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매혹적이다. 그 매혹은 강한 전파력을 동반하고 있어서 소수의 매니아들
만이 아니라 광범위한 대중들의 호응을 얻는 성공을 거두어왔다. 국경을 넘어서 번져가는 하루키 바람은 이 땅에도 상당한 문학적 파장을 던져주었으며 문학 외적으로도 적잖은 화젯거리를 몰고 온 바 있다.
하루키 문학의 수용 양상을 밝히는 것은 90년대 한국문학을 연구하는 데 있어 반드시 필요한 항목이다. 젊은 작가들의 경우 상당수가 음으로 양으로 하루키에게 많은 부분을 빚지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물론 그 수준은 천차만별이다. 윤대녕이나 이응준처럼 하루키 문학의 어떤 측면을 진지하게 소화 변용해서 나름대로 의미있는 결실을 거둔 경우가 있는가 하면,「살아남은 자의 슬픔」의 박일문처럼, 장정일의 독설을 빌리자면, 무뇌아적 해프닝을 연출하는 데 그치고만 경우도 있다.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의 이인화는 조금 특이한 경우인데, 하루키 소설의 문장 몇 개를 훔쳐 쓴 것을 제외한다면 이 작가처럼 하루키를 닮지 않은 작가도 드물 것이다.
노골적인 권력추종과 현실 추수의 논리는 하루키와 가장 면 거리에 있는 특질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문장 베끼기는 작가적 천품을 타고나지 못한 소설가 지망생의 안간힘과 간지가 낳은 한 바탕의 소극에 불과하다. 이밖에 장 아무개나 구 아무개 등도 하루키 소설을 모방한 조잡한 작품을 선보인 바 있다. 구내의 하루 키모방자들의 대열에서 구 아무개처럼 문학적 능력이 충분하다고 여겨지는 작가가 끼어 있는 것을 볼 때의 서글픔이란! 한 가지 분명히 해둘 것은 하루키 추종 및 모방 현상은 단순하게 단죄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간교하고 부도덕하기로 말하면 어설프게 하루키를 흉내낸 작가들 보다 로브그리예의「변태성욕자」의 줄거리극 그대로 베끼다시피한「경마장은 네거리에서……」의 하일지 같은 작가가 더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회가 주어지면 표절, 모방, 패스티시에 관하여 구구체적인 실례를 들어가며 분석한 글을 써보고 싶다. 의심할 여지 없이 하루키는 90년대 우리 문학시장에서 가장 인기 있는 브랜드 네임으로 군림하고 있다. 그의 소설에 대한 일부 독자층의 열광은 그 유례가 없을 정도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루키는 90년대 우리 문화계의 '떠다니는 기표' 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소설은 작가와 작품 역시 하나의 패션너블한 상품으로 팔리는 시대의 도래를 알리고 있다. 이제 그 실체가 분명치 않으면서도 많은 사람들을 유인해들이는 힘을 발휘하는 하루키 혹은 하루키적 스타일은 우리 앞에 시급히 그 의미를 규명하지 않으면 안 될 화두로 놓여 있다.
그렇다면 하루키 소설의 어떤 점이 90년대 우리 독자들로 하여금 일본문학에 대한 통상적인 무시내지 경시에서 벗어나 거기에 탐닉하도록 한 것일까. 무엇이 우리 독자들로 하여금 하루키의 소설에서 낯선 타인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얼굴을 발견하오록 한 것일까. 우선, 이미 많은 사람들이 언급했듯이, 90년대 우리나라의 정치사회적 상황이 하루키 문학의 수용에 아주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지적을 빠뜨릴 수 없을 것이다. 주로 70~80년대의 일본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하루키의 소설은 이데올로기적 대립구도가 무너지고 사회 전반에 걸쳐 가속적으로 탈정치화가 진행되는 한편, 자본주의의 고도화로 물질적 풍요가 정착된 단계를 반영하고 있는데 바로 이러한 측면이 '불의 연대' 를 통과하여 90년대라는 이데올로기적 침체기에 접어든 우리 정서에 호소력 있게
다가올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해주었다는 설명이다.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들은 대개 고등교육을 받고 경제적 안정을 누리고 있으며 가정 학교 직장 등 다방면에서 매인 데 없는 자유로움을 향유하고 있다. 또 그의 소설에서 60년대 학생운동 세대를 사로잡았던 이상주의에 대한 환멸과 정치적 비관주의 및 내면으로의 퇴각이란 기본 인자를 검출해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루키 소설과 우리 독자를 이어주는 이러한 정서적 동질성은 지나치게 과장할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고 무시되어도 좋을 만큼 사소한 것도 아님이 분명하다. 하지만 하루키 소설이 이처럼 국내외적으로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역시 그의 뛰어난 문학적 재능 덕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나가고 이미지와 상징을 긴밀하게 짜넣는 능력과 출중하지만 하루키는 무엇보다 먼저 탁월한 산문가라고 할 수 있다. 번역이란 해협이 가로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문장이 내뿜는 신선함과 아름다움은 금방 감지된다. 가벼운 미열과 함께 몸 전체로 서서히 퍼져나가는 약기운처럼 그의 문장엔 읽는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 있다. 돌연히 스치고 지나가는 풍경이나 상념을 간결하면서도 선명하게 부조시키는 데 있어서 그보다 더 나은 능력을 지닌 동세대 작가를 찾기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그의 문장은 가장 환상적이 장면조차도 바로 눈앞의 정경처럼 구체적으로 떠올려주는 조형 능력을 자랑한다. 하루키는 자기 작품을 해설하는 글에서 " 나는 좀더 심플하게 쓰자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쓰지 않았을 정도로 심플한 언어를 쌓아, 심플한 문장을 만들고, 심플한 문장을 쌓아, 결과적으로 심플하지 않은 현실을 그리는 것이다 " 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그의 산문이 지닌 매력의 한 단면을 정확히 나타내주고 있다. 여기서 하루키가 지향하는 ' 심플한 문장' 은 현실의 복잡다양함을 사상하지 않으면서 현실의 핵을 포착하는 기민한 정신과 세련된 감수성이 소산이다.
그 심플함은 당연히 일상적 삶의 구질구질함 질척거림 흐릿함의 반대항에 해당된다.
하루키의 소설은 인습과 타성과 정한으로 착잡하게 뒤얽힌 현실을 거절하고 밝고 단순하고 경쾌한 인공낙원을 꿈꾼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하루키 문학의 상표가 되어버리다시피한 ' 가벼움의 추구' 가 시작된다. 소설의 한 문장을 빌리면 그가 선호하는 것은 " 소금냄새, 먼 기적 소리, 여자애의 피부감촉 , 헤어린스의 레몬 향, 해질녘의 바람, 희미한 희망, 그리고 여름의 꿈 " <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中> 같은 가볍고 아련하고 감각적이면서 조만간 소멸해 버릴듯한 현실의 소품들로 이루어져 있다. 소멸하는 것들에 대한 애정과 경도는 결국 그의 소설의 짙은 상실감의 정조를 드리운다. 그래서 하루키의 소설은 삶의 우수에 특히 예민하게 반응한다. 표면적으로 볼때 하루키의 소설은 경기병파라는 호칭을 부여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문장 구성 인물의 성격 등 여러면에서 날렵하고 경쾌하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의 소설이 피상적이고 말초적인 감각이나 세계인식의 소산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루키 소설의 진정한 매력은 표면적 가벼움을 넘어선 어떤 ' 진지함의 추구 '에 있다. 소설 속에서 그 추구는 흔히 현실적 보상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숙명적으로 이미 시작단계부터 좌절을 예비하고 있다. 그러나 하루키의 등장인물은 바로 그 길을 끝까지 성실하게 가고자 한다. 가볍기 이를 데 없어 보이는 그의 언어의
보행엔 삶에 대한 둔중한 통찰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유희적 하루키 반대편에 성찰적 하루키가 자리잡고 있다. 한편에 ' 게임으로서의 삶 ' 이 있다면 다른 한편에 ' 탐색으로서의 삶' 이 있다.
