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편지 28신]사방천지에 있던 너였는데...
어제 결혼을 한 새내기 신부인 조카 은별에게.
고모부다. 축하한다.
내 어찌 너의 결혼을 축하하지 않을 수가 있으리.
어제밤은 ‘달콤한 꽃잠’을 자며
좋은 꿈 많이 꾸었으리라.
네 신랑은 무엇보다 듬직한 외모에
씩씩한 목소리가 마음에 들더구나.
식장에서 본 너는 참 예뻤다.
아나운서 박은영을 닮은 것같아 볼 때마다 네 생각이 났었다.
너의 아빠도 아닌데도, 네가 기특하더라.
대학을 졸업하고 어엿한 숙녀로서 호텔리어가 된 지
5년이 넘었나? 언제 평생 짝꿍을 만나 결혼을 한단 말이지?
세상이 많이 바뀌어 ‘서른 둘’이면 결혼 적령기라지.
혼인서약서를 신랑과 맞잡고,
씩씩하게 읽지 못하고 약간의 눈물이 섞여 하객들이 웃었다.
축하박수를 치면서, 10년도 더 전인
너의 대학시절 때 내가 썼던 졸문의 시가 생각나 옮긴다.
장안동 근처에서 며칠 입원했을 때 너의 학교 주변을 산책하면서 쓴 것이다.
백수가 되어 기약없이 거리를 헤맸네
어떻게 걷다보니 어린이대공원 앞
건너편이 어느 대학의 정문이네
작년 한 해 우리집에서 같이 있던
처조카 딸내미가 다니는 학교라네
얼마나 용무가 바쁜지 전화조차 받지 않게
나쁜 넘.
고모부는 졸지에 아파 몽유병자처럼
백주대낮 이렇게 헤매고 있는데
삼삼오오, 지나다니는 여대생들이
고만고만한 것이
모두 내 조카딸내미로만 보이네.
작달만한 키, 똥꼬바지, 검정스타킹......
하도 닮아 나도 모르게 이름을 불렀네.
"은별아" "딸내미"
대답도 없고, 뒤돌아보지도 않네.
길가에 널린 헤어샵으로 들어가버리네.
사방팔방 이쁜 아가씨들이
여전히 은별이로만 보이네.
반짝반짝 작은 별,
이쪽에도 은별, 저쪽에도 은별,
하도 헷갈려 눈 비비고 다시 보니
은별이는 여기에도 없고, 저기에도 없네.
지천으로 걸리던 우리 은별이는 어디로 갔을까.
건대앞 먹자골목 떡볶이 먹으러 갔을까.
길거리 타로점 본다고 남친과 줄을 서 있을까.
걱정거리 하나도 없게 보이는
여대생들의 재재거리는 수다만
귀에 쟁쟁,
네 목소리, 허스키로만 남았네.
관광경영학과 1년을 오목교 우리집에서 다녔지.
나는 아들만 둘이니, 딸내미가 옆방에서 자고 있는 게
마냥 신기하고 좋았구나.
대학생 조카와 맥주잔도 몇 번 기울이고,
네가 귀가가 늦으면 걱정도 많이 했구나.
네 고모는 어제 식장에서 날마다 아침에 학교 가라고
스무 번도 넘게 깨워도 소용이 없는 지독한 잠꾸러기였다고 회상하며
고모, 외숙모와 함께 웃더구나.
네 결혼식은 두고두고 화제가 될 것같더라.
아나운서 김병찬이 현란한 말솜씨와 듣기 좋은 목소리로 사회를 보며
식장을 휘어잡고, 가수 변진섭이 축가를 부를 줄 누가 알았으랴.
마치 우리가 연예인이 된 듯 싶더구나.
주례가 없이 하는 결혼식,
네 아빠와 시아버지되는 분의 진정성 있는 짧은 덕담도 인상적이었다.
아쉬운 것 하나는 코로나시국으로
양가 일가친척만 참석하여 분위기가 조촐한 것이겠지.
