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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우측집인 장평이 형네집은 (입석양반의 4남1녀중 막네) 부잣집 이기에 대밭도 퍽크고 텃밭도
꽤넓었고 집터도 우리동내 부안촌에서 가장넓었던것 같았습니다
장평이형네 마루에는 6.25때 빨치산들에게 겁을주기위한 사격때 예광탄이 마루에 떨어져서 호빵만하게
움푹파인 불탄자국이 3개나 있었습니다
나보다 네살더먹은 장평이 형네집은 텃밭에 해마다 당근을 서너고랑을 (3고랑) 심었습니다
우리동내에서 텃밭에다가 당근을 심은집은 장평이형네집 한집뿐 이었습니다
장평이 형네는 그맛있는 당근을 겨울내내 케서먹다가 못다먹고 봄까지 먹었던것 같았습니다
장평이형은 무슨병을 앓았는지 어릴때부터 귀가많이 먹었습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도 거의입모양 만보고 공부를 하였드랍니다
장평이형이 귀는먹었어도 아주영리하고 산수공부를 잘했다고 했습니다 (장평이형 동창인 춘수리 오점수님)
어쩌다가 영팔이형이나 후식이형이 귀먹쟁이라고 하던가 먹보라고하면 입을삐쭉하고는 눈을흘겼 드랍니다
다른사람들은 가난해서 도시락을 못싸가지고 다니던때에 부잣집 막둥이 아들인 장평이형은 쌀밥에 맛있는
조기나 소고기 반찬을 싸가지고 다녔기에 장평이형을 아무도 괄세를 못했드랍니다 (춘수리 오점수님)
형셋은 모두들 대학교를 나와서 큰형은 김제죽산 고등학교 선생님 작은형은 부안동아약국 약사 3째형은
내쇼날프라스틱 이라는 큰회사의 회사원이기에 우리동내 부안촌에서 최고의 집안이었답니다
장평이형네 집에는 복구라는 잡종인 아주큰똥개 숫놈이 한마리가 있었습니다
그복구는 우리개 메리가 암내낫을때는 하루종일 우리집에와서 살다싶이하고 암내를맛고 다른숫개들이 우리집
근처를 얼씬거리면 무섭게 짖어대면서 죽일듯이 달려가서 쫓아버렸습니다
복구는 메리의밥이 남아있으면 다줏어 먹어버리기에 우리 아버지한테 대빗자루로 수시로 뚜들겨 맞기도 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대빗자루를 드는성싶으면 죽어라하고 도망갔다가 금방또오곤 하였습니다
장평이형네 복구를 나는항상 예뻐해주고 쓰다듬어 주었기에 나를아주 잘따랐습니다
늦봄에 창원이나 다른애들이 장평이형네 대밭으로 죽순을 꺽으로가면 무섭게 으르렁 거리기에 쫓겨왔으나
내가 장평이형네 대밭으로 죽순을 꺽으로가면 반갑게 꼬리를치면서 내옆에와서 구경만 했습니다
우리집에는 어머니와 아버지 작은누나만 있기에 이야기 거리도 별로없고 재미가 없었는데 영일네집에는
영칠이형 영팔이형 영일이랑 영내누나등 식구가 많아서 언제나 재미있고 좋았습니다
어느날은 눈이살포시 (적게온눈) 온날밤인데 영일이네 집에가서 노는데 영칠이형이
" 심심헌디 장평이네 당근밭에든 당근이나 케다가 쪄먹으면 맛있것는디 그놈의 똥개새끼 때문에 "
하니까 영팔이형이
" 장평이네개가 똥개아니여 쎄파트 잡종이라 물리면죽어 그놈의새끼가 힘도쎄고 얼마나 싸난디 (사나운디) "
하기에 장평이형네 복구는나를 잘따르니 걱정말라고하고 영팔이형과 내가호미와 대바구니를 가지고
울타리를뚫고 장평이형네 텃밭에 갔더니 마루밑에서 잠자던 복구란놈이 으르렁 거리면서 뛰어왔습니다
