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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박노해
우리 세 식구의 밥줄을 쥐고 있는 사장님은
나의 하늘입니다
프레스 찍힌 손을 부여안고
병원으로 갔을 때
손을 붙일 수도 병신을 만들 수도 있는 의사 선생님은
나의 하늘이다
두달째 임금이 막히고
노조를 결성하다 경찰서에 끌려가
세상에 죄 한번 짓지 않은 우리들
감옥소에 집어넌다는 경찰관님은
항시 두려운 하늘이다
죄인을 만들 수도 살릴 수도 있는 판검사님은
무서운 하늘이다.
관청에 앉아서 흥하게도 망하게도 할 수 있는
관리들은
겁나는 하늘이다
높은 사람, 힘있는 사람, 돈 많은 사람은
모두 하늘처럼 뵌다
아니, 우리의 생을 관장하는
검은 하늘이시다
나는 어디에서
누구에게 하늘이 되나
代代로 바닥으로만 살아온 힘없는 내가
그 사람에게만은
이제 막 아장 걸음마 시작하는
미치게 예쁜 우리 아가에게만은
흔들리는 작은 하늘이것지
아 우리도 하늘이 되고 싶다
짓누르는 먹구름 하늘이 아닌
서로를 받쳐 주는
우리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푸른 하늘이 되는
그런 세상이고 싶다
<시 읽기> 하늘/박노해
박노해 그의 본명은 박기평입니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박기평에서 박노해로 바꾼 것은 ‘노동해방’이 이루어진 세상을 꿈꾸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성인 ‘박’에다 ‘노동해방’의 약자인 ‘노해’를 붙여 자신의 이름을 ‘박노해’로 다시 지은 것입니다.
지난 1998년 8월 15일, 박노해는 수감 생활을 마치고 석방되어 자유인의 몸이 되었습니다. 노동해방을 염원하며 노동투쟁을 벌였던 박노해는 1980년대 후반에 들어와 자생적 사회주의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이라는 단체를 결성하고 그가 자생적으로 구축한 사회주의 이론을 노동해방의 대안으로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이 대안을 우리 정부에서 인정할 리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대안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세계사 속에서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그가 사노맹을 결성하고 투쟁을 해나간 것은 분명 이 땅의 체제를 부정한 일이었기에 박노해는 사상범으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습니다. 앞에서 저는 박노해를 ‘자생적 사회주의자’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누구에게 사회주의 교육을 받은 바 없이, 그 스스로 불평등한 노동 현실을 개선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는 이 땅의 산업자본주의사회가 가져온 모순을 사회주의 이념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스스로 믿은 것이지요. 그러나 공산권 국가의 대몰락으로 인하여 그의 생각이 잘못된 것이었음은 명백하게 드러났습니다. 시인 자신도 그것을 공개적으로 시인하였습니다. 다만 그는 현실로서의 사회주의는 거부하지만, 가치로서의 사회주의에서는 배울 점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어쨌든 그는 현실로서의 사회주의는 버리고 1990년대 우리 사회가 지향하고 있는 자본주의, 자유주의, 민주주의의 가치를 인정하면서 전향을 하였습니다.
저는 박노해에게 그 어떤 이름보다도 먼저 순결한 이상주의자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싶습니다. 그의 꿈은 아주 고결합니다. 그는 공동체, 사랑, 헌신, 평등, 희망, 나눔, 봉사 등과 같은 세계를 지향합니다. 그의 삶과 운동과 시창작의 원천은 이곳에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는 다소 종교적입니다. 저는 그가 한때 그토록 사회주의 이념에 애착을 가진 것도, 현실로서의 사회주의 사회를 옹호했다기보다, 사회주의 이념 속에 깃들인 몇 가지 이상주의적 면모 때문이 아니었나 짐작을 해봅니다. 어떤 사람이 무슨 사상이나 이념을 옹호할 때는 그것의 전모를 다 알고 옹호한다기보다 그 사상이나 이념의 어느 한 부분에 특별히 매력을 느껴서 그렇게 하는 경우가 아주 많으니까요. 저는 이런 경우를 많은 종교인들에게서 보곤 합니다. 종교인들 역시 그들이 믿는 종교의 전모를 알고 믿기보다 그들이 믿는 종교의 어느 부분에 특히 매력을 느껴 종교를 택하는 일이 많습니다.
