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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건국과 한양천도: 정도전과 무학대사의 대립
어떤 한 사내가 조용히 안변 석왕사라는 암자에 찾아가 한 승려를 찾았다. "스님, 전 아랫마을에 사는 사람인데, 제가 어제 꿈을 꾸는데, 일천 개의 닭이 울고 다 무너진 집에서 서까래를 세 개 지고나왔는데, 꽃잎이 떨어지면서, 거울이 깨어지는 꿈을 꾸었는데, 꿈이 해괴하여, 점쟁이를 찾았으나, 그 점쟁이도 모르겠다하여, 스님을 찾으라 해서 왔습니다. 부디 저의 꿈을 풀어주시기 바랍니다. 무슨 꿈이옵니까?"
그러자 그 승려는 지그시 눈을 뜨면서, 말했다.
"그것은 제왕이 되는 꿈이오. 이것은 누구에게도 발설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오." 그 뒤, 40년 후 마침내, 그 젊은이는 임금에 올랐고, 그가 바로 조선 태조 이성계였으며, 그 승려는 다름 아닌 무학대사였다.
무학대사는 본성이 박씨이며, 이름은 자초이다. 출생지는 지금의 경남 합천 태생으로, 26살 때 원나라로 유학 가서 원나라의 고승인 나옹선사를 만난다. 나옹선사는 원나라 고승이긴 했으나 고려인이었으니 이국에서 스승을 만난 셈이었다. 그들은 귀국 후 나옹선사는 고려 공민왕의 왕사가 되었는데, 무학대사는 이것을 사양하고 내려갔다고 한다.
근데, 이성계는 무학대사를 꿈 해몽때 처음 만난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인 이자춘, 즉 나중에 환조로 추증되는 이성계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묏자리를 찾고 있었다고 한다. 그때 나옹선사와 무학대사가 지나가면서, 나눈 이야기가 이성계의 귀에 들어왔다.
"너는 흥왕지지(임금이 나는 땅)에 대해서 아느냐?"
그러자 무학대사가 답했다.
"제가 알기로는 산이 세 줄기로 갈라져 내려오고 있는데 아마도 가운데 줄기에 명당자리가 있는가 봅니다." 그러자 나옹선사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그렇지가 않다. 사람을 보면 왼손보다 오른손이 더 긴요하듯이 저 산도 오른쪽 긴 줄기에 명당자리가 있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이성계의 종이 이 사실을 이성계에게 알렸고, 이성계는 정중하게 두 승려를 모셔와 환종조의 장지를 정했다고 한다. 이 때 이성계는 몰랐겠지만, 무학대사와 이성계의 길고 긴 인연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새 왕조가 건국된 뒤, 이성계는 무학대사를 왕사로 임명했다. 억불숭유 정책을 기조로 세운 조선의 첫 번째 임금이 승려를 왕사로 세운다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었지만, 무학대사의 공적이 커서 그대로 넘어갔다.
새 왕조가 건국되었으나 고려라는 국호는 계속 쓰였고, 궁궐은 개성의 수창궁이었다. 따라서 이성계는 개성을 떠나 도읍을 옮길 생각을 하는데, 도읍의 최적지로 정해진 것이 두 군데, 계룡산과 한양이었다. 둘 다 풍수지리상으로 최고의 도읍지로 뽑혔지만, 계룡산은 비좁고 백성들의 삶이 불편하다하여 제외되었다. 남은 것은 한양이었다.
한양은 고려 예종때 남경으로 정해졌는데 당시 "오얏 성을 쓰는 사람이 왕에 올라가고 남경이 도읍이 된다"고 소문이 났었다. 당시 남경에는 오얏나무가 무성했으므로, 고려 조정에서는 매년 남경의 관리들에게 오얏나무를 베도록 명을 내렸다. 하지만, 계속해서 무성하게 자랐다고 한다.
어쨌든 무학은 인왕산 산줄기를 바라보면서 바로 이 곳이다라고 하며, 쾌재를 불렀다. 그러자 소를 끌고 오는 농부가 왈 "이 놈의 소야 미련하기가 무학과 똑같구나." 이 말을 듣고 깨달은 무학이 농부에게 청해 말하기를.....
