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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세유표(經世遺表) 11권 賦貢制 7
*공안(貢案) 개정에 대한 율곡 · 서애선생의 상소
공안(貢案)은 각 지역에 배분된 공물의 양, 상납 또는 거두는 방법 등 구체적인 내용이 있는, 요즘 말로 하면 공법(貢法)의 시행령 정도 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조정에서, 또는 왕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바로 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시행하지 못하는 이유를 ‘백성의 소요’ 등으로 내세웠다고 하는데, 거기서 백성은 그것으로 이익을 보는 극히 소수의 상인이나, 서리, 일이 귀찮아지는 일부 관리 등일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선조(宣祖) 15년(1582 : 壬午) 가을, 구월에 우찬성(右贊成) 이이(李珥)가 상소해서 공안(貢案)을 개정하길 청했다.
宣祖十五年。壬午 秋九月。右贊成李珥。上疏請改貢案。
그 상소는 대략 이렇게 일렀습니다.
“이른바 공안을 고치는 것은, 여러 고을에 토지의 대소와 인민의 많고 적음이 같지 않고 혹 하늘과 땅 차이인데, 공안에 정해진 것에는 심한 차등이 없어 괴로움과 편리함이 고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토산품 아닌 것이 많고 온갖 물품을 모두 마련해서 각 관청에 갈라 바치는데, 수량이 점점 많아지는 폐단은 해(害)가 백성에게 돌아가고, 이(利)는 서리가 가로채어, 나라 쓰임에 더해지지 않습니다. 또 근래에는 세가 가벼워져서 오랑캐와 같은 것도 있습니다.
1년 수입으로써 지출을 능히 감당하지 못하고, 매양 옛날에 저축했던 것을 보태어 씁니다. 그리하여 200년 동안이나 축적해오던 나라에 지금은 2년 동안 먹을 것도 없습니다. 나라가 나라 꼴이 아니니 어찌 한심스럽지 않습니까? 지금에 부세를 더하고자 하니 백성의 힘이 벌써 다했고, 전일의 규정만 지키면 오래지 않아서 나라 재물은 반드시 다 없어질 터이니 이것은 보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신의 생각에는 만약 공안을 개정하자면 능숙한 솜씨를 지닌 자에게 맡겨서 규모를 잘 획정하도록 하되, 다만 그 땅에 생산되는 것으로 균평하게 배정한 다음, 한 고을에서 상납하는 것이 두세 관청을 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수입하는 원래 수량은 별로 줄어들지 않으면서도 백성의 허비는 열에 아홉을 없앨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해서 백성의 힘을 너그럽게 펴주고, 백성의 심정을 위로해서 즐겁게 한 다음, 알맞게 요량해서 세를 증가한다면 나라 용도는 점점 넉넉해질 것입니다. 공안(貢案)를 고치고자 하는 것은 사실 백성만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 경비를 위한 것입니다.”
○신은 삼가 생각합니다.
당시의 법에 무릇 생선을 바치는 이는 봉상시(奉常寺)·사옹원(司饔院)·예빈시(禮賓寺)·양현고(養賢庫)·사재감(司宰監)에 바치는데, 백성이 이것 때문에 폐해를 받았습니다. 만약 모두 봉상시에 바치고 그곳에서 여러 관청에 분배하도록 한다면 그 폐해를 덜 수 있을 것입니다. 약재(藥材)는 내의원(內醫院)·전의감(典醫監)·의정부(議政府)·종친부(宗親府)·충훈부(忠勳府)·의빈부(儀賓府)·중추부(中樞府)·기로소(耆老所)에 바치는데 백성이 또한 폐해를 받습니다. 만약 약재는 모두 아울러서 내의원에 바치고 그곳에서 여러 관청에 분배하도록 한다면 그 폐해를 덜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군·현의 대소(大小)에 따라 공액(貢額, 공물의 수량)을 가감하면 백성이 바치는 양이 약간은 고르게 될 터이니 이 때문에 공안(貢案)을 고치자고 한 것입니다.