언뜻 생각해서 서로 반대되어 보이는 이 두 요소가 하루키 작품 속에 어떻게 교직되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2. 마른 우물
하루키 소설이 지닌 특성 중의 하나는 주인공이 대부분 매우 내면지향적이라는 점이다. 화려하고 거대한 시문화에 둘러싸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외부와의 의사소통에 큰 기대를 두지 않은 채 자기만의 세계, 적 영역에 관심을 국한하는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데뷔작「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는 주인공이 어렸을 적 지나치게 말이 없는 소년이어서 부모가 정신과 의사에게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 장면은 커뮤니케이션의 부재, 언어에 대한 불신, 삶에대한 자폐적 태도 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의 화자는 "정직하게 말하는 일은 몹시 어렵다" 면서 " 내가 정직하게 말하려 하면 할수록, 정직한 말은 어둠의 깊은 심연으로 가라앉는다" <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中 > 라고 증언하고 있다. 이처럼 외부와 단절된 채 자신의 내면만을 들여다보는 등장 인물의 태도는 종종 홀로바다를 마주하고 있는 단독자의 모습으로 현상하곤 한다. 각기 다른 작품에서 가져온 다음 두 문단은 하루키 소설의 상상 공간을 매우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공원 묘지의 숲속에서 쥐는 혼자 모든 언어를 잃은 채 앞 유리창만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차 바로 앞 몇 미터 거리에서 지면이 푹 꺼져 들어가, 그 앞에는 어두운 하늘과 바다와 밤거리가
펼쳐져 있었다. (…) 잠들고 싶었다. 잠이 모든 것을 깨끗이 씻어가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잠들기만 하면, 눈을 감았을 때 귓속으로 파도소리가 들렸다. 방파제를 때리는, 콘크리트 호안
블럭사이로 헤집듯 빠져나가는 겨울의 파도였다. 이제 더이상 아무에게도 설명할 필요가 없다,
고 쥐는 생각한다. 그리고 바닷속은 그 어떤 동네보다 따뜻하고, 평온함과 고요함으로 가득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이제 더이상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 이제 더이상...
< 1973년의 핀볼 中 >
항구 에 도착하자 나는 인기척이 없는 창고 옆에 차를 세우고, 담배를 피우면서 보브 딜런의
테이프를 오토 리피트로 해놓고 들었다. 등받이를 뒤로 넘어뜨리고, 두 다리를 스티어링에
올려놓고, 조용히 숨을 쉬었다. 좀더 맥주를 마시고 싶은 것 같은 기분도 들었지만, 이미 맥주는
없었다. (…) 이윽고 그 비는 희뿌연 색의 불투명한 커튼이 되어 내 의식을 덮었다. 잠이 방문해 온
것이다. 나는 이렇게 해서 내가 잃어버린 모든 것을 되찾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한번 상실되었다고는 하지만, 결코 훼손되지는 않은 것이다. 나는 눈을 감고, 그 깊은 잠에
몸을 맡겼다. 보브딜런은 『폭풍우』를 노래하고 있었다. < 일각수의 꿈 中 >
인용한 두 문단에서 등장인물은 상이한 공간의 경계에 자리잡고 있다. 그의 뒤엔 혼잡하고 메마른 도시가 있으며 그 앞엔 광활한 바다가 자리하고 있다. 등장인물은 현대적 삶과 시원으로부터의 부름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그는 단호하게 도시적 삶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내면의 요청에 따라 바다를 향한다. 바다는 태초의 혼돈, 생명의 시원, 태모(太母)의 화신이다. 유소년 시절을 항구도시에서 보낸 탓인지 하루키의 소설에선 바다가 빈번히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의 주인공은 따스한 물의 흐름이 가져다주는 '조촐한 평화로움' 을 꿈꾼다.「1973년의 핀볼」에서 쥐는 " 바다속은 그 어떤 동네보다도 따뜻하고, 평온함과 고요함으로 가득"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바다 외에오 하루키 소설엔 강이나 우물 저수지 수영장 비 같은 물 이미지가 높으 빈도수를 자랑하고 있다.「양을 둘러싼 모험」에서 주인공이 어릴 적 자주 수족관에 찾아가 고래 페니스를 들여다 보는 것이나 「태엽감는 새」에서 주인공과 구미코가 수족관의 해파리 구경을 하는 장면은 인간의 무의식 깊은 곳에 자리한 '바다에 대한 향수'를 잘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홀로 바다를 마주 본다는 것은 현실원리 - 현대문명에 등을 돌리고 고독하게 자신의 내면과 대좌하는 의미를 갖게 된다. 단편 "중국행 화물선" 끝부분에서 화자는 오류와 우연으로 가득한 삶을 뒤로 하고 " 항구의 돌층계에 걸터앉아, 공허한 수평선 위로 언젠가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를 중국행 화물선을 기다리자" 라고 말하고 있으며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도 주인공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고 바다에 내리는 비를 상상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나는 그 어둠 속에서, 바다에 내리는 비를 생각했다. 광활한 바다에, 누구에게도 드러나지 않도록 은밀하게 내리는 비를 생각했다. 비는 소리도 없이 해면을 두드리고, 그것은 물고기들에게도 전해지는 일이 없었다." 이러한 등장인물의 태도는 고독하고 예외적인 그만큼 영웅적인 풍모를 띠고 있다.
그는 일체의 현실원칙이나 합리성을 무시하고 자신의 주관성 깊숙히 침잠한다. 바다는 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은 그의 내부에 있는 것이다. 이때 등장인물을 사로잡는 것이 '잠' 이라는 사실은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여기서의 잠은 단순히 현실로부터의 도피나 의식의 방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계로의 진입을 위한 제의의 성격을 갖고 있다. 도시를 등지고 잠든다는 것은 낮의 원리의 반대편, 세속적 질서와는 다른 질서로의 하강을 뜻한다. 그것은 달리 이야기해서 우물 속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그는 한계지어진 도시적 삶의 반경을 넘어 다른 세계, 다른 질서, 다른 삶 속으로 투신한다. 그것은 화성의 지표에 무수하게 파여있는 한없이 깊은 우물에 내려간 청년의 이야기다. 우물은 몇만 년 전에 화성인이 파놓은 것임은 분명한데, 신기하게도 그 우물들은하나같이 수맥을 피해 파여 있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들이 그런 것을 팠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실제로 화성인은 그 우물 이외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어느 날 우주를 방황하던 한 청년
이 우물로 내려갔다. 그는 우주의 광활함에 권태를 느끼고 남 몰래 죽음을 소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래로 내려감에 따라 우물은 조금씩 편안하게 느껴졌고, 기묘한 힘이 그의 몸을 포근하게 감싸기
시작했다. 1킬로미터 정도 내려간 그는 적당한 굴을 찾아 그곳으로 기어들어가서는, 그 구불구불한
길을 정처없이 걸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中>
우물 속으로 내려가기는 하루키 소설에서 자주 되풀이 되는 주제이다. 그것은 도시와 바다라는 이질적 공간을 한데 이으려는 시도의 일환이다. 위 인용에 나오는 우물은 "수맥을 피해" 파여 있으며 그 우물 속으로 내려가는 것은 "죽음을 소망" 하는 등장인물의 마음의 움직임과 관련이 있다. 즉 우물은 일단 불모와 죽음의 공간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마른 우물은 주인공이몸담고 있는 세계의 불모성을 말해준다. 그는 그런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며 거기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는 바다로 상징되는 수성(水性)의 회복을 꿈꾼다. 다음 장면은 불치의 병에 걸린 어부왕이 다스리는 불모의 세계를 강력하게 상기시킨다.
내가 우연하게도 절판된 하트필드의 첫 단행본을 입수한 것은 사타구니에 지독한 피부병을 앓고
있었던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의 일이다. 내게 그 책을 준 숙부는 3년 후에 장암으로 온몬이
갈가리 찢기고 몸의 입구와 출구에 플라스틱 파이프를 꽂은 채 고통에 몸부림치다 죽었다. 마지막
만났을 때, 그의 몸은 마치 교활한 원숭이처럼 붉은 갈색으로 변해 쪼그라들어 있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中>
사타구니의 피부병이 암시하는 거세 모티브와 몸의 입구와 출구에 꽂은 플라스틱 파이프가 상징하는 불모성은 세계의 황폐화를 우의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은 자주 "텅 비어버리고 만 듯한 기분이 들"며 스스로를 "시대에 뒤떨어지고 만 고철덩어리" 로 느낀다.