"이 곳에서 10리 더 가면, 길지가 있을 것이다."
무학은 10리를 더 갔더니, 신라의 고승인 도선대사가 점지한 명당, 고려의 남경 궁궐 터가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것이었다. 지금의 신촌 쪽, 무악산 아래에다가 지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당시 정도전이 반대하고 나선다.
"산이 동쪽으로 나있으니, 궁을 서쪽으로 지어야 하지 않소. 제왕은 모름지기 서쪽으로 향해 앉는 법은 없소이다."
그러자, 무학대사가 말했다.
"그렇지가 않소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무악산의 화기때문에 200년 이내에 전쟁이 일어나게 될 것이오."
정도전이 응하여 말하기를.....
"궁 앞에 한강이 흘러서, 화기를 막아줄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오."
이래서, 정도전의 주장이 채택되어, 지금의 경복궁에 터를 잡고 공사를 했다.
무학대사의 의견이 무시된 것은 조선에서의 불교세력이 어쩔 수 없이 걸어야 할 숙명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무학대사 이후 명종시대에 잠깐 보우가 왕사 비슷하게 했을 뿐, 불교는 탄압받는 존재였다. 하지만, 무학대사는 그 탄압받는 존재에서도 그나마 나은 형편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태종대까지 살면서 왕사를 역임했다. 왕명에 따라서 함흥차사로 이성계에게 돌아오게 하는 태종의 간절한 청원이 담긴 편지를 태조에게 전하는 구실을 했다.
무학대사는 1405년 세상을 떠났고, 그로부터 200년도 안 되어 무학대사의 예언대로 전쟁이 나서 경복궁이 불타 모두 없어지는 참변이 발생한다. 그로부터 300년이 지나서야 경복궁이 중건하게 되었다. 그나마 경복궁이 중건되었다고 시련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 뒤 나라는 멸망하여, 일제에게 유린당해 창덕궁이 수리되어 동물원이 되고, 궁궐이 타서 중학교가 되며, 조선 총독부가 들어선다. 결국 경복궁의 불행한 운명은 역시 땅을 잘못 만난 탓이란 말인가?
신권인가? 왕권인가? 정도전과 이방원
1392년, 조선의 이성계는 형식상으로나마 고려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던 공민왕의 후비인 정비 안씨를 통해, 양위를 받았고, 고려의 최고 기관인 도평의사사로부터 의결받아, 왕위에 즉위했으나, 그것은 형식상에 불과한 것이고, 실상은 무력을 세워서 공양왕을 내쫓고, 왕위를 뺐은 것으로 파악된다. 불법적인 찬탈에 격분한 유생과 무관들이 집단적으로 이성계에 항거하며, 개성의 인근에 두류동이라는 골짜기에 들어가서, 문을 닫으니, 이것이 그 유명한 두문불출이었다. 총 72명으로 알려진 고려의 유신들은 이성계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끝내 거부했다. 이에 격분한 이성계는 군사를 이끌고 가서는 "불에 타죽을 것인지, 아님 조정에 나와서 출사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했다.
결코 소신을 꺾을 수 없었던 고려의 유신들은 끝내 불속에서 죽음을 선택하니, 이것이 그 유명한 두류동 72현이었다. 물론 두류동에 있었던 사람이 모두 죽은 것은 아니었다. 세종 때의 명재상이었던 황희가 살아남아서, 57년 동안의 길고 긴 조선의 관직 생활을 하게 된다. 그 뿐이 아니었다. 고려의 왕실을 세우려는 음모가 발각되자, 삼척에 귀양 간 공양왕과 세자를 죽이고, 고려의 왕족인 왕씨들을 모두 모아 배에 태우고서 좋은 곳에 살게 해준다 해놓고, 배에 구멍을 뚫어 모두 수장시키고 말았다.
