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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계인의 그림 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화성인
추사(秋史)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에 얽힌 이야기
세한도<歲寒圖> (국보.180호) 1844년작
* 歲寒圖 설명
세한도는 秋史 金正喜 선생이 이조 헌종 9년 탄핵상소를 받아
제주도 대정(大靜)이라는 곳으로 유배 중
58세 되던 해에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추사라는 호 말고도 완당이라는 호로도 유명하다.
그밖에 수십 개에 달하는 호를 쓰기도 했지만 추사와 완당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호다.
완당 김정희는 판서를 지낸 유당 노경의 맏아들로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일찍이 아버지를 따라 연경을 왕래하며
최고의 중국통으로서 청조경학이난 학계문단에 밝아 청조 명류와도
친교가 많았던 당대 엘리트 지식인이었다.
24세에 소과에 합격하기 시작하여 종 2품 병조판서(오늘의 차관급)에까지 오르게 되고 동지부사로도 선발되게 된다.
조정에서도 그의 학문의 실력을 인정하고, 청조의 새풍조를 따르는 항상 앞서 가는 신지식인이었기 때문에 주위의 시샘이 따랐다.
그러다, 윤상도의 옥(죄로 처형을 받게 되는사건)에 관계되었다고하여 제주도로 귀양가게 된다.
이 때 완당의 나이 55세로 인생의 황혼길에 접어들어 제주도 귀양살이는
9년이나 되는 고통의 긴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당시의 제주도 유배 생활은 아무도 없는 섬에서 모든 것을 도와주는 이 없이 살아야 하는 큰 고통의 세월이었는데
그속에서 선비로서 낙이라면 오로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 뿐이었다.
완당의 처지가 벼슬이 떨어지고 9년에 이르는 유배 생활을 하게 되자
모든 주위의 인심은 바뀌었다.
사람들의 인심도 예전같지 않은 속에서도 완당의 제자 중 이상적이라는
제자는 스승을 잊지 않고 중국에 역관(지금의 통역관)으로 드나들며
스승을 생각해서 귀한 책을 구해 계속 유배지로 보냈다.
당시도 범죄자를 도와주면 도와준 사람도 크게 벌을 받게 되므로
사람들은 감히 엄두내기가 어려웠다 .
완당은 그런 위험을 무릎쓰고 계속해서 책을 보내 주는 제자가 너무 고마워 세한도를 그렸다.
그림의 크기는 세로 23.7센티에 가로109센티미터로 그림만은 별로 크지 않은 크기지만
여러사람의 발문(그림을 보고 느낀 감상이라든가 등 느낌을 쓴 글)이
붙어있어 세한도를 펼치면 10미터에 이른다.
(두루마리식)그림의 구도를 설명하면,
왼쪽엔 잣나무 두 그루와 그 옆으로 초라한 초막집과 꼿꼿이 서있는 소나무 두 그루를 그리고
오른쪽에 김정희 필치의 화제와 낙관이 찍혀있는 것이 전부이다.
단순하기도 한데다가 먹물이 묻은 붓을 꼭짜서 마른 붓질로
까실까실한 느낌이 드는 갈필을 많이 써서
황량한 느낌과 함께 메마르고 차가운 먹색이 어우러져 외롭고
초라한 유배 생활을 잘 나타내주고 있으며
고고한 문기를 강렬하게 발산하여 김정희 문인화의 높은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구도도 삼각구도를 잡아 단순한 작품 속에서도 안정성을 이루고
필력있는 필치로 글씨 하나, 낙관 한 점 찍는 것에 소홀함이 없는 작품이었다.
그림에 김정희 자신이 쓴 시제에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라고 쓰여있다.