"대체 얼마나 물을 마셔야 충분한가" <1973의 핀볼 中>라는 한 작중인물의 탄식은 역으로 우리 시대가 그만큼 건조하고 마실 물이 부족하다는 것을, 그를 둘러싼 세계가 그만큼 건조하고 황량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처럼 마른 우물이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선 데릭 하트필드라는 가공의 작가의 작품을 빌려 추상적으로 이야기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면 다음 작품 「1973년의 핀볼」에선 보다 구체적인 양상을 하고 나타난다. 그 우물은 주인공이 대학생 때 사귄 나오코라는 여자가 소녀 시절 살았던 고장에 있는 우물이다. 나오코의 말에 따르면 푸르고 평화로운 골짜기에 자리잡은 그 고장엔 "우물을 파는 데만은 명실상부한 천재" 인 아저씨가 있어서 그 고장 사람들은 평소 맛있는 우물을 마음껏 마실 수 있었다. 그러나 나오코가 열일곱 살이 되는 해 가을 그 아저씨가 사고를 당해 죽고 난 뒤부터 그 고장에서 물이 샘솟는 우물은 얻기 어려워졌다. "평화로운 시대의 평화로운 세계" <1973년의 핀볼 中>, 다시 말해 전산업사회의 목가적 풍광은 끝장이 난 것이다.
그들은 이른 아침 산비둘기 소리에 눈을 뜨고, 너도밤나무의 열매를 밟으며 정원을 산책하고,
그러다 멈춰 서서는 잎사귀 새로 흘러넘치는 아침 햇살을 올려다보았다. 세월이 흘러, 도심에서
급격하게 신장한 주택화의 물결이 미미하게나마 이 고장에도 영향을 미쳤다. 도쿄 올림픽 전후다.
산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풍요로운 바다처럼 보였던 뽕나무밭은 불도저가 검게 짓뭉개버렸고,
역을 중심으로 평탄한 거리가 조금씩 자리를 잡아갔다. <1973년의 핀볼 中>
위 인용은 나오코가 살던 고장에 밀어닥친 변화의 물결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 일본 전역으로 확대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도쿄 올림픽을 전후하여 일본 전체가 급속히 고도산업사회 - 도시화의 물결에 휩쓸려들어가기 시작하면서 차갑고 맛있는 물이 샘솟는 우물은 자취를 감추고 세상은 삭막한 유형지로 변해버렸다. 그 세계는 "세 개의 수레바퀴, 즉 테크놀로지와 자본 투자, 그리고 인간들의 근원적인 욕망으로 굴러갔다" <1973년의 핀볼中> 경제지상주의에 현혹되어 진화의 스피드에 몸을 맡긴 사람들은 무한 반복되는 일상 속에 갇혀 익사해간다. 물론 이런 시대적 추세를 뒤엎을 움직임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전공투로 대변되는 60년대 말의 거센 스튜던트
파워의 분출은 그 극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마저 실패로 끝나자 환멸에 사로잡힌 젊은 세대는 모두 뿔뿔이 각자의 골방으로 흩어져야 했다.
작가의 초기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1973년의 핀볼」을 관류하고 있는 삶에 대한 무력감과 위화감은 바로 이런 시대적 맥락 속에서 부각된 정서적 침전물들이다. 물론 대다수 사람들은 현실에 적응해서 그럭저럭 살아간다. 그러나 허위로 가득 찬 기성 질서에 재빨리 영합하는 기회주의자가 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철지난 이상주의에 매달리는 둔감함도 소유하지 못한 사람에게 현실은 지극히 처치 곤란한 그 무엇이 된다. 이를 한 등장인물은 의자뺏기 게임에 비유하고 있다. "하지만 말이지, 난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구. 스스로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말이야. 내 자신을 생각하듯 남도 생각했고, 덕분에 경찰한테 얻어맞기도 했어. 그런데 말이야, 때가 되면 결국은 모두들 자기 자리로 돌아가더군. 나만 돌아갈 자리가 없었어. 의자뺏기 게임처럼 말이야."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中> 그렇다고 유독 "돌아갈 자리가 없" 는 사람이 현실 속에서 선택 할 수 있는 길은 어떤 것이 있을까. 우리가 여기서 하루키의 작중인물의 삶의 방식을 지배하고 있는 댄디즘에 대해 알아볼 필요성을 느낀다.
3. 댄디즘
우리는 앞에서 하루키의 작중인물들이 주어진 삶에 대해 느끼는 위화감을 지적한 바 있다. 현실에 참여하여 자기 지분을 주장하는 것에 대해 원천적으로 흥미를 잃어버린 주인공에게 삶이란 무용한 정열에 불과하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1973년의 핀볼」을 가득 메우고 있는 할일없는, 따분한, 고여 있는 젊음의 풍경을 보라. 그들은 "여름 내내 나와 쥐는 마치 무엇에라도 흘린 듯 25미터 풀을 가득 메울 만큼의 맥주를 마셔 치웠고, 제이스 바의 바닥을 5센티미터 두께로 온통 메울 만큼 땅콩 껍질을 뿌렸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中>거나 "골치 아프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는 것이 우리들 수준의 번역 작업에 있어 매력적인 점이다.
"왼손에 동전을 쥔다, 오른손을 탁 겹친다, 왼손을 핀다, 오른손에 동전이 남는다, 그 정도였다" <1973년의 핀볼 中>라는 구절이 말해주듯 다람쥐 쳇바퀴돌기 같은 삶을 산다. 그 어떤 모험이나 흥분과도 절연된 삶. 주인공의 신분이 대학생이거나 화이트칼라거나에 상관없이 그는 모든 우발성과 예외성을 괄호안에 가두고 '정체된 시간'을 산다. 그것은 평탄하기 그지없지만 그만큼 무료한 삶이기도 하다. 그런 삶에서 대수로운 일이란 없다. 모든 게 동일한 풍경, 동일한 인물, 동일한 사건의 반복일 따름이다. 신선함과 경이로움이 사라져버린 그 세계는 안온한 동시에
답답하다. 그래서 주인공은 "하루하루가 거품 같은 것들뿐" 인 그 삶은 "이 시궁창의 물을 저 시궁창으로 옮긴다, 그뿐이야." <1973년의 핀볼 中> 라고 자조한다.
이러한 삶에 대한 불만족으로 부터 "여기는 나를 위한 장소가 아니야." 라는 돌연한 외침이 터져나오게 된다. 어느새 서른 살을 넘어선 한 사람의 남자로서, 다시 한 번 외야 플라이 볼을 전속력으로 쫓다가 농구 골대에 부딪쳐, 다시 한번 글러브를 배게 삼고 포도덩굴 밑에서 잠들었다가 깨어났다고 하면, 나는 이번에는 도대체 무슨 말을 중얼거릴 것인가? 어쩌면 나는 이런 말을 할지도 모른다. '여기는 나를 위한 장소가 아니야'라고 - "중국행 화물선"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걸작선 中> 그러나 이 세상에 대한 거부가 다른 세상에 대한 희원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곳이 아니라면 어디라도" 식의 낭만주의적 현실 초월의 열정은 그의 몫이 아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댄디즘이 탄생한다. 현실 속에 있되 현실에 실질적으로 개입하기를 멈추고 다만 현실을 스쳐지나가는 것. 작가의 어법을 빌리면 그것은 '거리두기의 철학'이라고 옮겨질 수 있다.
