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2년 6월 나폴레옹은 70만 명에 가까운 병력으로 러시아를 침공했습니다. 러시아 정벌에 실패하고 나폴레옹이 모스크바에서 퇴각 명령을 내린 시기는 10월 말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12월이 되어야 혹독한 추위가 닥칠 것으로 보고 10월이면 철수에 필요한 시간이 충분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러시아의 기후가 얼마나 갑작스럽고 혹독하게 변하는지를 잘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1812년 11월 6일이 되자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고 폭설이 내렸습니다. 그동안 여름에만 전투를 했던 프랑스군은 아예 겨울 군복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병사들은 손발에 동상을 입어서 총을 쏠 수도 행군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70만 명에 달하던 병력 수는 2만 5,000명으로 줄어들었고 나머지는 죽거나 부상당하거나 포로가 되었습니다.
약 130년이 지난 1941년 6월에 히틀러는 300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러시아를 침공했습니다. 히틀러는 나폴레옹보다 더 첨단화한 무기와 더 많은 병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를 점령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히틀러도 나폴레옹과 마찬가지로 추위가 닥치기 전에 러시아를 정복할 수 있다고 확신했지만 러시아의 혹독한 겨울 추위로 인해 수많은 독일군이 얼어 죽었고 러시아에서의 패퇴는 히틀러의 패망으로 이어졌습니다.
베트남에서도 역사적 무지가 똑같이 반복되었습니다. 1946년부터 1954년까지 벌어진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식민 강국 프랑스는 베트민(Viet Minh)군의 게릴라 전술에 시달리다 결국 패배했습니다. 베트민군은 프랑스군의 보급선을 공격하고 빠지는 전술을 구사하면서 지속적으로 프랑스군을 괴롭힌 후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의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미국이 다시 그 수렁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미국은 프랑스의 경험에서 배우기는커녕 자신들이 더 강력한 군사력을 가졌기 때문에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말을 가진 군대가 실패한 곳에서 탱크를 가진 군대가 승리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러시아를 침공했던 히틀러와 마찬가지로 미국 역시 참혹한 패배를 경험했습니다.
1955년부터 1975년까지 20년간 6만여 명의 전사자와 1,680억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비용을 치르고도 미국은 베트남의 역사, 문화, 관습, 지형 등에 무지했기 때문에 패배했습니다.
전장에서의 반복적인 무지를 발견할 수 있는 또 다른 장소는 아프가니스탄입니다. 1839년 당시 세계 최강이던 영국군은 아프가니스탄을 정복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한 장군은 “아프가니스탄은 산세가 험하고 자부심이 강하며 자유를 사랑하기 때문에 함락하기 어렵고, 점령을 유지하기는 더 어렵다”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1979년 소련은 자신들은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며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습니다. 무자헤딘 게릴라는 높은 곳에 진을 치고 이동하는 소련군의 선도 차량과 최후방 차량을 지뢰나 로켓으로 파괴한 다음 나머지 병력을 서서히 괴멸시켰습니다.
소련의 지휘관들은 경무장으로 험한 지형을 빠르게 이동하는 소규모 부대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모른 채 전장에 투입되었던 것입니다. 무지의 배턴(baton)을 이어받아 2001년에 미국이 아프간 전장에 뛰어들었지만 2021년 전 세계가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허겁지겁 카불 국제공항을 떠났습니다.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George Santayana)는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과거를 되풀이할 운명에 처한다”고 했습니다. 역사에 무지하면 언제든지 위험한 일이 되풀이되어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역사가 중요한 이유는 재난을 경험한 사람이 모두 죽은 뒤에도 역사만이 그 재난의 기억을 우리에게 또렷이 전해주기 때문입니다.
국가적으로 탄핵이라는 아픈 경험을 또다시 겪게 되었습니다. 역사적 무지가 우리에게 다시는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2025년의 새봄과 함께 대한민국의 밝은 미래가 활짝 열리기를 기대해 봅니다.
산업연구원 명예연구위원, (사)지역산업입지연구원 원장 홍진기 드림
첫댓글 세기의 역사적인 전쟁경험 의 교훈 잘보면서 특히 미국이 월남전에서 베트남에게 패한 것 많은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