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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양식, 일용할 양식
출 16: 1-15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 5 책을 모세오경, 또는 오경이라고 하며 유대인들은 '토라'라고 불렀습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먼저 공인된 성경이 바로 이 모세오경이었습니다. 모세 오경은 우주 만물과 인류의 기원을 말하고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으신 언약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 구약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책들이라고 할 것입니다. 창세기가 믿음의 족장들의 개인적인 신앙을 보여주었다고 하면 출애굽기는 하나님의 백성들인 이스라엘이란 공동체의 신앙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출애굽기를 통하여 만나게 되는 하나님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출애굽기를 연구하면서 과연 출애굽 사건은 믿을만한 사건인가? 역사적으로 분명히 있었던 사건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이 실제로 있었다고 하면 언제 일어난 사건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 성경학자들이 가장 의심하는 것은 출애굽의 사건이 고대 근동 사회, 특별히 이집트라는 나라에 고고학적으로 증명할만한 유물이나 기록들이 남아 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러운 것은 이집트라고 하는 나라는 자신에게 불리한 역사는 후대에 잘 남겨놓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성서와 근동의 역사를 연구하는 고고학자들은 히브리 민족이 애굽에서 노예생활하다가 애굽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이주한 것을 절대로 부인하지 않습니다. 구약신학자로, 고고학자로 너무나 유명한 올브라이트(William Foxwell Albright) 박사는 "삼각주 동부 지역에 대한 현재의 지형학적인 지식을 갖고 판단하더라도 출애굽기에 나오는 출애굽 시작에 대한 설명은 지형학적으로 완전히 맞는 말이다"라고 했습니다. 올브라이트의 제자이면서 고고학계의 거장이며 "이스라엘의 역사"라는 명저를 남긴 죤 브라이트(John Bright) 박사도 출애굽은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죤 브라이트 박사는 "이집트에서의 노예생활에 관한 성서전승은 틀림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장소로 히브리 노예들이 건축한 비돔과 라암셋은 애굽에 있는 역사적인 도시였습니다. 비돔이라는 도시는 이집트 동부에 위치하여 있고, 또한 라암셋는 옛날 힉소스 왕조의 수도였던 아바리스라는 도시로 히브리인 노예들이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는데 동원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아니라고 역사적으로, 또 과학적으로 부인할 수 없다고 합니다. 출애굽 사건이 없었다고 하는 명백한 증거를 제시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불리하거나 또 중요하지 않거나 자존심이 상하는 일들은 기록하지 않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히브리 사람들은 자기들의 비참한 역사를 사실대로 기록하는 역사관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은 반드시 사실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불리한 역사는 남겨놓지도 아니하고 유물도 유적도 파괴하지만,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아픈 과거를 잊지 않으려고, 과거 불행하였던 역사를 사실대로 기록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고고학자들은 오히려 성경을 근거로 하여 고대사를 연구하고 있을 정도로, 히브리인들은 모든 것을 사실에 입각하여 기록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더욱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을 읽어보고 다시 성경을 근거로 하여 애굽이나 시나이 반도나 가나안 땅에서 고고학적인 가치를 지닌 유물을 찾고, 기록된 장소를 발굴하고 보니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이 얼마나 정확하냐 하면 민수기 13:22에 보면 알게 됩니다. 여호수아의 이스라엘 군대는 12명의 정탐꾼들을 가나안에 들여보내면서 헤브론을 정탐하게 되었는데 민수기13:22에 기록하기를 "헤브론은 애굽의 소안보다 칠 년 전에 세운 곳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헤브론이라는 도시가 아주 오래된 도시인데, 애굽의 소안이라는 도시보다도 7년 전에 세워진 도시라고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역사책으로 보려는 시도는 우리가 금해야 할 일이지만, 그렇다고 역사성 그 자체를 부인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현대에 출애굽기를 연구하면서 문제를 삼아야 하는 것이 있다면 "출애굽이 과연 있었느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출애굽이 언제 있었느냐?"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러 신학자들은 고고학적인 증거와 성경의 연대를 계산하면서 열왕기상6:1을 참고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사백팔십 년이요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 된 지 사년 시브월 곧 둘째 달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라"고 했습니다. 이 열왕기상 6:1의 말씀은 출애굽 연대를 결정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시작한 해는 B.C. 966년이었습니다. 그 해로부터 480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주전1446년이 됩니다. 그런데 많은 고고학자들이나 구약 신학자들이 주전 1446년과 1447년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죤 리아(John Rea)라는 학자는 주전 1447년을 말하고 있습니다. 출애굽의 연대를 계산하는데, 모세가 에돔 족속을 정복한 사건과, 모압 족속을 정복한 사건, 그리고 선지자 발람의 저주 사건의 연대를 추정하거나, 여리고 성이 무너진 연대를 과학적으로 계산할 때에 주전 1447년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 학자들이 말하는 주전 1446년을 출애굽의 연대로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의 말씀이 얼마나 정확한 연대와 정황을 말하고 있는지를 알아야될 것입니다.
