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 늑대와 춤을 > ]
이 영화는 자연과 인디언들 속에 동화되어 살아가는 한 백인의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그린 마이클 블레이크의 원작을 케빈 코스트너가 기획, 각색,감독, 제작,주연한 작품입니다.
케빈 코스트너가 이 작품을 영화화 하기로 하고 제작자를 물색하였으나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사진,들소 사냥을 하는 던바와 인디언들)
이유는 서부극은 이미 한물 간지 오래된 데다가 작품이 너무 길고 대사 중 3분의1을 차지하는 인디언 언어를 자막 처리하면 관객들이 이해하기에 무리가 있다는 점 등이었습니다. 그러나 코스트너는 이러한 어려운 여건을 딛고 직접 제작, 감독으로 나섰습니다.
이후 상업적인 대성공과 함께, 아카데미 7개 부문(작품,각색,감독,편집,촬영,음악,음향)을 석권했고, 골든글로브 3개 부문과 베를린 영화제 곰상을 수상하면서 로버트 레드포드, 워렌 비티,리차드 어텐브로에 이어 배우출신으로 4번째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자가 되었습니다. 이후 이 대열에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합류합니다.
시종일관, 경치가 장관인 이 영화의 실제 촬영도 사우스다코타의 광활한 대평원에서 이뤄 졌다는데 무려 3000마리의 버팔로를 풀어놓고 스펙타클 한 사냥 씬을 찍은 역량도 대단하지만 전체적으로도(사진,던바와 '발로 차는 새')
4시간(감독 판)이라는 긴 대작을 지루하지 않게끔 적재적소에 사건을 적절히 잘 배합한 연출은 결코 초보감독 답지가 않았습니다.
물론, 당시로서 그는 이 작품에 올인 할 수밖에 없었던 처지였지만 각본에서부터 편집까지 너무나 많은 작업에 관여를 하였기에 마치 캐빈 코스트너의 일인극이나 마찬가지라 할 정도로 이 작품에는 코스트너의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원주민 인디언들의 사고가(사진,던바와 인디언 '발로 차는 새')
그 어느 영화보다 짙게 배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던바(케빈 코스트너)에게 '늑대와의 춤을'이라는 이름을 지어주는 그들의 사물을 보는 관점은 너그럽다 못한 풍요로움이 절실히 느껴집니다.
“슈마니투통카 오브 와시테” 수우 족의 말로 ‘늑대와 춤’을 의미하는데, 주인공, “던바”중위에게 이런 이름을 지어준 인디언 “발로 차는 새"는 시인 같은 참으로 낭만적인 사람임에 틀림없을 겁니다. 영화에서 그는 매우 신중하고 의리가 있는 우호적인 인디언으로 등장을 합니다. 이 "발로 차는 새”는 실제로 존재하였던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가장 멋진 길은 참다운 인간으로 사는 것이다." 이는 이 인디언이 던바에게 하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영화는 인종과 국경을 초월한 휴머니즘을 짙게 풍기고 있죠. 가죽만을 얻기위해 버팔로를 무참하게 죽이는 백인들을 향해 "영혼이 없는 자들의 소행"이라고 분노하는 인디언들...
그들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원주민일 뿐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는(사진,인디언촌과 던바)
서로간에 부르는 이름을 인디언들의 언어 그대로 자막처리하고 있습니다. "발로 차는 새""주먹 쥐고 일어서" "머리 속의 바람" "열마리 곰" 등 자연의 모습 그대로인 것입니다.
비록 상대가 백인이라 할지라도 "친구를 사귄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라고 말하며 "인생을 살아가는 길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장 멋진 길은 참다운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이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백인들은 이렇게 순박하고 정의롭게 살아가는 그들을 문명을 앞세우면서 가차 없이 침략하고 학살하였던 것입니다.
