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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여진족의 존재를 몰랐다.
여진족은 예로부터 숙신, 읍루, 말갈, 물길로 불리는 강력한 세력이었는데 이를 간과한 일본은 두만강을 건너 여진족과 싸우다 크게 패했다.
셋째, 가장 치명적인 실수!
그들은 전쟁의 신 이순신(李舜臣)의 존재를 몰랐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 일까?
강한 군사력? 빠른 정보력?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것은 물자 보급이다.
그래서 일본의 수군은 전라도 앞바다를 지나 한양으로 물자를 보급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순신(李舜臣)이 그 물자 보급로를 모조리 끊어 놓았기 때문이다.
이순신(李舜臣)은 1545년 4월 28일 한양의 건천동(서울 중구 인현동)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한양에서 지냈다.
이순신(李舜臣)의 선조들이 대를 이어 살아오던 고향은 충청도 아산이었다.
이순신(李舜臣)의 할아버지 이백록은 조정에서 벼슬을 하던 중 '기묘사화' 라는 정치적 사건에 휘말려 벼슬에서 쫓겨났다.
이 때문에 이순신의 아버지 이정은 벼슬길에 뜻을 두지 않았고, 어머니인 변씨가 바느질 품을 팔아 어려운 살림살이를 겨우 꾸려 나갔다.
이순신(李舜臣)은 가난한 선비 집안의 4형제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순신의 아버지는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훌륭한 왕인 복희씨, 요, 순, 우임금의 이름을 따와서 아들들의 이름을 희신, 요신, 순신, 우신이라고 지었다.
장차 자신의 아들들이 나라에 몸 바칠 훌륭한 인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이순신(李舜臣)은 아버지의 바람대로 남달리 영특하고 용감한 아이로 자랐고 군사놀이를 특히 좋아했다.
어린시절에 이순신은 류성룡(柳成龍)과 특히 가깝게 지냈다.
류성룡(柳成龍)은 이순신 보다 세 살 위였지만 누구보다도 친했다.
고향이 안동이었던 류성룡은 어렸을 때 한양의 건천동으로 이사를 왔고, 두 사람의 우정은 어른이 되어서도 변하지 않았다.
뒷날 이순신(李舜臣)이 전라좌도 수군 절도사가 되도록 힘쓴 사람도 류성룡 이었고, 류성룡(柳成龍) 자신도 이순신의 일과 관련하여 여러 차례 벼슬자리에서 물러나야 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훈훈한 두 사람의 우정...보기 좋아~~)
21세에 보성 군수를 지낸 방진의 외동딸과 결혼한 이순신(李舜臣)은 1576년 32세가 되어 무과 시험에 급제하였으나, (무과 시험을 보다 말에서 떨어진 얘기 들어보셨쥬?) 제대로 된 벼슬자리 하나 얻지 못하다가 겨우 함경도 삼수에 있는 동구비보의 권관(종9품) 이라는 관직을 맡게 되었다.
류성룡(柳成龍)이 쓴 '징비록'에서는 "조정에서 공을 밀어주고 끌어 주는 이가 없어 과거에 급제한 지 10년이 지나도록 출세하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어느날~
동구비보에서 3년 임기를 마치고 1579년 훈련원의 봉사로 부임했을 때의 일이었다.
이순신(李舜臣)보다 높은 병조 정랑 서익(徐益)이 자신의 친척을 승진 시키기 위해 순신에게 서류를 꾸며 달라는 부탁을 했다.
하지만 성품이 대쪽 같았던 이순신(李舜臣)은 이를 단호히 거절했고, 이일로 순신은 충청도 병영으로 쫓겨났다.
다행히 충청도 병마절도사는 이순신
(李舜臣)을 신임하여 전라도 발포의 만호(종4품)라는 관직을 맡겼다.
1582년 봄, 이순신(李舜臣)에게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지난 날 자신의 부탁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이순신을 모함했던 '서익(徐益)'이 부임을 해 온 것이었다.
서익이 순신이 직무를 게을리했다며 모함을 하는 바람에 결국 이순신(李舜臣)은 또 쫓겨나게 되었다.
(이런~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더니 -ㅠ)
하지만 관직에서 쫓겨난 지 4개월만에 순신은 훈련원 봉사로 임명 되었고, 43세에 녹둔도에 둔전관으로 부임했다.
이순신(李舜臣)이 부임하던 해, 녹둔도에 풍년이 들었다.
이것을 안 여진족이 노략질을 하기 위해 쳐들어왔고, 순신은 장수들을 이끌고 출정했다.
그러나 여진족 군사들을 잡지는 못한채 잡혀 간 마을 사람들 60여 명을 구해냈다.
그런데 이게 화근(禍根)이었다.
여진족이 쳐들어 오기 전 순신은 북병사 이일(李鎰)에게 군사를 늘려 달라고 요청을 했으나 이일(李鎰)은 그의 요청을 무시했다.
그런데 여진족이 쳐들어오게되자 이일은 이순신(李舜臣)에게 잘못을 뒤집어 씌웠다.
(이순신, 그대를 모함 받는 대장으로 임명합니다!
이일 이놈~~~이런 🐕뼈다귀 같으니라구🤣)
그리하여 이순신(李舜臣)은 관직을 빼앗긴 채 싸움터에 나가는 백의 종군의 벌을 받아야 했고, 여진족과의 다시 싸운 전쟁에서 공을 세워 겨우 죄명을 벗을 수 있었다.
하여튼 관직과는 뒤지게 인연이 없는 이순신(李舜臣)이었다.
조일전쟁이 일어나자 1593년 8월 15일 그의 나이 49세!
류성룡(柳成龍)의 도움으로 삼도 수군 통제사로 부임한 이순신(李舜臣)은 일본 '요시라'의 거짓 계략에 넘어간 김응서와 권율의 보고에 의해 부산진으로 출정할 것을 선조로부터 명을 받았다.
하지만 이순신(李舜臣)은 왜군들이 미리 숨어 있다가 우리 수군을 칠 계략이라 생각하고 출정 명령을 어겼다.
이순신(李舜臣)의 화려한 활약이 탐탁지 않았던 선조(宣祖)는 기회는 이때다 싶어 순신을 한양으로 압송해 모진 고문을 가했다.
(영화 '명량'에서 인두로 지지는것 봤제? 내 손에 인두가 쥐어진다면 요걸 그냥 선조에게.. 콱!)
결국 조정에서는 이순신(李舜臣) 에게서 벼슬을 빼앗고, 대신 이순신과의 불화로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좌천되었던 원균이 삼도수군 통제사로 임명되었다.
조선의 수군이 강한줄만 알고 있었던 선조는 아뿔사!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죽고 도주한 12척을 뺀 134척이 전부 수장되자, 백의종군(白衣從軍)하고 있었던 이순신(李舜臣)을 삼도수군 통제사로 재 임명하며 이런 교서를 내렸다.
"지난날 그대를 백의종군케 해서 오늘 이런 패전의 욕됨을 입었으니 무슨 할말이 있으리오~ (....) 그대는 부디 충의를 굳건히 하여 다시 나라를 구해주시오."
교서는 조정의 사과문이기도 했다. 교서를 받은 그날 밤 이순신(李舜臣)은 바로 길을 떠난다.
칠천량 해전에서 겨우 남은 전선을 수습하고 조선 수군을 재건하는 강행군이 시작된 것이다.
🎓 다음은 명량대첩이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