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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전쟁과 불교
불교도들에게 묻는다.
글/ 이석구(콜로라도 주립대 교수)
이 글의 잡지에 소개한 당시의 배경:
1991년 미국과 이라크 사이에 발생한 전쟁은 걸프 전쟁(Gulf War)이 있었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이란-이라크 전쟁 후유증으로 발생한 막대한 경제적 빚을 해결하고 석유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1990년 8월 2일 산유국인 쿠웨이트를 전격 침공했다. 이에 1991년 1월 17일부터 2월 28일까지 미국 중심의 다국적군이 이라크군을 상대로 대규모 군사 작전을 했다.
I. 전쟁은 왜 일어나는가? 대답은 간단하면서 복잡하다. 왜냐하면 전쟁의 원인이 사람의 심전(心田)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이 최종적으로 전쟁여부를 결정하기까지는 여러 가지 조건들이 그 행방을 좌우할 것이나 마지막 판단은 사람에게 달려있다. 결국 마음의 주인인 인간에게서 싸움이 일어나기 때문에 역시 전통적 주제인 인간성과 직접 관련되어 있기도 하다.
이 인간성에 관해서는 동서양의 종교경전이나 많은 철학가들에 의해서 언급이 있지만 그 중 전쟁과 관련해서 인간성의 부정적인 면을 꿰뚫어 본 철학자는 영국 철학의 황금시대에 영국국교의 한 사목의 아들로 태어났던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이다. 그의 유명한 저작인 LEVIATHAN(리바이어던 (1651):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절대 권력을 가진 국가(리바이어던)의 탄생과 사회계약을 다룬 불후의 명작으로 평가 받음.. 편집자 주)은 그가 63세 때 쓰여진 바 그는 이 저술의 제 13장에서 인간성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So that in the nature of man, we find three principal causes of quarrel. first, competition; second, diffidence; third, glory. (그러므로 인간성에 있어서 우리는 세 가지 싸움의 원인을 발견한다. 첫째는 경쟁이요, 둘째는 자신이 없어함이요, 셋째는 영화이다.) 경쟁을 위해 소득 때문에 남을 침범하고, 자신감의 결여로 안전을 도모하고, 영화는 평판을 좋게 받으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소득을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폭력을 쓰고, 안전을 위해서는 공격자에게 방어법을 쓰고, 명성을 위해서는 말이나 웃음이나 의견 등을 통해 사소한 일에 이르기까지 자기를 울리고 남을 과소평가하려고 한다. 이래서 사람의 삶은 계속 공포와 폭력에 의한 죽음에 의한 위험 하에 있게 되고 그러므로 인생은 고독하고 가난하고 더럽고 짐승같고 단명하다는 것이다. 이래서 인간은 전쟁 상태하에서 각자 각기 싸우게 되는데 이른다. 홉스의 인간관은 인간의 밑바닥을 그대로 묘사한 것이다.
중국 유교 대가 순자(荀子 298~238 B.C ?)도 그의 성악설에서 인간은 나면서부터 이익에 좌우되어 양보심이 없어 서로 다투게 되고 남을 미워하며 폭행과 범죄를 저지르게 되고 또 눈이나 귀 등 관능의 쾌락을 추구해서 음탐한데 이른다고 보았다.
1941년 뉴욕에 있는 콜롬비아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날 징병되어 구라파에서 정보장교로 2차 대전이 끝날 때가지 참전한 J. Glenn Gray 교수는 1959년 그의 경험을 실은 책을 발간했다. 그는 The Warriors(전사들)이란 책에서 전쟁을 좋아해서 전쟁을 허용하는 인간심리를 세 가지로 분석했다. 첫째는 인간의 심미적 욕구인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The delight in battle as a mere spectacle may progress almost insensibly to aesthetic contemplation or to a more dominantly intellectual contemplation of its awfulness...
It is, first of all, wrong to believe that only beauty can give aesthetic us delight; the ugly can please us too, as an artist knows.
(전쟁터가 하나의 단순한 광경으로서 주는 기쁨을 거의 무감각으로 심미적 응시로 또는 더 지배적으로 전쟁터의 무서움에 대한 지적 응시로 발전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것만이 우리에게 심미적 기쁨을 준다고 믿는 것은 그릇된 일이다. 추한 것도 우리들을 기쁘게 할 수 있다는 것은 모든 미술인이 다 알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는 단체적 경험이다.
The cause that calls comradeship into being may be the defense of one's country, the propagation of one true religious faith, or a passionate political ideology; it may be the maintenance of honor, or recovery of a Helen of Troy.
우애를 일으키게 하는 원인으로서 자리 나라의 방어, 진정한 종교적 신앙의 선전, 또는 열정적으로 지지하는 정치이념, 영예의 유지 혹은 트로이의 헬렌의 회복 등을 들을 수 있다. 이상이 단체심을 일으켜 전투적으로 고무케 한다.
셋째로는 인간 심리 속에서 파괴를 기뻐하는 것이다.