[ 명감독이자 명배우 케빈 코스트너 ]
80년대 말과 90년대 초의 케빈 코스트너는 할리우드의 가장 빛나는 별이었습니다. 1974년 에로영화 <말리부의 뜨거운 여름>으로 데뷔한 그는 몇 편의 저예산영화들에 단역으로 출연했고, 이후 로렌스 캐스단의 서부영화 <실버라도>에서의 천방지축 총잡이 역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80년대 실베스타 스텔론과(사진,케빈 코스트너)
같은 스타들의 과도한 남성적 매력에 질려 있던 관객에게 코스트너는 완벽한 대체물이었죠. <언터쳐블>에서의 그는 법전을 뒤로하고 완력을 휘두르는 람보가 아니라, 고집있게 법전을 들고 돌진하는 지적인 남자였고, 스릴러영화 <노 웨이 아웃>의 그는 스테로이드 주사 자국 없이 성마른 가슴의 섹스 심벌이었습니다.
두 편의 야구영화 <19번째 남자>와 <꿈의 구장>이 성공을 거두자 마운드의 꿈을 이야기하는 코스트너는 중산층 미국인들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는 새로운 게리 쿠퍼였고 제임스 스튜어트였던거죠. 그리고 이어서 대작 <늑대와 춤을>이 만들어졌습니다.
마이클 치미노 감독의 <천국의 문(헐리우드 영화사상 최악의 실패작중의 하나)>을 따서 ‘케빈의 문’이라 비웃던 사람들은 <늑대와 춤을>의 거대한 성공 앞에서 코스트너를 오슨 웰스에 비교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그를 좋아했던 이유는, 고독하게 자신의 꿈을 위해 정진하는 미국인 남자의 자화상을 그에게서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로빈 후드>, <보디 가드> 같은 상업영화와(사진,영화 '보디가드'에서)
, <퍼펙트 월드> 같은 작가영화 사이에서 벌인 준수한 곡예는 코스트너에 대한 관객과 할리우드의 신뢰를 더했습니다. 마흔의 나이로 할리우드 명성의 바벨탑, 그 아슬아슬한 정상에 오른 코스트너는 세상에 못할 것이 없다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잘 나가던 코스트너는 MCA영화사의 대작 <워터월드>에 참여하면서 대실패를 맛보게 됩니다. 핵전쟁이 끝나고 물로 뒤덮인 미래사회의 묵시록인 <워터월드>는 예산 1억8천만 달러, 당시로서는 영화사상 최고 제작비를 들여 만든 대작이었습니다.
<라파누이>의 감독이었던 케빈 레이놀즈가 연출을 맡고 코스트너가 주연한 이 영화는 세트가 가라앉고 촬영이 지연되는 등 순탄치 않은 과정을 거치더니 개봉을 3개월 앞두고 편집 과정에서 레이놀즈가 의견차로 빠졌습니다. 결국 코스트너와 MCA가 최종 후반작업을 진행했는데, 미국에서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실패했으나 해외에서 올린 수익으로 손해는 겨우 면했습니다.
96년 골프와 로맨스를 접합한 <틴 컵> 덕분에 배우로는 다시 어느 정도 제자리를 찾았지만 감독으로서는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사실상 두번째 작품인 <포스트맨>의 참패 때문입니다. 장장 2시간을 넘기는 <포스트맨>은 <늑대와 춤을>, <워터월드>에 이은 코스트너의 야심대작이었지만 코스트너의 경우 상영시간과 작품의 완성도는 반비례 했습니다.
<늑대와 춤을>이 미국 개척시대의 역사와 인디언을 바라보는 데 있어 균형감각을 유지하고, <워터월드>가 스펙터클이라도 있었던 데 비해 <포스트맨>은 지루하고 길기만 하다는 혹평을 받았습니다. 1800만 달러에 못 미치는 수익을 거두며 흥행에서도 참패했습니다. <포스트맨>과 <워터월드>를 가지고 감독으로서 코스트너의 역량을 다 평가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아직은 연출력은 불안정해 보였습니다.
잠시 정신을 차린 코스트너는 98년에는 다시 슬픈 로맨스의 주인공으로 돌아와 <병 속에 담긴 편지>를 찍었던 케빈 코스트너는 2003년, 서부 영화 <오픈 레인지>로 다시 팬들 앞에 섰습니다.
