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를 소유하면 명예를 얻는다, 부는 세인들의 선망과 부러움을 사는 명예의 표시이기 때문이다. 부의 소유는 민중의 존경을 받는 근거가 되자마자 우리가 자존심이라고 부르는 자만심의 필수조건이 된다.
노동에 불참하는 것은 금력을 증명하는 관습적 증거이고 바로 그 덕분에 사회적 신분을 과시하는 관습적 징표이기도 하다 금력의 가치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여가에 대한 훨씬 더 강력한 강조로 이어진다.
"어떤 표시에 대한 표시는 그것을 표시하는 사물 자체를 표시한다. "
부가 우리 사회에 어떤 의미를 끼치는지에 대한 문장이다. 마지막 문장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구문을 사용하였는데 베블런은 이 구문을 부가 능력이나 월등함을 드러내는 표시라고 할 때 부를 표시하는 것들 자체가 월등하다는 말로 사용한다.
시사를 꽤나 관심있게 들여다 보시는 분들이라면 베블런 효과에 대해서 한 번씩 들어보셨으리라 생각한다. 가격이 오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의 부와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아름다우면서도 비싼 가치를 지니고 이는 물건에 과도한 소비를 하는 행위를 사회학자 베블런의 이름을 딴 '베블런 효과'라고 부른다. 학교 교과서나 고등학교 시험에도 출제된 적이 있을 정도로 영향력이 큰 효과이다. 그리고 이러한 '베블런 효과'를 처음으로 언급한 책이 바로 소스타인 베블런의 <유한계급론>이라고 할 수 있다.
<유한계급론>의 영어 원문판의 제목은 <The Theory of The Leisure Class>이다. 여기서 The Leisure Class는 '유한계급'은 숨가쁘게 쉴 틈 없이 무한하게 일을 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무한계급'에 비하여 여유롭게 시간을 가지며 여가를 보낼 수 있을 정도의 압도적인 부를 가진 사람들을 의미한다. 소스타인 베블런에 의하면 '유한계급', 즉 압도적인 부를 통하여 자신만의 여가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자들은 "비천한 노동"을 면제받고 멀리하며, 자신의 부와 권력을 드러내기 위하여 "과시적 소비", 즉 타인에게 보이기 위한 소비를 하하며 품위와 예절이라는 것을 통하여 많은 사람에게 우아함과 고결함을 내보이며 존경받기를 원한다.
가치 있는 재화들을 과시적으로 소비하는 것은 유한계급 남성이 명성을 얻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그가 부를 축적하면 할수록 그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자신의 부유함을 충분히 과시할 수 없게 된다. 그에 따라 값비싼 선물을 제공하거나 화려한 축제나 연회를 열어 친구들이나 경쟁자들의 호응을 이끌어낸다.
현대의 화려한 축제와 연회가 생긴 이유를 "과시적 소비"를 통하여 설명하고 있는 구절이다.
타인에게 존경받기 위해 품위와 예절을 지킴과 동시에, 남자는 모든 사람들이 선망하는 여자를 차지하려 하고, 이와 같은 현상을 통하여 여성이 지니고 있는 아니무스(animus,사전적 의미로는 여성의 남성지향성이라고 불릴 수 있겠으나 이 책에서 말하는 본래의 뜻을 너무나 제한시켜 직접 책을 읽어보길 권한다.)를 설명해내고 있다. 또한 체면유지를 위한 사교, 드라이브, 클럽활동, 바느질 봉사활동 등 갖가지 사회적 역할로 이루어진 과시적 여가를 통하여 자신들만의 온갖 규범들을 만들어내며 스스로가 넌더리는 내면서도 그것을 지키려 든다. 그리고 이를 통해 다수의 사람들을 자신들의 아래로 두려고 하는 선전 수단으로 활용한다.
소스타인 베블런은 이와 같은 "과시적 소비" 현상이 전 계급에 뿌리내리며 퍼져 있다고 설명하였으며, 실제로 등장한 '전리품 가정(trophy homes)', '전리품 아내(trophy wives)'를 비롯하여 시골과 도시의 차이, 신체 보호가 아닌 보여지기에만 집중하는 의복, 취미생활, 역탈 문화로부터 일상적인 여가활동의 최고의 형태로 전승된 명예로운 활동이 된 스포츠, 금력의 계층화에 영향을 받는 종교 의례, 금력을 지닌 자들의 교육관여와 대학교의 거창한 연출의 의례 혹은 베레모 의식 등의 예법과 관행 등을 통하여 금력과시의 또다른 장이 되버린 교육활동 등 수많은 허례의식들을 동시다발적으로 "과시적 소비"를 통해 설명해내고 있다.
