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수교 이후의 과거 10년은 중국 내 한국 교민, 유학생, 심지어는 재중동포들에게까지 생활에 엄청난 변화를 몰고 왔다. 공산국가로만 알았던 중국이 한국의 세번째 무역상대국으로 부상하면서 이에 따른 양국간 인적ㆍ물적 교류는 앞으로 어디까지 팽창할지 점치기조차 어려울 정도이다.
교민들이 집단 거주지가 중국 곳곳에 형성되고 한국인만을 상대로 하는업종이 성행할 만큼 중국은 한국에게 없어서는 안될 가깝고도 중요한 국가가 됐다.
베이징(北京)시 동북쪽 4환로와 5환로 사이 신흥 아파트 단지인 왕징신청(望京新城)은 대표적인 코리아타운이다. 아파트 단지로는 세계 최대 규모라는 왕징신청의 주민은 4,000여 가구. 이중 700여 가구가 한국인들이다.
인근 화지아디(花家地), 따스양(大西洋) 단지의 한국인까지 포함하면 2만여 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곳에 한국인이 집단 거주하게 된 것은 1992년 한중수교 이후 한국 본사에서 파견된 주재원 등이 대거 이주하면서부터다. 여기에 중국 유학붐까지겹쳐 ‘기러기 아빠’ 는 한국에 남겨놓고 자녀들만 데리고 오는 어머니들이 이 아파트 단지로 몰려들어 ‘과부촌’ 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코리아타운의 중심지답게 단지 내 낙원상가는 한국인을 상대로 한 업소일색이다. 한국인에게 자장면을 파는 중국음식점은 물론, 된장 고추장 단무지 김밥 오뎅 미숫가루 등 한국 음식을 파는 식품점이 즐비하다.
‘참새 방앗간’ ‘이모네 반찬전문점’ ‘땅끝마을’ ‘고향산천’등 상호를 아예 한국말로 한 점포가 있는가 하면 한국인들만을 상대로 한부동산 중개소도 30여 개에 이를 정도로 성업 중이다. 3년 전 이곳에 입주한 이모씨(38)는 “여기가 중국땅이라는 생각이 안 든다” 며 “한국 물건을 못 구해 불편했던 적이 없다” 고 말했다.
최근에는 한 대형상가 1~3층 전부에 한국인 대상 업소 및 위락시설이 들어서고 간판도 ‘한국성’ 이란 한국말이 내걸리자 중국 당국이 영업을 불허해 ‘왕징청(望京城)’ 으로 바꿔 다는 일까지 벌어졌다.
교민들의 하루 일과도 한국에서의 생활과 별 다를 바 없다. 3년 전 베이징 지사로 발령 난 남편을 따라 초등학생 딸과 중학생 아들을 데리고 온오모씨(39)는 전화만 걸면 배달되는 한국 비디오테이프를 보며 시간가는줄 모른다. 오씨가 쓰던 한국제 화장품은 물론, 없는 한국 물건이 없을 정도여서 이곳이 중국인지 한국인지 착각할 정도다. 조선족 여성을 가정부로들이면서 생활은 오히려 더 풍요로워졌다.
피부로 느끼는 변화는 유학생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수교 전과 수교 초창기 유학생들의 중국 생활은 밥값내기 농구나 축구, 몇 개월이 지나도 여전히 똑같은 노래 뿐인 구식 노래방 정도가 여가 활동의 전부였다.
그러나 유학생이 수 천 명으로 늘고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생활 패턴은 완전히 달라졌다. 온라인을 통해 농구 축구 야구 등 아마추어 스포츠팀이 결성돼 선수만 300여 명이 넘는 대규모 대회가 치러지는가 하면 곳곳에 들어선 PC방은 유학생들의 새로운 문화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7년 전 유학 온 송병욱(23ㆍ베이징대 4년)씨는 “베이징에 첫 발을 내디딘 그날의 삭막했던 풍경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며 “그러나 지금은 모든것이 달라져 또 한번 충격을 느끼고 있다” 고 말했다.
재중동포들에게는 한중수교가 전통적 공동체를 허무는 요인으로 작용하고있다. 옌볜(延邊) 자치주를 중심으로 지린(吉林)성과 헤이룽장(黑龍江)성, 랴오닝(遼寧)성 등 중국 동북 3성에 모여 살던 동포들은대도시로 대거이동하고 있다. 한국 기업에서 통역을 맡거나 한국인이 운영하는 공장에서일하는 동포들이 급증하면서부터다.
이들은 한국상사 주재원이 거주하는 지역에 몰려 살면서 한국 기업과 일종의 공생관계를 이루고 있다. 한중수교 이후 조선족의 대도시 유입 규모는 베이징 7만~10만 명, 산둥(山東)반도의 칭다오(靑島) 4만~5만명, 상하이(上海)ㆍ광저우(廣州) 2만~3만 명 등 30여만 명에 이른다.
전체 200만 재중동포 중 15% 정도가 고향을 떠난 셈이다. 베이징 동쪽 외곽인 차오양(朝陽)구에는 ‘고려촌’ 으로 불리는 동포타운도 생겨났다.
그러나 140년 간 이어졌던 재중동포 공동체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우려의목소리가 적지 않다.
1950년대 초 75% 이상이 재중동포였던 옌지(延吉)는 38만 전체 인구 중동포가 38%로 줄어들었다. 옌볜 자치주의 경우 280만 명 중 30%도 안 되는83만 명으로, 동북 3성에 산재한 4,000여 개 동포 마을은 10년 새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중국 공산당 지린 옌볜 자치주위원회는 재중동포 인구가줄어들자 과거 이들이 맡고 있던 당서기를 한족으로 바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