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晉)문공(文公)의 망명생활
그리스 신화에서
오디세우스는 호메로스가 쓴 [오디세이]의
주인공이다.
그는 트로이 전쟁에 참가하여
승리를 거두었지만 귀로에서 곤경에 빠져서 20년 만에
고향 집으로 돌아온다.
이 때문에
서양 문화에서 오디세우스는 일찍부터
모험의 대표적인 인물로 간주되었고 ‘오디세이(odyssey)’는 작품의
이름이면서 그 자체로 방랑, 모험을 뜻하게 된 것이다.
중국의 경우
오디세우스에 비견할 인물을 꼽는다면
춘추시대 오패(五覇),
즉 다섯 명의
패자 중의 하나로 이름을 떨쳤던 진(晉)나라
문공(文公, 재위 636~628 BC)이다.
최종적으로
오패가 되기 전까지 진 문공은 실로 죽음의
위기를 수 차례 극복해야 했다.
그는 43세에
제후 계승을 둘러싼 갈등에 휩싸여 원치 않는
피난을 떠나서
19년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62세에 이르러
비로소 제후가 되었다.
도대체
진 문공은 무슨 때문에 19년의 고난을
겪어야 했던 것일까?
진 헌공
(憲公)에게는 여러 명의 부인과
자식이 있었다.
맏이이자
태자로는 제강(齊姜) 소생의 신생(申生)
이 있었다.
그 뒤에도
이민족을 정복하고서 부인을 맞이하여
중이(重耳), 이오(夷吾)가 있었다.
헌공이 나이 들어서
여희(驪姬)를 맞이하여 해제(奚齊)와 탁자(卓子)가 태어나면서
진나라 공실에 어두운 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헌공은
여희가 아니면 잠도 편히 들 수 없고
식사도 달게 먹지 못했다.
여희는
헌공 사후에 자신의 신변 안정을 위해서
자신의 자식을 제후로 만들려고 했다.
여희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아들이 제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음모를 꾸몄다.
먼저 태자 신생을
왕궁에서 떠나도록 하기 위해 군 지휘권을
맡겨서 전쟁을 이끌도록 했다.
또 신생이 죽은 어머니
제사를 지내고 제사 고기를 헌공에게 보내자 그 고기에 독을
묻혀서 헌공을 시해하려는 반역을 저지른 것으로 꾸몄다.
이 일로
신생은 목을 매달아서 자살했다.
이렇게 사건이
마무리될 줄 알았지만 불똥이
중이와 이오에게 튀었다.
신생이
일을 꾸몄으므로두 사람이 모를
리가 없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신생 자살 이후 제후 계승의 강력한 경쟁자였지만
졸지에 반역 공모자가 되었다.
이로써 중이와 이오는
처음에 진나라의 자기 근거지로 도망을 갔다가 자신들을 죽이러
온 자객을 피해서 다른 나라로 망명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훗날
헌공이 죽자 이오가 혜공(惠公)이 되고
중이가 문공이 되었다.
19년의 모험, 공자에서 제후가 되다
진문공(중이)는 19년의 모험 중에 살해, 기아, 안주 등 다양한 위기를 넘기고 마침내 조국으로 돌아와 제후가 되었다. ⓒ신소언
여희가
음모를 벌였을 때 중이는 처음에 잠시 피난하면
상황이 좋아지리라 생각했다.
그는 진나라에서
자신의 신변을 보호할 만한 곳으로
피신을 떠났다.
분별력을 잃은
헌공은 여희의 말을 듣고서 두 아들에게
불같이 성을 내며 자객을 보냈다.
자객이 갑작스레
들이닥치자 중이는 담을 넘어서 달아났지만 자객이
휘두른 칼에 옷소매를 베이고 말았다.
중이는
담을 넘은 뒤에 진(晉)나라의 북쪽에 있는
어머니의 고향 적(狄)나라로 갔다.
적나라는
자신의 조국인 진나라와 가까워서
왕래하기 편했기 때문이다.
그는
잠깐 가 있으려고 했던 적에서
12년을 보냈다.
그 사이에
이오가 진(秦)나라2) 의 군사 원조를
빌어서 제후가 되었다.
이오는
제후가 되었지만 중이가 언제 자신에게
도전할지 몰라 겁을 냈다.
결국 그는
킬러를 보내서 중이를
죽이고자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중이는 다시 정처 없는 방랑을
떠나야 했다.
적나라를
떠나려고 하니 그곳에서 결혼한
부인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별을 앞두고 눈물을 흘리기보다
웃음을 잃지 않은 채 여유를 부렸다.
“25년을
기다려도 내가 오지 않으면 그때
미련 없이 재혼하시오!”
“25년을 기다리면
제 무덤에서 자란 측백나무가 크게
자랄 것입니다.
말은
이래도 나는 변치 않고 당신을
기다릴 겁니다.”
이제
중이는 피난이 아닌 진정한 모험을
떠나게 되었다.