내가작은 소리로 복구야 복구하니 내목소리를듣고 꼬리를 살래살래 흔들면서 아주좋아 했습니다
영팔이형이 한군데서만 뽑지말고 듬성듬성뽑고 (띠어서파고) 흙으로 잘덥으라고 하였습니다
눈속에든 당근을 잎파리체 바구니에 가득히 담아갔고 영팔이형이 발자국도 지워버리면서 왔습니다
영팔이형과 영내누나가 샘에가서 당근과 고구마를 씻어가지고 쪄놨는데 흙을깨끗이 못씻어서 삶은당근에서
흙이써그럭 거렸어도 향긋한 당근은 기가막히게 달고도 맛이있었습니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때 이야기 입니다
닭서리를하면 지금같으면 112순찰차가 출동을하고 절도죄로 큰일이 날일이지만 내가청소년 시절이었던
60년대만해도 흔히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지금생각하면 닭을도둑 맞아서 큰손해가난 피해자인 독골닭주인 들한테 참으로 미안하고 죄송하답니다
큰방에서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주무시고 나는혼자서 아랫방에서 잠을자는데 아마24시가 거의된것 같은데
나와동갑이고 죽마고우인 영일이가 잠자는 내손을잡고 흔들면서 깨웠습니다
왠일인가하고 놀라서 일어나니 손짓을 하면서 밖으로 나오라고 했습니다
밖에나가니 우리집 외양간앞에 창원이는 닭을한마리 상복이는 닭을두마리들고 앉아있었습니다
한마리만 잡어오지 누집것을 3마리나 잡아왔냐고 나무라니 독골에서 잡아왔다고 했습니다
큰방부억에있던 등까지 갖고와서 호롱불 심지를 많이올려서 등불두개를켜고 닭을삶을 준비를 하였습니다
우리집 외양간 소죽끓이는 큰가마솥을 서너번 씻어내고 일단은 물을붓고 물을끓였습니다
내가 마늘 소금 배추김치 칼과큰쟁반 큰그릇들을 준비하는 동안에 창원이와 상복이한테 닭털을 뽑으라고
했더니 상복이와 창원이는 끓는물을 붓으면 털이금방 빠진다고 물로닭털을 처리하자고 하였습니다
닭3마리를 언제뜨거운물로 한다냐 내말듣고 털을대충 뜯어서 부엌의 불에넣어 흔적을 없에고 잔털은 짚불로
끄슬려야 꼬숩고 훈제맛이나니 털을뜯으라고 했더니 창원이가 내말이 맞다고 하면서털을 뽑았습니다
닭을잘잡는 영일이는 닭의배를 갈라서 간만꺼내고 닭대가리 발 창자등을 세면기에다 담아서 우리헛청의
잿간재에다 파묻고 왔습니다
세면기에 닭3마를넣고 대충핏기를 씻고는 마늘과 소금을넣고 가마솥에 넣었습니다
닭고기를 먹을때는 소주가 있어야한다고 상복이는 동내에서 제일로 끝집인 자기집으로 소주를 가질러
가더니 큰댓병의 소주를한병 갖고왔습니다
큰암닭 3마리를 넷이서 소금을 찍어먹고 배추김치로 싸서먹는데 참으로 기가막히게 맛이있었습니다
사발에다가 소주를 붓어서 물을마시듯 마시는 영일이와 창원이와 상복이는 술을참으로 잘도먹었습니다
닭고기를 먹으면서 영일이는 집주인이 문을열고 나올까 보아서 작대기로 문고리를 고여놨다고 했습니다
닭털이 오면서 빠지기에 새내쪽으로 돌아서왔고 우리동내 오기전에 새내쪽 산속에서 닭털을전부 털어버리고
왔기에 부안촌 쪽으로는 닭털이 하나도 없으니 절대로 모를것 이라고 했습니다
새벽이 되도록 닭고기를 싫컷먹고 잠을자는데 새벽녁에 아버지께서 소죽을 끓이로 나오셨다가 부억바닥에
널부러진 닭뼈들과 김치조각등을 보시고는 가마솥도열어 보셨던가 봅니다
" 이놈의 새끼들이 엇저녁으 (어젯밤에) 누집닭을 잡어다가 여그서 히먹었다냐 (삶아먹었다냐) 이것이시방