"모든 사물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 것, 모든 사물과 나 자신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둘 것" <상실의 시대 中> 포스트모던 시대를 사는 댄디의 좌우명이라 할 수 있는 이 경구는 삶으로부터 후퇴하여 내면의 밀실에서 안락한 자족감을 누리며 살고자 하는 마음의 일단을 보여준다. 그래서 「1973년의 핀볼」에서 한 여성은 주인공에게 "친절하기는 한데, 너한테는 뭐라까, 어딘가 냉담한 부분이 있어…"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中> 라고 말한다. 한없이 다정하고 친절하며 남에 대한 배려가 체질화되어 있긴 하지만 절대 자신의 내면을 열어보이지 않고 타인의 내면속으로 침투하려고도 하지 않는 이 태도는 삶의 한계지점을 보아버린 자의 오만한 고독을 나타내 보인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댄디는 가장 오해받고 있는 용어 가운데 하나이다. 그 용어엔 으레 겉멋부리기나 유한계급의 도락, 문화적 속물근성 등의 부정적 의미가 따라다닌다. 그러나 원래의 댄디즘엔 이런 통념과 정반대되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서구에서 댄디즘의 개념을 가장 현대적으로 잘 정립시킨 인물로 평가받는 보들레르는 댄디즘을 "하나의 종교"라고 부르고 댄디를 "새로운 귀족계급" 이라고 정의한다. 댄디는 "현 세계에게는 찾아보기 힘든 진부(陳腐)를 물리치고 파괴하려는 욕구의 대변자" 이며 "퇴폐 가운데 빛나는 마지막 영웅주의의 섬광"이다. 댄디가 지닌 미의 특성은 "감동되지 않으려는 확고한 결심에서 유래하는 냉정함" (이상 "현대적 생의 화가"에서 인용)에 있다. 보들레르의 댄디는 구체제의 이미 몰락하고 새로 등장한 부르주아 계층의 문화적 천민상에 대한 반발이 새로운 정신주의의 의장을 하고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댄디는 민주주의가 초래하는 하향적 평준화를 거부하고 자기만의 스타일과 고고한 정신적 귀족주의를 구가하고자 한다. 남과 구별되고자 하는 욕망이 부단히 스타일의 자의식적 계발로 이어지고 이것이 다시 삶의 미학화로 표출되는 것에 댄디즘의 특성이 있다. 댄디는 반속물, 반부르주아의 가치 아래 탄생했으며 물질적 풍요와 대립하는 정신주의 노선의 추종자들이다.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들은 많든 적든 이런 댄디의 계보에 속하는 자질을 타고난 사람들이다. 그들이 입는 의상, 그들이 먹는 음식, 그들이 즐기는 기호품, 그들이 듣는 음악, 그들이 들고 다니는 소설, 이 모든 것들은 무차별성이 일반화된 세계에서 차별화를 강구하는 한 방식으로 드러난다. 그의 소설에 패션이나 음식에 대한 묘사가 자주 등장하고 좋아하는 팝 음악 가수와 곡명이 자주 나오는 것은 작가의 교양 현시 욕구가 아니라 바로 이런 댄디즘의 구현이다. 댄디는 자신의 정신주의를 구하기 위해서 역설적으로 부유하고 한가로울 필요가 있다. 그는 다만 경제적 부를 경멸하기 위해서 물질적 풍요를 요구하는 것이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주인공의 단짝으로 나오는 쥐라는 친구는 "돈 있는 놈들은 - 모두 - 엿이나 먹어라" 라고 외친다. 이 말은 그러나 매우 모순적인데 왜냐하면 쥐의 집안이 상당한 부자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그 점을 지적할 때마다 쥐는 "내 탓이 아니야" 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가끔,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가 있어. 자신이 부자라는 것에 말이야. 도망치고 싶어져. 이해할 수 있겠니, 내 기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中>이라고 고백한다. 그렇다고 그가 자신의 출신으로부터 구체적인 일탈의 조짐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부르주아적 삶을 증오하고 그것에 혐오를 표시할 뿐이다.
댄디즘은 전형적으로 근대의 산물이면서 근대성에 적대하고 반발하는 것에서 자신의 위상을 확보했다. 그것은 근대에 대한 전면적 회의의 소산은 아닐지언정 시장성의 유혹에 대한 방어와 자기단련의 의미를 갖고 있다. 그래서 보들레르는 "댄디는 끊임없이 고상하기를 갈망하여야 한다. 거울 앞에서 살며 잠자야 한다"는 철칙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댄디는 외모 인상 복장에서 제스처 취향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자신을 통제하고 타인과 구분되는 자신만의 아우라를 형성하는 것에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하루키의 소설에서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인상 중의 하나는 등장인물들의 성에 대해 매우 개방적이고 감각적 쾌락에 민감한 듯하지만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면 아주 금욕적인 일면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하루키의 주인공들은 금전에 대해 그렇듯이 성에 대해서도 초연하다. 그런데 그 초연함은 자신은 그런 것과는 아무 상관없다는 식의 초연함이 아니라, 그러한 현상곳에 깊숙히 몸담고 있으면서 거기에 매몰되지는 않는 정신의 자유로움이 가져다주는 초연함이다. 이 장신의 자유로움은 한편으로 주위 현상에 기동성 있게 반응하는 순발력을 가져다주면서 다른 한편으로 상투적인 인식과 삶에 비판적 시선을 유지할 수 있는 거리감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하루키의 주인공들이 매혹적인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이런 댄디즘의 세련된 구현에 있다. 일본의 한 언론매체에서 나온 다음과 같은 논평은 이 점을 잘 말해주고 있다.
독특한 문체, 주인공의 성격, 소설에 답은 음악이나 음료 같은 소도구에 이르기까지 , 하루키의 소설은 독자의 감흥에 딱 맞아 읽으면 기분이 상쾌하다. 그가 독자들로부터 압도적인 지지와 공감을 얻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일본 도서신문" <태엽감는 새 2권 뒤표지에서 재인용>
하루키의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품위와 절제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해주는 경제적 여유는 그야말로 "독자의 감흥에 딱 맞"으며 읽는 사람의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어준다. 그것은 주어진 현실을 불만족스러워하는 독자들의 기호에 적절히 영합하면서도 그 현실을 완전히 뒤바꿔야 된다는 식으로 결단을 촉구하거나 해서 부담을 자아내지는 않는다.
우리가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하루키의 소설에 나타난 댄디즘이 서구에서 발생했을 당시의 원래 모습에 가까운 것이 아니라 현대에 이르러 변질되고 대중화된 양상으로서의 댄디즘이라는 점이다. 자본주의의 고도화로 상류계급에만 허용됐던 상품과 이미지가 대중적으로 보급되고 소비되면서 댄디즘 또한 엘리트의 전유물이기를 그치고 대중들의 라이프 스타일의 하나로 자리잡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일상생활의 심미화(aestheticization of everyday life)가 바로 그것이다. 댄디는 이제 더이상 저주받은 소수 예술가들만이 누리는 특권\친형이기를 그치고 상품미학의 바다 속에서 새롭게 각광받는 또하나의 상품으로 자리잡기에 이르렀다. 자기 이미지의 고양에 대한 물릴 줄 모르는 식욕에 사로잡힌 현대인들은 댄디즘의 다양한 기호조차 쉽사리 포획 변형해 자신의 영토로 삼고 있다.
현대로 올수록 댄디즘이 원래 가졌던 강한 현실비판의 정신과 고급한 사유는 점차 밀소되고 그 자리에 새로움 - 차이짓기에 대한 강박만이 노골화되는 추이를 보여주고 있다. 즉 댄디즘 내부에서 다시 수많은 분파와 계열이 형성되고 서열이 매겨지는 것이다. 자분주의의 속악함에 대한 반발로 시작한 댄디즘은 오늘날 현실의 속악함의 일부로 화하고 있다. 조금 거칠게 단순화시켜 이야기하자면 오늘날 댄디즘은 문화적으로 아방가르드와 키취 사이에 있다. 댄디즘이 그 사회의 정신적 문화적 부패를 막는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다히지 못할 때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전위성을 상실한 채 관음적 소비 대상으로 전락해버린 댄디즘의 형해일 따름이다.
하루키의 소설은 바로 이 경계에 있다. 그의 소설은 이처럼 우리 시대에 댄디즘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고 전파되고 있는지에 대한 문학적 반영이면서 현실 속에서 그처럼 댄디즘이 유행의 물살을 탈 수 있도록 주도하는 또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의 소설은 '문학의 죽음' 이 주요한 주제로 부상하고 있는 이 시대에 새로운 문학적 가능성을 보여주는 전범이 될 수도 있고 또다른 얍삽한 문화적 신상품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하루키는 이 아슬아슬한 곡예를 지금까지는 비교적 성공적으로 계속해오고 있는 듯이 보인다.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댄디적 기질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검토가 가능하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그의 주인공들은 경제적 여유와 성적 자유방임의 상태 속에 놓여 있으면서도 그것으로 부터초연하다. 그는 진지하고 성실한 품성을 지녔지만 사회적 출세나 물질적 성공에는 무척 냉담한 대중이 원하는 상투형이 아니라 자기 고유의 실존인 것이다. 초기 작품에서 작가는 그것을 "숫자로 환산된 프라이드"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이전에 인간의 존재 이유를 테마로 한 짧은 소설을 쓰려 한 적이 있다.
결국, 그 소설은 완성되지 않았지만, 그 동안 나는 줄곧 인간의 레종 데트르에 대해서 생각했고,
덕분에 기묘한 버릇에 집착하게 되었다. 모든 사물을 숫자로 환원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버릇이다.
약 8개월 동안, 나는 그 충동에 휘둘렸다. 나는 전철을 타면 우선 승객의 숫자를 세고, 계단의 숫자를
전부 세고, 틈만 있으면 맥박수를 쟀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中>
당신이 핀볼 머신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수치로 환산된 프라이드뿐이다.
(…) 핀볼 머신은 당신을 그 어떤 곳으로도 인도하지 않는다. 리플레이 램프가 켜질 뿐이다.