The satisfaction in destroying seems to me peculiarly human, or, more exactly put, devilish in a way animals can never be... Destruction is an artistry directed not toward perfection and fulfillment, but toward chaos and more anarchy.
파괴하는데서 오는 만족함은 내게 있어서는 유독 인간들이 하는 일이다. 또는 더 정확하게 말해서 악마적인 것인데 다른 동물들은 그런 짓을 결코 안한다... 파괴는 완성이나 성취하는 일을 향한 예술품이 아니고 혼란과 도덕적인 무정부상태를 초래하게 만든다.
종교적인 관점에서 생각해 볼 때 불교에서 말하는 탐, 진, 치, 즉 욕심, 성냄, 그리고 어리석음은 인간들을 싸움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원동력이 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와 거기에서 허덕이는 인간들이 싸움에서 벗어날 길이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
조로아스터의 종교는 아예 선신과 악신이 항상 싸우는 세계에서 우리도 어느 한편에 들어 있어야 하므로 싸움터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선신 아후라마즈다가 궁극적으로 악신 아하리만을 이겨내는 세계관이 등장하나 그때까지는 평화의 세계는 아니다. 도교의 음과 양의 세계는 결국 상호 보완관계를 이룬다고 하지만 서로가 상반원칙에 서 있으므로 갈등을 면할 길이 없다.
유교도 주역의 세계관을 깊이 받들고 조상들의 혼백을 위해 제사를 성심껏 받치는 행사를 계속하는 한 선악 대치된 세계에서 떠날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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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이상 살펴본 인간관을 증명하다시피 세계사는 끊임없이 싸움의 도가니 속에서 피비린내 나는 상호 살육의 비극을 연속해 왔다. 20세기 전반기만 하더라도 2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루었다. 물적 자원적 손실은 제외하고 인적 손실만 생각해보아도 제 정신 가지고는 할 수 없는 일들을 저질렀다. 세계 제 1차 대전의 전사자가 ‘The United States : The History of a Republic’란 책에 의하면 총 7백 13만 8천 9백 명이나 된다. 이외에 민간인 사망자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나 7백만 이상 되는 시체들을 한군데 모아 쌓아 놓을 때 그 높이와 시체들에서 나오는 악취는 어떠할까 생각해 볼 일이다.
또 그중 시체중의 하나가 내 부모든지, 형제든지, 자식이든지, 또는 내 자식이라고 생각해 볼 때 우리의 아픔은 창자를 잘라 내는 것 같지 않을 것인가? 세계 제 2차 대전 때의 인명의 피해는 근 4천 4백만 명이었다니 이는 우리 머리로서는 이해가 잘 안가는 숫자이다.’ Ruth Leger Sivard’의 World Military and Social Expenditures(1989)에 의하면 1945년에서 1989년 사이에 1백 27번의 전쟁과 그와 관계된 것으로 죽은 민간인이 1천 3백 31만 9천명이고 군인이 6백 81만 명으로 합계 2천 1백 80만 9천명이 된다.
이중 한국전쟁 때 희생된 민간인이 1백 50만이고 군인 사망수가 역시 1백 50만 명으로 나와 있다. 지역별로 보면 남미계가 총 66만8천명, 구라파가 17만 육천 명, 중동이 16,145,000명 동남아가 3,103,000명 극동이 10,645,000명 아프리카가 5,490,000명 기타 114,000명이다. 이상과 같은 인명피해를 끼친 전쟁도 전쟁이지만 그 살해방법도 가지가지 무자비했던 것을 우리는 뉴스를 통해 잘 알고 있다. 중공정부가 장개석 정부를 밀어낸 뒤 수백만의 유산지주 관료급의 목을 잘라 죽이는 등 비참한 일이 있었고 크메르 정권하에서 수백만 명이 파리 목숨만치도 못하게 죽은 것은 옛날 진(秦)군의 싸움(292B.C)에서위(魏)나라와 초(楚)의 24만 명의 군인들을 목을 잘라 죽인 일, 또 같은 진병이 투항한 趙兵 40만 명을 長平의 싸움(262~63 B.C.)에서 생매장한 무참하고 잔인한 살해 방법과 비교할 만한 일이다.
이상과 같은 막대한 인명피해 배후에는 거기에 상당한 이상의 군사비용이 소비되었든 것이다. Ruth Leger Sivard 1989년에 따르면 1960~1987년 사이 세계 전체 군사비용은 17조 달라 (17 trillion)인데 이것은 같은 기간 중 교육비로 쓰여진 15조 달라보다 13%가 더 많고 또 보건비의 10조 달라보다 70%가 더 많은 액수였다. 또 현존하는 핵무기들은 현재 18,000메가톤의 폭발력을 가지고 있는데 이 양은 지구에 생존하고 있는 모든 남자, 여자, 그리고 아이 당 3.5톤의 T.N.T.에 해당되는 것이다. 1945년에 3개 밖에 안되는 핵무기가 1985년에는 57,000개에 이르고 그 효능과 발사 능력을 개량하기 위해서 쓰여진 경비가 3조 달라에 달했다. 이 양은 다른 말로 하면 20세기의 세 번 전쟁에서 희생된 4천 4백만 명을 죽인 11메가톤의 폭발력보다 1636배나 더 되는 폭발력이 되는 셈이다. 이런 핵무기들은 아직도 사용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인류의 생명을 앗아갈 최대의 위험성이 있는 무기로 간주되고 있다. 이상과 같은 무기에 들어간 금액은 국제적으로 평화를 유지하는데 드는 경비보다 그 900배나 더 되는 액수로서 그 비중이 비교가 전혀되지 않는 상태이다.