오래간 만에 구약신학에 대한 여러 책을 볼 수 있었습니다. 죤 브라이트의 [이스라엘의 역사]라는 책과 문희석 박사가 펴낸 [구약성서 배경사], S. G. 드 그라아프(De Graaf) 박사의 [약속 그리고 구원]이라는 책이었습니다. 특별히 그라아프의 책에서는 출애굽기에 나오는 유월절 사건을 부활과 연결시키고 있었습니다. "부활절은 이스라엘 유월절의 성취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홍해를 건너는 오늘의 사건을 "주의 날"이라고 해석하며 하나님의 사랑의 권리를 행사하시는 날로 이해하였습니다. 홍해를 건너는 날은 어떤 날이었습니까? 이스라엘을 위한 구원과 승리의 날이었고, 그리고 불신 세력인 애굽과 바로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아주 큰 주제를 가진 사건이요, 중요한 본문입니다. 권능의 손길을 통하여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발견하게 됩니다. 구약에서 손이란 말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상징, 표징으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16절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 21절에서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매", 26절에도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물이 애굽 사람들과 그들의 병거들과 마병들 위에 다시 흐르게 하라" 27절에서도 "모세가 곧 손을 바다 위로 내밀매 새벽이 되어 바다의 힘이 회복된지라"고 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손을 내어 밀라"는 말이 4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 뒤 따라 오는 출애굽기 15장의 모세의 노래에도 6절 말씀에 "여호와여 주의 오른 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 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12절에서도 "주께서 오른 손을 드신즉 땅이 그들을 삼켰나이다"라고 하였고, 그 외에도 "주의 팔이 크므로", "주의 손으로 세우신" 이런 표현으로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여기서 만나고 계시하시는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을 인도하시고, 지키시는 하나님이시며,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하여 싸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애굽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며, 택하신 자녀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모세를 만나고 가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만나고 그 분을 모시고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인도 하에 그들이 모여 있던 고센숙곳을 떠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래 전에 요셉의 형제들이 약속했던 대로 조상 요셉의 뼈를 가지고 애굽을 나왔습니다. 요셉의 뼈를 가지고 나옴으로 조상과 맹세한 약속을 지켰다는 뜻도 있지만, 이번 출애굽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고 하나님이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바였다고 하는 뜻도 있었습니다. 신실한 믿음의 사람인 요셉의 뼈를 가지고 나온 것으로 하나님은 반드시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가나안 땅에 들이신다고 하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애굽이 기뻐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전 애굽 사람들은 하나님이 위대하시고 권능이 있다보니 이스라엘 사람만 보아도 두렵고 떨리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즉시 인도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빠른 지름길이 있었는데 블레셋 땅을 통과하여 지중해 연안으로 해변을 따라가는 길이었습니다. 해변의 길이 있습니다. 이 길을 "비아 마리스"(Via Maris)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이라고 하였는데 이 길은 옛날부터 군사도로였으며, 대상들이 다니는 길이었습니다. 이 길로 가면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짐승을 데리고 간다고 하여도 1개월이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2주간이면 들어갈 길인데,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40년을 방황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려고 이스라엘을 광야로 몰아넣고 있는 것입니다. 블레셋 땅으로 가는 길에는 블레셋이라는 도시 국가들이 있어 이미 철기 문화를 발전시키고 그들은 대단히 호전적인 민족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저들 블레셋과 한판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애굽으로 후퇴하게 되고 다시 노예로 되돌아갈 것이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것을 내다보시기 때문에 가까운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머나먼 광야 길로 돌리시고 있는 것입니다.
출3:17절입니다.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우리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승승장구하고 번영의 일로를 걸어가고 싶지만, 그 길은 죽음의 길이라고 판단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를 통하여, 질병을 통하여 머나먼 길로 돌이시는데, 그 길은 죽음의 길이 아니라 사는 길이요, 실상은 복된 길이었습니다.
