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고 한가로운 금요일 오후, 밀양팔경의 하나라는 호박소를 찾아가는 길. 김해에서 양산으로 가는 고속도로를 따라 가다가 낙동강을 만난다. 낙동강 푸른 물과 여름 산이 어울린 풍경은 경이롭다. 길 오른편으로 흐르는 낙동강의 푸른 물에 발을 담그고 한나절 앉아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갈 길은 멀다. 김해에서 양산을 거쳐 밀양으로 가는 길은 몇 개의 터널을 지나야 한다. 터널 입구와 출구 부근에서 느닷없이 만나게 되는 여름 산, 멀리서 산의 풍경을 그린 동양의 산수화와 달리 가까이서 보는 산은 또 다른 느낌을 준다. 길 양편으로 우뚝 솟아 있는 여름 산과 나무와 짙은 초록색 잎들, 참 아름답다.
고속도로에서 밀양으로 들어와서 외곽 쪽으로 빠진다. 산과 숲으로 가득한 여름의 밀양은 환하고 평화롭다. 외곽이라 그런지 몰라도 비교적 길은 넓지만 차들이 드물게 다닌다. 얼음골 사과 판매장이 있는 곳을 알리는 팻말이 있는 곳을 몇 군데 지나치며, 문득 사과를 좀 사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조금 더 가니 마침 길가에서 사과를 파는 사람이 있다. 길옆에 차를 세우자 사과 파는 아가씨가 사과를 깎아 준다. 얼음골 사과는 당도가 높고 과육이 단단하기로 유명하다. 한 조각 베어 먹으니 달고 단단한 사과의 맛이 일품이다. 아가씨에게 호박소 가는 길을 물어보니 호박소는 얼음골 안에 있다고 한다. 얼음골 안으로 들어가면 호박소로 가는 길이 나온다고 한다. 사과 봉지를 들고 차 안에서 사과 하나를 닦아 껍질째 베어 문다. 사과를 소재로 한 홍영철의 아름다운 시 한 편이 문득 떠오른다. 습작 시절 좋아했던 시 가운데서도 문득문득 생각이 나는 작품이다.
엄마는 낡은 재봉틀 앞에 앉아 있었다./ 해진 옷을 깁는 것이었는지/ 삯바느질을 하는 것이었는지는 기억할 수 없다./ 고등학교에서 돌아온 누이는/ 가방 속에서 사과 한 알을 꺼내 엄마에게 건네주었다./ 나는 구구단을 외며 장독대 앞에 앉아 있었다./ 초여름이었다. /1963년 5월 8일./ 나는 사과 한 알을 보았다./ 누이는 엄마에게 사과를 먹으라고 했다./ 어머니날의 선물이라고 했다./ 엄마는 허리를 펴며 너나 먹으라고 했지만/ 누이는 굳이 사양을 했다./ 5월의 햇살 너머/ 사과를 씹는 엄마의 입술이 보였다./ 나는 담장 밑에서 자라고 있는 박하 풀잎을 뜯어/ 코끝에 갖다대었다./ 왜 그렇게 슬펐을까./ 사과 한 알./ 누이는 공납금을 내지 못해 몇 번이고 쫓겨왔었으나/ 공부는 언제나 우등이었다./ 택시 운전수의 아내가 된 누이는 오늘도/ 가방공장을 다녀왔으리라./ 나는 지금도 사과를 좋아한다./ 필요하다면 몇 상자의 사과도 살 수 있다./ 사과는 나의 진주다. -홍영철, ‘추억 속으로’
호박소를 찾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길을 잘못 들어 나는 사과밭이 있는 좁은 길을 따라 다니며 한참을 헤맸다. 그러다가 차에서 내려 사과밭 구경을 했다. 탁구공만 한 크기의 연두색 사과 열매들이 나뭇가지 가득 매달려 있었다. 여름의 더운 바람 속에서 연둣빛 작은 사과알들이 천천히 자라고 있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먹은 사과는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사과나무를 보는 것은 처음이다. 작은 열매들이 발갛게 익어갈 동안 무더운 여름햇살과 가을의 서리를 맞아야 할 것이다. 얼음골 사과가 유명한 것은 사과를 키우는 과수원의 일교차가 크기 때문이라고 한다. 봄 동안 하얀 사과꽃이 만개했을 얼음골 사과밭과 가을 들판을 붉은 색으로 물들일 사과열매를 생각하며 나는 여름 산과 사과밭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마침내 호박소 가는 팻말을 발견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호박소를 향해 걸었다. 제법 멀리 갈 각오를 했지만 생각했던 것과 달리 주차장과 호박소는 무척 가까웠다. 호박소는 높은 산들로 둘러싸인 영남 알프스의 한 자락인 백운산에 위치해 있었다. 호박소 들어가는 길 왼편에 작은 절 하나가 자리 잡고 있다. 세로로 된 큰 바위를 깎아 한자로 백운산 백연사라는 절 이름을 새겨 넣은 것이 독특했다. 돌계단을 밟고 돌담 안으로 들어가 절집을 잠깐 둘러본다. 나무들이 절 한쪽을 가득 채우고 있다. 백연사에서 나와 낮은 산길을 따라 왼편으로 100여m를 가니 호박소가 나온다.