이뜻은 "아주 추운 겨울이 되어서야 잣나무와 소나무의 푸르름을 알 수 있다"는 뜻으로
처지가 뒤바뀌어 주위의 인심이 변함을 말하기도 하고
자신의 힘든 유배 생활을 세한(추운겨울의 심한추위)에 비유하여
그런 속에서도 송백과 같은 변함없는 의지로
선비의 기상을 잃지 않겠다는 자신의 굳은 의지를 표현하고,
또한 곁들여 완당의 발문에 사람이 한 번 잘 살다 못살아 보면 주위에 인심을 알수 있는데
예전의 제자 이상적의 처세는 칭찬할게 없으나 (스승에게 제자가 잘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뜻)
"지금의 이상적의 처신은 어느 성인이라도 칭찬 할 것이다" 라고
제자 이상적의 스승에 대한 변치않는 의리에 고마움을 표현하였다.
완당은 아마도 당시의 어려움을 세한 속의 꼿꼿한 송백을 표현하면서 자신의 슬픔을 굳은 의지로 이겨나간 것 같다.
이 그림을 받는 이상적은 이듬 해에 중국 북경에 가게 되어 스승의 옛 친구인
오찬의 잔치에 초대 받아 간 자리에서
스승의 세한도를 내보였다.
이 때 함께 자리했던 청나라 문사 16인은 이 그림을 감상하고는
그 어려운 유배 생활 속에서 세한도에 표현한 김정희의 마음을 십분 헤아리고
세한도의 높은 품격과 사제 간의 깊은 정에 감격하여
저마다 이를 기리는 시문을 남겼다.
그 후, 이상적은 자신의 제자 매은 김병선에게 그림을 주게되고 그의 아들
소매 준학군이 쓰고 ?셈만? 보관했으나,
그림이 그려진지 70여년뒤 일제 강점기를 맞아 귀중한 보물과 서적을
온갖 수단을 다하여 탈취하니
이때 이 그림도 마침내 경성대학 교수였던 후지쯔까를 따라
동경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그 후,세계에서 전운이 가장 높은 1844년 서예가인 소전 손재형 선생이
어려움과 위험을 무릎쓰고 현해탄을 건너가
후지쯔까를 여러번 방문 사정하여 사재를 털어 세한도를
다시 고국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세한도가 다시 고국의 품으로 돌아오니 이를 보고 위대한 한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오세창이
세한도가 이역으로 전전한 내역과 그동안에 기록된 찬문의 내역을 자세히 적고
세한도를 찾게 된 기쁨을 시 한 수로 덧붙였다.
이어서 초대 정부 부통령 이시영과 정인보의 평가와 감회의 글과 서예가 손재형의 필치로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가 남겨져있다.
세한도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대상이 된 것은 작가의 농축된 예술적 기질과 고결한 선비의 정신에서 발로 되는
담박함과 지조와 기상, 그리고 사제지교의 아름다움이 이 시대의
교훈이 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또 하나 더욱 중요한 것은 청나라 유학자 16인의 발문이 있어 문화사적으로 중요한 자료가 되어 세한도의 가치를 더해 주고 있다.
지금은 개인 소장되어 있으며 국보 180호로 지정되어 있다.
* 추가 설명
1. 그림이 그려진 배경
추사가 제주도에 유배되자 그 간 그와 왕래하던 사람들 중 거의 모두는
발길을 끊게 되었으나 그의 제자 이상적<李尙迪.
호는 우선 藕船. 당시 온양군수>만은 꾸준히 스승을 위하여 책을 구해
보내는 등 정성을 다하였다.
추사의 유배 5년 째인 1844년 추사는 우선<藕船>을 위하여 이 그림을 그렸는데
이 때 그의 나이 59세였다.
2.李尙迪<1804- 1865>
호 藕船 추사의 역관출신 제자로서 북경에 여러 차례 왕래하였으며
시문에 능하여 중국의 문사들과 교류가 깊었다.
저서에 은송당집<恩誦堂集>과 해린척소<海隣尺素>가 있다.
3.화풍<畵風>
세한도는 그림이기 이전에 그의 암울하고 쓸쓸한 유배 생활을 잘 보여주고 있는
하나의 심경사진<心境寫眞>이다.
자신의 말할 수 없이 처절한 심정은 볼품없는 조그마한 집 한채로서 표현하였고
제자의 고마운 행동은 지조의 상징인 우뚝한 소나무로 표현하였으며
'너와 나' 둘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무관심은 소나무와 집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겨울 배경으로 표현하였다.