여러분, 구름기둥과 불기둥이란 어떤 상징성이 있습니까?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이란 말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거하시고 있다는 뜻이요, 하나님이 인도하고 보호하신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행진하는 광야는 얼마나 더운지 모릅니다. 거대한 구름기둥이 뜨거운 사막에 그늘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밤에는 불기둥과 불 덮개를 만들어서 어두움을 밝혔으며 기온이 급강하하기 때문에 불기둥과 불 덮개는 추위를 막아주었습니다.
여러분, 광야라는 곳은 정말 사람 살 곳이 되지 못합니다. 광야는 비가 아주 적게 와서 광야가 된 것입니다. 광야는 낮에는 뜨거워서 타죽을 정도요, 밤에는 추워서 얼어죽을 지경입니다. 비는 오지 않지요,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추워지니 바위들이 부수어져서 골짜기마다 모래가 쌓여 있습니다.
실제로 일본의 한 목사님이 지프를 타시고 광야에 들어가셨다가 차가 고장나는 바람에 물이 없어 목말라 타죽었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자, 그런데 약200만명이 되는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은 광야로 몰아넣으신 것입니다. 이집트라는 나라는 나일강이 흐르는 지대만 조금 벗어나면 전 국토가 광야 지대입니다. 가나안으로 나간다고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가 가로막힌 광야에 접어든 것입니다. 광야에는 이정표가 없습니다. 길이 없다는 말인데, 땅에는 길이 나있지 않지만 구름기둥은 이스라엘이 가는 길이었습니다.
애굽의 바로는 시시각각 이스라엘의 행로에 대하여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 해변의 길로 가지 않고 광야로 접어들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이스라엘은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잡힐 독 안에 든 쥐와 같았습니다. 애굽의 바로는 전군 동원령을 내렸습니다. 이스라엘을 놓치지 말고 다시 잡아다가 국고성을 쌓고, 농사를 짓게 하고, 도로를 건설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바로가 온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의 진영 가까이에 이르게 되었을 때에 이스라엘은 애굽의 군대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눈을 들어보았더니 애굽의 군대가 자기들 뒤에 미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심히 두려워하였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이제 두려움을 모세를 향한 원망으로 이어졌습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우리에게 이 같이 하느냐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이 때부터 이스라엘의 원망은 크게 10차례 계속됩니다. 원망하는 말은 불신앙을 낳고 나중에서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고, 마침내 하나님의 심판의 자리에 들어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때 모세는 백성에게 외쳤습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 아주 중요한 일들을 수없이 교훈하시고 있습니다. 앞에는 홍해 바다가 가로놓여 있고 뒤에는 애굽의 군대가 덮치려고 하는 순간인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앞으로 나아가게 하라고 하십니다. 모세를 향하여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고 약속하시고 명령하시고 있습니다.
우리가 싸우는 영적인 싸움의 모델이 되기도 하고 신앙생활은 이렇게 하여야 한다는 교훈을 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사를 설명하는데 아주 중요한 성경이 바로 출애굽기라는 성경입니다. 우리는 출애굽기를 잘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을 인도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진영에 앞서 가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어 이스라엘을 인도하고 있습니다. 신1:30에서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같이"라고 하셨습니다. 전에 읽던 성경에 보면 너희보다 앞서 가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은)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신1:32)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우리 보다 앞서 가시고 있으며 먼저 가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살겠다고 하면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녀들을 지키시고 있습니다. 애굽의 병사들이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구름 기둥을 돌려 길을 막으시고 애굽의 군인들이 있는 곳은 흑암으로 앞을 보지 못하게 하시고 이스라엘은 밝게 하셔서 지켜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고, 안보하시고 있습니다.