하지만 이렇게 할 수 있은 것만도 다행한 일이겠다.
다시 한번 축하한다.
언제 세월이 좋으면,
네 신랑과 우리집에서 밥 한끼 했으면 좋겠다.
이미 꼰대가 되어버린 고모부도
그럴 때에는 쓸데없는 군소리하지 않겠다.
나도 주례를 대여섯 번 서보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이제 막 새로운 인생의 행진을 시작하는
너희 선남선녀들에게 들려주는 축시가 있었다.
백기완 선생님이 쓴 <시집 장가가는 벗들에게>라는 축시이다.
너희는 백선생님이 누구인지도 모르기 쉽겠구나.
제법 길지만, 신혼여행 중에 네 신랑과 함께 꼭 한번 낭송하며 그 의미를 새겨보면 좋겠다.
“저치나라에 저치 가는” 네 결혼을 다시한번 축하하며 줄인다. 사랑한다.
2021년 1월 24일
막내 고모부가 쓰다
여보게 자네들이 오늘은 기어코
따슨 보금자리를 차린다 이건가 아무렴 차리게나
하지만 하나만 묻겠네
하늘의 별은 우째서 그렇게 반짝반짝 빛이 나는 줄 아는가
걸친 게 없어서 그렇다네 가식이 없어서 그렇다 이말이지
그러니 이제 자네들이 어떤 집을 꾸려야 하겠나
아무것도 걸친 게 없는 사랑의 집을 꾸미라 이 말일세
여보게 혼례잔치는 본디 연습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겠지
아무렴 혼인이란 한살매 딱 한 번 있는 큰 잔치라
참말로 축하하네 하지만 하나만 더 묻겠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나무가 어떤 것인줄 아나
용문산 은행나무라네 그런데 그것이 어째서 그리 크고 또
지금 이시각에도 자라며 천 년을 살고 있는질 아는가
바람에 강한 때문이라네 그러니 어떤 집을 지어야 하겠나
사랑에 강한 집보다 바람에 강한 집을 꾸리시라 이걸세
여보게 그런데 새색시 좀 들어보게
자네가 참말로 오늘은 시집을 간다 이 말이지
그런데 아니 된다네
어째서 새색시가 사내네 집으로 살러 가느냐 이 말이여
여보게 신랑, 오늘은 참말로 자네가 장가를 간다 이건가
그것도 아니 된다 이 말이여
우째서 사내자식이 여자 품에 안기러 가느냐 이 말이여
그러게 우리 모두 시집 장가간다는 말 따위는 이제
때려치우고 저 끝없이 열린 땅 사랑과 꿈이 영그는 나라
그것을 무엇이라 했던가
그렇지 한없이 열린 곳 저치나라 저치 간다고 했겠다
그렇지 주저앉으면 아랫목이 썩는 게 아니라
엉덩이가 썩는 법이라
시집 장가를 가느니 세상을 일구고 역사를 일구는
사랑과 이상이 꽃피는 고장 저치를 가자 이 말일세
여보게 사랑에도 병이 있다는 걸 아는가, 토라지는 병
질투하는 병, 욕심내는 병, 티각태각하는 병
하지만 그 병은 오 초 이상 끌면 죽음의 병이라 알겠지?
똑딱 똑딱 똑딱 똑딱 똑딱 짜증과 싸움은 끝난 거야
알겠지
자 이젠 나서라 이 말일세 내 집만 지을 것이 아니라
맑고 밝은 새 세상을 꾸미는 창조의 현장에서
손에 손을 잡고 우리 다시 만나자 이걸세
그땐 한 타래쯤 주렁주렁 애들을 달고 와도 좋지
주렁주렁 주렁주렁
*.저치:한없이 열린 땅 대륙의 나라, 저 바다 건너로 사랑과 꿈을 찾아 끝없이 달려간다는 뜻.
그래서 시집 장가를 간다는 말보다 우리 옛 조상들은 ‘저치 간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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