노동해방을 추구한 박노해의 정신과 그가 지닌 이상주의적 면모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시편들은 아주 많습니다. 그의 시집 『노동의 새벽』, 『참된 시작』 속에 실린 작품들이 대부분 이런 면모를 갖고 있습니다. 저는 박노해의 시 가운데 여러 편을 좋아하나, 특히 『노동의 새벽』이라는 그의 첫 시집 맨 앞에 실린 작품 <하늘>을 좋아하기에 여러분들과 함께 감상해보고 싶습니다. 박노해의 시가 대부분 그렇듯이 이 시도 아주 쉽고, 시인의 의도가 잘 전달됩니다.
우리 세 식구의 밥줄을 쥐고 있는 사장님은
나의 하늘입니다
프레스 찍힌 손을 부여안고
병원으로 갔을 때
손ㅇ르 붙일 수도 병신을 만들 수도 있는 의사 선생님은
나의 하늘이다
두달째 임금이 막히고
노조를 결성하다 경찰서에 끌려가
세상에 죄 한번 짓지 않은 우리들
감옥소에 집어넌다는 경찰관님은
항시 두려운 하늘이다
죄인을 만들 수도 살릴 수도 있는 판검사님은
무서운 하늘이다.
관청에 앉아서 흥하게도 망하게도 할 수 있는
관리들은
겁나는 하늘이다
높은 사람, 힘있는 사람, 돈 많은 사람은
모두 하늘처럼 뵌다
아니, 우리의 생을 관장하는
검은 하늘이시다
나는 어디에서
누구에게 하늘이 되나
代代로 바닥으로만 살아온 힘없는 내가
그 사람에게만은
이제 막 아장 걸음마 시작하는
미치게 예쁜 우리 아가에게만은
흔들리는 작은 하늘이것지
아 우리도 하늘이 되고 싶다
짓누르는 먹구름 하늘이 아닌
서로를 받쳐 주는
우리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푸른 하늘이 되는
그런 세상이고 싶다
이 시는 박노해의 첫 시집 『노동의 새벽』 첫 장에 수록된 작품입니다 그가 바라는 세상을 압축해서 담아놓은 듯합니다. 다소 해설적인 느낌이 없지 않으나, 그가 바라는 세상의 압축도는 이 작품의 다소 해설적인 맨 마지막 연에 들어 있습니다. 그것을 여기서 다시 한 번 반복해 읊어볼까요?
아 우리도 하늘이 되고 싶다
짓누르는 먹구름 하늘이 아닌
서로를 받쳐 주는
우리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푸른 하늘이 되는
그런 세상이고 싶다
한마디로 말해서 박노해는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고 이끌어주며 사랑하는, “서로가 서로에게 푸른 하늘이 되는 그런/세상”을 소망한다는 것입니다. 부연하자면, 박노해는 너와 내가 서로에게 권력이 되지 않는 세상, 나와 내가 수평적인 자리에서 서로를 위한 빛이 되는 세상, 너와 나 사이에 대화정신과 민주정신만이 살아 있는 세상, 너와 내가 서로를 살림의 길로 안내하는 세상, 너와 내가 서로를 그리워하며 만나고 싶어하는 세상, 너와 내가 서로를 자유롭게 하는 세상 등을 소망한 것입니다. 이런 세상을 가리켜 우리는 인간이 만들고자 하는 유토피아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그러면 박노해의 시 <하늘>을 좀더 찬찬히 그리고 자세히 감상해보기로 합시다. 누구나 다 하늘을 알고, 하늘을 보면서 살지만, 박노해는 이 시에서 하늘이 이미지를 원용하여 그가 하고자 하는 뜻을 잘 형상화했습니다.