총괄해서 말하자면, 윗사람에게 덜어내면 아랫사람에게 보탬이 되고, 아랫사람에게서 덜어내면 윗사람에게 보탬이 되어야 함은 천하의 정해진 이치입니다. 그러나 전부(田賦)의 폐단은 유익함이 위로 나라(公)에 있지 않고, 아래로 백성에게도 있지 않습니다. 한 물건이 둘 사이를 가로막고, 좀벌레가 되어서, 위에서는 영화가 깎이고, 아래에서는 고혈(膏血)이 짜여집니다. 예부터 충성스런 지사(志士)는 그 입에는 쓰고 마음도 괴로워 반드시 없애고자 한 것은 모두 이런 것 때문입니다. 노(魯)나라의 삼가(三家)와 한(漢)나라의 척리(戚里)와 우리나라의 서리(胥吏)는 그 귀천은 비록 다르나 그 중간에서 가로막는 것은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자(有子)가 철법(徹法)을 쓰도록 청하면서, “임금이 백성과 함께 족(足)해진다.” 했고, 문성공(文成公, 율곡의 시호)이 공안을 개정하길 청하면서, “임금이 백성과 함께 족해진다.” 하였으니, 이것으로써 그 이치를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또 상고하건대, 율곡이 지은 《東湖問答》도 또한 이런 뜻이었으니 참고함이 마땅하다]
○그 다음해 봄에 병조판서(兵曹判書) 이이가 또 아뢰었습니다.
“군적(軍籍)을 개정하는 것은 비록 윤허를 받았으나 신이 감히 일을 시작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공안을 고치지 않으면 비록 군적을 고치더라도 양병(養兵)하는 방책이 반드시 효과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옛말에 ‘이(利)가 십(什)이 못 되면 옛것을 고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만약에 경장(更張)한다는 빈 명칭만 있고, 변통하여 실리를 얻지 못한다면 차라리 예전대로 할 뿐입니다. 아아! 공안을 개정하지 않으면 백성의 힘이 끝내 펴질 수 없고 나라 용도도 마침내 넉넉할 수가 없습니다. 논의하는 자는 혹 소요(騷擾)스러움을 걱정하나 공안을 개정하는 등의 일은 조정에서 상의(相議)해서 결정할 뿐입니다.
백성은 한 되의 쌀, 한 자의 베도 허비함이 없는데, 무엇이 백성에게 관계되기에 소요할 염려가 있겠습니까? 만약 양전(量田)을 한다면 백성을 조금 소요하게 하는 일이 없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풍년이 들기를 기다려서 이에 거행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공안을 개정하는 것을 반드시 양전보다 뒤에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공안은 진실로 전결(田結)의 많고 적음을 따져서 고르게 정할 것입니다. 그러나 양전한 다음이라고 해서 전결의 증감에 어찌 큰 차이가 생기겠습니까? 먼저 공안을 개정하고 뒤따라서 양전하더라도 또한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전결에 비록 남고 모자라는 작은 차이는 있을지라도, 어찌 지금 공안이 전결의 많고 적음을 불문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잘못 정한 것과 같겠습니까?”
○신은 삼가 생각합니다.
당시 공법도 반드시 전결로써 근본을 삼았기 때문에 상소한 바가 이와 같았고, 법을 개정하기에 이르러서도 또 전결에 따라 쌀을 거두었다.
疏略曰。所謂改貢案者。列邑土地人民大小不同。或至懸絶。而貢案之定。無甚差等。苦歇不均而多非土產。百物皆辦而分納各司。刁蹬之弊。害歸於民。胥吏弋利而公用不加焉。且近來稅輕。有如貊道。一歲之入。不能支出。每以宿儲補用。二百年積累之國。今無二年之食。國非其國豈不寒心。今欲加賦。則民力已竭。坐守前規。則不久必罄。此非難見者a285_222c也。臣意若改貢案。付之能手。善於規畫。只以土產。均敷平定。使一邑所納。不過二三司。則元入之數。別無所減。而民費則可除十之九矣。如是寬舒民力。慰悅民情。然後量宜加稅。則國用可以漸裕矣。欲改貢案者。非獨爲民。實爲經費也。〇臣謹案。當時之法。凡納魚者。納于奉常寺。納于司甕院。納于禮賓寺。納于養賢庫。納于司宰監。民斯受害。若竝納于奉常寺。以分諸司。則其弊有省矣。納藥者。納于內醫院。納于典醫監。納于議政府。納于宗親府。納于忠勳府儀賓府中樞府耆老所。民斯受害。若竝納于內醫院。以分諸司。則其弊有省矣。又以郡縣大小。加減貢額。則民獻粗均。玆所謂改貢案也。總之損上則益下。損下則益上。天下之定理也。然田賦之弊。上不在公。下不在民。有物梗於兩間。爲蠹爲蠱。上割其榮。下浚其膏。自古忠志之士。其苦口苦心。必欲除去者。凡此而已。魯之三家。漢之戚里。我邦之吏胥。其貴賤雖殊。其所以梗於中一也。故有子請用徹法曰。君與民俱足。文成請改貢案曰。君與民俱足。斯可以a285_222d悟其理也。又按栗谷著東湖問答。亦此意也。宜參攷焉。
厥明年春。兵曹判書李珥。又啓曰。改軍籍。雖蒙允許。〇臣不敢始事者。不改貢案。則雖改軍籍。養兵之策。必不見效。古語有之。利不什則不改舊。若只有更張之虛名。而不獲變通之實利。則寧仍舊而已。嗚呼。不改貢案。則民力終不可紓。國用終不可裕。議者或以騷擾爲憂。而改貢案等事。皆自朝廷商確勘定而已。民無升米尺布之費。何與於民。而有騷擾之患哉。若量田則不能無小撓於民。故必待豐年。乃可擧行。貢案之改。必後於量田云者。此亦不然。貢案固當以田結多寡均定矣。量田之後。田結增減。豈至於大相懸絶乎。先改貢案。隨後量田。亦何害哉。田結雖有盈縮之小差。豈如今之貢案。不問田結多寡。而率意誤定者乎。〇臣謹案。當時貢法。亦必以田結爲本。故所奏如此。及其改法也。又以田結收米也。
선조 27년(1594, 甲午) 봄에 공안을 상정(詳定)하도록 명령했으나 시행되지 않았다.