호박소는 가는 길은 산에서 흔히 만나게 되는 평범한 길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길을 따라 난 산길을 조금만 올라가니 호박소가 보였다. 시원하게 떨어져 내리는 폭포와 움푹 파인 소가 한눈에 들어왔다. 특이한 것은 폭포가 떨어지는 절벽과 소를 둘러싼 가파른 낭떠러지 전부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더욱이 바위 전체가 하나로 이어진 것처럼 보여 이채로웠다. 화강암은 길고 긴 시간 동안 물에 씻겨 깊은 소를 이루고 있는데, 그 모양이 마치 절구의 호박 같이 생겼다 하여 호박소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사진 찍는 자리를 발자국 모양으로 표시한 곳에서 소를 내려다보니 소는 이름 그대로 움푹 들어간 절구처럼 생겼다. 깊이가 무척 깊은지 안내판에 명주실 한 타래가 들어갔을 만큼 깊었다고 하는 이야기도 전해진다는 글을 적어 놓았다. 이곳에서 가뭄이 계속될 때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고 한다.
등산 온 사람들 여럿이 소에 모여서 더위를 식히고 있다. 바위를 타고 내려온 다람쥐 두 마리가 등산객이 던져준 사과를 갉아 먹고 있다. 사람들은 전화기 카메라로 연신 다람쥐를 찍고 있다. 다람쥐는 사람을 별로 겁내지 않는 기색이다. 참 오랜만에 보는 줄무늬 다람쥐다. 숲을 해치는 못생긴 청설모들이 가득한 산에서 다람쥐를 보기는 그리 쉽지 않다. 언제 보아도 다람쥐는 귀엽고 예쁘다. 신발과 양말을 벗어 바위 위에 올려두고 호박소 찬물에 발을 담가 본다. 조금 있으니 온 몸이 시원해진다. 다람쥐가 내 주위를 오르락내리락한다. 등산 온 사람들이 잠깐잠깐 왔다가 돌아가기를 반복할 동안 나는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물웅덩이와 절벽 주변의 나무들을 보며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를 떠올리고 실소를 흘리기도 한다.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웅덩이는 아마 이런 곳이었을 것이다. 더운 여름에 물놀이를 나온 선녀들이 넋을 잃고 물놀이를 하고 나무꾼이 바위 뒤에 숨어서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한 선녀의 옷가지를 훔쳐 선녀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사는 그런 이야기. 깊이를 알 수 없는 저 깊은 호박소에도 이런 비슷한 사연들이 숨어 있을지 모를 일이다. 호박소 깊은 수면 위에 나뭇잎 하나가 떨어진다. 젖은 발을 말리고 양말과 신발을 신고 일어서 발길을 돌리다가 다시 한 번 호박소를 내려다본다. 깊은 물속에서 아름다운 물고기들이 평화롭게 유영하고 있을 것 같은 초여름 오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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