민수기 6:24-26의 말씀은 제사장의 축복기도가 있습니다. 24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데 지켜주시는 복을 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 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하여 싸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싸우시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작전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는데, 사랑하는 자녀들은 일찍이 홍해를 건너 보내놓고 애굽 군인들을 바다로 끌어들여 수장시키고 일망타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건너갈 바닷길을 마른 땅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밤새도록 홍해 바다에 길을 만들고 있습니다. 바다 한 가운데란 진흙이 깔려 있게 마련인데 그 바닥을 마른 땅으로 만들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싸우시는 하나님이시며, 만군의 여호와이십니다. 과거에는 애굽의 군대가 크게 보이고 두려운 존재로 보였으나, 이제 우리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크게 보아야 합니다. 애굽의 군인들을 바닷길로 끌어들이셨는데 애굽인들은 전차대를 몰고 들어섰으나 바퀴가 빠지고 넘어질 때에 하는 말이 "이스라엘 앞에서 우리가 도망하자. 여호와가 그들을 위하여 싸워 애굽 사람들을 치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홀로 싸우실 수도 있으나 우리에게 하나님만을 신뢰하면서 손을 내 밀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고 싶어도 우리가 손을 내어밀어야 하고 발걸음을 앞으로 내어 디뎌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문제 속에 답을 주시는데, 답이 없는 문제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넘실거리는 홍해 속에 길을 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바다 속에 마른 길을 드러내시고, 이스라엘로 안전하게 건너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장차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애굽은 죄악 세상의 상징입니다. 이 죄악 많은 세상에서 유월절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죄사함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홍해를 건너면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광야라는 교회 생활을 보내게 하시고 마침내 가나안이라는 축복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있습니다. 출애굽은 우리가 죄악 세상에서 구원받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그림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이 출애굽기는 하나님의 구속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섭리가 담겨 있는 성경인 것입니다. 이 세상이란 애굽과 같이 부유한 세상이지만, 악한 영이 지배하는 곳이요, 약속이 없는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들과 맞바꾸시면서 우리를 구속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말하는 학자들 중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예정하시고 인도하시는 은혜를 섭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에는 보존섭리가 있고 협력 섭리가 있고 통치하시는 섭리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보존하시고, 협력하시고 통치하시는 섭리로 이끄시고 있습니다.
31절입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대에 하나님의 큰 능력을 보고 체험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앞서 가시면서 인도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싸워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들려진 지팡이요, 하나님의 능력의 손을 의지하면서 이 악한 죄악 세상과 싸워 승리하여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밤새도록 우리를 위하여 동풍을 일으키시고 새벽이 될 때 애굽을 몰아 치시고 있습니다. 소망의 새벽, 승리의 새벽을 기다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원망하는 사람들
출 16; 1-16
구약성경을 읽는 성도들마다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무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출애굽기나 민수기를 읽어보면 저들의 모습은 참으로 목이 곧은 백성임을 쉽게 느낄 수가 있습니다.
교만과 고집, 불신앙으로 똘똘 뭉쳐있는 저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저들이 가진 또 하나의 모습은 조금만 어려워도 원망을 한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4장을 보면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앞에는 홍해바다요, 뒤에는 애굽군대가 쫓아오는 것을 보고 차라리 애굽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다고 원망했습니다(12절).
홍해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고서도 사흘이 지나 '마라'라는 곳에 이르러 마실 물이 없자 다시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출15:22-27).
애굽을 떠난 지 한 달이 되는 날에 '신' 광야에 도착했는데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양식이 다 떨어지고 먹을 것이 없게 되자 백성들은 다시 모세를 원망하고 있습니다. 애굽의 고기가마 곁에 있었을 때가 좋았다는 것입니다(출16:1-3).
저들이 또 르비딤에 도착했을 때 마실 물이 없자 다시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출17:3).
저들의 모습은 원망이 전부였습니다. 저들은 무슨 구실만 있으면 원망을 일삼았습니다.
물론 사람은 누구나 원망과 감사를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괴롭고 어려우면 원망을 하고, 좋은 일이 있으면 감사하는 것이 우리들의 기질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삶을 표현하는 방식이 달라야 합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괴로운 때에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기 때문입니다(살전5:18)
맥추감사주일을 맞아 우리는 우리의 삶을 뒤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과연 우리의 삶은 감사의 연속이었는지, 아니면 원망과 불평으로 소비적인 삶을 살았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도 본문을 중심으로 해서 '원망하는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들으면서 이제는 원망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의 입에서 감사만 넘치는 기쁨의 삶을 사시는 결단의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원망의 장소
본문 2절에 보면 "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원망할 수 있는 장소는 광야입니다. 광야는 모든 것이 부족한 곳입니다. 만족이 없는 곳입니다. 생활하는데 불편하기 짝이 없는 곳입니다.
바로 이런 곳에서 원망의 소리가 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가정에서 다투는 이유도 있을 때보다는 없을 때 근심이 생기고 다툴 수 있는 여건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원망을 하게 되는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현실만 보기 때문입니다. 현실 문제만 크게 보기 때문에 그 직면한 현실을 극복할 가능성만 없어 보이면 불신앙적인 마음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한 민족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홍해를 마른 땅처럼 건넜습니다. 쓴 물이 변하여 단물이 되어 마셨습니다.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니 메추라기를 입에서 냄새가 나도록 먹이셨습니다. 농사도 짓지 못하는 저들에게 비상한 방법을 통해서 날마다 만나를 주셨습니다.
물 때문에 원망하자 반석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했습니다.