코스트너는 私費를 더한 2천만 달러를 주머니에 넣고서(사진,영화 '오픈 레인지'에서>
하늘과 땅이 소실점을 향해 치닫는 캐나다의 평원으로 향했습니다. “누구도 한여름에 한물간 스타가 등장하는 2시간짜리 서부영화를 보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말리는 영화인들의 손사래도 그를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여름용 블록버스터는 절대 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누군가가 십년 뒤에 이 영화를 떠올리며 ‘이게 바로 내가 말하는 서부영화야’라고 그는 말했다. "요즘 사람들은 진정한 서부영화를 보지 못한다. 내가 만들려고 하는 영화는, 진정한 서부영화다”
누구도 실패를 의심치 않던 <오픈 레인지>는 케빈 코스트너를 구원했습니다. 개봉 첫 주말에만 제작비의 절반을 넘게 벌어들인 이 작품은 6주 연속 전미 박스오피스 10위권에 머무르며 6천만 달러가 넘는 수익을 거두었습니다. 비평가들은 전형적이지만 제대로 세공된 서부영화를 따스하게 다독거렸습니다.
로저 에버트는 “불완전하지만 깊이 빠져들게 만드는 아름다운 서부영화”라고 했고, <버라이어티>지는 “코스트너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이후 할리우드의 마지막 고전 영화감독처럼 보인다”는 이례적인 찬사를 보냈습니다. 물론 케빈 코스트너는 하워드 혹스나 존 포드, 혹은 조지 스티븐스가 아닙니다. 하지만 <오픈 레인지>는 느리고 아름답게 움직이는 고전적인 서부영화의 기운을 온전히 살려냈습니다.
열린 공간을 사랑하는 코스트너는 이야기와(사진, '오픈 레인지'에서)
캐릭터가 스스로 숨을 쉴 수 있도록 하고,
그럼으로 이야기는 하나의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대신 수많은 서브 텍스트를 가지 치며 관객의 호흡을 넉넉하게 허락합니다. 이를테면 <오픈 레인지>는 거대한 캔버스에 그려진 끝없는 풍경화인 겁니다.
케빈 코스트너는 이제 다시 누구도 말릴 수 없는 고집과 야심으로 또 다른 거대한 프로젝트에 뛰어들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또 참패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오손 웰즈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되는 것이 영영 불가능해 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케빈 코스트너는 괴이할 정도의 진심을 간직한 채 서부로, 마운드로, 미국의 과거로 향할 것입니다. 그의 진심은 느리게 느리게, 서부의 시간으로 전진합니다.
* 케빈 코스트너의 인생
케빈은 1955년 캘리포니아 린우드에서 셋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케빈은 자주 이사를 다녔으며, 10살 때 교회 성가대에서 노래를 불렀고, 시와 작문을 즐겼다고 합니다. 18살 때 그는 직접 카누를 만들어 태평양으로 가기 위해 강을 타기도 했으며, 지금의 큰 키(185 cm)와는 달리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는 키가 겨우 157cm였다고 합니다.
1973년 풀러턴에 있는 캘리포니아 대학에 진학해 무역학을 전공했고, 이때 케빈은 야간수업을 통해 연기를 배우게 됩니다. 1978년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 때 만난 신디 실바('늑대와 춤을"에서 출연한 여배우)와 결혼을 합니다.
첫 직장으로 그는 오렌지 컨츄리에서 마케팅 일을 하다가 멕시코발 비행기에서 우연히 영화배우 리차드 버튼을 만나면서 모든 것이 달라지게 됩니다.(사진, 영화 '언터쳐블'에서)
버튼은 그에게 그가 정말 원하는 인생을 살라고 충고해 준 것입니다. 케빈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바로 배우로서의 연기였던 것이죠. 곧 직장을 때려친 다음에 케빈은 할리우드로 이사오게 되고 이후 배우로서 인생을 시작하게 됩니다.
코스트너는 3번의 결혼을 통하여 7명의 자식을 두었습니다. 첫번째 부인 신디 실바('늑대와 춤'에서 함께 출연)사이에서 3명, 이후 잠시 교제한 브리짓 루니와의 사이에 1명,그리고 현재의 아내인 독일계 크리스틴과의 사이에서 난 3명입니다.
그는 자식 욕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뭐 케빈처럼 여유가 있으면 자식이 많은들 어떠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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