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의 글은
2015년 11월 9일 포스팅하였습니다.
오늘은 삼겹줄의 탁구.....
그 비밀회동을 가졌습니다.
탁구 치는 일이 비밀회동이 된 사연은
사역의 큰 상처, 그 자체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동안 화원 비전 센타에서 탁구 모임을 이어 가다가
가을 바람에 새롭게 사역의 둥지를 튼 큰 물가의 좋은 땅 옥토의 그 곳에서 삼겹줄의 탁구를 이었습니다.
넓은 교회당 지하에는
오직 탁구를 칠 수 있는 고정된 공간이 마련되었습니다.
바닥의 쿠션이 좋아
무릎 관절의 탁구의 부작용을 전혀 염려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점심 시간 맞추어 만났는데
교회당 주변이 맛집 식당가로 유명하여 그 가운데 고등어 정식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고등어 정식을 많이 먹어 보았는데
그 동안 먹은 고등어 정식과는 차원이 다른 안동 간고등어의 진정한 맛을 보았습니다.
특히 밥맛이 너무 좋아
다시 찾고 싶은 식당이었습니다.
점심을 맛있게 먹고 커피 한 잔 마신 후....
저녁 시간 때까지 탁구 경기에 몰입하였습니다.
그 동안 집에서 혼자 세도우 탁구를 쳤는데
삼겹줄의 탁구는 물을 만난 고기의 생동감으로 넘쳤습니다.
탁구는 전신 운동으로
최고의 유산소 운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탁구를 친 후 얼마의 휴식 시간을 가지면서
죽은 자의 세례에 대한 말씀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9절의 죽은 자들을 위한 세례는
아주 난해한 성경구절입니다.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고전15:29)
성경을 읽다가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에 걸려 멈칫하며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난해한 구절로 인식하는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란 말씀은
종교의식으로 세례받지 않고 죽은 사람을 위하여 대리 세례받는 모습을 상상하면 말씀의 덫이요,
함정이며 의혹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종교의식으로 세례받지 않고 죽은 사람을 위하여 대리 세례받는 실상은
사울 서신의 그 어떠한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고 바울의 신학과 대립되는 사상입니다.
그러므로 세례의 본질에 대한 사도 바울의 생각을 읽는다면
난해한 구절도 아니며 말씀의 의혹을 갖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6장 4-5절 말씀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세례 받는 것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므로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세례 의식은 산 사람이 받지만
세례의 본질은 죄로 인해 죽은 사람이 예수의 죽으심과 연합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요,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영생의 부활을 믿음의 소망으로 갖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부활의 소망을 말씀하면서
세례의 본질적인 의미를 세례에 대한 다른 설명 없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의 소망으로 부활을 강조하였습니다.
죽음의 연합으로서 구원의 본질인 세례는 죽음의 향연이요,
또한 영생의 부활을 이루는 생명의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례는 의식의 세례 뿐만 아니라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종말론적인 고난의 삶으로 인내의 믿음을 온전히 이루는 영적 예배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운다는 바울의 고백은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는 말씀을 닌해하지 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의식의 세례가 아니라 구원의 본질로서의 세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된 복음을 위하여 종말론적인 고난의 행진을
부활의 소망을 이룰 때까지 계속하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는 말씀과 병행 구절은
또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말씀입니다.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고난과 박해를 받는 바울의 전도 여정은
구원의 본질로서 세례를 행하는 것이요, 영생의 부활, 그 놀라운 소망으로
인내의 믿음을 온전히 이루는 것입니다.
바울은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는 말씀으로
의식의 세례가 아닌 구원의 본질로서의 세례를
복음의 빛으로 계시하였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고린도전서 15장의 전체적인 말씀은
세례와 구원의 관계를 죽음과 부활의 역학적인 고난의 삶으로 승화시킨
바울 복음의 정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짧은 나눔이었지만
난해한 성경의 말씀을 함께 나눌 수 있어 좋았습니다.
그 후 교회당 밖 주자장에서
우리 허 강도사님께서 다산에서 가지고 온 대봉감 한 박스를 나누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교제하였습니다.
집에 와서 대봉감을 꺼내보니
주먹보다 훨씬 더 컸습니다.
지난 번 청송 갔을 때 재래시장에서 대봉감 한 박스를 구입하였는데
청송의 대봉감보다 두 배나 더 컸습니다.
북쪽의 청송보다 남쪽의 다산 대봉감이 훨씬 더 큰 것은
보다 더 따뜻한 날씨 때문일 것입니다.
감나무는 해거리를 하는 과일로
충분한 거름을 주지 않으면 그 해는 감이 하나도 열리지 않습니다.
어릴 때 감홍시를 먹으면서 자란 추억 때문에
해마다 가을의 끝자락 겨울의 문턱에 항상 대봉감 한 박스를 구입해서 겨우 내내 홍시를 먹습니다.
대봉감의 홍시는
그 맛이 최고입니다.
우리 허 강도사님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카페의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올 겨울은 집안 가득 맛 있는 대봉감 홍시로
아주 따뜻하게 지낼 수 있게 되어 감사하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