그런데도 저들은 원망을 쉬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저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치 못하고 살았던 증거입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엄청난 축복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불신앙의 모습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이 불신앙적인 마음을 갖게 되면 사람은 미련하게 변해버립니다.
잠언 19장 3절에 보면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자기가 잘못은 저질러 놓고 하나님만 원망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옛말에도 일이 잘되면 자기 탓이요, 일이 안되면 조상 탓한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미련한 인생은 자기가 실수하고, 잘못을 해서 일을 망쳐놓고는 하나님만 원망한다는 것입니다.
원망도 습관입니다. 원망을 자꾸 하다보면 매사에 원망만 일삼게 됩니다.
어느 교회에 불평을 잘하는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교회에서 건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교회를 너무 크게 짓는다고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큰 교회를 짓게되면 유지비도 만만치 않을텐데 교회가 이렇게 낭비해도 되느냐고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이런 사람의 불평 속에서도 건축은 진행되고 건물을 다 짓고 1년이 지나서 교회가 부흥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이 사람이 또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가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처음부터 교회를 작게 지었다는 것입니다.
불평하는 사람은 환경이 바뀌어도 불평을 그치지 않습니다.
원망과 불평을 좋아하는 사람은 무슨 어려움만 있으면 물을 만난 고기처럼 이리저리 다니면서 신이 나서 원망을 일삼습니다.
불평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새로운 불평거리를 만들어 불평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과 같이 지낼수록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함께 죽음의 길로 가기 때문입니다.
2. 원망을 들으시는 하나님
본문 7절에 "아침에는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가 자기를 향하여 원망함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관데 너희가 우리를 대하여 원망하느냐"라고 했습니다.
9절에도 "…여호와께서 너희의 원망함을 들으셨느니라 하라"고 했고, 12절에서도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원망하는 소리를 철저히 들으십니다.
저들의 원망의 소리를 시편 78편 17절에서 19절에서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희는 계속하여 하나님께 범죄하여 황야에서 지존자를 배반하였도다 저희가 저희 탐욕대로 식물을 구하여 그 심중에 하나님을 시험하였으며 그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광야에서 능히 식탁을 준비하시랴"
하나님께 원망하는 태도는 하나님께 대한 범죄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들의 원망은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하지는 않았습니다. 모세와 아론에게 원망을 했습니다.
그러나 지도자를 향한 원망은 곧 하나님께 하는 원망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8절).
저들은 어려움만 닥치면 모세의 지도력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도자에 대한 고충은 이해하려고 들지 않고 지도자의 무능으로 말미암아 이런 어려움이 오고, 지도력이 부족하여 문제가 발생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걸핏하면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심지어는 돌로 쳐서 죽이려고도 했습니다.
이렇게 지도자에게 대한 원망을 하는 저들에게 하나님은 그 원망이 바로 하나님께 하는 원망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세는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불러내었기 때문입니다. 사명을 주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게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저들의 원망을 들으시고 책망대신, 진노 대신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저들에게 만나를 주고, 고기를 주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다윗은 이런 하나님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시103:8-9).
우리의 행한 대로 벌을 주신다면 누가 주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먹는 타령을 하며 원망하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먹을 것을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공급하셨습니다.
우리의 부족한 것을 채우시는 하나님께 원망의 소리를 내지 말고 우리는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어야 할 것입니다.
3. 원망을 피할 수 있는 방법
원망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있는 고질병이 아닙니다.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신앙생활하면서 수많은 원망을 일삼고 있습니다.
원망은 우리의 신앙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아니 원망을 계속함으로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음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고린도전서 10장 10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원망을 하지 말아야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원망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우리는 원망하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말에도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울리다 보면 나도 모르게 똑같아진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원망이 전체로 번졌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둘째로, 자족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모든 원망은 만족하지 못하는 마음상태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바울은 '나는 어떠한 형편에서도 자족하기를 배웠다'(빌4:11)고 말했습니다. 자족하는 마음도 어려운 현실 속에서 하나 하나 배워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12절에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이런 자족의 능력으로 모든 일에 만족하며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기도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4장 6절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했습니다.
부족할 때, 만족이 없을 때,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원망보다는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맥추감사주일을 맞아 '원망하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불평과 원망보다는 오늘도 우리로 호흡케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불평과 원망은 성도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들입니다. 아니 우리의 신앙을 파멸시키는 무서운 독소입니다.
지금 가는 인생길이 이해가 안되고, 사는 것이 괴롭고 답답해도 원망을 하지 맙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그 곳이 가장 안전한 장소요, 최선의 길임을 믿고 광야 길에서도 감사만 드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