(이것이지금) 맷마리다냐 (몇마리다냐) 이런오살놈의 새끼들봐 "
하시면서 국물이 아직도 따땃허네이 하시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나는 시치미를떼고 모른체하고 잠을잤습니다
자면서 들으니 가마솥에든 먹다남은 닭고기와 닭고기 국물을 바가지로퍼서 양은바께스에 담고계셨습니다
어머니는 닭고기 국물에 무우를 썰어넣고 양념을 잘하여서 닭고기도 많이넣고 아주맛있는 국을끓였습니다
나는배가 부르고 잠을설쳐서 잠을자고 싶은데 어머니는 아침밥을 먹으라고
" 먹을때 얼렁같이먹게 빨리큰방으로 건너오니라이 "
하시면서 여러번을 불러대기에 큰방에가니 아주맛있는 닭고깃국 냄새가 폴폴낫습니다
나를보더니 아버지 께서는
" 어떤놈 새끼들이 닭을맷마리나 잡어왔다냐 그지랄 허다가 쥔한티 잽히면 (잡히면) 빽따구가 (뼈가) 부러져 "
하셨고 닭고기나 소고기 돼지고기를 일체안잡수는 우리어머니 께서는
" 괴기가 (고기가) 많이남은것봉게 한두마리가 안닌것 같은디 하여간에 괴기좋아하는 영감은 영일이 창원이덕에
너댓끼는 (4-5끼) 잘먹것네이 "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삼일이 지난후 헛청에서 외양간의재와 큰방의 부억의재를 삽으로 정리하시던 아버지가 재를퍼올리
시다가 잿속에서 닭대가리와 발목들과 내장들을 발견하셨 드랍니다
닭대가리3개 닭발목6개 닭내장3개를 전부찾아 내셔서 물로깨긋이 씼었드랍니다
닭대가리와 발목은 짚불로 끄슬려서 털도태우고 발톱도 태워서 뽑아버리고 손질을 잘했드랍니다
닭내장도 소금으로 잘씼어서 대가리와 발목과함께 절구통에 소금과 쌀가루를넣고 도굿대로 잘찧었드랍니다
그리고는 아버지 혼자서 손으로 주물러서 먹기좋은 크기의 똥그랑댕을 두쟁반을 만들었답니다
그똥그랑땡을 조금씩 솥에넣고 무우를 썰어넣고 국을끓이니 닭뼈가 씹히면서도 기가막히게 맛이있었습니다
몇년전 부모님 산소에서 텐트를치고 며칠간 쉬면서 고향마을 친척동생인 명수에게 그이야기를 했더니 형님은 호랑이가
담배피던 시절의 이야기를 한다면서 지금은 그런것을 누가꿈도 안꾼다고 했습니다
명수동생은 부안촌에서는 아마 닭서리가 영일이형때가 끝물이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날저녁에 산소의 텐트속에서 대전에서 혼자살고있는 작은누나한테 그똥그랑땡 이야기를 하였더니 언제막내사위
박서방이 저그집에가면 토종닭을 한마리 사오라고해서 만들어준다고 하면서 절구통이 문제라고 하였습니다
정읍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2일과 7일이 장날이 었습니다
6.25.한해전에 큰형님이 정읍중학교 1학년때인데 장날이라 시장통을 구경도할겸 시장으로들어 갔드랍니다
그런데 시장속에서 우연히 장에오신 아버지를 만나버렸 드랍니다
학교가 파했으면 직선길인 연전으로해서 상평리를지나 집으로바로 가야하는데 당고개로 한참을 돌아서가는
시장통으로 나왔으니 딴짓거리를 하고다닌다고 아버지한테 욕얻어먹고 혼날것을 생각하니 큰일이 낫드랍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싫은말씀을 한마디도 안하시고
" 밴또밥 (도시락) 먹었어도 배고프제 "
