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고인의 가족에게 진심으로 위로하는 마음을 보내는 바입니다.
그리고 지금 드리는 말씀은 고인과 고인의 가족에 상관없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한국 불교의 장례예절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래서 말씀드리기가 어렵군요. 다만 미얀마의 상좌불교에서 위빠싸나 수행을 경험한 입장에서 몇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의 죽음에 대한 예가 있습니다.
① 등잔에 기름이 떨어져서 불이 꺼진 경우
② 등잔에 심지가 다 타서 불이 꺼진 경우
③ 등잔에 심지와 기름이 다해서 불이 꺼진 경우
④ 등잔에 바람이 불어서 꺼진 경우
이상의 경우에서 보듯이 사람도 몸에 병이 나서 죽는 경우와 마음이 아파서 죽는 경우와 몸과 마음이 수명이 다 되어 죽는 경우, 또는 어떤 불의의 사고나 자연적인 재해로 죽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등잔불의 경우처럼 죽음이란 모두 이 네 가지 유형에 속할 것입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입니다. 다만 먼저 가느냐 늦게 가느냐 하는 문제의 차이만 있습니다. 죽음은 조건입니다. 그리고 업의 과보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나 죽을 때 어떤 마음으로 죽느냐 하는 것에 따라 다음 생의 마음이 결정되어 일생을 형성하게 됩니다. 이것이 죽기 전의 마음인 사몰심이 다음 생의 마음으로 바로 나타나는데 결생심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업의 과보에 의한 과보심이란 마음입니다.
그러나 과보심에 의해 탄생 최초로 일어나는 결생심으로 일생의 삶이 형성된다고 해도 꼭 그렇게만 사는 것은 아닙니다. 벌써 잉태된 모태에서부터 외적 조건과 맞닥트리게 됩니다. 결생심과 상관없이 어머니의 잘못으로 장애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태어나서 인간의 삶은 최초 예정된대로 살지 않고 다시 내적 외적 조건에 크게 좌우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으로 탄생된 것은 위대한 사건입니다. 오직 인간만 예정된 삶을 반전시킬 수 있습니다. 이렇게 소중한 기회를 부여받았는데 어찌 선업을 쌓아 새로운 삶으로 반전시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러한 삶을 구현하기 위해 수행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앞선 등잔불에서 보듯이 사람들은 어떤 조건에 의해 또는 업의 과보에 의해 죽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비참하게 죽고 그렇지 않게 죽고의 문제는 반드시 다음 생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죽을 때의 마음이 문제이지 죽는 상황은 별개입니다. 아라한도 소에 치어 죽기도 합니다. 다만 업의 과보를 벗어날 수 없어서 그 과보를 받고 윤회를 끝내는 것입니다. 신통제일의 목련존자께서는 심하게 구타를 당해 맞아 죽었습니다.
죽음은 지, 수, 화, 풍 4대의 변화일 뿐입니다. 부드럽다가 단단한 상태가 된 것이고, 피가 흐르다가 멈춘 것이고, 몸이 따뜻하다가 차가워 진 것입니다. 그리고 움직이다가 움직이지 않는 현상입니다. 물질은 이것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마음은 이미 즉시 다른 곳에서 다시 태어났습니다.