앞일은
온통 불확실한데다 나이가 들어가서
불안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은
진을 떠날 때부터 자신을 믿고 따르는 다섯 명의
현사(賢士)가 있다는 것이었다.
중이는
당시 국제 사회의 경찰 노릇을 하는
제나라로 가기로 했다.
중이 일행은
제나라로 가는 도중에 위(衛)나라를
지나게 되었다.
위나라
문공(文公)은 중이 일행을
푸대접했다.
또 오록(五鹿,
지금의 하남성 복양 동쪽)을 지나가다 너무 굶주린
탓에 농부에게 밥을 구걸했다.
농부는
밥 대신 흙덩이를 건네주었다.
중이는
크게 화가 나서 농부에게 매질을
하려고 했다.
자범(子犯)이
흥분한 중이를 만류하며 흙덩어리를 준 것은 땅덩어리를
가지라는 하늘의 은총으로 풀이했다.
이에 중이는
농부에게 절을 하며 흙덩어리를 받았다.
우여곡절 끝에
제나라에 도착한 중이는 환공을 만나서
환대를 받았다.
이는 현재의
영웅과 미래의 영웅이 조우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중이가
제나라에 온 지 2년 만에 환공이 죽고, 내분으로
환공의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
이렇게 국정이
불안한 상황이면 다른 나라로 옮겨 갈 법한데
중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중이는
5년간 자신이 모험에 나서야 할 영웅이라는
점을 자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사람이
편안하게 살다 보면 누가 다른 것을
하려고 하겠소!
나는 여기서
죽었으면 죽었지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을 거요.”
(人生安樂, 孰知其他? 必死於此, 不能去.)
“당신은 한 나라의
공자로서 상황이 곤란하여 이곳으로 왔고, 여러 현사들은
당신에게 자신들의 운명을 걸고 있습니다.
당신은
하루라도 빨리 제나라로 돌아서 고생한
조력자에게 보답하지 않고
여자의 치마폭에
푹 빠져 있으니 제가 당신 때문에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길을 찾지 않으면 언제 공을 세우겠습니까?”
제나라에서 만난
부인과 조력자는 중이에게 술을 먹여서 취하게 한 다음
수레에 태워서 제나라를 떠났다.
술이 깬 뒤에
사태를 파악한 중이는 불같이 화를 내며
조력자를 죽이려고 했다.
그러자 조력자는
“자신을 죽여서 중이가 바라는 것을 이룬다면
죽여 달라!”고 요구했다.
이때 중이는 비로소
자신의 운명을 깨닫고 진으로 돌아갈 뜻을
세우게 되었다.
(남송 이당(李唐)은 중이의 귀국을
<진문공복국도(晉文公復國圖)>으로 그렸다.)
제에서 만난 부인과
중이를 10년 넘게 따라다닌 조력자들은 현실에 안주하려는 중이가
자신의 운명을 자각하여 영웅으로 태어나기를 고대했다.
두보는
‘전출새(前出塞)’라는 시에서 그들의 마음을
가장 잘 나타냈다.
“영웅이
세상에 뜻을 두었다면 어찌 모험을
사양하겠는가?”
(丈夫四方志, 安可辭困窮?)
하지만
중이의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중이 일행은
자신들의 힘만으로 진나라로 돌아가 제후가 될
군사적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꿈을 도와줄 다른 원군을
찾아 나섰다.
제나라에서
조(曹)나라로 갔지만 공공(共公)은 중이를
푸대접하고 모욕을 주었다.
중이는 당시
병협(騈脇)이라 불리는 특이한 신체로
소문이 자자했다.
보통 사람은
겨드랑이에 갈비뼈 자국이 보이지만 중이는
통뼈라서 그것이 없었다
.
공공은
중이가 목욕할 때 알몸을 들여다보며
병협을 확인하려고 했다.
중이는
조나라에서 정(鄭)나라를 거쳐
초(楚)나라로 갔다.
진(晉)나라와 초나라는
대대로 남북의 세력을 대표하는 적대적
대립자였다.
초나라의 성왕(成王)은
불리하고 위험한 상황에서도 중이가 위엄을 잃지 않고 뛰어난 인재의
도움을 받으므로 하늘의 가호를 받는다고 생각했다.
초나라에 머무르던 중에
진나라의 혜공이 죽고 그의 아들이 제후가 되자
중이는 귀국을 결심했다.
이에 조국과 가까운
진(秦)나라로 건너가 군사적 원조를 이끌어내서 진(晉)
나라로 돌아가서 제후가 되었다.
그때 중이의
나이가 이미 62세였다.
43세에
망명을 떠난 지 실로 19년
만의 일이었다.
장년의 중이가
노년이 되어서 문공이 된 것이다. 문공은 모험의
과정에서 배운 인내와 절제, 지혜와 결단,
여유와 관용을
바탕으로 9년 남짓한 재위 기간에 진나라를
패자(霸者)의 나라로 만들어냈다.
이는 중이가
19년간의 모험으로 성장하고 성숙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제 즐기는 모험만큼이나 당한 모험을 마주할
용기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출처] 진(晉)문공(文公)의 망명생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