하시면서 한봉지에 다섯개가든 단팥이든 아주맛있는 고급빵을 사주시드랍니다
언제나 먹고싶었던 그빵이었는데 돈이없어서 눈으로만 요기를했던 그단팥빵 이었답니다
게눈감추듯 4개를먹고 1개는 가방에 넣었는데 이번에는 엿장사를 만나니 큰깨엿을 두개를 사주시드랍니다
맛있는 단팥빵 빵4개를먹고 꼬숩고 (고소하고) 파삭파삭한 큰깨엿을 두개나먹으니 배가든든 하드랍니다
집으로 바로안가고 시장통으로 나왔다고 아버지한테 욕을얻어먹고 혼날줄 알았는데 그무서운 아버지가
왜이러시는가 싶으면서도 아무말도 안하시니 그냥좋기만 하드랍니다
시장속을 한참을 가다가 아버지가 이것저것 사가지고넣은 밀가루 자루를 큰형에게 들으라고 맞기시 드랍니다
그리고는 질퍽한 시장속에서 많은사람들이 밟고다닌 지저분하고 검은흙으로 범벅이된 밀가루 자루를 한손으로
줏어들더니 댓충접어서 들고는 정읍천변 냇가로 가시드랍니다
큰형은 챙피한 생각이 들어서 아버지의 한참뒤에서 솔차니 거리를두고 따라서 갔드랍니다
큰형이 뚝위에서 쳐다보니 대양리 다리윗쪽 냇가에서 검은흙으로 범벅이된 밀가루 자루를 한참을물에 흔들어서
행구더니 그자루속에서 무엇을 꺼내는데 돈이나오 드랍니다
조심해서 돈을물로씼고 물을뿌려 버리고 손바닥으로 돈을탁탁 두드리더니 그돈을 세어보고는 빙긋이 웃으면서
돈을잘접어서 조끼주머니에 넣드랍니다
그리고는 그더러운 밀가루포대를 한참동안 흐르는물에 더흔들어서 빨더니 물을꼭짜고 털어서 가지고 갖고오면서
" 집에갖고가면 콩도담고 폿도담고 (팥) 씰디가 (쓸데가) 많혀 하시면서 돈을시어봉게 쌀한말값이 넘어야 "
하시면서 좋아하시면서 웃드랍니다
큰형은 아버지가 남들이 밟고다닌 그더러운 밀가루 보자기를 왜줏어갖고 냇가로 가는가 챙피하고 걱정스럽고
싫었는데 막상 그속에서 쌀한말값이 넘는다는돈이 나오는것을 보고는 신통하기만 하드랍니다
춘수리 구상리 부안촌 만수동에관한 이야기 입니다
퍽옛날 내가 어렸을때 초등학교 다닐때 아버지께서 입석리나 인촌 그리고 금구로 시제에 다녀오시면
조끼 주머니에서 시루떡조금과 꽃감 밤 대추 몇알씩을 내놓으셨습니다
그때의 떡맛은 참으로 기가막히게 맛이있었습니다
지금한번씩 먹어보는 비싼갈비집의 갈비보다도 맛이있었습니다
가난했던 그시절에는 일년동안에 떡을맛볼수 있는때가 설날과 추석과 식구들의 생일때뿐 이었습니다
어쩌다가 입석리 시제때는 그맛있는 떡도못얻어 오시고 싸움을 말리시다가 옷고름만 뜯겨가지고 오셨습니다
이유는 문중논을 경작하는 사람들이 농사가 잘되었는데도 병충해와 수해로 패농을했으니 (농사가 망했음)
도지세를 못내놓겠다 무슨소리냐 매루도 (병충해) 안먹었고 수해는 무슨수해냐 농사만 터지게 잘되었드만
하면서 싸우기에 우리아버지는 키도작고 삐쩍마른 체구이기에 싸움도 제데로 말리지도 못하시고 옷고름만
뜻겨가지고 오시는게 일상이었습니다
만수동 친척들 중에는 수십년전 조상대대로 한필지 두필지씩 문토를 거의헐값에 빌려서 먹는데 황새고개
겸호당숙 같은분은 논은물론 밭한평도 못벌어먹는 불공평한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서 2000년경 줄포에서 정읍을거쳐서 전주에이르는 도로가 새로나면서 우리문중산으로
도로가 지나가면서 2억5천만원 정도의 보상금이 나왔드랍니다
그보상비중 약2억3천만으로 지금은 고인이된 만수동 H님이 유사를하면서 몰래팔아 착복했던땅을 다시샀답니다