유행이란 본질적인 추악함을 끝없이 반복적으로 재생하는
피상적인 변화의 연속에 불과하다.
-소스타인 베블런으 의복을 통하여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유행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단순한 나태나 게으름이 아닌 이러한 활동적이고 과시적인 소비들과 활동들은 상위층 뿐만 아니라 중산층, 혹은 그 밑의 계급까지도 영향을 끼치게 되며 자신의 평판을 유지하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 고통을 겪지 않기 위하여 외견상으로라도 그렇듯 공인된 규범에 맞추어 생활하기 위하여 안간힘을 쓰며 온 힘을 다하게 된다.
인간은 태초부터 대지에서 자라나는 모든 것들을 소비하기 위하여 태어났다고 한다. 소스타인 베블런은 인간의 기본적인 소비가 아닌 인간의 욕심을 채우고 자만심을 높이기 위한 소비를 이 책을 통하여 집중적으로 설명해냈다. 인간은 합리적인 생산만을 위해 존재하고 경쟁체계는 무조건적으로 경제를 진보시킨다고 생각하는 그런 논리를 정면적으로 반박한 그는 이 세상의 한 획을 그은 사회학자라고 불리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고대에서부터 비롯된 목적에 대한 집요함을 그대로 전승받은 우리들은 이 책을 통해 각자의 삶을 한 번씩 되돌아볼 기회를 가져볼 수 있을 것이다.
과시적 소비의 진화과정 전체를 돌아볼 때 재화든 용역이든 인간의 생명력이든 어느 것을 과시적으로 소비하더라도 그 소비가 명성을 높이기 위한 사치품을 소비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명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낭비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가장 단조롭고 시시한 체면치레의 기준에 따른 비교를 제외한 어떤 비교도 그들에게 맞는 소비 기준을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다.
도덕적 능력, 육체적 능력, 지적 능력 혹은 심미정 능력같은 다각적인 비교와 얽키고설키곤 하는 재력에 대한 비교는 그 변별력을 거의 상실해가고 있다. 이런 비교들은 특히 현재 다양하게 표출되고 있는 지적 심미적 능력이나 그 숙련도의 등급을 판단하는 일반적인 기준을 생산해내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본질적으로는 오로지 재력의 격차에 비롯된 차이를 번번이 심미적, 혹은 지적 능력의 차이로 해석하게 된다.
그 어떠한 비교 기준도 재력이라는 비교 기준을 대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베블런은 말하고 있다. 우리 역시도 재력이라는 차이를 심미적, 지적 차이이라고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고 있을 때가 있지 않을까?
"삶의 의미를 망각한 채 치욕스럽게 생명을 부지하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큰 죄악이라는 것을 명심할지니" 라는 말이 이 책에서 인용한 로마 유베날리스의 <풍자시>에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삶을 살아가야 가치 있는 삶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우리들의 삶에 있어서 재력은 얼마나 큰 영향를 지니고 있는 것인지 새삼스레 다시 떠올리게 된다. 본인 역시 자신이 정말로 하고 싶고 정말로 바라는 것이 아닌 타인의 시선에 맞추어 자신의 평판을 유지하고자 과시적 소비와 과시적 여가를 하며 견디는 삶을 산 경험이 있지 않았는가 하며 자신을 되돌아보고 성찰하게 된다.
그러나 무한계급이 유한계급을 동경하고 그들과 같은 삶을 추구하는 것이 마냥 행복하기만 할까?
어쩌면 유한계급을 동경하고 동화되고자 하는 그들은 자기가 없는 자들이다. 그들은 세월의 급류에 휩쓸려 가도 저항하지 않는다. 나라가 침범당하여 굴욕적인 삶을 살아도 그들은 또 다른 나라에 성원으로서 사는 것이 나쁘거나 악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들이 하ㅡ는 행위는 배신도 변절도 아니다. 다만 자신도 유한계급을 향해 동화될 기회가 가속화 된것으로 볼 뿐이다.
식민지 35년 생활도 별다르게 보지 않는다. 유한계급으로 사는 내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들과 달리 유한계급을 포기하면서까지 민족의 독립을 위해 자본을 쓰고 무한계급으로서 목숨걸고 저항하는가? 성경 갈라디아서 5장 1절에서 근거를 찾는다. "그리스도께서 자유를 주셨으니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애를 메지 알라." 유한계급을 지향하는 무한계급은 자유인의 길을 저버릴 수 있다.
이순신, 안중근, 김구, 유관순, 장준하, 윤동주 같은 이들은 겨레와 민족을 저버리지 않고 굳건히 서서 독립을 위해 자신을 던진다.
그 길이야말로 자신을 찾는 길이며,양심을 지키는 길이며, 바르게 사는 길이라 믿기 때문이다. si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