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도 밥이다
쌀,돌,풀,꿀 그리고 밀
‘ㄹ’자를 받침으로 하면서 한 글자로 뜻을 이루는 우리말은 한결같이 아름답고 우리와 친숙한 단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쌀,돌,달,별,물,불,솔,뻘,들,풀,술,얼,뜰,꿀...... 그리고 밀. 백곡(百穀) 중에서도 ‘ㄹ’자를 받침으로 하는 것이 ‘쌀’과 ‘밀’뿐임이 어찌 예사로운 일이겠는가. 밀은 인류가 농경생활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재배한 작물이다. 지금까지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밀은 1만 5천년 전부터 아프가니스탄에서 코카서스에 이르는 지역에서 재배되기 시작하여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우리나라의 경우 경기도 용인군 점동면 흔암리 유적지와 경주 반월성지에서 발견된 탄화밀의 생성시기가 기원전 5세기로 추정됨을 미루어 짐작컨데 밀은 쌀과 더불어 반만년 역사를 우리 민족과 함께해온 주요 식량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조상들의 식생활 문화를 가늠할 수 있는 차례상과 관혼상제 밥상차림을 보라. ‘결혼한다’는 말이 ‘국수 먹는다’는 말과 동일시되고 전,구절판용 밀전병에다 밀개떡에 이르기까지 삶의 빈부를 떠나 우리 민족의 식생활 구석구석에 스민 밀의 위치는 가히 쌀과 견줄만한 정도이다.
일제의 강점기인 1940년도에 34만 8천 ha에서 28만톤의 밀을 생산한 바 있으며 해방후 혼란기인 1947년도에도 8만여 ha에서 6만여톤의 밀을 생산했던 기록이 말해 주듯이 밀은 우리 밥상의 한 자리를 조용히 지켜온 제2의 주곡이다. 더욱이 60년대에 쌀과 보리,콩을 위주로 했던 식생활이 이제는 쌀과 밀 중심으로 변해버려 지난 90년을 기준으로 국민 1인당 소비량이 보리가 2kg에 불과한데 반해 밀은 30kg을 넘어섰다. 밀은 분명 ‘밥’이다.
꽉찬 밀․텅빈 밀
우리 땅에서 재배해온 우리밀은 그루밀,올밀,은파밀,조광밀 할 것 없이 한결같이 키가 작고 도복이 덜 되는 매우 우량한 품종이었다. 1974년도에 밀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증대(단보당 1,400kg 생산)함으로써 인류의 식량문제 해결에 지대한 공로를 세웠다 하여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미국의 Borlaug 박사에게 그토록 큰 영광을 돌리게 한 밀 종자가 바로 1904년경 일본인 교수가 연구삼아 가져갔던 우리 토종밀의 먼 후손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우리의 앉은뱅이 밀이 세계 녹색혁명의 일등공신 노릇을 했건만 오늘날 우리가 한해에 5천억원 이상의 밀을 수입해 먹는 처지가 된 것을 누구에게 하소연할 것인가.
대저 자연은 사람을 닮고 사람은 또한 자연을 닮아가는 것이 생명순환의 이치이다. 밀을 주식으로 살아온 서양 사람들은 밀처럼 키는 쑥쑥 자랐지만 밀대처럼 속이 텅텅 비어 갖은 질병에 나약한 모습을 나타낸 반면에 통통하고 기름기가 잘잘 흐르는 단립종(자포니카 계열) 쌀을 주식으로 삼으며 오동통한 보리와 동글동글한 콩을 혼식함과 더불어 키가 짤닥말한 ‘우리밀’을 다양한 조리방법으로 섭취해온 우리 민족은 비록 체구는 작았지만 속은 더없이 여물고 건강한 삶을 영위해 왔다.
