도에
오도록 했다----
< 박현모 제공 >
대안이 전혀 거론되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윤방과 최명길은 국왕을 강화도로
옮겨 장기전에 대비하자고 했고,
윤황과 정온은 개성으로 나아가
백성과 함께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느 쪽이든 실행을 전제로 한
구체적인 전략이었다.
그러나 인조는 어느 방안을 채택해
국가적 방어 전략으로 만들지
않았다.
신하들도 척화를 외치면서도
어디서 어떻게 싸울지, 백성을
어떻게 보호할지, 군량과 병력을
어떻게 조달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전략이 없었다.
정보 관리도 허술했다.
1636년 3월 조정이 평안감사에게
보낸
‘화친을 끊고 오랑캐의 침입에
대비하라’
는 기밀문서가 청의 복병에게
빼앗겼다.
조선의 적대 의도와 허술한 방비가
청에 그대로 드러났다.
그해 12월 청군이 압록강을 건넌
뒤에도 조정은 적의 진격 속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13일 저녁에야 청군이 평양에
이르렀다는 보고를 받고
우왕좌왕했고, 이튿날에는
이미 개성을 통과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강화도로 피신할 시간마저 놓친
인조는 결국 남한산성에
고립되었다.
인조와 정반대의 길을 걸은
사례도 있다.
993년 거란군이 밀려오자 고려
성종은 먼저 서희를 중군사로
임명하고 군사를 북방에 배치했다.
이어 자신도 서경, 즉 평양까지
나아가
“여러 신하를 모아 앞일을
의논하게”
했다.
남쪽으로 피신하는 대신 전선과
일정한 거리를 둔 곳에서 한
신하의 의견과 그에 대한 반론,
다시 서희의 계책을 차례로
경청한 것이다.
성종은 서희의 방안을 최종적으로
채택하고 협상의 전권을 맡겼다.
여론에 끌려다닌 것이 아니라,
여론을 모아 결론을 내린 것이다.
서희 역시 왕의 기대에 부응해
담판으로 전쟁을 끝냈을 뿐 아니라
강동 6주를 확보할 기반까지
마련했다.
고려는 이후 거란의 재침에 대비해
방어력을 키웠고, 1019년 강감찬은
귀주에서 거란군을 크게 물리쳤다.
첫 침입 뒤 주어진 26년을 국방력을
기르는 기회로 살려낸 것이다.
조선에도 임경업 같은 장수와
김시양·최명길 같은 현실적인
협상가가 있었다.
부족했던 것은 인재가 아니라,
그들의 서로 다른 역량을 하나의
국가 전략으로 결집하는
리더십이었다.
가장 무거운 책임은 국왕
인조에게 있다.
‘삼학사’로 불린 언관들은 원칙과
명분을 주장하고, 조정에서는
척화와 주화가 맞설 수 있다.
국왕의 역할은 그 의견들을 변화하는
현실에 비추어 실행 가능한 국가
전략으로 결론 짓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조는 시비의 대립에 갇혀
결단해야 할 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최고 결정권자가 여론을 이끌지
못하고 끌려 다니는 사이에,
1636년 12월 청 태종이 이끄는
12만8000여 대군은 압록강을
건넌 지 열흘 만에 한양에
육박했다.
오늘날 대한민국도 강대국 경쟁과
국제 질서 재편 속에 서 있다.
이럴 때일수록 진영 논리와 도덕적
우월감에 기대어 상대를 비난하는
‘통쾌한 외교’
를 경계해야 한다.
원칙을 지키되 현실을 정확히 읽고,
국방력을 기르면서도 대화와
협상의 통로를 열어 두어야 한다.
지도자의 책임은
‘옳은 논의’
를 ‘필요한 조치’로 바꾸어
국민의 생명과 국가의 생존을
지키는 데 있다.
이것이 병자호란이 오늘의 한국
정치와 외교에 남긴 가장 뼈아픈
교훈이다.
박현모 세종국가경영연구원 원장
[출처 : 조선일보]
[100자평]
소요산관
미국에게 큰 소리치고 살자는 약간 낭만적인
반미주의. 우리는 한민족이고 동포들이
고통받고 있으니 보살펴주자는 소갈머리 없는
인도주의. 국방비 차이가 얼만데 설마 하는
평화주의. 이런 것들이 정리되지 않고,
교육도 되지 않고, 학연으로 지연으로
당파따라 취사선택 되고, 반대되고,
그것 때문에 우왕하고 좌왕하는 혼란이
계속되고 있다.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고 국민에게 알리고
중지를 모아야 할 때다.
옛날 반공 시대엔 북에 대해서 말만 해도
잡혀갔었지.
이젠 실상을 교육하고 알려야 할 때가 왔다.
회원90958338
글쓴이가 한가하게 옛날이야기 들려준게
아니다...
형보수지는 준비도 대책도 없이 전작권
회수하고 자주권을 찾자고 통쾌하게 큰소리
친다.
더듬당은 척화론자들 이상으로 낭만주의자
들이고..,
남자들은 모두 죽고 여자들은 노예로 팔리고
늙고 볼품없는 할머니들은 주방용으로
끌려가는 게 국제 현실이다
북에서 경량화된 전술핵으로 서울기능만
간단히 마비시켜도 국민여론은 항복으로
급속도로 바뀐다.
불쌍한 서민들은 고통속에 울부짖고
비행기 타고 제일 먼저 도망갈 놈들이
형보사범수지와 그 측근들이다.
콩큐
조선은 500년간 고여도 너무 고였다.
프라우다
병자호란을 반면교사 해야 한다.
이 시대엔 미국이 명이고 중국이 청이다.
한국은 이념 같은 명분 보다는 실리 외교를
추구해야 한다.
한국은 친미국하고 친 중국해야 한다.
곰다이버
영화 "남한산성"이 생각납니다.
청 태종이 코앞에 있는데 명나라에 제를
올리는 모습에 한숨을 쉬었던 기억입니다.
지금 이재명은 "국력이 세계 상위권
이라면서 자위권 행사할 명분이 차고도
넘친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압록강에 중공군 3개 사단이 날마다 훈련하고
있다는 것이 뭔말인지 잘 모르지만 우리는
38선 지키기도 벅찬 일 같아보여
안타깝습니다.
Pebble
지도자는 정상이고 위대할 것이라는 인식을
가진 국민. 공자가 삼강오륜에서 그렇게
가르쳤으니까.
anak
백성이야 죽든 말든 내 알 바 아니고...
정원90
셰셰 하는 것이 통쾌한 외교?
제 불리하면 국가와 국민이 어찌 되든 모른
척하고, 제 유리하면 국민은 졸로 보나?
소팽약선
빙빙 돌리지 말고, 직설적으로 말을 해.
"인조"냐? "광해군"이냐?
샤크
인조만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광해군을
몰아낸 것부터 당쟁의 결과가 아닌가?
외교의 실패로 전쟁을 부른 실책은 천고의
죄인이라 하겠다.
청나라 볼모시절에 깨우친 소현세자의
일가를 도륙한것은 속좁은 아버지 이상의
과오가 아닌가?
참으로 귀태의 인물인데, 지금도 그를 닮은
괴물이 또아리를 트고 있어 심히
걱정스럽다.
카페 게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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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19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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