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작년 9월 국가기록원 연구직 학예연구사 채용시험에 응시했다가 불합격을 했습니다. 공고에는 분명 장애인 구분모집으로 2명을 채용하겠다고 해놓았지만 장애인 응시자인 제가 있음에도 합격자 발표 시 해당자 없음이라고 표시를 하였습니다. 채용시험은 서류와 면접 두 가지로 진행되었는데 서류에서는 제가 결격사유가 전혀 없고 오히려 한국근현대사 전공자로서 우대 조건과도 맞아서 합격을 했습니다. 그런데 2차 면접시험에서 5분 정도 되는 면접으로 저를 불합격시켜 버렸습니다. 물론 특별채용 과정에서 면접은 당락을 결정하는 중요한 관문이고 면접관들의 의사결정이 최대한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은 저도 잘 압니다. 그렇지만 저의 경우는 장애인 구분모집이었고 2명 채용에 응시자는 저 혼자뿐이었습니다. 면접이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은 많은 응시자들이 있을 경우 채용인원을 가려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면접도 잘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저의 불합격을 인정할 수 없었고 합격자 발표 일에 국가기록원 총무팀 인사담당에게 전화를 해서 불합격 사유에 대해 물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담당자의 대답은 1. 휠체어를 타고 들어간 점. 2. 출 퇴근을 어떻게 할지 의문됨. 3. 의사능력이 떨어짐. 4. 직무수행에 문제가 있음. 이었습니다. 저는 전혀 납득할 수가 없었고 좀 더 자세한 답변과 조사를 부탁하며 국가기록원장과 행정자치부 장관에게도 글을 올렸습니다. (국가기록원 '열린 원장실', 행정자치부 '장관과의 대화') 그렇지만 어느 곳에서도 만족할 만한 대답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국기기록원장은 한 달이 지나도록 그에 대한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고 행정자치부 장관도 담당자에게만 맡겨 놓고 형식적이고 원론적인 대답으로 일관했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장관이 직접 작성한 것이 아니라 담당자가 대충 만든 내용이었습니다. 정말이지 너무 실망스러웠습니다. 적어도 홈페이지에 그런 란을 만들어 놓았다면 원장이나 장관이 직접 상황을 알아보고 나름의 조치를 취한 후 답변을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일이 있기 전까지는 그런 줄 알았습니다. 국민들의 목소리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들어주는 정부, 누구나 억울한 일 부당한 일을 겪게 되면 손 내밀 수 있는 정부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을 모두 받아들여 사회의 부조리와 잘못된 관행을 바로 잡는 정부 그것이 노무현 대통령이 추구하는 '참여정부'의 진정한 의미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너무 실망스러웠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국무총리실 홈페이지에 그간 일어났던 일들을 적고 조사를 부탁하는 내용의 글을 올렸습니다. (국무총리와의 대화) 며칠 후 답변은 국무총리가 직접 작성한 것인지 어떤지는 알 수가 없지만 그런 일은 국무총리의 관할이 아니며 국가기록원과 직접 해결을 하라는 것이었다. 국가의 모든 일을 관장하는 국무총리가 행정자치부 소속 공공기관과 관련된 일을 자기 관할이 아니라는 무책임한 대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의 글을 꼼꼼하게 읽었다면 국가기록원과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국무총리가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다면 충분히 조사해서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대통령에게 까지 갈 생각도 해 보았지만 그렇게 하더라도 행정자치부 장관이나 국무총리의 답변과 별반 차이가 없을 것 같아서 그냥 그만두어 버렸습니다. 이제는 확실히 알았습니다. 현 정부에서 각 기관과 부처의 홈페이지마다 기관장과의 대화라는 거창한 이름을 만들어 놓았지만 실제로 그것은 대화의 상대조차 정해져 있지 않고 거기에서 얻어지는 대답은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부당한 처우에 분개한 사람들에게 더 큰 실망만을 안겨준다는 것을 말입니다. 예전에 TV에서 대통령이 노트북을 앞에다 두고 정무를 상의하는 장면을 볼 때마다 '우리 대통령께서 진정으로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는구나.'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 모두가 보여 지기 위한 가식적인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 이상 높은 분들에게서 기대할 것이 없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고 '장애우권위문제연구소'와 '국가인권위원회'에 저의 부당한 불합격에 대한 내용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처음부터 장애우권위문제연구소에서는 적극적인 태도를 취해 주었습니다. 공식적인 문서로 국가기록원에 면접 기준과 점수, 구체적인 불합격 사유 등을 알려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고 기록원 측에서 답변을 차일피일 미루자 저에게 기자회견을 제의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국가인권위원회에서도 진정이 접수되었다며 담당 조사관이 저에게 전화를 해서 좀 더 자세한 내용을 물어보았습니다. 결국 저는 장애우권위문제연구소의 제안을 받아 들여 기자회견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한편으로 걱정되는 부분이 없지 않았지만 그보다는 불합격의 부당함을 세상에 알리고 바로 잡아 다시는 그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게 해야겠다는 마음이 더 컸습니다. 연구소에서 다 준비한다고 했지만 저도 그동안 진행된 상황과 그 요지를 정리하고 여러 가지 준비를 많이 해갔습니다. 그렇지만 서울기록물센터 앞에서 진행된 기자회견은 그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보잘 것 없었습니다. 주요 일간지는 물론 이류 신문의 기자들도 오지 않았고 처음 들어보는 인터넷 신문 기자 한 명이 왔을 뿐이었습니다. 