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식(金富軾)의 〈등석(燈夕〉
城闕深嚴更漏長
성과 궁궐이 깊고 엄한데 경루가 길다
燈山火樹桀交光
등불 산과 불나무가 어울려 찬란해라
綺羅縹緲春風細
가는 봄바람에 능라의상이 너훌 너훌
金碧鮮明曉月涼
서늘한 새벽달 아래 금빛ㆍ푸른빛 선연해라
華蓋正高天北極
어좌는 하늘 북극에 드높이 마련되고
玉爐相對殿中央
옥로는 대궐 중앙에 마주 대해 놓여 있네
君王恭默疏聲色
임금님 공묵하사 성색을 안 즐기시니
弟子休誇百寶粧
이원의 제자들아 백보장을 자랑 마소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역) | 1968
이 번역 뒤에 간단한 주석이 있으나 여기서는 생략하였다. 필자는 이 시를 다음과 같이 역주하여 본다.
〈등불 잔치하는 날 저녁燈夕〉
城闕沈嚴更漏長 성안의 궁궐 깊고 엄숙하며
성궐침엄경루장 시간은 늦어만 가는데,
燈山火樹桀交光 등은 산 이루고 불은 나무 이루어
등산화수걸교광 뛰어나게 빛 엇갈리네.
綺羅縹緲春風細 아름다운 비단 의상 아늑하고 아늑함은
기라표묘춘풍세 봄바람 살랑거리며 스치기 때문이요,
金碧鮮明曉月凉 누렇고 푸른 단청 선명함은
금벽선명효월량 새벽 달 빛 차갑기 때문일세.
華蓋正高天北極 화려한 임금님의 행차
화개정고천북극 하늘의 북극성 자리를 높게 차지하셨고,
玉繩相對殿中央 빛나는 여러 대신들 궁정 중앙에서
옥성상대전중앙 마주 보고 서 있네.
君王恭黙疎聲色 임금님과 제후님들 공손하고 묵묵하시어
군왕공묵소성색 노래와 여색을 멀리하시니,
弟子休誇百寶粧 궁중의 여러 악공들 백 가지 보물 장식
제자휴과백보장 자랑하지 말라.
*등석燈夕: 등불 잔치하는 저녁. 이런 밤 잔치는 유희의 일종으로 하는 경우도 있고, 또 불교의 행사로 하는 경우도 있음.
*성궐城闕: 본뜻은 성 위에 있는 높이 솟은 망루라는 뜻이나, 여기서는 궁궐, 대궐이라는 뜻이나 비슷하게 쓴 것 같음. 《시경》 〈푸르고 푸른 그대의 옷깃이여靑靑子衿: “왔다 갔다 하며 성루에서 기다리네挑兮達兮, 在城闕兮”
*심엄深嚴: 깊고 엄숙함. 궁중의 분위기를 표현할 때 더러 사용함. 당나라 정전鄭畋의 〈중추에 궁중에서 숙직하며中秋直禁苑〉 “황홀하게도 붉은 땅 안에 돌아와서, 깊고 엄숙하게 짙게 붉은 대문 안에서 숙직하노라恍惚歸丹地, 深嚴宿絳處”
*경루更漏: 궁중에 설치한 물시계.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물방울이 바꾸어[更] 가면서 밑으로 떨어지는 것[漏]을 제어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부름. 오경이 완전히 끝나면 북을 번갈아 두드려 궁문을 열게 하였다고 하며, 시내에 있는 종각에서도 그 소리를 받아서 두드렸다고 함,
*등산燈山: 등불이나 불꽃놀이 등이 휘황찬란한 것을 비유. 당(唐)나라 소미도(蘇味道)의 〈정월십오야(正月十五夜)〉에 “화수와 은화가 합하니, 성교의 철쇄가 열린다火樹銀花合 星橋鐵鎖開” 하였는데, 《고사성어고(古事成語考)》 세시조(歲時條)에 ‘화수은화합(火樹銀花合)’은 등불이 휘황찬란한 것을 가리킨다고 하였다.-고전db 주석정보에서 인용.