표현주의적 기법이며 필의가 간결하고 풍격이 높아 종래의 남종화<南宗畵>를
일신하고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신 남종문인
이 후 과천(果川) 관악산 및 선친의 묘역에서 수도하며 여생을 보냈다.
그는 경학· 음운학· 천산학· 지리학 등에도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으며,
불교학에 조예가 깊었다.
이와 같이 그의 학문은 여러 방면에 걸쳐 두루 통하였기 때문에 청나라의 거유들이
그를 가리켜 <해동제일통유(海東祭日通儒)>라고 칭찬하였다.
흥선 대원군 이하응에게는 추사가 외8촌 형님이었고 청년 대원군은 추사로부터
난을 치는 수업을 받은 사실은 잘 알려진 일이다.
또한 예술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겨 시· 서· 화 일치사상에 입각한
고답적인 이념미(理念美)를 구현하려 하였다.
학문에서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장하였고,
서예에서는 독특한 추사체(秋史體)를 대성시켰으며,
특히 예서· 행서에 새 경지를 이룩하였다.
그는 함흥 황초령(黃草嶺)에 있는 신라 진흥왕 순수비(巡狩碑)를 고석(考釋)하고,
1816년에 김경연(金敬淵)과 북한산 비봉에 있는 석비가 조선 건국시
무학대사가 세운 것이 아니라 진흥왕 순수비이며,
‘진흥’이란 칭호도 왕의 생전에 사용한 것임을 밝혀
그 전까지의 잘못을 시정하였다.
그의 서체는 옹방강의 <한송불분론(漢宋不分論)>에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초기에는 명나라 동기창(董其昌)을, 후기에는 송나라 소식(蘇軾)과
당나라의 구양순(歐陽詢)의 서풍(書風)을 본받았다.
그는 역대 명필을 연구하고 그 장점을 모아서 독특한 추사체(秋史體)를 완성하였다.
이 밖에 전각(篆刻)은 청나라와 어깨를 겨누었는데,
별호만큼이나 전각을 많이 하여 서화의 낙관에 사용하였고
추사체가 확립되어 감에 따라 독특한 추사각풍(秋史刻風)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그는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를 풍기는 높은 경지의 문인화만을
높게 평가하고, 당시 화단에 만연해 있던 진경산수화나
풍속화 등을 낮게 평가하였다.
이로써 모처럼 일어난 민족적인 화풍의 세가 꺾이고 다시금 전통적인
문인화풍으로 되돌아가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우리 나라 역사상 예명(藝名) 을 남긴 사람들이 많지만 김정희만큼
그 이름이 입에 오르내린 경우도 드물다.
따라서 그에 대한 연구도 학문 예술의 각 분야 별로 국내외
여러 학자들 사이에서 일찍부터 이루어져왔다.
그 결과 그는 단순한 예술가 학자가 아니라 시대의 전환기를 산 신지식의 기수로서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받아들여
조선왕조의 구문화제체로부터 신문화의 전개를
가능하게 한 선각자로 평가된다.
《실사구시설》을 저술하여 근거 없는 지식이나 선입견으로
학문을 하여서는 안됨을 주장하였으며,
종교에 대한 관심도 많아 베이징[北京]으로부터의 귀국길에는
불경 400여 권과 불상 등을 가져와서 마곡사(麻谷寺)에
기증하기도 하였다.
70세에는 과천 관악산 기슭에 있는 선고묘(先考墓) 옆에 가옥을 지어
수도에 힘쓰고 이듬해에 광주(廣州) 봉은사(奉恩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다음
귀가하여 71세를 일기로 1856년 10월 10일 작고하였다.
문집에 《완당집(阮堂集)》, 저서에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
《완당척독(阮堂尺牘)》 《담연제집(潭연濟集)》등이 있고,
작품에 《묵죽도(墨竹圖)》 《묵란도(墨蘭圖)》와 국보 제180호로 지정된
《세한도(歲寒圖)》등이 있다.