아라한이나 부처가 아니고서는 죽음은 다시 태어나는 윤회를 합니다. 죽은 자와 다시 태어난 자는 같은 것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별개이고 어쨌거나 죽어서 바로 다음 생을 받습니다. 그러나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 인간, 색계, 무색계 중에서 어느 곳에서인가 태어납니다. 그러므로 죽어서 어디를 가느냐하는 것이 중요하지 죽는 다는 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죽어서 가지고 가는 재산은 계율을 가지고 갑니다. 계율을 지켰으면 선업을 쌓은 것으로 업의 과보를 받아서 그 결과대로 태어납니다. 죽어서 49일 동안 어느 곳에 머문다는 말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아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다만 부처님께서는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죽으면 시간이 머물지 않듯이 마음도 머물지 않고 바로 다음 생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정작 두려워 해야 할 것을 죽음이 아니고 불선업의 과보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항상 오늘 이자리에서 알아차림으로 새로운 선업을 쌓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부처님께서는 율장 대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깨달음을 얻으시고 천인인 사함빠티가 부처님께 법을 펴달라고 청을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을 바로 승낙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세 번째 청을 했을 때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귀 있는 자들에게 불사의 문을 열겠으니 죽은 자에 대한 근거 없는 제사는 그만 두어라" 그러므로 인간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간접적으로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아라한의 경우에 지독한 병으로 인해 고통을 받는 경우는 자살을 허용한 예가 있습니다. 이 경우는 아라한은 불선심이 없고 오직 작용만 하고 원인과 결과가 없는 무표심만 있기 때문입니다. 아라한이 된다는 것은 이미 탐진치가 불타버려서 죽고 태어나는 것에서 자유로워진 분이라서 허용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때로는 병으로 고생을 하셨습니다. 당시에 승단에도 많은 비구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피부병이나 전염병이나 고질적인 불치의 병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제가 미얀마에서 비구계를 받을 때마다 비구계 의식의 과정에서 피부병이 있느냐, 전염병이 있느냐 하는 것을 물어서 없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별 것을 다 물었는데 심지어 돈을 떼먹고 왔느냐고 묻기고 했습니다. 비구가 되어 은신처로 삼으려 하고 있는지를 묻기도 한 것입니다. 만약 병이 있다거나 빚 때문이라고 했으면 비구계를 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예로 보아 몹쓸 병에 걸렸을 때 특별하게 아라한에게만 사후가 없기 때문에 자살을 허용한 것입니다. 그 외에는 절대 자살이 허용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장례절차에 대해서는 하등에 마음을 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의식은 모두 빤냐띠(관념)입니다. 누가 무엇을 하든 상황에 따라야 합니다. 다만 그때 그런 의식에 상관없이 무엇을 하거나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대상을 볼 때도 보는 자기 마음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행동을 하거나 들을 때도 알아차림을 가지고 하면 몸과 마음에 집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알아차린다고 해서 외계와 차단하라는 것이 아니고 밖을 보면서도 보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면 몸과 마음에 집중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삔냐님, 무엇 때문에 알아차릴 대상을 밖에서 찾습니까? 진정한 불자라면 불교적 의식도 큰 의미가 없다고 알아야 합니다. 그런 것은 형식입니다. 형식이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니고 형식이므로 심각하게 생각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일들이 전부이기 마련이고 수행자는 이런 형식에 빠지지 않고 빠라마타(실재. 성품)을 봅니다. 죽어서 치르는 예절은 다만 살아있는 자의 슬픔으로, 살아있는 자의 아쉬움으로 의식을 행할 수는 있지만 이것이 죽은 자에게 미치는 영향은 전무합니다. 단지 산자의 정성일 뿐입니다. 그러면 된 것입니다.
기독교 예절이거나 불교예절이거나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기독교 예절이 있는 곳이면 당연히 맞이해서 의식을 행하는 것이 죽은 자의 가족에 대한 예의 일 것입니다. 또한 무슨 위로의 말이 진정으로 위로가 되겠습니까. 다만 찾아가서 살아있는 자의 따뜻한 마음을 내 보이는 것 외에는 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자고로 슬픔은 함께 나누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설령 불교예절을 행한다 해도 수행자는 절을 할 때 가벼움, 무거움, 손이 닿음, 차가움, 단단함을 알아차려야 할 것입니다.
제가 경험한 얘기를 하나 해드리겠습니다. 미얀마의 쉐우민에서 수행을 하고 있는데 다른 절에 있는 한국 비구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사망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화장으로 장례예절을 했습니다. 특별하게 초청을 하여 몇 백 명의 미얀마 비구가 장례예절에 참여했었습니다. 저도 그 중의 일원으로 행사에 참여했는데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그 쉬운 반야심경 한 줄을 외우질 못해서 상당히 난감했습니다.