*화수火樹: 여기서는 등을 달아놓은 나무라는 뜻.
*화개華蓋: 임금님이 행차하실 때 햇볕을 가리기 위하여 드는 큰 양산 같은 것.
*금벽金碧: 황금색과 푸른 빛 단청. 북송 소식의 〈왕정국이 보내준 시의 운자에 맞추어次韻定國見寄〉: “조정으로 돌아오니 꿈과 같은데, 두 대궐은 누렇게 푸른 단청 아찔하다네還朝如夢中, 雙闕眩金碧”
*북극北極: 여기서는 북극성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라는 뜻. 북극성을 중심으로 하늘이 별 자리가 바뀐다고 보아 임금님의 자리로 비유됨. 당 두보의 〈동짓날 흥을 풀다冬至遣興〉: “옥으로 만든 안석은 천자님의 북극성 자리에 본래부터 있었던 것이요, 붉은 관복 입은 벼슬아치들은 다만 궁전 중간에 서있었다네玉几由來天北極, 朱衣只在殿中間”
*옥승玉繩: 여러 별이라는 뜻. 원래는 북두칠성 가운데 다섯 째 별인 옥형(玉衡)의 북쪽에 있는 별 두 개를 가리켰으나, 후에는 뭇 별을 말하게 되었음. 《한사》 4-521 참조. 옥로(玉爐: 궁전 양쪽에 놓여 있는 큰 옥 화로)로 된 책(《三韓詩龜鑑》)도 있는데, 바로 그 연의 위의 구절에 처음 나오는 화개와 대(對)가 되는 말로서는 옥승보다 더욱 적합하나 의미로 보아서는, 옥승이 여러 별들, 즉 이 행사를 축하하여 주기 위하여 모인 여러 장관이라는 뜻으로 더욱 적합할 것 같다.
*공묵恭默: 침묵(沈默)한 태도. 《서경(書經)》 열명 상(說命上)에, “공경하고 침묵하여 치도(治道)를 생각하노라니, 꿈에 상제께서 나에게 어진 보필을 주시다.[恭默思道 夢帝賚豫良弼]”라고 하였다.-고전db에서 인용.
*제자(弟子): 당 현종 때 궁중에서 후원하여 양성한 음악 기관 중의 하나가 이름이 이원(梨園)이었는데, 거기에서 배우는 남녀 가수들을 이원제자라고 하였음. 여기서는 이 연등 행사를 빛내기 위하여 동원된 악공들을 말함.
이 시는 궁중에서 열린 관등 잔치를 노래한 것인데, 조정의 대신으로서 궁중 행사에 참석하여, 그 행사의 장엄한 분위기와 임금님의 훌륭한 덕을 칭송하는 시다.
위의 주석에도 밝혔지만, 이러한 관등 행사는 중국에서는 옛날부터 매우 성행하였고 지금까지도 축제로 이어지고 있다. 다음에 먼저 북송의 수도 개봉에서 열린 이런 관등 행사의 일면을 설명하는 글을 한 편 살펴보자.
맹원로(孟元老)가 북송의 수도인 개봉의 풍속을 기록해놓은 《동경몽화록》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정월 초이레부터 등을 달 가설장치를 만드는데, 폭포가 흘러내리는 형상을 만들어놓고 그 좌우의 문에 용이 노는 모양〔戱龍之狀〕을 만들어 단다. 또 14일이 되면 황제가 수레를 타고 오악관(五嶽觀) 영상지(迎祥池)에 행차하여 신하들과 연회를 베푼다.