우선 제1연을 볼까요? 박노해는 이 부분에서 “우리는 세 식구의 밥줄을 쥐고 있는 사장님은/나의 하늘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혹시 자신의 부모가 사장님이라든가, 본인이 자신이 사장님인 사람은 이 말을 듣고 기분 나빠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마음 푸십시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시 속의 언어는 비유적이고 상징적인 것이지 어느 대상을 구체적으로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여기서 비록 박노해가 사장님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권력을 가진 자의 비유적 표현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그 말이 환기하는 이미지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해야 합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우리 시대에 사장님을 권력이 주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종업원들 등쌀에, 뿐만 아니라 경제 위기까지 겹쳐서 이제 사장님의 권력도 적잖게 줄어들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어쨌든 아직까지는 사장님은 ‘장長’으로서의 권력을 누리고 있습니다. 아직도 사람들은 사장님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사장님이라고 부르면 그 소리를 듣기 싫어하지 않으며, 관습상 모르는 남성을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데 익숙해 있습니다. 지난 1970년대와 1980년대의 다방가에서 기혼 남성들은 온통 사장님으로 불렸습니다.
박노해는 이런 사장님을 가리켜 “우리 세 식구의 밥줄을 쥐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에게 가장 큰 권력으로 작용하는 것이 밥이라면 밥줄을 쥐고 있는 사장님은 종업원들에게 가장 큰 권력입니다. 그는 ‘하늘’ 같은 존재입니다. 밥줄을 잃는다는 것은 목숨을 잃는다는 것과 같은 뜻이기에, 사장님에 대한 존경은 두려움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사장님의 횡포가 심하다면, 그때 밥줄을 쥐고 있는 사장님은 존경보다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박노해가 말하는 식으로 표현한다면 그는 “검은 하늘”과 같은 존재입니다. 종업원들이 사장님 앞에서 공손해지는 것은 그에 대한 예의 이전에 자신의 밥줄을 관장하고 있다는 아주 현실적이 이유 때문입니다. 이것이 억울하다면 당신도 사장이 되라고 누군가 충고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무나 사장이 될 수는 없습니다.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때 제가 말씀드린 ‘능력’은 아주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박노해가 그의 시 <하늘>의 제2연에서 의사 선생님을 앞 연의 사장님처럼 검은 하늘과 같은 존재라고 규정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어떤 분은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의사의 공로가 얼마나 대단한데 이런 부정적 발언을 하느냐고 두덜대면서 말입니다. 여기서도 의사는 지시대명사가 아니라 비유적, 상징적 표현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박노해는 이 땅에서 의사의 권력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말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존경과 두려움, 은혜와 권력은 동전의 앞뒤와 같습니다. 따라서 의사에 대한 존경심은 두려움의 다른 말이고, 그가 베푸는 은예는 권력의 다른 말입니다. 의사는 어느 시대이고 대접을 받아왔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그들이 인간의 목숨을 구원해주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목숨을 보전하는 일입니다. 밥이 권력의 핵심에 있을 수도 있는 것도, 의사가 권력의 핵심에 있을 수 있는 것도 실은 이들이 다 인간의 목숨을 관장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의시가 대단한 권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병원에 가서 자기 돈 내고 치료를 받으면서도 의사에게 굽신거립니다. 간호원의 호명 소리에 초등학생처럼 대답합니다. 역시 자기 돈 내고 치료를 받는데도 몸 아픈 것이 잘못을 저지른 것이라고 되는 것처럼 머뭇거립니다. 의사는 우리에게 당신의 병명이 무엇이며, 당신에게 무슨 약을 줄 것인지에 대해 제대로 알려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저 의사가 주는 대로 약을 가지고 돌아옵니다. 더욱이 그가 기록카드에 쓰는 문자를 환자인 우리는 해독할 수도 없습니다. 그는 결코 우리가 다 아는 한글을 쓰지 않으니까요. 아, 이래저래 의사는 권력을 갖게 됩니다. 의사는 우리의 목숨을 좌우할 수 있는 신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 땅에서 경제적으로도 아주 특별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이만하면 박노해가 왜 의사 선생님을 겁나는 하늘로 비유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열악한 환경이 컨베이어벨트에 앉아 기계처럼 육체노동을 하고 그런 자신들을 사장님이나 선생님이 아닌, 공돌이 혹은 공순이로 지칭하는 것을 들을 때, 분명 그들에게 의사 선생님은 겁나는 하늘과 같은 존재입니다.
