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와 악기>
김은주
무기와 악기는 한 집에 산다.
도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은 서로 버거워 하면서도 또한 떨어질 줄 모른다. 부엌과 건너 방의 한랭 전선은 식구 모두를 얼어붙게 했다가도 언제 그랬냐 싶게 나란히 목욕 바구니를 들고 장수 목욕탕으로 나설 때면 봄 햇살아래 얼음처럼 쉬이 녹아내릴 때도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기가 한 수 앞서는 듯 보여도 끝을 보면 늘 악기가 이기는 형국이다. 느릿느릿 목욕탕으로 향하다 슈퍼 앞에서 더러 되돌아오는 경우도 있다. 바나나우유를 먹을 것인지 딸기우유를 먹을 것인지를 두고 서로 불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끝내 목욕탕을 코앞에 두고 되돌아오는 것이다.
큰 철제 대문을 당당히 밀치며 집안으로 먼저 들이 닥치는 쪽은 아들네 집이라는 무기를 가진 시할머니 쪽이고 그 뒤를 이어 총총 되돌아오게 된 경위를 혼자 말로 중얼거리며 들어서는 쪽은 미소가 악기이신 시외할머니다. 손부인 나는 잔뜩 화가나 제멋대로 벗어던진 할머니의 고무신부터 가지런히 놓으며 무기의 항변부터 들어준다. 건너 방에서 부엌으로 넘나드는 소리에 가시들이 춤을 춘다. 열심히 들어 주는 나의 추임새에 무기는 언제 그랬냐 싶게 금방 목소리에 따신 물이 오른다. 목욕 바구니에 쓰러져있는 바나나우유를 따서 빨대를 꽂아주면 무기의 심사는 그제야 반분이 풀린다.
그러고 나면 내 발 걸음은 바삐 부엌으로 향한다. 홈그라운드가 아니라 늘 양보만 하는 악기의 심정이 어떨까 싶어 얼른 달려가 보면 악기는 눈 꼬리에 웃음을 물고 서서 참으시라는 내 시늉에 같이 눈을 깜박이며 “됐다마”하신다. 그 한마디로 악기는 무기의 용심을 다 넘어서 버리는 것이다.
무기는 체구가 건장한 씨름선수 같다. 쪽진 이마는 사각이며 넓다. 넓은 이마만큼 마음자리도 넉넉하면 좋으련만 세월이 갈수록 고집만 느신다. 설컹한 목소리는 장부 저리 가라 할 만큼 굵다. 무기의 치마폭에서는 늘 휑한 바람 소리가 들리고 입맛은 얼마나 까다로운지 매일 다른 찬이 올라야 식사를 하신다.
아들인 아버님 앞에서는 수저질이 천근보다 더 무겁다. 어깨는 늘 결리시는 듯 주먹으로 두드리고 조금이라도 날이 궂을라치면 아예 이마에 끈을 묶고 누워 버리신다. 내가 보기에 아들 둔 무기의 유세는 아버님 계실 때만 유효한 것 같다. 아버님이 골목길을 돌아 출근하시고 나면 언제 그랬냐 싶게 목소리가 낮아진다.
그때부터 부엌 공화국을 장악하고 계시던 악기의 세상이 된다. 악기는 사위 앞이라 어려웠던 감정을 매일 아침 마당을 씻어 내리는 일로 해소한다. 꽉 마른 체구에 얼마나 재빠른지 그 치마폭에서는 늘 구르는 듯 음악소리가 난다. 묵은 먼지를 두고 보는 성격이 못되는지라 악기가 지나간 자리는 금방 빛이 나고 말끔해진다. 태생이 부지런하여 새벽부터 밤 까지 한 시도 앉는 법이 없다. 그 손끝에서 만들어진 음식은 얼마나 맛깔스러운지 늘 우리를 즐겁게 한다. 무기가 힘으로 좌중을 압도 한다면 악기는 늘 웃음과 부지런함으로 우리를 감동시켰다.
견원지간보다 못하다는 사돈지간인 무기와 악기는 그런 옛말도 무색 할 만큼 그림자처럼 붙어계신다. 같이 드시고, 같이 화투 패를 놓으시며 농을 하고, 같이 다니신다. 그러다가도 언제 그랬냐 싶게 금방 먹장구름이 몰려오고 천둥이 치기도 한다. 자꾸만 심술을 부리는 쪽은 무기고 그 심술을 다독이며 받아 주는 쪽은 악기다. 무기는 기세만 등등했지 실질적인 집안의 힘은 악기 쪽이 더 강하다. 어머님 대신 집안일을 다 둘항 하시며 식구들에게도 늘 살갑게 대하다보니 모두들 악기만 좋아한다. 무기는 내 집이라는 자신감에 늘 과하게 오버하시고 반대쪽에서 그 모습을 가만 지켜보고 계시던 악기는 그냥 있어도 좋은 사람이 되고는 했다. 하지만 악기는 그런 무기를 단 한 번도 탓하지 않으셨다. 무기가 호박죽이 먹고 싶다면 냉큼 끓여주고 갈치조림이 먹고 싶다면 금방 해다 드렸다. 그럴 때 보면 젊은 우리들이 쉬이 읽어내지 못하는 당신들만의 마음자리가 있어 보인다. 서로 다투면서도 서로의 마음을 훤히 꿰뚫어 보는 두 분을 보고 있자면 밥그릇 수가 차지 않은 우리들로서는 묘한 그 감정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서로가 서로에게 자식 하나를 내어준 사이라서 그런지 섭섭함도 많아 보이지만 그 모습이 무색할 만큼 두 분은 잘 굴러가신다. 장독대 청소하는 날은 부실한 악기 대신 힘쓰는 일은 무기가 도맡아 하신다. 어머님이 곱게 모시옷을 차려입고 외출이라도 할라치면 악기는 당신 딸의 고운자태에 흐뭇한 미소를 짓지만, 무기는 현관에 쭈그리고 앉아 애꿎은 고무신만 뒤집어 터셨다. 서로 인력으로 어쩔 수 없는 마음의 간극만 빼고는 같이 늙어가는 처지로서는 의기투합은 곧잘 이루어지셨다.
매일 간당간당 내 마음을 졸이게 하던 두 분의 신경전이 어찌 보면 한없이 늘어지는 노년의 삶을 팽팽하게 끌어당겨주는 활력소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무기가 악기의 봉양을 받으며 먼저 저 세상으로 가셨고 그렇게 정정하시던 악기도 무기 없는 쓸쓸함을 견디지 못한 채 삼 년 만에 뒤따라 가셨다. 하늘나라에 가셔서도 두 분은 나란히 손을 잡고 장수 목욕탕으로 목간을 가시겠지. 가시다 또 서로 다툴지도 모를 일이다. 바나나우유와 딸기우유 때문에.......
첫댓글 바나나 우유와 달기 우유는 저희집 아이들이 좋아하는 식품인데...서로 그 우유때문에 다투신다는 이야기에 한참을 웃고 또 웃습니다. 다복하신 가정이다는 생각은 기본이고 선배의 글에서 그동안 느꼈던 묵직한 화두보다는 화사한 글맛이 느껴졌거든요. 읽고 나갈려다 이 감흥만은 이야기해야겠기에. 몇번을 읽어도 질리지가 않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