2010 종친회장님을 역임한 오두근님은 계단식밭을 평탄작업을 하면서 나온흙을 마침정읍역 KTX공사장에서
흙이필요 하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흙을 1억원을받고 팔아서 문중기금에 입금하는 큰공헌을 하였답니다
2000년에 종친회 회장을 역임한 오재근님 (1935.5.5) 께서는 문중발전을 위해서 2000만원을 기부하셨고
1971년봄에 태능선수촌 입구의 숲속에서 만수동 일대의 종친들과 출가한 (女) 자손들까지 245명에게 재경종친들의
단합을위한 큰행사를 열어주셨답니다
그때만해도 소고기를 마음껏 먹기가 힘든때 였는데 모두들 소고기를 배부르게먹고 참석한분들께 여러가지 선물도
나누어 주었다고 했습니다
참석을 못했던 제가 오재근 회장님께 경비관계를 물었더니 자기사비로 그때돈 370만원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후로도 태능에서 그런행사를 4회를 더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오동주님 증언)
2003 - 2009년까지 2회에걸쳐 종친회 회장을 역임한 오식근님 (1938.6.20- 2021) 께서는 문중발전기금 2000만원을
기부하셨고 고창군 부안면 인촌의 세천비 800만원 정읍 고부 입석리 필경재 표지석 600만원을 사비로 세우셨습니다
(오동주님 증언)
이렇게 고맙고 훌륭하신 후손들이 계시기에 학정공파 필경제는 무궁한 발전이 있을것 같습니다
저의 작은누나 오초자님의 이야기 입니다
올해 81세인 작은누나는 38세봄에 43세이던 매형이 남의논에 물을올려줄 양수기의 전선이 짧다고하니
자기과수원 밭으로가는 전선이 여유가 있었기에 220볼트 전기가 흐르는 전선을 맨발에 맨손인체 가정용
뺀지로 잘라주다가 감전되어서 사망하였답니다
초등학교 5학년 아들부터 6살짜리 딸까지 아들둘 딸셋을 남겨두고 남편이 하늘나라로 가버렸으니 암담하드랍니다
다행이도 늙으신 시어머니가 계셔서 천만다행이고 큰의지가 되었드랍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불쌍해 하시고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불쌍해 하시면서 이심전심 더아끼고 의지하고 사랑하면서
산속의 외딴집에서 일곱식구가 힘들게 어렵게 살았드랍니다
큰아들과 작은딸은 자기들이 대학교를 안간다고 포기하였기에 큰딸과 막내딸은 충남대학교 간호학과 작은아들은
전북대학교 치과대학을 보냈드랍니다
5000 여평의논과 3000 여평의밭에서 시어머니와 둘이서 후레쉬불을 비추어 가면서 죽어라고일을 하였드랍니다
그렇게 정신적인 지주이셨던 시어머니 께서는 손주들이 자리를 잡는걸 보시고는 하늘나라로 가셨답니다
그렇게 힘들고 어렵게 애들을 가르친결과 작은아들은 서울봉천동에서 20년이넘게 치과병원을하고 딸들은 충남대학교
의대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를 잘하고 있답니다
어릴때부터 가장 절친하게 지냈던 누나는 전화를 하면서 나에게 몇번이나
" 야 내가 고생한것을 책으로쓰면 몇권은 될것이여이 너한티나 이런속에 맺힌소리를허제 누구한티 허것냐 "
하면서 목이메여서 훌쩍거리면서 울때도 여러번 있었습니다