박노해는 제3연에서 경찰관을 “경찰관님”이라고 부르며 그 역시 “두려운 하늘”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나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의 집단을 이루게 되면 그 집단의 질서 유지를 위하여 ‘합법적인 폭력기관’을 만듭니다. 폭력기관이 합법성을 띠고 있다니, 하며 궁금증을 표시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한편으로 자율적인 질서 유지 능력이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나 한 집단에 ‘합법적인 폭력기관’이 있는 것은 단순히 그 구성원들이 탓만이 아닙니다. 그 집단의 최고 권력자는 자신의 권력을 보다 공고히 하기 위해 ‘합법적인 폭력기관’을 만듭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경찰과 군대는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래서 경찰관과 군인을 보면 한편 안심도 되지만 겁도 납니다. 특히 우리들이 일상생활과 연관돼 있는 경찰관에게서 이런 양가감정을 더 크게 느낍니다. 그런데 집단이 어수선할수록, 그 집단의 최고 지배가가 끝없는 권력욕의 화신일수록, 최고 지배자의 선출에 부정이 가해질수록, 그 사회의 합법적인 폭력기관은 더 큰 힘을 얻습니다. 그리고 때로 그 힘을 남용합니다.
전두환 대통령이 통치하던 지난 5공화국 시절, 시인 김진경은 <광화문에서>라는 그의 시에서 경찰을 보면 없는 죄라도 만들어서 고백하고 싶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고백한다면 일단 용서받을 수 있을 것 같으니까요. 그만큼 경찰관은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그들은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 같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그들은 감시와 처벌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 같았습니다. 박노해는 이런 경찰관을 “경찰관님”이라고 부르며, 그들의 권력 앞에서 나약해진 노동자들의 처지를 알렸습니다. 경찰이 두려운 것은 그들 역시 인간의 목숨을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경찰이 허락받은 것은 이른바 물리적 힘입니다. 이것은 밥보다도, 의술보다도 더 직접적인 폭력입니다. 인간들은 밥 앞에서보다 물리적 폭력 앞에서 더 두려워 떱니다. 그래서 이런 권력은 “두려운 하늘”과 같다고, 박노해는 탄식한 것입니다.
아직도 박노해를 두렵게 만드는 권력적 실체는 또 남았습니다. 그는 판검사를 “판검사님”이라고 부르며 이들을 “무서운 하늘”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판검사란 심판관입니다. 아마도 심판 받는 일만큼 두려운 일도 없을 것입니다. 선생님으로부터 시험 결과 통지서를 받아들 때부터 재판소에서 재판받는 일에 이르기까지, 심판은 우리를 두려워하게 만듭니다. 그것은 재판으로 인하여 내가 ‘평가’되기 때문입니다. 평가란 나의 잘잘못을, 그리고 나의 높낮이를 백일하에 드러내는 일입니다. 사람 위에 사람 없다고 말하지만, 재판관은 사람 위의 사람 같아 보입니다. 이런 재판관은 인간의 목숨뿐만 아니라 명예 그리고 재산에 영향력을 미칩니다. 그들의 말 한마디가 무섭습니다. 재판관의 권력 또한 어느 시대에나 대단해서, 사람들은 재판관의 권력을 흠모합니다. 그래서 재판관이 되는 시험에 해마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듭니다. 집안에 재판관이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그 집안 전체가 힘을 얻은 듯 상기됩니다. 박노해는 이러한 재판관이 하층민들에게는 어마어마하게 두려운 존재라고 말합니다. 특히나 독재정권 하의 친여적 재판관은 노동자들에게 참으로 두려운 존재라고, 그는 행간 속에서 전하고 있습니다.