임금의 수레가 등불로 장식한 등산(燈山)에 들어서면 어련원(御輦院)의 사람이 수간미래(隨竿尾來)라고 외친다. 이 말에 따라 천자의 수레가 빙 돌아서 거꾸로 가면서 등산을 구경하고 돌아오는데, 이것을 발합선(鵓鴿旋)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오악관에서의 연희와 등불 용이 달리는 듯한 형상이 있고, 그것을 구경하는 황제의 행차가 비둘기가 선회하여 돌아오듯이 거꾸로 돌아온다는 뜻이다. 《古今事文類聚 前集 卷7 上元 京師燈棚》-고전db 각주정보에서 인용.
이 글에서 도교 사원인 “오악관”이 나오는 것을 보면, 송나라 때의 이런 행사는 중국의 민간 신앙인 도교과 관련이 있는 것 같이 보인다.
고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전집》 (제13권)에는 이 “등석” 행사와 관련된 시가 10여 수나 보이는데, 그 중에 1수만 한국고전db에서 인용하여본다.
〈상원일(上元日) 등석(燈夕)에 등롱(燈籠)의 시를 한림원(翰林院)에서 지어 올리다〉
휘황한 불꽃은 꽃송이 가지런히 핀 듯하고 / 煌煌列燄花齊綻
엷고 가벼운 비단은 물같이 맑구나 / 薄薄輕紗水正澄
일만 사람을 한 그림자로 비추었으니 / 炤却萬人同一影
참으로 대왕등임을 비로소 알았네 / 始知眞箇大王燈
*상원일(上元日) : 음력 정월 15일을 말하는데, 금오(金吾)에게 분부하여 밤에 통행금지를 풀게 하고 전후(前後) 각 1일에 걸쳐 관등(觀燈)놀이를 하게 하였다.
등불 잔치를 하는 날 시를 바치는 행사를 아울러 한 것을 보면, 아마 새해가 오고 변화의 조짐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국태민안과, 임금의 복록을 아울러 비는 것도 이 등불을 구경하는 날, 문신들이 한 가지 행사가 되었던 것 같다. 이런 것을 보게 되면, 위에서 본 것과 같은 이 등석이라는 행사는 민간 신앙과 관련된 도가적인 성격이나, 계절의 변화에 순응하며 국태민안과 군주의 장수를 비는 유가적인 성격에다, 기복적인 성격을 가미하고, 또 다분히 유희 오락적인 환락적인 성격까지 추가한 매우 복합적인 요소를 지닌 국가행사였던 것 같다.
한 편 불교적인 성격을 띤 연등회는 고려 시대에는 1월 15일, 또는 2월 15일에 있었으며, 이와는 별도로 4월 8일 부처님 오신 날에 맞추어 등불을 부처님 앞에서 밝히는 전국적인 행사가 있었다고 한다.
- 《한백》 15-320 참조.
이렇게 보면,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고려에서의 등석 행사는 또 불교적인 의미까지도 가미되는 것은 당연한 것 같은데, 그런 행사가 구체적으로 어떠하였는지 소상하게 설명한 글을 필자는 아직 잘 찾아 읽어 볼 수 없었고, 다만 문신들이 이런 날 지은 시만 더러 보고 있을 뿐이다.
자. 그러면 당시 그 시대의 대표적인 문신 김부식이라는 분이 지었던 이 〈등석〉 시를 다시 살펴보기로 하자. 이 시를 그 분이 몇월 몇일 등불 행사를 보고 지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다만 “아름다운 비단결 같은 의상 아늑함은 봄바람에 가늘게 스치기기 때문이요”라는 구절이 있는 것을 보아서는 4월 초파일일 것 같지는 않고 그 보다는 좀 더 이른 봄날이 아니었을까 생각하여 본다. 아마 2월 보름쯤이 아닐지?