" 새벽에 어두울때 풋고추한바구니 상추한보자기 들깻잎 한바가지를따서 소쿠리에 담아서이고 보자기로덮고 뛰어가듯이
성내사거리 에가서 버스를타고 약관에가서 (청과물시장) 팔어갖고 집에오면 할머니가 애들밥멕여서 학교에 보냈다이
그돈이 있어야 내일아침에 학교에가는 것들한테 돈을써주제 "
하면서 누나가 울때는 나도같이 울어버렸 드랍니다
셀수도없이 많은고생과 괄시와 어려움 속에서도 언니와 친정오빠들과 동생에게 한없이 고맙다고 했습니다
큰누나는 작은누나네 작은아들 재건이의 등록금을 두번이나 내주었는데 우리형제들은 등록금을 한번도못내 주었습니다
참으로 미안하고 부끄럽기만 하였답니다
누나는 시어머니 친정어머니 언니와 오빠들 그리고 동생한테 의지하면서 살아왔다고 하였습니다
2004.10. 작은누나와 큰며느리가 (김보성) 비행기를타고 우즈베키스탄으로 여행을 갔드랍니다
정읍 소성면 용산에서 농사만짓던 작은누나는 비행기도 처음타보고 외국여행도 처음으로 해보는것 이었답니다
큰아들 송재종이 논농사 밭농사일로 평생을 고생한 제어머니에대한 아주큰 효도였던것 같습니다
외국여행을 간다고 정읍에가서 큰돈을주고 제일로 좋은옷을 사서입고 인천공항에 갔드랍니다
옷이며 머리며 신발등 촌티가 나버리니까 여행을 함께가는 남자와 여자들이 무척안쓰러운 눈으로쳐다 보드랍니다
아주좋은 옷을입은 예쁘게생긴 50대의 어떤아주머니가 작은누나에게
" 농사지으면서 며느리랑 외국여행을 가시는것을보니 시골에서는 부자인것 같네요? "
하면서 물어보드랍니다
" 더늙으면 못댕긴다고 큰아들이 억지로 가라고해서 왔그만요 "
하였더니 무척이나 안쓰러워 하면서그말이 맞는말 이라면서 잘왔다고 칭찬을 하드랍니다
몇시간쯤 비행기를타고 우즈베키스탄 공항에내려서 밖으로나오니 근10명의 예쁜러시아 아가씨들과 총각들이
꽃다발을 들고와서 작은누나와 며느리에게 주면서 박수를 쳐주면서 아주반갑게 환영을 해주드랍니다
어떤여자애는 눈물을 훔치면서 반가워 하드랍니다
인천공항에서 봤을때는 그렇게 촌스럽고 꽤죄죄한 농사꾼 시어머니와 며느리 였는데 이게무슨 일인가하고
모두들 놀라워하면서 의아해 하드랍니다
그중에 한아가씨가 우즈베키스탄에서 다른곳까지 안내해주는 가이드 였는데 자기들이 해마다 4-5명씩 저분들의
집에가서 공짜로 한달간씩 밥먹고 잠자고 했다면서 또한번 고마운 박수를 보내드랍니다
그리고는 비행기를 함께타고간 일행들과는 헤어져서 마중나온 그곳세무서장딸의 차를타고 그집으로 갔드랍니다
6년간 정읍 소성면 용산 송재종네 집에와서 한달간씩 신세를진 20여명이 거의가다 선물을들고 찾아왔드랍니다
세무세장네 집에서 그들과 밤이깊도록 이런저런 이야기를하고 이튿날은 공항에서 한시간반인가 비행기를타고
모르는곳으로 갔는데 그곳에서도 몇년전에 용산에와서 신세졌던 아가씨가 한사람 꽃다발을들고 와있드랍니다
그곳에서도 그아가씨의 차를타고 이곳저곳 유적지들을 관람하고 호텔에가지안고 그집에서 잠을잤더랍니다
작은누나네 큰아들 송재종은 전라북도 카톨릭농민회 무슨국장을 하면서 반정부 활동도 많이하였지만 민간외교
활동도 아주 잘한것 같았습니다
우즈베키스탄 대학생들을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남학생과 여학생을 4-5명을 한달간씩 먹이고 재우고 내장사
선운사 백양사 서울등을 구경시키고 돌아갈때는 속초까지 데리고가서 자기돈으로 우즈베키스탄 표를끈어서