수입밀로 키운 지금의 아이들을 보라. 그들은 비록 우리 땅에서 자랐지만 이미 우리 한민족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사람의 젖이 아닌 소의 젖을 먹고 농약에 찌든 수입밀을 먹으며 자란 오늘의 아이들은 소처럼 밀처럼 덩치만 크고 키만 컸지 40kg 컴바인 자루 하나 짊어지지 못해 자빠지는 속빈 강정처럼 되고 말았다. 소젖을 먹이고 사람으로 자라나기를 바라는 이 땅의 어머니들은 깨달으라. 오늘날 인륜상실과 패륜을 일삼는 비행 청소년 문제가 비단 저소득층과 결손가정에서뿐 아니라 우리들이 지극히 정상적이라고 주장하는 아이들에게까지 확산되고 있음이 바로 먹을거리를 잘못 선택한 우리들의 손길 때문임을......
한국전쟁 이후 쏟아져 들어오는 미국산 밀가루 배급을 받기 위해 줄을 서야 했던 쓰라린 기억 뒷편에 우리의 쌀 시장을 무너뜨리려는 다국적 곡물 메이저들의 음흉한 미소가 있었음은 차치하고라도 미국의 교묘한 식량정책에 휘말려 매주 수요일을 ‘분식의 날’로 정해 밀가루를 주식으로 삼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는 것처럼 떠들어대던 과거를 돌이켜 보라. 쌀 시장을 무너뜨리고 밀가루로 세계를 점령하려 했던 미국의 무서운 식량정책의 결과로 불과 반세기 전만 하더라도 쌀을 주식으로 해온 이라크,이란 등 일부 중동국가가 마침내 밀가루를 주식으로 하는 나라의 대열에 서게 되었음을 알고 있는가. 금세기는 참으로 무서운 식량 전쟁의 시대이다.
우리밀, 죽었니? 살았니?
1984년 마침내 정부가 밀의 수매를 중단한지 5년째이던 1989년. ‘한살림’과 ‘한국가톨릭농민회’가 협력하여 경남 고성군 마암면 두호마을 24 농가에서 10,500평의 밀을 재배계약하여 227 가마를 생산한 것으로 시작된 우리밀살리기운동! 이후 2년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1991년 11월 28일 창립대회를 가짐으로써 비로소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 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는 한때 출자회원수 15만명에 출자금 30억원을 기반으로 4개의 가공공장과 5개의 협력업체를 거느린 기업형 운동단체로 우뚝 서서 가히 민간운동으로서는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성과를 누린 바 있으나 경영마인드의 부족으로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실정이다. 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인 10년 전 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가 수확한 우리밀은 40kg 가마로 30만 가마(총 12,000톤)를 기록해 정부가 수매를 중단하던 1984년도의 수매량을 넘어선 바 있다.
그러나 한해에 무려 300만톤이나 수입되는 수입밀에 비하면 자급률이 불과 1%도 채 못되는 상황에서 제품판매가 벽에 부딪쳐 계약재배면적을 전면동결해야만 했다. 농민들은 몇 년간의 경험이 축적되어 단보당 생산량이 늘어나고 농가소득에도 실질적 도움이 된다며 더 심기를 원하지만 소비자들의 소비수준이 이를 따르지 못해 생산량을 동결해야만 했던 안타까운 역사를 국민들은 알고 있는가.
밀은 어느 작물보다도 왕성한 광합성 작용으로 만약 100만 정보에 밀을 심으면 우리나라 탄산가스 배출량의 20%를 흡수를 대기정화에 기여한다는 연구결과가 있으며 이모작이 가능한 영,호남 지방에서 벼농사와 밀농사를 이모작으로 하면 나무보다도 산소 배출량이 많아져 우리 모두가 쾌적한 대기환경에서 살 수 있다는 연구보고도 있음을 눈여겨 보자. 예측불가능한 국제적 식량파동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쌀,보리,밀,콩 이 네가지 작물은 ‘국민의 생명줄’로 인식하고 자급정책이 수립되어야 한다. 이미 우리에게 제 2의 식량이 된 밀은 최소한 1만톤 이상을 종자로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 소비자들이여. 부두의 하역작업 노동자들이 냄새만 맡아도 쓰러진다며 작업을 기피할 정도로 방부제와 농약에 찌든 수입밀을 국내에 들여와 찰기를 높이기 위해 또다시 화학물질을 투입하는 과정을 알면서도 수입밀을 먹을 것인가. 소비자들이 먹어만 준다면 얼마든지 밀을 더 심겠다는 애타는 농민들의 목소리를 귀기울여 들으라.