아, 박노해에게 무서운 권력이 또 있군요. 박노해는 <하늘>의 제 5연에서 관청의 관리들을 “겁나는 하늘”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박노해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관청에 앉아서 (나라를) 흥하게도 망하게도 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나라의 공복이라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국민 위에 군림하곤 했습니다. 그들의 계획과 그들의 결재는 국민들을 통제했습니다. 저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관리들은 선민의식을 갖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박노해는 이들 또한 민중에게는 겁나는 권력적 실체임을 폭로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각종 고시는 사람들의 부러운 관심 대상이고 그들의 성공은 신문지상을 화려하게 장식합니다.
박노해가 그의 시에서 사장님, 의사 선생님, 경찰관님, 판검사님, 관리라고 부른 사람들은 모두 보통 사람 이상의 권력을 가진 존재라고, 박노해는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높은 사람’이거나, ‘힘있는 사람’이거나, ‘돈 많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이 땅에서 주눅들어 사는 것은 바로 지위가 높지도, 힘이 있지도, 돈이 많지도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지위와 힘과 돈은 다 무엇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그것들은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데 가장 효과적인 것입니다. 인간의 욕망이 어디 한두 가지입니까? 그러나 제가 생각하기에 모든 인간의 욕망 중 가장 큰 욕망은 이 땅에서 목숨을 잃지 않고 영원히 살고 싶다는 욕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이 돈과 힘과 지위입니다. 아, 권력은 이래서 인간들의 영원한 주제입니다. 권력이라는 주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엘리아스 카네티의 『군중과 권력』이라는 책을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후진사회란, 권력이 한 곳에 집중된 사회입니다. 그것도 부당한 방법으로 권력이 특정한 곳에 집중된 사회입니다. 인간이란 어차피 정치적 동물이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얼마간의 권력이 주어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권력이 왜곡된 집중은 국민들을 불안하게 하고 그들을 허탈감에 빠지도록 이끕니다. 강한 자의 권력이 약한 자의 삶을 언제든지 황폐화 내지는 초토화시킬 수 있으니까요.
지난 시대, 우리 사회의 권력은 너무나도 한 곳에 집중되었습니다. 참다운 민주사회가 이룩될 수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역사의 과정이었다고 자위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으나 우리는 힘있는 사람, 돈 많은 사람, 높은 사람 앞에서 주눅들어 있었습니다. 우스갯소리를 하나 해야겠군요. 어느 날, 지금은 60세가 다 되어가는 시인 한 분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시골에서 상경하여 자수성가한 분이었습니다. 그는 저에게 말했습니다. “아, 글쎄, 내가 서울에 와서 부자들이 사는 동네를 지나가려면 그 높은 울타리에 삐죽이 고개를 내밀고 있는 개나리도 위대하게 보이더군, 어디 그뿐인가. 그 집의 울타리 너머로 들려오는 개소리도 대단해 보이더군, 나는 완전히 주눅이 들었던 거야”라고 했습니다. 부잣집 옆을 지나면서 이 시인이 느낀 감정, 경찰서 앞을 지나면서 없는 죄라도 만들어서 고백하고 싶다던 김진경 시인의 시구, 의사 앞에서 제 돈 내고 진료를 받으면서도 하인처럼 굽실거리는 우리들의 모습은 어딘가 잘못된 것이 분명합니다.
박노해는 이런 현실의 어둡고 무서운 권력들을 고발하면서 그가 소망하는 세계를 그의 마지막 두 연에 담아보았습니다. 그것을 여기에 다시 한 번 옮겨 적어볼까요?