리플레이, 리플레이, 리플레이…, 마치 핀볼 게임 그 자체가 어떤 영겁성을 지향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기까지 한다. <1973년의 핀볼 中>
타인과의 소통 가능성에 대해 절망한 주인공을 숫자라는 중성적이고 비개성적인 영역으로 은신한다. 이 사소하다면 사소한 버릇은 세상의 통념과 가치관에 휘둘리지 않으려는 정신의 고집스러움을 보여준다. 오직 그 프라이드만이 그를 시대의 거품에 휩쓸리지 않은 채 단독자로 지탱할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자신을 특수화하려는 욕구, 나아가 자신의 삶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가공하고자 하는 욕구이다. 물론 그 행위 자체는 부질없는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숫자 세기나 핀볼 게임이 현실적으로 안겨주는 보상은 거의 없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것에 자기만의 가치를 부여하고 거기에 전심전력을 기울이는 것에 댄디의 모럴이 있다.
그에게 삶의 진정한 의미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창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하루키 소설에 자주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농담이나 게임을 단순히 봐 넘겨서는 안 된다.
하루키 소설에서 윤활유 역할을 하는 재치 있는 대화와 핀볼에서부터 말잇기나 글자맞추기 같은 시간 때우기용 놀이에 이르기까지 여러 모습으로 등장하는 게임은 의미없는 세상에서 젊음을 소비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댄디의 삶의 방식, 다시 말해 존재의 기술(art of existence)이라고 할 수 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 나오는 '나'와 쥐의 함축적이면서도 뼈가 들어 있는 대화나 「1973년의 핀볼」에 나오는 '나'와 쌍둥이 자매 사이의 넌센스를 방불케 하는 천진난만한 대화, 그리고 「노르웨이 숲」을 가득 메우고 있는 와타나베와 미도리의 유머러스한 대화를
상기해보라. 미도리가 와타나베에게 "봐요, 그쪽 말투는 꼬옥 험프리 보가트 같아요. 쿠울하고 터프하고" 라고 한 대목은 현대의 인간관계에서 말하기 방식이 차지하는 의미를 간략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들의 대화는 강한 성적 뉘앙스를 담고 있을 경우에도 절대 우스꽝스럽다거나 천박한 경지로 멀어지지 않고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을 때라도 경직된 구호나 이데올로기적 결정론에서 벗어나 있다. 그들의 대화는 재치 자랑에 머물지 않고 삶을 바라보는 예기치않은 새로운 시각의 가능성을 암시해준다.
현실적으로 댄디는 소수일 수밖에 없다. 현존하는 질서에 순응하지 않고 영원히 소수파로 남겠다는 오만한 소외감 없이 댄디의 대열에 낄 수는 없다. 그래서 「1973년의 핀볼」의 주인공은 "그럼 거의 아무와도 친구가 될 수 없다는 얘기예요?" 라는 물음에 "아마 그럴거야. 거의 아무와도 친구가 될 수 없어" 라고 답변한다. 그러나 때로 어떤 징표를 나침반 삼아 소수가 다른 소수를 알아보고 접근하는 경우가 있다.「노르웨이 숲」에서 대학선배 나가사와가 와타나베를 보고 "<그레이트 개츠비>를 세 번 읽은 작자라면 나와 친구가 될 수있지" 라고 말하는 대목은 그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지나치게 오래된 고전도 피하지만 죽은 지 30년이 지나지 않은 작가의 책은 원칙적으로 손에 대려고 하지 않는다는 나가사와의 독서 방침은 원칙 아닌 원칙에 지나지 않는다. 거기서 두드러지는 것은 자신과 타자를 구별짓는 방식의 하나로 스스로에게 그런 내적 규율을 강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단순한 장난이나 괴벽이 아니라 엄숙한 자기 명령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있다 삶을 게임으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참여한다는 것은 얼핏 실없이 보이지만 그것엔 나름대로 확고한 원칙과 자기 통제가 따른다.
하루키의 주인공들은 아무도 거들떠보려 하지 않는 일상의 사소한 것들속에서 삶의 의욕과 세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해낸다. 단순히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거나 연인과 한적한 길을 산책하거나 아르바이트로 잔디를 깍는 일 따위의 일상적인 장면에 하루키는 종종 오래 기억에 남을 만한 미적 후광을 부여한다. 그 순간 일상생활은 진부한 나날의 틈에서 빠져나와 감각적 즐거움으로 충만한 시적 순간으로 탈바꿈한다. 그러나 댄디가 일상 속에서 일상을 통해 거두는 이러한 승리는 극히 찰나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댄디가 누리는 작은 즐거움은 거대한 불확실성의 바다 위에
떠 있는 포말에 불과하다. 나른하기까지 한 일상의 평안은 조만간 깨질 수밖에 없으며 그는 어느 한순간 원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부득불 다른 세계의 부름 앞에 소환당한다. 지금 이곳에 살고있는 그 앞에 다른 시간, 다른 장소가 펼쳐진다. 이처럼 유희하는 자아가 막다른 벽에 봉착했을 때, 게임으로서의 삶이 한계에 부딪쳤을 때 그는 새롭게 성찰하는 자아, 탐색으로서의 삶에 눈뜨게 된다. 우물 밑으로 내려가야만 할 시간이 도래한 것이다.
4. 우물 속으로 내려가기
현실의 표면에서 여유 있게 세련된 삶을 구가하던 하루키의 주인공들도 어느 시점에 이르면 막다른 경계에 도달하게 된다. 댄디의 경쾌한 행보로는 극복할 수 없는 운명의 과제가 그 앞에 제기되는 것이다. 이 불가항력적인 사건의 흐름에 휘말리는 순간 그는 삶 앞에서 다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게된다. 드디어 그는 농담과 유희로 적당히 사태를 웃어넘기는 방식을 그만두고 곰곰히 자기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보기 시작한다. 그 과거는 연인의 죽음 (노르웨의 숲)이란 형태로 찾아오기도 하고, 친구의 돌연한 실종과 지하세력의 협박 (「양을 둘러싼 모험」)으로 현상하기도 하고, 고양이의 실종과 그에 연이은 아내의 실종 (「태엽 감는 새 」)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하여 주인공은 과거의 자신과 결별한 채 새로운 삶 속으로 내던져진다. 하루키의 소설을 이처럼 탐색담으로 파악할 경우 그 줄거리는 흔히 주인공을 둘러싼 일상에 균열이 가고, 주인공이 그 균열의 원인을 조사하기 위한 장정에 오르고, 그 와중에 여러 가지 난관을 겪고, 그러다 맨 마지막에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만 원하던 것을 손에 넣지는 못한다는 걸로 요약될 수 있다. 누군가의 돌연한 실종 혹은 죽음은 주인공으로 하여금 삶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하는 필연성 속으로 밀어넣는다. 그런데 하루키는 이러한 탐색의 여정을 자주 우물 속으로의 하강 이미지에 담아 형상화하고 있다.
그 우물은 데뷔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 나오는 화성의 마른 우물이자 「1973년의 핀볼」에 나오는 나오코가 살던 지방의 우물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 우물이 가장 명료한 형태를 부여받은 것은 「노르웨이 숲」에 이르러서였다.
우물은 초원이 끝나고 잠목숲이 시작되는 바로 그 경계선에 있다. 대지에 빠끔히 열린 지름 1미터
가량의 어두운 구멍을 풀이 교묘하게 덮어 감추고 있다. 둘레에는 목책도 없으며, 약간 높다란
돌담도 없다. 다만 그 구멍만 이 입을 벌리고 있을 뿐이다. (…) 나로서 유일하게 알 수 있는 건
그것이 아무튼 지독하게 깊다는 그것뿐이다. 어림할 수조차 없을 만큼 깊은 것 이다. 그리고
그 구멍속에는 암흑이 "이 세상의 온갖 종류의 암흑을 응축 해놓은 것 같은 농밀한 암흑이" 가득
차 있다. (「노르웨이 숲」 28쪽)
주인공이 사랑하던 여인 나오코가 요양하던 산 속에 있는 것으로 묘사된 이 우물은 죽음의 입구에 다름아니다. 그것은 혼자 외롭게 자신의 밀폐된 내면에 갇혀 죽어갈 나오코의 운명을 예고해주고 있다. 즉 이 작품에서 주인공에게 맡겨진 임무란 저쪽 세계 그러니까 저승으로 하강하는 나오코를 어떻게 해서든 다시 이쪽 세계 그러니까 이승으로 복귀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르페우스 신화가 말해주듯 이러한 모험은 실패로 귀착되기 마련이다. 나오코는 결국 자살하고 말며 주인공은 그제서야 홀로 지상을 미친 듯이 헤매며 방황하게 된다.