보냈드랍니다
그래서 이번에 러시아 우즈베키스탄에서 연해주에 이르는 한민족의 발자취를 견학하는 여행팀에 자기어머니와
처에게 역사공부겸 여행을 선물한것 이었다고 했습니다
고맙고 그리운 이일년 (1937.12.26 - 2020.1.14.) 누님의 이야기 입니다
이일년님은 1950년 8월에 황해도 해주에서 5살씩 덜먹은 남동생 하나와 여동생 하나를 데리고 서울로
피난을 나왔답니다
동생들을 굶기지안고 먹이고 가르치고 결혼을 시키는라 자기는 혼기를 놓치셨습니다
그러다가 잘아는분이 결혼을하여야 한다고 10여살더먹은 상처하고 혼자사는 남자를 소개해주어서 결혼을
하였드랍니다
남편김씨는 평소에는 좋았으나 술을마시면 주사가 심해서 수시로 밥상을뒤업고 구타를 하는통에 도저히 살수가
없어서 6년만에 이혼을 하였드랍니다
1993년봄에 제가 이일년님네 현대아파트 앞에있는 괴안동 파출소장으로 발령이나서 갔습니다
일요일은 파출소에서 밥을하는 아주머니가 안나오는 날이라 직원들과 의경6명이 라면을 끓여먹던지 짜장면을
시켜먹든지 대충때우고 넘어가는 날이었습니다
파출소앞에 사시는 이일년님이 일요일날 퍽큰검정색 핸드빽을들고 상담을하시러 오셨다가 점심때문에 걱정하는걸
보시더니 자기가 맛있게 해준다고 하드랍니다
의경둘을 데리고 나가더니 한사람에게 돈을주면서 돼지고기와 대파를 사오라고하고 한명은 자기집으로 데리고가서
묵은지를 두포기를 가지고와서 저녁밥 먹을것까지 김치찌게를 아주맛있게 잘끓여 주셨답니다
이일년님의 상담내용은 전부가다 부채관계였기에 경찰서에 고소할것과 변호사한테 찾아가서 민사소송을 할것들을
잘나누어서 A -4용지에 구분해써서 드렸습니다
경찰관은 민사관계 불간섭의원칙 법조항을 펴주고 읽어보시라고 했더니 고개를 끄덕이 셨습니다
그동안 약2억정도의 채권때문에 인천변호사와 서울변호사 법무사들에게 상담료와 밥값이 겁나게 들어갔으나
파출소에와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남의다리만 긁었다고 하시면서 만족해 하셨습니다
가끔 궁금한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삐삐를 ( 012-260-5049) 하시라고 삐삐번호를 적어주었더니 아주좋아 하셨습니다
이일년님께서는 교회나절에 안다니 시기에 일요일마다 파출소의밥을 해주시겠다고 하시기에 힘드시니까 안해주셔도
된다고 했어도 손주같은 젊은의경애들과 이야기하면서 노닥거리는게 좋다고 하셨습니다
파출소의 순찰차가 112순찰중 뚱뚱하신 이일년님을 만나면 모두가 알아서 가시는곳 까지는 꼭태워다 드렸드랍니다
이일년님은 그것이 미안하고 쑥스럽지만 그렇게 고맙고 좋을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2년여를 정답게 오누이간처럼 잘지내다가 1995년 여름에 중동파출소장 으로왔는데 어느날 이일년누님께서
시민회관옆 식당에 오셨다고 하시면서 혼자만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소갈비를 시켜놓으 셨기에 잘먹고 나오면서 돈을낼려고 했더니 그럴줄알고 미리계산을 하셨다고 했습니다
괴안동까지 모셔다 드린다니까 파출소장님이 일과시간에 돌아다니면 안된다면서 조수대문을 열더니 내년봄에 작은딸
대학교에갈때 보태쓰라면서 안식구한테 갖다주라면서 100만원을 놓으시고는 얼른택시를 타셨습니다
