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의 삶은 오래 배우고 공부한 바를 토대로 계속 새로운 이치를 이끌어내며, 때로는 그 구한 바를 다음 세대에 알려 주어 이어지게 하는 교량의 역할을 감당한다. ‘오래’라는 말과 ‘계속’이라는 말은 특히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정언 명령이 되는데 기본기를 갖추고 유지해 나가는 데에 시간이 필요하며 고통을 수반하는 불안정한 삶을 지속적으로 감당해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학자’는 또 한편으로 다음 단계로의 이동 즉, 쇄신에 대한 욕망과 그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는다는 점에서 ‘몽상가’(dreamer)들이기도 하다. 이들이 스스로 공구(攻究)하는 원리와 가치에 대해 꿈꾸기를 멈출 때 이들의 학자로서의 소임도 마무리되는 것이다. 김홍중에 따르면 미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동적으로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꿈꾸기를 통해 생산되고 분배되는 재화이고, 꿈은 개인의 소유물인 동시에 사회집단이나 장, 혹은 국가나 문명이 생산하여 제공하는 공공재로서의 공몽(共夢)이다. 따라서 학자의 사적 욕망은 아카데믹한 장(champ)과 사회적 시스템에 연관된다는 점에서 공몽과 공모한다고 볼 수 있다.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허진호, 2019)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조선 후기 실학자이자 과학기술자인 장영실의 일화들에 세종대왕과의 사적 관계성에 대한 상상력을 더해 만든 작품이다.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기를 좋아하는 세종은 임금의 자리에서 항상 내려다보아야 하는 자신의 위치에 대한 고충을 토로하는데, 영실 또한 신분 탓에 늘 조아려야 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반작용으로 별을 보기를 좋아한다고 고백하면서 두 사람은 신분을 뛰어넘는 공감대를 형성한다. 작품 속 장영실의 사적 욕망은 자신의 재주를 알아주고 면천시켜준 세종을 향해 있다. 그가 ‘자격루(물시계)’를 제작하고 천문관측을 위한 ‘간의’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면서 안여(임금의 가마)를 만드는 과정은 공구의 가치를 기술적 제작물의 완성도에만 둔 것이 아니라 세종이라는 ‘주군’에 대한 충성심에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 학자의 사적 욕망은 결국 원하든 원하지 않든 공몽 즉, 사회적 시스템의 문제와 요구를 결코 우회할 수 없다. 영실은 북극성이 주군의 별이며 그것이 자신에게는 세종이라고 말하지만, 조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관에서 그것은 인정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북극성이 명나라 황제의 것이라고 말해야 하거나, 대신들이 명의 심기를 거스른다는 이유로 간의의 제작을 반대하는 것, 최만리 등이 한글 창제를 반대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하지만 “명나라가 없으면 조선이 망하느냐? 조선은 조선만의 언어와 시간이 있어야 한다.”와 “저 많은 별들이 나의 백성들 같구나.”라는 세종의 말은 명을 중심으로 한 중화주의를 타파하고 조선을 중심에 둔 세계관으로 변혁하려는 인정 투쟁의 성격을 띤다. 그러므로 영실에게 자신을 희생하고서라도 이뤄야 하는 ‘전하의 나라’에 대한 소박한 꿈은 성리학적 명분론 대신 자주론과 실용적 기치를 내세우는 사상적 격돌의 소용돌이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인 ‘Forbidden Dream’은 세종의 꿈이자 세종을 향한 장영실의 꿈이라는 점에서 둘의 사적 욕망은 역사의 장 안에서 공몽이 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루카치(Lukács György)의 <소설의 이론>처럼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학문의 길에 들어선 학자로서, 특히 전공의 특성상 근래의 경제적 환산 가치로는 다소 ‘가성비’가 떨어지는 삶을 살게 되는 인문학자로서 추구하는 가치와 현실의 관계는 영화보다 훨씬 복잡한 구도에 놓여 있다. 다만, 학자로서의 사적 욕망과 사회적 공몽의 자장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꿈꾸기를 계속한다는 것, 그 지난한 노력의 지속이 중요하리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