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고등학교 1학년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집안 형편이 여의치 않아서 공업 고등학교를 선택했지요
왜냐구요
당시에는 국민학교(초등학교) 입학부터 입학금이 있어야했고 매달
등록금을 내야했지요
그리고 학교 운영상 필요한 경우 기성회비를 별도로 내야했지요
물론 중고등학교 그리고 대학에 갈때도 입학금이 그리고 매월
내야하는 등록금이 있어야 하지요
당시에는 대학에 가기는 지극히 어려웠고 초등학교도 못가는 애도
많았답니다
나도 역시 아버지는 직장이 없었고 동생이 셋이나 되는 대식구였으니
초등학교 졸업후 입학금이 없어서 청계천에 있는 인쇄소에 다녔
답니다
필요한것 구입하는 심부름꾼 이었지요
1년후 야간 중학교를 갔답니다
당시 이렇게 생각 했지요
돈이 안드는것은 공부 뿐이라고 말입니다
열심히 공부를 했고 공업고등하교 중 컷트라인이 높다는 공업고등
학교에 무난히 입학을 했답니다
그런데 무난히란 말이 좀 그런것 같습니다
취업이 가장 우수하단 기계 공작과를 선택했는데 컷트라인이 좀 얕은
판금 용접과로 떨어졌지요
기계분야는 기계 공작과와 판금 용접과 그리고 주물목형과로
나뉘어져 있었지요
고2나 고3 여름 방학중에는 반(20명) 모두가 공장에 실습을 나가지요
실습 나갔다가 취업으로 결정하는 학생은 극히 드물고 학교로 돌아와
대학 입학 공부를 하는 친구가 대부분 이랍니다
그런데 국영수 과목 수업이 절반이고 전공 실습이 절반이니 대학 입학
수준이 지극히 부족하지요
이런 실정이니 대부분 친구들은 졸업때쯤 공장에 취업을 하게 되지요
실력이 부족하면서도 서울 공대나 한대 공과에 입학 시험을 치루지만
합격됐다는 소식은 없었답니다
우리나라 공업분야 수준이 형편이 없었던 때였지요
우리나라에는 자동차 생산공장이라든지 전기 전자 상품 생산 시설이
전무했던 시절이었지요
친구 하나는 미국 여행 여권을 하나 구입하고 무조건 미국으로 건너가
건물 청소를 하며 부지런히 벌어 승용차도 하나사고 괜찮은 집도 하나
세로 얻고 해서 이제 막 미국땅에 뿌리를 내릴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됐다고 편지가 오곤 했었답니다
공장에서 일을하고 또는 잔업 두어시간하고 밤늦게 집에 힘없는 발걸음을
하며 돌아오곤 했었답니다
매월 월급날에는 일전 한푼 쓰지않고 어머니께 월급 봉투를 드리곤
했지요
동생 셋과 부모님과 모두 다섰 식구가 생계를 유지 했지요
이제는 먼 추억이 된 그 시절을 돌이켜 보며 쓴 웃음을 지어본답니다
지금 막 미스트롯2 2라운드 결승전이 TV에서 재방송이 막 시작되고
있습니다
괴로우나 즐거울때 즐겨 들어왔던 우리의 민족의 감성이 실려있는
트롯이지요
탑쎄븐 아가씨들의 노래를 들으며 미소를 지어봅니다
(작성: 2021. 03. 15.)
첫댓글 젊은 시절 고생은
사서라도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훌륭한 일을 하셨어요.
존경합니다.
행복한 하루가 되세요.
좋은 추억의 글 잘
보았습니다.
감사드립니다
고운글 잘보고 갑니다.꾸벅^^♥
아련한 힘들었던 기억을
즐거운 로망으로
만들었 습니다
우리소리의 맥 전통 가요
트롯 음악을 들으셨어
아픈 기억도 로망이
되셨습니다 우리의
트롯 음악에 정서 와
힘입나다 잘 읽었습니다
영탁 막걸리 한잔
값 올림니다 한잔
드시고 토롯 한곡
부르세요
@가람풍경 주성태
풀 서비쓰 압니다
용돈 쓰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