이처럼 주인공은 두 세계의 경계선에 발을 걸치고 있다. 한편에 현대적 합리성으로 운영되는 도시공간이 펼쳐져 있다면 다른 한편엔 이러한 밝고 화려한 현실 속에 편입되지 못한 어둡고 음습한 또 다른 세계가 있다. 이 대조되는 공간은 삶\죽음, 현실\환상으로 도식화할 수 있겠는데 우물은 때로 이 양 세계를 이어주는 통로 구실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죽음으로 일방통행하는 나락이 되기도 한다. 「노르웨이 숲」이 도쿄―미도리에 의해 대표되는 삶의 공간과 교토 산 속의 요양원―나오코에 의해 대표되는 죽음의 공간이라는 대위범적 공간 분할로 이루어져 있다면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제목 그대로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현실 공간과 세계의 끝이라는 환상 공간의 평행 공존에 의해 축조돼 있다.「태엽 감는 새」역시 도쿄 교외의 주택가를 무대로 한 일상적 공간과 우물 속에서 잠들며 왕래하는 환상의 공간이라는 이중 구조로 돼 있다. 우물 속의 세계는 현실 세계와 달리 낯설고 두려우며 어둡고 춥다. 아직 하루키 특유의 본격적인 탐색의 서사가 펼쳐지기 이전 작품인 「1973년의 핀볼」에서도 그 우물 속의 세계는 주인공이 찾는 핀볼 기계가 보존돼 있는 거대한 창고의 형상으로 그 몰골을 드러내고 있다.
춥다. 그리고 역시 죽은 닭의 냄새가 난다. 나는 천천히 좁은 콘크리트 계단을 다섯 단 정도 내려갔다.
계단 아래는 한층 좁다. 그런데도 땀이 났다. 기분 나쁜 땀이다. 나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는다. 다만 겨드랑이에 고인 땀만은 도저히 어쩔 도리가 없다. 나는 제일 아래 계단에 앉아,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피웠다. (「1973년의 핀볼」 192∼193쪽)
침묵과 싸늘함이 지배하는 그 공간에서 주인공은 이제는 효용가치를 잃어버린 수많은 핀볼 머신을 본다. 핀볼 머신의 무덤인 그곳에서 그는 예전에 그가 즐겨 다뤘던 스리 플리퍼 스페이스 십을 찾는다. 주인공은 시종 그 기계를 '그녀' 라고 부르며 그 앞에서 오랜만에 해우한 연인처럼 대화를 주고받는다. "종종 네 생각을 해" 라든지 "왜 왔는데요?" 라는 물음에 "네가 불렀어" 라고 대답하는 식으로. 기계의 영혼과 대화를 주고받는 이 장면은 저승에서 에우리디케와 해우하는 오르페우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해준다. 그러나 그 해우는 잠시에 그치고 그는 다시 홀로 일상으로 복귀해야 한다.
이 춥고 고요한 죽음의 세계는 「양을 둘러싼 모험」이나 「댄스 댄스 댄스」에선 양 사나이로 변한 친구 '쥐'가 은거하고 있는 북해도의 오두막집 이나 돌핀 호텔 내부의 신비스러운 공간으로 나타난다. 이들 공간은 한결 같이 춥고 어두우며 그 공간에서 주인공은 이제 현세의 사람이 아닌 쥐― 양 사나이와 대화한다. 그 대화는 죽음의 의미화를 지향하는 동시에 주인공이 삶을 살아가며 상실한 그 무엇에 대한 새삼스런 인식에 맞닿아 있다. 죽은 자가 산 자 앞에 나타나 산 자가 그 동안 바쁜 일상 속에서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린 그 무엇을 환기시켜주고 현실을 움직이는 힘의 역학에 대해 충고해주는 것이다. 아울러 우물 또한 도시공간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엘리베이터나 거대 빌딩
내부에 뚫려 있는 비밀 통로로 그 모습을 달리해 나타난다. 「양을 둘러싼 모험」에 나오는 관처럼 생긴 괴상한 형태의 엘리베이터나 「댄스 댄스 댄스」에 나오는 엉뚱한 순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공간에 주인공을 내려 놓는 엘리베이터는 바로 우물의 변형인 것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미로를 헤매며 주인공은 정체불명의 적과 싸우고 결코 도달하지 못할 목표지점을 향해 나아간다.
그러나 주인공이 탐색의 끝에서 만나는 것은 항상 죽음이 거나 유령 그리고 부재일 뿐이다. 역으로 그 죽음과 유령의 부재가 그들이 깃들어 있는 공간을 침묵과 싸늘함이 지배하는 공간으로 만든다.
하루키 소설에서 탐색은 대개 개인적 실존의 문제와 정치사회적 알레고리가 접합돼 있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물론 「1973년의 핀볼」이나 「노르웨이 숲」처럼 젊음의 상실과 우수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경우 정치사회적 함의가 상대적으로 두드러지지 않지만 「양을 둘러싼 모험」이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태엽 감는 새」 같은 작품에선 개인적 문제와 사회적 주제의 교차가 비교적 선명히 드러나고 있다. 이는 작가의 인식의 심화 및 확대에 따라 소설의 스케일이 커지고 그 구조가 중층화되어 나타난 결과일 것이다.
하루키의 주인공들은 흔히 자신의 내부에 어떤 결락된 부분이 있다고 느끼고 그것이 그를 사회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결락된 부분을 찾아 나서는 여정에 오르는 것이다. 그 결락된 부분은 그러나 한 개인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니라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전체가 상실하거나 망각한 그 무엇이라는 점에서 주인공의 행위는 시대적 추이를 거스르는 가역반응으로 자리메김한다. 그런 의미에서 주인공은 시대적 대표 단수로서 성배 ― 사라져버린 여인을 되찾아오는 임무를 수행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이 위화감을 느끼는 그 시대적 추세는 초기작에선 막연하게 상실과 환멸의 정조로서만 그 편린을 드러냈지만「 양을 둘러싼 모험」에 이르면 일본의 현대사를 지배한 군국주의와 야쿠샤 같은 검은 어두운 지하세력의 힘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이 찾아 헤매는, 등에 별 마크가 붙은 특별한 양은 인간의 체내에 들어가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특별한 양이다. 그 양은 전쟁 전 몽고의 초원에서 양박사라는 학자의 몸 속에 들어갔다 나온 뒤 '우익의 거물' 의 몸 속으로 들어가 그로 하여금 전후 일본의 정치와 경제에 절대적 영향력을 미치게 만든다. 그리고 '우익의 거물' 마저 이용가치가 없어지자 주인공의 친구인 '쥐'의 몸 속으로 침투한다. 양으로 육화돼 나타난 이 힘은 주인공이 지향하는 삶의 태도와 정반대되는 삶의 원리를 상징한다. 그것은 권력에 대한 추종, 파괴와 죽음의 메커니즘에 다름아니다. '쥐'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양의 음모를 분쇄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에 이르면 주인공을 압박하는 외부의 거대한 힘은 정보사회의 외양을 취하고 있다. 일본 사회의 현주소라 할 수 있는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쪽의 주인공은 자신의 의도와 무관하게 원래 그가 소속되어 있는 '조직'과 또다른 마피아적 단체인 '공장' 및 지하를 지배하고 있는 야미쿠로 사이의 정보 쟁탈전에 휘말려 거대 빌딩 속에 뚫려 있는 미로를 헤맨다. 생명의 존엄성과 개인의 창의성을 도외시한 후기산업사회의 이러한 정보전쟁의 아귀다춤 저편에 일각수들이 거니는 폐쇄적인 마을이 있다. 거기선 모든 것이 신비스러운 고요 속에 침잠해 있다. 하지만 일체의 변화나 발전과 무관한 그 세계에서도 주인공은 완벽한 평정을 얻지 못한다. 소설은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와 세계의 끝, 이 두 상이한 차원이 점차 서로를 향해 접근해가다 하나로 접속되는 순간 막을 내린다. 주인공은 바다 앞에 차를 세우고 그 안에서 잠에 빠져든다. 그 잠은 다른 세계로의 진입을 위한 제의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추구의 잠정적 중단이기도 하다. 작가는 우물 저편의 세계 속으로 완전히 뛰어드는 것에 불안감을 느낀 것일까.
길이 발견되는 순간 탐색은 끝나고 마찬가지로 작품 또한 끝난다. 아마도「태엽 감는 새」가 우리에게 각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이 작품이야말로 우물 속 가장 먼 지점까지 나아가는 주인공의 모험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우물 언저리를 배회하며 사라진 누군가가 다시 돌아오기를 수동적으로 기다리지 않고 직접 우물 속으로 투신해 상대방을 찾아나선다.