이상 열거한 기록들은 홉스가 말한 “경쟁”, “자신이 없어함”, “영화”, 순자가 분석한 “자기 이익추구”, “증오”, “관능의 쾌락”, GRAY "교수가 말한 “심미적 욕구”, “단체우익주의”, “파괴를 기뻐하는 일”, 불교의 “탐=진=치”, 기독교의 원죄관에서 오는 인간의 전체적인 타락(Total depravity)설, 조로아스터의 선신과 악신 대치의 2원론적 쟁투, 도교와 유교의 “음양설”이 치루어야 했던 값비싼 대가였다. 그러면 이에 대처할 인류평화 생존의 희망이 될만한 방법은 없는가?
II. 지난 수년 사이 세계 초강군사국의 하나인 소련이 서구진영과의 긴장과 경쟁에서 양보와 후퇴의 길을 택하므로 당장의 3차 대전의 위기는 면했다고 본다. 그러나 아직도 호전적인 인간성과 라켓과 수소탄들은 여전히 남아있다. 비록 핵무기는 사용치 않했으나 막대한 군비와 이라크 측의 인명손실(10만 명이상 죽었다고 함)과 군사공업 건물의 파괴를 초래하고 미국 측도 144명의 사망자를 냈다는 금년 상반기의 걸프전쟁은 좋은 예의 하나가 되었다. 전쟁이 전연 없는 장래는 인간성이 완전히 변하기 전에 기대할 수 없지만 그런 세계로 향하는 데 필요한 심전의 변화를 줄 수 있는 말을 Friedrich Nietzsche는 그의 The Wanderer and his Shadow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전쟁들을 이기고 군사력에 우수한 국민들이 다음과 같이 말할 위대한 날이 올지도 모른다.
III.
We break the sword, and will smash its military establishment down to its lowest foundations ... Rather perish than hate and fear, and twice rather perish than make oneself hate and feared. (우리는 칼을 부수고 그 군사 편제를 분쇄해서 가장 낮은 기반으로 축소시킬 것이다. 증오하고 두려워하는 것 보다 파멸하기를 바란다.)
중국의 묵자(墨子 479 - 381 B.C.)는 겸애(兼愛) 즉 평등 무차별의 사랑을 주장했다. 군인 출신인 묵자는 서로 죽이는 것보다 내가 상대방을 사랑하므로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는 세계 즉 공리상호 부조의 사상을 주장했다. 인도의 간디는 그의 비폭력주의에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비폭력 원칙이 아니고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비폭력주의라고 정의했다.
종교적인 해결 방법은 무엇일까? 우선 세계 세력 판도를 고찰한 후 해결책을 살피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세계는 기독교 영향 하에 있는 남북미 주와 구라파가 군사적 패권을 쥐고 있고 다음에는 소련 중국 등을 위시한 사회주의 사회요. 세째로 회교 영향권 안에 있는 중동 파키스탄과 인도네시아가 있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비폭력 사랑 중심사상으로 시작했으나 서기 313년에 로마황제 콘스탄틴이 “Edit of Milan"을 선포 종교자유를 허락하고 차츰 로마제국의 국교로 되어 정교일치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그 후 1096년에 시작한 십자군의 싸움이 1291년에 끝날 때까지의 전쟁 경험과 종교개혁 때 로마 캐톨릭과 칼빈파 개혁 세력 사이에 있었던 30년 종교전쟁(1618~1648)등 싸움의 경험을 쌓아 오늘에 이르렀다. 이 구미 세력과 전쟁을 한 이라크는 회교권에 속한 한 국가였다. 회교는 그 교주 모하메트가 종교를 일으켰을 때부터 주위 국가 세력들과 싸움을 해 이겨내면서 시작한 종교다. 그 후 그들의 성전(Jihad)의 이론과 함께 전쟁을 통한 포교 정책은 필리핀까지 그 세력을 확장하기에 이르렀다. 대승과 테라바다 불교는 그의 영향권이 오늘에 있어서는 일본, 한국, 대만, 태국, 스리랑카, 버어마 등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합리적인 종교 평화정책은 각각 종교들이 끼칠 수 있는 영향권 내에서 전인류를 구하기 위한 통종교적 방향으로 각 종교가 비폭력과 사랑을 중심한 가르침으로 정치, 군사지도자들을 설교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불교들이 공헌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하고 공안적 질문을 독자들에게 묻고자 한다.
14호. 1991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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