宣祖二十七年 甲午 春。命詳定貢案。不果行。
《보감(寶鑑)》에 이르기를, “왜란 후에 공법이 더욱 무너졌는데 옛 공안을 줄이고, 한결같이 토산(土産)에 따르도록 명했다. 증가나 감손을 다 개정하지 못하고 중지했으나, 공물을 쌀로 변경한다는 논의가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하였습니다.
○신은 삼가 생각합니다.
갑오년은 만력(萬曆) 임진·계사년의 다음해(1594)였습니다. 이때는 왜구가 물러가지 않았으니, 법을 제정할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성명(成命)이 비록 내렸으나 개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상신(相臣) 유성룡(柳成龍)이 상소하여 공안을 상정(詳定)하기를 청했는데, 주장이 다음과 같습니다.
“각 도의 민결(民結)에 쌀과 콩을 고르게 부과해서 모두 경창(京倉)으로 실어오도록 하고, 각사(各司)의 공물 및 방물 진상도 물품을 계산해서 값을 정합니다. 제용감에 진헌(進獻)하는 모시와 베의 값을 무명[木]으로 하는 예와 같이 하고, 유사(有司)를 시켜 사서 쓰도록 합니다.
군자(軍資)가 부족하거나 국가에 특별히 조달할 일이 생기면, 공물과 방물 진상의 액수를 요량해서 결정합니다. 그렇게 하면 곳간에 갈무리한 쌀과 콩으로 번거롭게 바꿔서 만들지 않더라도 취해 쓰는 데에 다함이 없을 것입니다. 신이 들으니 중국에는 외방에서 진상하는 일이 없고, 다만 13도(道)의 속은(贖銀, 벌금으로 받은 은)을 광록시(光祿寺)에 교부(交付)하여 모든 진공(進供)하는 물품을 사서 쓴다고 합니다. 만약 특별히 소용되는 일이 있으면 특명으로 선수(膳羞)를 줄여서 그 값을 인용(引用)하기 때문에 먼 지방 백성이 실어나르는 수고를 하지 않더라도 공장에서 만든 온갖 물건이 서울에 모여들지 않는 것이 없으니, 이것은 그 입법의 좋은 점입니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유문충(柳文忠, 유성룡의 시호)이 말한 바가 곧 대동법(大同法)입니다. 대동법에 대한 논의는 문충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寶鑑曰。亂後貢法。尤壞命減省。舊案一從土產增損。未盡釐正。而止貢物作米之議始此。〇臣謹按。甲午者。萬曆壬辰癸巳之厥明年也。此時倭寇未退非制作之時。故成命雖下。而不能釐革也。
相臣柳成龍上疏。請詳定貢案。其議曰。各道民結。均賦米豆。皆令輸到。京倉。各司貢物及方物進上。計物定價。如濟用監進獻苧布價木之例。使有司貿用。而若軍資不足及國家別有調度之事。貢物方物進上。量數裁減。而米豆之藏在庫中者。不煩換作。取之無窮矣。臣聞皇朝無外方進上之事。只以十三道贖銀。付光錄寺。凡進供之物。皆買而用之。若有別用之事。則以特命減膳。而用其價銀。故遠地之民。不知有輦輸之勞。而工匠百物。無不湊集於京都。此其立法之善也。〇臣謹案。柳文忠所言。卽大同也。大同之議。其自文忠始乎。
첫댓글 새해,
건강하시고 늘 평안하시길^^
네 부디, 진심, 완전 건강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