* 세한도 자제문(自題文) 문장 풀이
去年以晩學大雲二書寄來 今年又以藕耕文編寄來 此皆非世之上有
購之千萬里之遠 積有年而得之 非一時之事也
지난 해에 두 가지 晩學, 大雲 책을 부쳐왔고, 금년에는 耕文編이라는 책을 부쳐왔는데,
이는 모두 세상에 흔히 있는 일이 아니요. 머나먼 천리 밖에서 구한 것이며,
여러 해를 거쳐 얻은 것이요, 일시적인 일이 아니다.
且世之滔滔 惟權利之是趨 爲之費心費力如此 而不以歸之權利
乃歸之海外蕉萃枯稿之人 如世之趨權利者
더구나, 세상의 도도한 물결은 오직 권세와 이익의 옳음만을 따르는데,
그것을 위하여 마음을 소비하고 힘을 소비함이 이와 같아,
권력있는 사람에게 주지 않고, 바다 밖의 한 초췌하고 메마른 사람에게 주었으니,
세상 사람들이 권세와 이익을 따르는 것과 같구나.
<세상 사람이 권력자를 추구하듯 나를 따라주는구나>
太史公云 以權利合者 權利盡以交疎 君亦世之滔滔中一人
其有超然自拔於滔滔 權利之外 不以權利視我耶 太史公之言非耶
태사공이 이르기를, 권세와 이익으로 합한 자는 권세와 이익이 다하면
교분이 성글어진다고 하였는데,
그대 또한 세상의 물결속의 한 사람으로 초연히 스스로 도도한 물결에서
(몸을) 빼어 권세와 이익의 밖에 있으니
나를 보기를 권세와 이익으로써 하지 않는 것인가? 태사공의 말이 그른 것인가?
孔子曰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 松栢是貫四時而不凋者
歲寒以前一松栢也 歲寒以後一松栢也 聖人特稱之於歲寒之後
今君之於我 由前而無加焉 由後而無損焉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날이 차가워진 이후라야 소나무와 잣나무<또는 측백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안다' 고 하였다.
松栢은 사철을 통하여 시들지 않는 것으로서, 세한 이전에도 하나의 송백이요.
세한 이후에도 하나의 송백이다.
성인이 특히 세한의 후에 그 것을 칭찬하였는데, 지금 그대는 전이라고 더함이 없고,
후라고 덜함이 없구나.
然由前之君 無可稱 由後之君 亦可見稱於聖人也耶
聖人之特稱 非徒爲後凋之貞操勁節而已 亦有所感發於歲寒之時者也
그러나 이전의 그대는 칭찬할 만한 것이 없거니와, 이후의 그대는 또한 성인에게
칭찬받을 만한 것 아닌가?
성인이 특별히 칭찬한 것은 다만 늦게 시드는 정조와 경절을 위한 것뿐만이 아니고
또한 세한의 시절에 느끼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烏乎 西京淳厚之世 以汲鄭之賢 賓客與之盛衰 如下비<丕+邑>榜門
迫切之極矣 悲夫 阮堂老人書
아! 西漢의 순박한 세상에 급암, 정당시 같은 어진 이에게도 빈객이 시세와 더불어
성하고 쇠하곤 하였으며,
하비의 방문같은 것은 박절이 극에 달하였구나.
슬프다! 완당노인 쓰다...
<참고 : 추사고택에서 배포하는 자료를 참고로 한, 마지막 구문의 풀이문>
아! 서한의 순박한 세상에 급암,정당시 같은 어진 이에게도
빈객이 시세와 더불어 성하고 쇠하곤 하였고...
이는 하규(下규)의 적공(翟公)이 대문에 방을 붙여 '一死一生에 사귀는 정을 알겠고,
一貧一富에 사귀는 모습을 알겠으며,
一貴一賤ㅡ으로도 곧 사귀는 정을 알 수 있겠노라' 고 하였던 고사에서도 같은 것이었으니,
이렇듯 세상 인심의 절박함이 극에 도달한 것은 참 슬픈 일이로구나.라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