미얀마에서 비구를 몇 년을 했었지만 수행만 했지 빨리어 기도문 하나를 변변히 외우지 못했으므로 고인에 대해 여간 죄스럽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소는 낭패감에 마음이 아프다가 무료하고 할 일이 없어서 배의 일어남, 꺼짐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수행만을 아는 이기적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그 마음을 알아차리고 다시 배의 일어남, 꺼짐의 호흡만 보다 끝이 났습니다.
사원에 돌아와 인터뷰 시간에 사야도께 이 말을 했습니다. 경하나 변변히 외우지 못해서 호흡이나 보고 있었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말한 것입니다.
이때 사야도께서 제게 질문을 했습니다. 만약 고인이 죽어서 그곳을 내려다보고 있었다면 그 많은 사람 중에서 누구에게 제일 고마워했겠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저는 순간적으로 망설이지 않고 제 무릎을 치며 "바로 접니다"라고 했습니다. 이미 수년 동안 수행을 한 눈치는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말귀를 알아들었던 것입니다.
사야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곳에 있는 많은 사람 중에서 자신의 호흡을 알아차리고 있는 사람의 마음이 가장 편안했을 것이다. 그래서 가장 편안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자기를 가장 편하게 해주는 것이므로 그 사람에게 가장 고마움을 표했을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마음을 알아차리는 곳에서 하는 인터뷰의 내용입니다. 이 말에는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자기 속마음은 끓고 있는데 남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겉으로 남을 위하는 척하는 것이지 실지로는 끓는 마음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비관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려서 고요하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하루는 밖에 큰 사야도를 찾아온 많은 신도를 가리키며 저 사람들이 항상 왜 저렇게 사야도께 찾아오는 줄 아는가 물었습니다. 대답은 이렇습니다. 큰 사야도께서는 항상 자신이 불을 끄고 계신데 사람들은 온갖 불을 가슴에 안고 와서 사야도께 말씀드리면 사야도의 불이 꺼진 평안함에 자기 불도 꺼져서 가기 때문에 편안해서 온다는 것입니다. 정말 큰 사야도께서는 항상 고요히 앉아 계셨습니다. 누가 와서 대화는 해도 상대를 쳐다보지도 않고 시선을 내려 까시고 그냥 알아차리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큰 스승께서 본인의 89세 생신에 해주신 말씀이 생각나는 군요. "나는 매 순간 낳고 죽는다." 그렇습니다. 나중에 아비담마를 공부해 보고나서야 스승의 말씀이 실감이 났습니다. 마음은 매 순간 생겼다 없어지므로 생명도 매 순간 되풀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몸의 생명은 호홉에 있으므로 몸에서는 호흡과 호흡의 사이가 생명의 단위입니다.
그래서 생명이란 작게는 순간이고, 조금 크게 보면 하루 밤 사이고, 좀 더 크게 보면 일년이고 아주 크게는 일생이 하나의 싸이클입니다.
그러므로 언제 어디서나 자신이 고요함을 가져서 남도 고요하고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불자의 가장 소중한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가족에게 그리고 부모나 형제 자매에게 그리고 이웃을 대할 때 먼저 자신의 고요함을 얻으십시오. 그러면 자신도 고요하고 남도 고요해 집니다. 이것이 선업입니다.
첫댓글 비록 제가 질문자는 아니지만 제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것을 묘원님께서 지적해 주셔서 한결 마음의 부담이 줄어들었습니다. 참으로 선하십니다. 사두! 사두! 사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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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감사합니다.특히 경험담은 아주 유익한 가르침으로 남습니다.그리고 편리하신 시간에 윤회에 대한 말씀을 좀 해주실수있는지요??? 막연한 윤회관을 확고하게 알고싶은 바람이 있어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모르던것들을 많이 알게됩니다. 감사합니다.
자비관..내 마음이 고요해야 남에게도.. 미소로 포장하는 습관이 그나마 낫지않나 생각했는데...진심으로 고요함과 자비 지혜를 나누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