주인공 오카다 도루는 서른살 먹은 남자로서 근무하던 법률 사무소를 그만둔 뒤 집안일을 하며 지낸다. 그의 아내 구미코는 고급 공무원의 딸로 잡지사에서 편집일을 하고 있다. 이 두 사람은 구미코 집안의 심한 반대를 무릎쓰고 6년 전 결혼했다. 어느 날 기르던 고양이가 사라진 다음 이상한 여인으로부터 알 수 없는 전화가 걸려오는 등 비정상적인 일이 연이어 벌어진다. 그리고 아내마저 아무 설명 없이 그의 곁을 떠난다. 이제 주인공은 아내 찾기라는 탐색의 여정에 오르게 된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아무 특징없는 평범한 남자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주인공의 반대편에 아내의 오빠인 와타야 노보루가 있다. 대학교수이자 인기 있는 경제비평가로서 저널리즘의 각광을 받는 노보루는 출세 지향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사고에 철저하게 물들어 있는 문제적 인물이며 나중에 정계에 진출해 자신의 영향력을 극대화하는 데 성공한다. 주인공은 겉으로는 화려하고 그럴듯해 보이지만 공허하고 가짜에 불과한 이러한 인물이 지배하는 세계를 다음과 같이 우화적으로 그려보이고 있다.
어딘가 아주 먼 곳에 천박한 섬이 있었어요. 이름을 붙일 만한 섬도 아니죠. 아주 천박한 모양의
천박한 섬으로, 그곳에는 천박한 모양을 한 야자 나무가 잘 어울리죠. 그 야자나무는 천박한 냄새를
풍기는 야자 열매를 만드는데, 마침 그곳에는 천박한 원숭이가 살고 있고, 그 천박한 냄새를 풍기는
야자 열매를 좋아해서 즐겨 먹죠. 그리고 천박한 배설을 하죠. 그 배설물은 땅바닥에 떨어져 천박한
토양을 더욱 천박하게 하고, 그 토양에 서 자란 천박한 야자나무를 더욱 천박하게 하는 거예요.
그러한 순환이 계속 되는 거죠. (「태엽 감는 새」 2권 53쪽)
여기서 주인공이 말하려고 하는 바는 자명하다. 금전 만능의 소비자본주의와 국가주의의 망령에 사로잡힌 전후 일본 사회에 대한 비판의 집약인 셈이다. 남편에게서 떠난 오빠인 노보루의 관할로 들어간 아내를 되찾기 위한 주이공의 노력은 현실 속에서 세를 얻고 있긴 하지만 정작 인간에게 중요한 그 무엇을 도외시한 현대 일본 사회의 전반적 흐름과의 투쟁인 것이다. 노보루 같은 인물이 가속화시키는 '천박한 순화'에 대항해서 주인공은 잃어버린 순수의 상징인 아내를 필사적으로 되찾으려 한다. 그 되찾기는 주인공이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이웃해 있는 텅빈 집의 버려진 우물에 들어가는 것으로 나타난다. 물이 마른 우물에 웅크리고 앉아 잠에 빠져든 그는 "젤리처럼 차갑고 물컹물컹한" 벽을 통과하여 다른 세계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거기서 그는 미지의 여인과 그 여인을 에워싸고 있는 정체불명의 음험하고 폭력적인 힘과 조우하게 된다.
현실과 꿈, 실재와 환상, 현재와 과거가 뒤섞여 전개되는 이 작품은 방대한 분량만큼이나 다양한 상징들이 배치돼 있어 그것들을 정교하게 따라 읽 데도 별도의 지면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유난히 두드러진 특징으로 다음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을 듯하다.
첫째는 시간적 배경이 확장됨에 따라 현 시대에 대한 공시적 분석에 머물지 않고 통시적 고찰까지 동반하는 시야의 확장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결혼에 도움을 주었던 혼다라를 노인의 유품을 전달하러 온 마미야라는 사람에게서 노몬한 전쟁에 얽힌 처절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당시 몽고에서 정찰활동을 하고 돌아오던 마미야 중위 일행은 소련장교가 이끄는 몽고군에게 사로잡혀 대부분 죽고 마미야 자신은 사막의 외딴 우물 속에 유폐돼는 지경에 처해진다. 춥고 어두운 우물 속에서 며칠 간 죽음같은 고행을 치른 그는 하루 한 번 빛이 우물 속으로 스며드는 순간 어떤 절정을 체험한다. "내가 당신에게 전하고 싶은 것은 내 인생은 아마도 그 외 몽고 사막에 있는 깊은 우물 안에서 끝나버렸던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오. 나는 하루 중에 10초나 15초 동안만 우물 바닥에 비쳐 들어오는 강렬한 빛 속에서 생명의 핵 같은 것을 완전히 태워버린 듯한 느낌이 들어소" 라는 마미야의 발언은 우물속으로의 내려가기가 함축하고 있는 존재 갱신의 열망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우물과 관련된 마미야의 경험은 주인공 자신이 이웃집 우물로 내려가는 행위와 겹쳐 독특한 울림을 자아낸다.
또한 주인공은 우물 속으로 들어갔다 나오면서 얼굴에 반점이 생기는데 이것은 그가 아내를 찾던 와중에 만난 또다른 인물 아카사카 너트메그라는 여인의 아버지와 이어진다. 너트메그의 부친은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만주의 동물원에서 수의사로 재직하다가 전쟁의 어리석음과 폭력성을 여실히 깨닫게 해주는 일련의 체험을 하는데 그의 얼굴엔 주인공과 똑같은 반점이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설정은 지금 이곳에서 주인공이 겪는 체험의 일회적이고 비가역적인 것이 아니라 그 형태와 인물만 달리하여 역사 속에서 계속 되풀이되고 있음을 암시해주고 있다.
즉 주인공은 오카다 도루라는 고유한 존재인 동시에 노몬한 전쟁 당시의 마미야 중위이기도 하고 2차대전 막바지의 만주 동물원 수의사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의 세계에서 나는 나이면서 동시에 타자이기도 하다. 나와 다른 사람은 고통과 사랑의 연대를 통해 하나가 된다. 우물 속으로의 하강은 출구 없는 밀폐된 자아 속으로의 칩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물 밑으로 연결된 통로를 통해 다른 사람을 만나고 다른 사람과 일체가 되는 체험을 수반한다.
'나'는 복수의 나가 되는 것이다. 주인공이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다 자신이 어느새 그 우물 속에 있음을 발견하고 "그 우물은 세계의 모든 우물 가운데 하나며, 나는 세계의 모든 나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태엽 감는 새」2권 316쪽) 는 깨달음을 얻는 것은 이 점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 순간 '나'는 혼자있으되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상호주관성이 세계는 오만한 자기중심주의도 아니고 무차별적인 대중추수주의(?)도 아닌, 인간들 사이의 진정한 친교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둘째, 이런 상호주관성의 경험은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어느 정도 비현실적이고 신비주의적인 분위기를 띠고있다. 여기서 강렬학 드러나는 것은 오컬티즘이다.
하루키의 다른 작품에 간접적으로 암시된 오컬트적 분위기는 이 작품에 이르면 돌출적으로 작품 전면에 내세워져 있다.
오컬티즘은 하루키만이 아니라 현대의 일본 작가 중 상당수가 천착하고 있는 주제이다. 요시모토 바나나는, 문학성이 의심스럽긴 하지만, 이 분야에 가장 메진하고 있는 작가인 듯하며 무라카미 류나 시마다 마사이코 등의 소설에서도 초능력이나 텔레파시 같은 것을 쉽게 대할 수 있다. 이는 어쩌면 옴진리교 파동이 말해주듯 일본 사회에 불건전한 신비주의가 만연해 있으며 괴기물이나 환상물이 유행하고 있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을 듯하다. 오컬티즘은 합리주의의 협소한 반경을 넘어 세계를 바라보는 다른 시각을 제공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도 있고 사회적 퇴폐의 한 징후로 부정적으로 볼 수도 있다.
주인공에게 마미야 중위를 소개해준 혼다 노인, 사라진 고양이를 찾아주는 임무를 맡고 주인공 앞에 나타난 가노 마루타와 구레타 자매, 디자이너에서 심령치료사로 변신한 아카사카 너트메그와 그녀의 아들 시나몬, 이들은 모두 초능력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신비스러운 힘의 소유자로 그려져 있다. 그들은 미래를 예언하고 원일 모를 마음의 병을 치료하고 다른 사람의 꿈속에 자유자재로 출몰한다. 꿈속에서 정사와 살인이 벌어지고 이미 벌어졌다고 전제된 사건이 뒤늦게 실제로 일어나는 시간의 역류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더욱이 주인공 자신이 우물에 들어갔다 나온 뒤 영적 능력을 획득해 치료 행위에 나서기까지 한다. 현대적 합리성을 내면화한 관점에서 보자면 이들의 사고와 행위는 황당하고 기이한 면이 없지 않다.