켄터키치킨,피자헛,그리고 우리밀
외신보도와 해외자료를 종합해보면 미국 내에서도 밀의 농약오염이 크게 문제되고 있고 미국판 우리밀, 즉 농약과 방부제를 치지 않은 순수한 밀은 우리가 국내에서 판매하고 있는 우리밀 가격보다도 2-3배 높다는 소식이다. LA에서는 이미 ‘우리밀식당’이 생겨나 우리 교민은 물론 미국인들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반가운 얘기도 들려온다. 이제 자신있게 일어서서 세계시장으로 눈을 크게 부릅떠야 한다. 멋모르고 물 건너가 미국사람 노벨평화상 수상에 기여한 토종밀의 억울함을 달래 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저 유명한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의 튀김옷을 우리밀로 입히고 ‘맥도널드 햄버거’ 와 ‘피자헛 피자’를 우리밀로 반죽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판매부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밀을 살리는데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사랑하는 싯귀의 표현대로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가는 나그네처럼 풍요롭고 건강한 삶을 후손들에게 물려 주어야 한다. 밀도 결코 내줄 수 없는 우리의 밥이다.
속담에 비친 밀
- 밀가루 장사하면 바람이 불고 소금 장사하면 비가 온다.
사전에서 찾아본 밀(참밀)
- 벼과의 1,2년생 재배식물. 높이는 1m 가량이고 5월에 꽃이 핌. 페르시아 원산으로 세계 각지에서 재배하며 열매는 빻아 밀가루로 만듦.
(동아새국어사전,동아출판사)
- 벼과에 속하는 2년생의 재배초본. 줄기는 곧고 높이는 1m 가량이며 원통형에 속이 비었음. 잎은 마디에 호생하는데 가늘고 길며 끝이 뾰족하고 잎 꼭지는 칼집 모양으로 되어서 줄기를 싸고 있음. 열매 성분은 대부분 녹말과 단백질이 많이 함유되어 중요한 곡식임.
(국어대사전,민중서림)
- 벼과의 한두해살이 풀로서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가꾸는 곡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가을밀을 심어왔는데 외국산 밀이 수입되면서 거의 심지 않게 되었다.
(국어용례사전,성안당)
- the grain from which flour for bread,etc is made
(Oxford Advanced Learner's Dictionary)
- a plant whose yellowish,brown grain is used for making flour,or the grain itself.
(Cambridge International Dictionary of English)
출처 : |
아름다운 세상 | 글쓴이 : 선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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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전 우리 말을 사려면 한참 걸어 나가야합니다. 그래도 우리 밀을 꾸준히 사 먹고 있습니다. 그럼요, 우리밀을 우리가 지켜 내야죠. 좋은 글 감사합니다. 이 글 가져 갑니다.
피시식~~~(쓴웃음).....유럽에서 잘나가는 흰백합의 원종도 울나라 참나리가 모태이고, 미국에서 유명세를 탄 미쓰킴라일락이라는 해괘망칙한 이름의 꽃도 울나라 수수꽃다리가 원종이고....봄마다 사들이는 과수 교배용 벌꿀들의 원종도 "코리아" 인데.....우린 그저...먹고살아야라는 알곡에만 정신을 팔았지..겨를이 없었죠....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그건거 보면 ㄷㅍ 님이 .....선각자이기도 해유~~
좋은 글 고맙습니다 우리것은 소중합니다.
"밀가루 장사를 허믄 바람이 불고~ 소금 장사를 허면 비가 온다"...정말 장사하기 심들지요? 헛허허허허
돈좀된다 싶으면 미제가 범람하고, 량이 좀 된다 싶으면 중국제가 범람합니다.....에공....해묵기 증~~말.... 어렵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