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47년 전 경기도 수원시 매산동에서 1남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조실부모하고 가정이 어려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서 객지를 전전했다.
그러다 대구 남산동에 작은방을 얻어 살면서 유흥업소에서 일을 시작했다.그리고 27년 전 동갑내기 친구 덕분으로 부처님의 존재를 알게 되다.
도반도 없었고, 인연있는 스님도 없었던 나는 부처님 말씀을 제대로 접할 수 없었던 까닭에 기쁠 때나 슬픈 일이 있을 때마다 동화사 갓바위 부처님을 찾아 뵈었다.
밤새 부처님께 절을 하고 아침에 집으로 돌아오던 어느날 나는 부처님께 약속을 드렸다. 육바라밀 중의 보시바라밀을 꼭 행하겠다고.
술집 다니는 사람들 치고 빚 없는 사람이 별로 없는데,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런 내가 보시할 수있는 방법이 뭐 있을까 고민이 되었다.
생각 끝에 교동시장에 가서 실과 바늘을 구입했다. 추운 겨울 변변히 보살펴 주는 이 없는 아이들에게 내가 손수 짠 스웨터를 입혀주기로 했다.
관세음보살을 염송하며 한올한올 정성을 드린 옷을 입은 아이들이 장래에 부처님께 귀의하고 참불자가 되기를 기원하며 스웨터를 짰다.
한달에 여섯벌 정도, 일년이면 50~60벌 정도를 만들었다. 주인 눈치를 봐야하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스웨터를 뜨는 시간만큼은 마음이 항상
즐거웠다.
또 12월이 되면 동촌에 있는 보육원에 과일과 과자를 사 보내주기도
했다. 해마다 경북 일대의 고아원을 찾아다니며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정성을 보탰다.
부처님께서는 항상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라고 하지만, 직업이 직업인
만큼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가기란 정말 힘이 든 일이었다.
입에 풀칠은 해야겠기에 술집을 다니고는 있었지만 하루라도 빨리 술집을 그만두고 싶었다.
그렇게 6~7년을 살았을 즈음 영천지부 매일신문 기자가 찾아왔다.
술집아가씨가 스웨터를 짜서 고아원에 보낸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는 것이다.
부처님 법이 좋아 그저 작은 정성을 내었을 뿐이라며 거절을 했지만 기자는 물러서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취재에 협조했고 활자화돼 세상에 알려지고 말았다. 그게 계기가 돼 나는 경북 도지사 표창을 받았다.
도지사님은 언제든지 어려운 일이 생기면 부탁하라며 격려해 주셨다.
그 후 몇년이 지났을까. 이제 겨우 서른을 넘은 나에게 크나큰 시련이
닥쳤다. 병이 생긴 것이다.
의료보험 카드가 없었던 나는 큰 병원 한번 가 보지 못하고 그저 병명을 알아내지도 못하는 동네 병원을 다니며 하루하루를 연명해야 했다. 돈은 바닥이 나고 그저 죽을 날만 기다릴 뿐이었다.
고통스러워하며 기도를 드리던 어느날 밤 경북도지사에게 받은 표창장이 불현듯 눈에 띄었다. ‘아하, 지사님께 의료보험 카드를 발급해 달라고 부탁드려 봐야지’. 지사님께 편지를 썼다.
하루만에 도청에 편지가 도착했는지 그날 오후 5시쯤 도청 관계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도청 관계자는 내 병 상태가 심각한 것 같다며 곧바로 입원조치를 해 주었다.
황달이 심해 피부색이 까맣게 되어 버린 나를 본 의료진들은 곧 수술해야한다는 진단을 내렸다. 조직검사 후 나는 장장 12시간의 수술을 받았다. 눈을 뜨고보니 설날 새벽 4시. 간암인 줄 알았는데
취장두부암이었다는 것이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담낭절제술로 6가지 내장을 떼어내야 했던 나는 3일밖에 살지 못한다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다. 그동안 인연을 맺었던 이들이 마지막으로 보겠다며 다녀갔다.