그이듬해에는 우리집사람이랑 셋이서 밥을먹었는데 막내아들 대학에갈때 보태라고 100원과함께 금반지계를해서
자기차례라 탔다고하시면서 금한냥을 (2022년 약270만원) 주셨습니다
2020.1.14.이일년누님이 돌아가셨을때 성모병원 장례식장과 화성함백산공원 화장터를 거쳐서 평택서호 납골당까지
전송해 드리렸고 작년에 납골당에 한번찾아 뵈었더니 살아계실때처럼 웃고계셨습니다
20여년전 겨울에 눈이많이 왔을때 안내산악회인 (돈을받고 등산객을 실어다주는 산악회) 산수산악회를 따라서
원주 치악산에 갔습니다
산악회 버스는 구렁이와 까치의 전설이있는 상원사 입구에 우리를 내려주고 그버스는 산행종점인 구룡사 주차장으로
이동하여서 대기하다가 산행마친 사람들을 싣고서울로 오는것 입니다
그날은 상원사 입구에서부터 티격태격 입다툼하는 부부를 화해시켜주고 칭송을듣고 빵과달걀 콜라를 얻어먹었습니다
" 5만원이나 주고삿다는 아이젠이 이게뭐여 미끄럽기만하고 벌써두번이나 미그러져서 넘어졌어 "
하면서 자기부인을 타박하면서 가더니 언덕도 아닌데 또벌러덩 넘어졌습니다
남편이 또넘어지니 부인은 미안해서 어쩔줄을 몰랐습니다
" 사장님 혹시 아이젠을 잘못신은것 아니요 발좀들어 보세요 "
하였더니 아이젠을 두쪽다 꺼꾸로 신고있었습니다
" 아니 선생님 이것을 어떻게 아셨어요 참말로 고맙습니다 참말로요 "
하면서 앉아서 짚신 아이젠을 뿔이바닥으로 향하게 신으면서 좋아했습니다
" 자기가 꺼꾸로 신어놓고는 죄없는 아이젠만 나쁘다고해 별일이 다있어이 "
하면서 그부인은 배낭을 열더니 김밥한줄 사과 등등을 계속내놓기에 빵과달걀 켄콜라만 받았습니다
2000년초에 지리산 천왕봉에서 아래서도 우측발의 아이젠을 꺼꾸로신은 대학생이 넘어지는것을보고 고쳐준일이
있었기에 그때가 생각나서 발을들어보라고 했더니 내생각이 맞았습니다
눈은많아도 꽁꽁얼었기에 등산하기에는 아주좋았습니다
상원사와 비로봉을 거쳐서 여름에는 더워서 겨울에는 미끄러워서 모두들 겁을먹는 사다리병창 난코스를 철파이프를잡고
잘내려 왔습니다
30여분의 시간이 있기에 구룡사까지 구경을잘하고 주차장을 지나오는데 시내버스 정류장에서 누가나를 불렀습니다
원주까지 함께택시를 합승해서 타고가자고 했습니다
나는우리 산악회버스를 탄다고하니 혹시빈자리가 있냐기에 잘모르겠다고하니 사정해서 서서라도 간다고하였습니다
오늘 처음보는 버스옆에서 산행대장님이 아직안온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기에 저분들이 늦게와서 자기들 산악회버스를
놋쳤으니 서서라도 간다고하니 어쩔려냐니 20000원씩만 내라고 하세요 하면서 여자두분은 앉을자리가 있어요 하였습니다
그들은 아주 좋아하면서 10만원을 걷어서 산행대장에게주고 버스에 탔습니다
찬바람에 덜덜떨다가 따뜻한 버스속에서 중간에앉은 나에게 찾아와서 고맙다고 하면서 좋아했습니다
오다가 여주휴게소에서 쉬는데 산행대장님이 나에게 20000원을 쥐어주면서 집에가면서 과일이나 사갖고 가세요 했습니다
집에와서 배란다에 옷을널면서 산행대장님이 사례비로준 돈을보니 20000원이니고 한장은 60000원 이였습니다
산행대장님은 아마도 50000원 짜리를 10000원짜리로 착각하고 준것같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