나는 어디에서
누구에게 하늘이 되나
代代로 바닥으로만 살아온 힘없는 내가
그 사람에게만은
이제 막 아장 걸음마 시작하는
미치게 예쁜 우리 아가에게만은
흔들리는 작은 하늘이것지
아 우리도 하늘이 되고 싶다
짓누르는 먹구름 하늘이 아닌
서로를 받쳐 주는
우리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푸른 하늘이 되는
그런 세상이고 싶다
인용된 첫 연을 보면 박노해는 자신을 “대대로 바닥으로만 살아온” 사람으로 규정짓고 있습니다. 이때의 바닥은 하늘과 대비되는 세상입니다. 이 글을 읽은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삶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습니까? 높고, 힘있고, 돈 있는 그런 하늘로서의 삶이었습니까? 아니면 힘없고, 돈 없고, 지위도 없는 바닥으로의 삶, 그것도 대대로 바닥으로만 이어지는 삶이었습니까? 여기에는 본인 자신의 책임도 아주 크겠지만 냉정한 역사의 책임도 있습니다. 역사란 냉정하기 짝이 없는 속성을 갖고 있어서 역사 바깥으로 또는 역사 아래쪽으로 누군가를 내몰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바람처럼 지나가버리곤 합니다. 역사의 냉정성과 무심성을 생각할 때면 온몸에 전율이 일어납니다. 실제로 역사란 얼마나 차갑고 난폭하고 불공정한가요. 그러나 역사란 추상적 실체이기 이전에 인간이, 아니 인간만이 만든 산물이니, 그것을 해결하는 것도 인간의 몫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흔적인 역사를 시간적으로 누적시켜 꿰매는 존재 역시 이 우주 속에서 인간 밖에 없으니, 역사의 성패는 곧 인간의 성패를 의미합니다. 이 역사적 흠 속에 당연히 인간이 참여할 수밖에 없습니다.
박노해는 그런 역사 속에서 자신의 몸을 던지고자 했습니다. 그는 시로, 산문으로 노동운동으로, 저항과 데모로, 역사의 왜곡된 면모를 수정하고자 했습니다. 그의 역사 인식과 역사 참여의 방법이 타당했는지 어떤지는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사항이겠으나, 그가 인간이 만든 역사를 인간의 힘으로 적극 개선해보려고 ‘투신’한 사람임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함께 논의하고 있는 그의 시 <하늘>을 보면, 그가 만들고 싶은 세상은 누구도 검은 권력자가 되지 않는 평등한 세상입니다. 누구도 타 존재를 지매하지 않는 민주 세상입니다. 누구도 타 존재를 지배하지 않는 민주 세상입니다. 그는 이것을 가리켜 “서로가 서로에게 푸른 하늘이 되는 세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힘이 아주 작다는 것을 느낍니다. 자신은 기껏해야 아장걸음마를 시작하는 자신의 아이나 아내에게만 작은, 그것도 흔들리는 작은 하늘에 불과할지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박노해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투쟁했습니다. ‘사노맹’을 만들어 현재의 대한민국 체제를 뒤엎고 노동자가 중심이 되는 공산사회를 만들고자 꿈꾸기도 했으니까요.