준비해간 내용은 다 말하고 돌아왔지만 왠지 모를 서운함과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연예인들의 신변잡기에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쫒아 다니며 카메라 플레쉬를 터트리는 기자 분들이 왜 그렇게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에는 무관심한 것인지 만약 그것이 돈이나 권력 때문이라면 우리 사회는 전혀 정의롭지 않고 언론도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기자회견이 끝나고 장애우권위문제연구소의 태도도 변하였습니다. 이전의 적극적인 태도는 온 데 간 데 없고 기다려보자는 말로 일관하더니 얼마 후부터는 연락조차 오지 않았습니다. 연구소 자체적으로 가망 없는 일이라고 판단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국가기록원 측에서 어떤 압력이 들어온 것이지 알 수는 없었습니다. 어떤 사정이 있든 간에 장애인 단체조차도 그 본분을 잊어버리는 현실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저를 다시 한번 실망하고 좌절하게 만드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국가인권위원회 조사관의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조사관은 저에게 전화를 해서 인권위 측에서 국가기록원에 공문을 보냈는데 답변이 왔다며 공무원 특별 채용의 경우 면접의 재량권이 상당 부분 인정되고 그렇기 때문에 이의를 신청하더라도 면접 과정과 점수를 공개하지 않는 것이 관행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전의 판례를 보더라도 이런 상황은 기각되었다며 저의 진정도 기각될 것이고 저 스스로 심사 조치를 포기하는 편이 낫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기가 막히고 화가 났지만 모두 꾹 참고 정중하게 그래도 심사 조치에 들어가 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조사관은 다음 날 다시 저희 집으로 전화를 해서 제가 분명히 의사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님께 이 일은 기각될 것이니 그냥 포기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습니다. 부모님은 제 의사가 확고함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언성을 높이시며 본인과 이야기가 끝난 것을 왜 또 심사 포기를 권하느냐고 되물으셨습니다. 그랬더니 조사관은 황급히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것은 인권위 조사관의 역할은 아닐 것입니다. 적어도 인권위의 조사관을 맡았다면 진정인의 억울한 사정과 부당한 처우에 대해서 철저하게 조사를 하고 심사에서 그것을 바로 잡을 수 있도록 도외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심사에도 들어가기 전에 조사관이 기각될 것이라며 포기를 하라고 하는 것은 제가 전에 겪은 어떠한 일들보다 부당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이전의 판례에서 장애인 구분모집에서조차 장애인을 이유 없이 불합격시킨 경우를 용인하고 진정을 기각해 버렸다면 국가인권위는 진정 누구를 위해, 어떤 일을 해결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 의문스러웠습니다.
예전 한 TV 공익광고에서 "장애를 보면 능력을 볼 수 없습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사람들이 까만 안경을 벗어던지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정말 그런 줄 알았습니다. 장애에 대한 차별이 아주 없는 건 아니겠지만 장애보다는 능력을 더 우선적으로 봐주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장애인들의 사회 참여도 점차 확대되어가고 우리 사회도 조만간 복지사회의 대열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이 사회로 나아가는 길은 멀고도 험하고 그 과정에서 받게 된 불이익을 바로 잡으려면 그렇게 애를 쓰면 쓸수록 힘들어 지는 건 자기 자신이고 더욱 크게 남는 건 세상에 대한 실망과 마음의 상처뿐이니 말입니다.
지인들에게 저의 억울한 사정을 말했더니 다들 똑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장애인을 2명 뽑는다고 했으면 2명을 뽑아야지. 장애인 응시자가 있는데도 안 뽑은 건 거기서 아주 크게 잘못을 한 거다. 끝까지 가 봐라." 이것이 가장 상식적이고 평범한 생각입니다. 장애인 구분모집으로 2명을 뽑는다고 했으면 장애인 응시자가 없으면 모를까 응시자가 있다면 뽑아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누가 봐도 부당한 불합격이 분명한데 왜 높은 분들은 모르쇠로 일관하시고 장애인 단체와 인권위에서는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저 혼자서는 정말 힘든 싸움입니다. 높은 분들께서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조사를 해주셨다면 훨씬 더 쉬울 텐데 이제는 그분들에게 기대할 것은 없습니다.
다만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께서 이 글을 보신다면 당선인께서 만들어 갈 5년은 지금과 달랐으면 합니다. 청년시절 당선인께서도 박정희 대통령께 편지를 써보셔서 저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장애인이 사회에 진출해 제대로 된 자리를 잡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장애인 고용촉진 및 직업재활 법'의 개정으로 법률상으로는 장애인의 고용과 사회적 입지가 확대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제 경우에서도 보듯이 장애인 채용을 권장하고 모범을 보여야 할 국가기관에서 조차 장애인 구분모집을 형식적으로 만들어 놓았을 뿐 적격자가 있음에도 장애가 좀 심하다는 이유만으로 불합격을 시켜 벼렸습니다. 정말이지 '말로만 복지사회'입니다. 당선인께서는 진정한 복지사회를 만들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2명을 뽑는다고 했으면 진짜로 2명을 뽑아야 한다는 지극히 평범한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만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장애인이라도 능력으로 얼마든지 인정받을 수 있고 노력하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는 사회, 이명박 대통령님 임기 내에 꼭 이루어졌으면 하고 기원합니다.
긴 글 끝까지 읽아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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