우물 속으로 내려가기는 현실 세계와의 의도적인 단절인 동시에 신체적인 고행을 통한 심리적 훈련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물이란 자궁과도 같은 공간에서 그는 태아적 상태로 회귀하며 우주적 밤의 상태를 체험한다. 그럼으로써 그는 인간의 오감으로서는 파악할 수 없는 우주의 숨겨진 모습을 발견해내는가 하면 고차원적인 자아와 교섭하기도 한다. 고도의 정신집중과 망상으로 잠재된 무의식의 에너지가 유출됨에 따라 그는 존재의 진실과 삶의 신비를 투시하기에 이른다.
주인공은 이처럼 지상의 시간을 초월해서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를 오가며 끝내 와타야 노보루를 파멸에 이르게 한다.
오르페우스는 드디어 에우리디케를 구출하기 직전의 단계에 도달한 것이다. 그러나 그 구출이 초자연적인 힘의 도움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무조건적인 동의를 잠시 유보하게 된다.
댄디즘이 그렇듯이 이 오컬티즘 또한 이 시대의 난마와도 같이 얽힌 문제를 풀기엔 지나치게 '상상적인 해결책' 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닐까. 하루키는 「태엽 감는 새」의 결말에서 오카다와 구미코의 재회를 끝내 성사시키지 않음으로써 순진한 낙관론을 경계하고 있다. 그러나 오컬티즘을 통한 사태의 해결이 안겨주는 아쉬움은 여전히 남는다.
5. 글쓰기의 기원
하루키의 소설은 댄디즘의 표면과 오컬티즘의 심연이란 이중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댄디즘이 부각될 때 그의 소설은 '적당히 우아하게 살기' '고독하지만 근사한 삶'에 대한 추구로 정리 가능한 세계를 보여준다. 그때 주인공은 '게임으로서의 삶'에 탐닉한다. 그러나 그러한 유희적 자기 연출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다. 주인공이 자기 앞에 박두한 운명의 과제를 풀어나가기 시작함에 따라 '탐색으로서의 삶'이 대두한다. 그는 우물 속으로 내려가 지하의 어두운 힘과 접촉하고 이 세계에서 상실한 그 무엇을 되찾아오고자 한다. 처음에 그 탐색은 개인적 문제에 국한된 것이었으나 작가의 연륜이 더해감에 따라 점차 역사 사회적 지평으로 확대해나가는 양상을 보여 주고 있다. 그 탐색의 끝에 오컬티즘이 자리잡고 있다. 이상의 요약에서 알 수 있듯이 하루키의 소설은 동일한 지점을 우회해서 파고들어가는 나선의 궤적을 그려왔다. 그 결과 그의 소설은 주제 인물 분위기 등에서 강한 상호텍스트성과 유기적 연속성을 보여왔다.
"반딧불" "마을과 그 불확실한 벽" "태엽 감는 새와 화요일의 여자들" 같은 단편이 「노르웨이 숲」「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태엽 감는 새의 연대기」같은 장편으로 눈부신 확장을 이룬 것은 그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또 흔히 '쥐 3부작' 이라 부르는「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1973년의 핀볼」을 보면 이미 테니스 코트 옆의 잡목숲에서 목메달아 죽은 나오코라는 여자가 삽화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작가의 내면에서 발효를 거듭했을 그 이미지는「노르웨이 숲」에 이르러 활짝 피어남을 볼 수 있다.
나오코의 죽음 ― 사라짐은 그 뒤에도 다채롭게 변주되어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에선 시마모토란 여자의 모습으로, 「태엽 감는 새」에선 구미코와 가사라하 메이의 모습으로 반복된다.
핀볼 머신처럼 그의 소설 역시 "리플레이 리플레이 리플레이…" 되는 것이다.
달의 여신의 벌거벗음이란 원형적 이미지를 보여주는 다음 두 대목을 비교해보라.
그러더니 그녀는 두 손을 돌리고 천천히 가운의 단추를 끄르기 시작했다. 단추는 모두 일곱 개가
있었다 (…) 그 일곱 개의 흰 단추가 전부 끌러지자 그녀는 벌레가 허물을 벗듯 가운을 허리 쪽으로
스스르 미끄러뜨려 벗어 던지고, 알몸이 되었다. 가운 속에 그녀는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몸에 붙어 있는 것은 나비 모양의 머리핀뿐이었다. 가운을 벗어던진 그녀는 마루에 무릎을
댄 채로 나를 보고 있었다. 부드러운 달빛에 비쳐진 그녀의 알몸은 갓 태어난 아기의 새로운
육체처럼 윤기있고 애처로웠다.(「노르웨이 숲」 227쪽)
나는 발가벗었어요. 흐흠. 왜 또 발가벗는 그런 짓을 했느냐고 묻지 마세요. 왜 그랬는지는 나도
잘 모르니까요. 그러니까 잠자코 다음 얘길 들어 주세요. 어쨋든 나는 모조리 홀랑 벗어던지고
침대에서 나왔어요. 그러고 나서 하얀 달빛이 고여 있는 방바닥에 무릎을 꿇었어요. 방안은
난방이 꺼져서 썰렁했을 텐데도 전혀 춥게 느껴지지 않았죠.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 속에 뭔가
특별한 것이 들어 있어서 그것이 내 몸을 얇은 필름처럼 폭 감싸서 보호해주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태엽 감는 새」4권 231쪽)
세속과 격리된 채 각각 깊은 산 속의 요양원과 공장 기숙사에 머물고 있는이 두 여성은 남자 주인공의 시선이나 부름에 응답이라도 하듯이 옷을 벗는다. 나오코와 가사하라 메이가 달빛 속에 벌거벗고 꿇어앉은 장면은 제의를 집행하는 여성 샤먼의 모습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종교학자 엘리아데의 설명에 따르면 남성은 가면을 씀으로써 주술적 힘을 증강시키는 반면 여성의 힘은 제의적 벌거벗음을 통해 증폭된다). 달은 신화적으로 불과 연결된다. 위 인용에서 여성의 알몸을 감싸는 눈부신 달빛이 어두운 물로 화할 때 그녀들은 우물 저편 죽음의 세계로 하강한다. 주인공의 탐색은 이처럼 육체를 넘어선 육체, 바로 눈앞에 있는 듯하면서 동시에 아득히 먼 곳에 있는 여성을 찾아나서는 여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에우리디케를 구하고자 하는 오르페우스의 이러한 모험은 항상 좌절에 부딪치고 만다. 마지막 순간 그녀는 사라지고 그에겐 회한 어린 기억만이 남겨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루키의 글쓰기는 사라져가는 에우리티케의 얼굴을 복원하고자 하는안타까운 열망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오직 글쓰기만이 시간의 마모와 부식을 넘어 그 대상을 지금 이 자리로 소환할 수 있다. 그런 각도에서 보자면 "완벽한 문장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아, 완벽한 절망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야"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1쪽)라는 그의 데뷔작 첫문장은 얼마나 암시적인가. 글쓰기만이, 불완전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글쓰기만이 우리에게 남겨진 유일한 구원 가능성이다. 일상에서 신비를 발견해내고 사회적 존재에게 신화적 차원을 부여하는 하루키의 독특한 글쓰기는 바로 거기서 진정성을 획득한다.
그의 소설이 때로 댄디즘의 경박함과 오컬티즘의 황당함을 밀쳐버리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로 하여금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이도록 만드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하루키의 소설을 덮고 귀를 기울여 본다. 이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고 있지 않은가. 누군가가 누군가를 찾고 있지 않은가. "소리가 되지 않는 소리로. 말이 되지 않는 말로." (「태엽 감는 새」2권 324쪽)
◆ 텍스트로 사용된 번역본 소개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김난주 옮김, 열림원)
1973년의 핀볼 (김난주 옮김, 열림원)
양을 둘러싼 모험 (박은주 옮김, 모음사)
일각수의 꿈 (김난주 옮김, 모음사)
상실의 시대 (유유정 옮김, 문학사상사)
댄스 댄스 댄스 (유유정 옮김, 문학사상사)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김난주 옮김, 모음사)
태엽 감는 새 연대기 (윤성원 옮김, 문학사상사)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 걸작선 (유유정 옮김, 문학사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