그는 전향하고 석방되었습니다. 그는 명상집이자 시집인 『사람만이 희망이다』 속에서 자신의 희망은 동네 이장이나 한 번 멋지게 해보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아주 상징적인 것으로 읽힙니다. 말하자면 그는 인간사의 처음이 농사짓는 일이라는 점과, 따라서 그 일을 인류가 인간사의 근본으로 삼아야 하며, 그 패러다임을 인류사의 기저로 깔고 존중할 때, 비로소 인간들이 이 땅에서 온전히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이 동네 이장이 된다는 것, 과격한 혁명가가 동네 이장으로 변신한다는 것, 노동운동가가 동네 이장이 되고 싶다는 것, 이 모두가 어찌 보면 맥을 같이하는 점이지만, 적어도 그는 이제 밥의 배분 문제라고 할 수 있는 산업사회 속에서의 노동 혹은 인간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이전의 일로부터, 밥(쌀 혹은 생명) 그 자체의 건강한 보존과 생성이라는 농경사회적 생명운동가의 일을 소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인간 이전에 자연(생명)이 있으며, 인간은 산업사회적 인간이기 이전에 농경사회적인 자연임을 인식했다는 증거입니다. 여기에서 그는 이전보다 훨씬 근본적인 차원으로 내려왔으며, 또 현시대의 예민한 문제를 문명사적인 차원에서 포착하고 이해하며 대안을 만들어 가려는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박노해는 이상주의자입니다. 그는 역사 속에서 역사적인 인간으로 그 이상주의자의 꿈을 실현해보고자 했습니다. 그의 시는 이상주의자가 보여주는 비장미와 숭고미를 기저에 깔고 있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감상해온 <하늘>을 보더라도 이런 점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그에게 우리 모두가 서로를 받쳐주며 푸른 하늘이 되는 세상이란, 그가 가진 이상주의자의 꿈이 담겨 있는 세상입니다. 그는 역사라는 것이 원래 불평등과 불공정과 강자 우선의 세상임을 모르는 순진한 어린아이처럼, 아니 그것을 너무나도 잘 알지만 처음부터 그것을 부정해보고 싶은 사람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푸른 하늘이 되는 민주와 평등이 이상적인 세상을 간절히 소망한 것입니다.
이런 소망과 그 소망의 실현을 위해 그가 지적하고 비판한 세계 인식의 실상이 너무나도 날카롭기 때문에, 그리고 그 소망의 실현을 위해 그가 바친 열정이 너무나도 대단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앞에서 비장감과 숭고의 감정을 느끼는 것입니다. 박노해가 말하는 세상, 즉 서로가 서로에게 푸른 하늘이 되는 세상이 진정 민주적인 세상이라면, 우리 시대는 아직도 한참 가야 할 길이 남아 있습니다. 그 세상이 올 수 있다는 확신은 없지만,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검은 하늘과 같은 세상을 푸른 하늘과 같은 세상으로 바꾸려는 노력을 할 수밖에 없겠지요.
이상주의자는 당당한 것 같지만, 이상이 높기에 세상에서 외롭습니다. 이상주의자는 숭고한 것 같지만, 그의 뜻이 숭고하기에 이 세상에서는 쓸쓸합니다. 다시금 우리가 『시 읽는 기쁨』 1권에서 다룬 안도현 시인의 『외롭고 높고 쓸쓸한』이라는 제목이 떠오르는군요. 박노해가 사상범으로 수감될 만큼 과격한 모험을 계속하였지만, 그것은 기본적으로 그가 인간을 신뢰하고 인간을 통하여 이상사회를 만들려는 꿈이 강렬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그가 수감되었을 때, 그는 비록 자신이 꿈꾸는 이상사회가 현실적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고 그것에 도달하려는 방법 또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전향하게 되었지만, 그는 비록 자신이 꿈꾸는 이상사회가 현실적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고 그것에 도달하려는 방법 또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전향하게 되었지만, 그는 이상주의자가 감당해야 할 ‘외롭고, 쓸쓸한’ 심정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입니다.
글을 마치며 하고 싶은 말은, 수많은 역사적 질곡 속에서도, 인간이 역사를 포기할 수 없는 한(왜냐하면 역사를 포기한다는 것은 인간이기를 그만둔다는 말과 같으니까요.)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푸른 하늘이 되는 그런 세상은 영원한 이상향으로 인간들의 마음 속에 남아 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 시는 시대적 현실을 반영하면서도 그러한 인간들의 원형젖ㄱ인 소망에 호소하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 혹시 여러분들은 누군가에게 여러분 자신이 검은 하늘과 같은 존재가 되어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보십시오. 또한 지금, 혹시 여러분들은 누군가로부터 검은 하늘과 같은 존재를 느끼고 두려움에 떨고 있지 않은지 점검해보십시오.
―정효구, 『시 읽는 기쁨』, 작가정신,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