그러나 나는 중환자실에서 하루빨리 나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부처님이시여! 10년만 더 살게 해주세요.’ 전생에 지은 업장을 닦는 간절한 마음으로 약사여래불을 입에서 놓지 않았다.
비록 몸은 병상에서 괴로웠지만 마음만은 편안했다. 7일만에 중환자실에서 나온 나의 사연이 매일신문에 보도가 되면서 대구시민들이 7백만원의 성금을 모아주었고, 도청의 엄지호 선생님은 두달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퇴근 후에 방문해 주시며 격려해 주셨다.
엄 선생님은 보호자가 없는 나의 보호자가 되어 주시기도 했다. 또 두달동안의 치료비 2천만원은 정부에서 선처해 주었다. 그리고 6개월이 고비었던 나에게 운문사 북대암 법춘스님, 거창 동명사 원종스님이 직접 집에까지 방문해 용기를 주시고 격려해 주셨다. 스님께선 ‘
술 인연을 끊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노력해 보라’고 하시면서 유발상좌로 삼아 주셨다.
그분들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얼른 뜨개질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전생에 지은 업장을 진실한 기도로 참회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부처님께선 나를 보실때 얼마나 답답해 하셨을까. 내가 지은 업은 당장은 안 나타나지만 그늘에 숨어있어 그를 따른다 했거늘….
스님께서도 “이제부터 조상천도하면서 지장기도를 해보라”고 하셨다. 그리고 “내가 늘 너를 보호할 것이다”고 말씀하셨다.
각지에서 보내주신 성금과 봉사단체인 무량단 봉사자들의 도움으로 나는 작은 가게를 차렸다. 한달 30만원에 달하는 항암제 약값 부담도 컸고, 머리가 빠지고 밥맛도 없어 5개월 먹고 항암제를 도저히
더 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오직 기도로써 극복하고자 봉정암을 5번이나 다녀왔다. 3천배를 시작하면서 건강이 조금씩 회복되어 갔다. 그러나 산너머 산이라고 전에 알고 지내던 술집 아가씨에게 보증을 서 줬던 일이 있었는데 아가씨가 모두 도망을 가버리는 일이 생겼다.
그 돈의 액수는 내 수술비보다 더 큰 돈이었다. 눈앞이 캄캄하고
이 몸으로 어떻게 갚을 것인지 난감했다. 북대암에 가서 기도하면서 울기도 많이 울었다. 하지만 그돈을 갚기 위해서는
다시 한번 일어서야 했다.
부처님께 빌고 빌어서 얻은 목숨인데 라는 굳은 마음으로 기도에 매진했다. 큰스님은 나에게 눈도 나빠지고 했으니 15년동안 해 왔던 뜨개질을 그만하라고 하셨다. 술장사도 그만하라고 하셨다. 나는 기뻤다. 사실 그 누군가에게서 나의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찾아보라는 격려를 받고 싶던 차였다.
그 후 나는 또다시 난소와 자궁 적출술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번민하지 않았다. 열심히 기도하고 보시행을 하면 언젠가는 부처님 가피를 받을 것이라는 스님의 말씀을 믿었다.
지금은 대구시 만촌동에 법화정사포교당을 수리하고 있다. 법당은 물론 봉사자들과 같이 소녀가장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고, 독거노인, 장애인들을 돌봐주는 공간으로 꾸밀 것이다.
나는 ‘인과응보’를 믿는다. 내가 복을 짓지 않으면 받을 것도 없다는 것을 나는 체험했다. 20여 년동안 술집을 전전하던 여자가 어찌 부처님 법을 전하는 포교사가 될 것을 누가 가히 짐작이라도 할 수 있었겠는가.
거룩하신 부처님! 진리만을 배우면서 꾸준히 정진하고 몸으로 행하겠습니다.
김금옥(대구 수성구 범물1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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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변화시키는 인터넷①』
(≫≪) 미군 희생 여중생들의 죽음을 애도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