이 시의 제1련 에 나오는 “경루가 길다”(신호열 역)는 말은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을 놓고서 이야기하는 것일까? 필자는 이 말을 “시간은 늦어만 가는데“라고 의역을 하여보았다. 그 다음 구는 앞의 燈山火樹 4자를 신호열 선생님은 “등불 산과 불나무가”라고 번역하셨는데, 필자는 “등은 산을 이루고, 불은 나무 이루어”라고 옮겼는데, 이 두 가지 번역이 다 맞는 것이다. 그러나 차이는 명사만 있는 이 네 글자 중에서 신 선생님은 첫째와 셋째 글자를 명사인데 형용사로 활용하여 하여 보셨고, 나는 오히려 1,3 자는 명사 그대로 두고, 2,4 자를 명사인데 동사로 활용하여 풀어 보았을 뿐이다.
이 2구의 제5자인 “桀” 는 어떤 한시 선집에는 “燦”로 적은 것도 있는데, 어느 글자로 적든지 간에 모두 앞에 나오는 등불이 “야단스럽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니, 별 상관은 없을 것같이 생각된다.
제2련(3구와 4구)는 대對를 맞추어 지은 것인데, “綺羅”와 “金碧”도 대로 쓴 것으로 풀어야만 한다. 그래서 나는 “기라”는 신 선생님과 같이 비단 “의상”으로 풀었지만, “금벽”은 누렇고 푸른 궁궐 건물의 화려한 “단청”으로 보아서, 이 두 글자를 추가하여 풀었다. 제3구의 뒤쪽 “春風細”의 “가늘 세”자는 본래는 형용사이지만, 여기서는 동사로 활용된 것인데, “가늘게 스치다[細拂]”과 같은 뜻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글자를 봄 바람 살랑살랑 스치고“로 풀어 보았다.
마지막 연(7,8구)은 임금님을 추켜올리고, 악공들의 사치를 훈계하는 말이 그대로 직설적으로 쏟아져 나와서 좀 감칠맛이 없지만, 그 위의 3연은 궁중 안에서 밤이 이억토록 계속된 이 어리어리한 어전 행사를 아주 잘 표현하였다고 생각한다.
이 시에서 특히 궁성이나 국왕과 관련되어 사용된 어휘는 매우 평범한 말 같이 보인 것도 사실은 매우 오래된 고전에서 따가지고 왔음이 우선 놀랍다.-城闕(시경), 恭默(서경) 등. 옛날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벼슬아치들이 궁중에서 쓴 글이 대개는 그러할 것이기는 하지만…
이 시에서 당시의 일반 민간 풍습이나, 불교적인 의식 같은 것은 엿볼 길이 없기는 하지만, 당시의 한 대표적인 관각館閣문인, 또는 어용문인의 전아하고 세련된 어용문자를 읽어 볼 수는 있을 것 같다.-여기서 “어용”이라고 하는 말은 전통 사회의 문신들에게는 글로서 나라의 인정을 받았다는 영광스러운 말이지, 지금 같이 출세를 위하여 통치자에게 이용당하여 글을 판다는 부정적인 뜻을 가진 것은 아니다.
다시 한 번 쉽게 풀어놓는다.
궁성에 높이 솟아 있는 이 망루는
매우 깊고도 엄숙한데.
물시계 보고서 시간을 알리며
치는 북소리는
이미 여러 번 시간이
흘러가고 있음을 알리고 있는데…
등 바구니는 산을 이루었고
불은 숲을 이루었는데,
그 빛깔들 우뚝하게
서로 엉키고설키고 있다네.
아름다운 비단 의상.
아늑하고 아늑하게 나부낌은
봄 바람 가늘게 스침 때문이요,
화려한 단청 빛깔
선명하게 드러남은
새벽 달빛 서늘한 소치일세.
화려한 상감님 행차
저 높은 북극성 자리에
바야흐로 높이 솟으셨고,
늘어선 여러 신하들
궁전 중앙에
서로 마주 보고
서 있구나.
주상 전하께서는
늘 매사에 겸손하고
과묵하시니,
여러 악공들
허리에 두른
온갖 보물 같은 것
자랑하지 말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