왕씨를 멸족시킨 것을 하늘에서 지켜본 태조 왕건이 분노하며 이성계의 꿈에 나타나 이성계를 꾸짖으며," 너희 자식들도 피 흘리는 싸움을 하리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태조는 조선을 세우고서, 세자 책봉을 하려고 했는데, 이성계에겐 총 여덟 명의 아들이었다고 한다. 방우, 방원 등의 한씨 소생과 방번, 방석 등의 강씨 소생의 아들이었다. 하지만, 첫째 아들인 방우라는 사람이 어디론가 행방불명이 되어 소식이 끊겼다.(야사에는 이성계의 조선 창업에 반기를 들어, 산속에 은거했다고 한다.) 소식이 끊긴 첫째 아들을 마냥 기다릴 수 없었던 이성계는 개국공신중 한명인 정도전의 의견을 듣기로 했다.
정도전은 왕권중심보다 신권중심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보니, 왕권중심의 사상을 가진 이방원을 좋아할 일이 만무했으며, 나이가 어린 방석을 세자에 세워, 왕위에 세우는 편이 훨씬 낫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에 대해서, 이방원이 좋아할 리 만무했다. 첫째가 없으면, 둘째가 왕위에 올라가야 하고, 공으로 따진다면, 자기가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물론 자기가 왕위에 올라가야 한다고 직접 대놓고 말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방원은 당시 조선 개국에 있어서 정도전과 더불어 최대의 공을 세웠지만, 정도전의 견제로 공신록을 받지 못했고, 세자마저 빼앗긴 상태에서 정도전과 정면승부를 한다는 것은 사실상 무리수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정도전의 절대적인 후원자인 이성계의 왕비인 강씨가 있는 한은 아직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1396년 이성계의 왕비였던 강씨가 죽자, 태조는 아내를 잃은 상실감에 정사를 거의 놓은 상태였고, 정도전은 사실상의 집정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태조는 더 이상 집권할 의지가 없어지고, 세자에게 왕위를 양위하고자 했다. 세자가 왕위에 올라가면, 정도전의 세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이방원은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규합하여, 정도전에게 도전하기 시작했다.
정도전은 이런 한씨 소생의 왕자들의 반발을 없애고, 자신에 대한 도전을 완전 봉쇄하기 위해, 사병철폐를 계획하고 있었다. 당시 조선이 명나라와 국서를 가지고 마찰이 있었는데, 명나라의 홍무제는 정도전을 압송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상태였다. 명나라에 가면 죽을 것이라고 생각한 정도전은 이것을 거부했고, 여기서 밀리면, 끝장이라고 생각한 정도전은 대명강경책을 펼치며, 요동 정벌론을 주장한다. 요동 정벌론은 1388년 명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하려하자, 이에 반발한 고려의 우왕과 최영이 이성계를 수장으로 하여, 요동정벌을 추진했으나, 이성계가 이에 반발하여, 회군하여, 하극상을 일으켰음을 앞에서 본 바 있다.
이런 요동정벌을 정도전이 다시 추진했는데, 실상은 요동정벌을 목표했다기보다는 자신의 정적을 견제하고 동시에 명나라로 하여금 자신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과시하기 위한 측면이 아니었는가로 추측된다. 어쨌든 정도전의 모험은 곧 이방원 일파들에게 저항을 받게 되고, 정도전은 사병철폐라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게 된다. 조선 초기, 창업 주체 세력이 무신 세력이 상당수 존재했으므로, 개인적으로 사병이 존재했다. 이것은 왕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사병 철폐는 곧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무력화시키는 것이고, 곧 이것이 단행되었다.
하지만, 요동정벌과 사병철폐는 곧 정도전의 몰락을 초래했고, 이방원이 보낸 자객에게 의하여 처형당하게 된다. 태조의 아들이자 강씨의 소생 또한 살해당하고, 태조의 사위도 피살되어, 딸이 눈물을 머금면서, 승려가 된다. 강씨의 소생인 방석이 살해당함에 따라, 세자 자리는 공석이 되었고, 공이 큰 이방원이 세자에 올라갈듯 했으나, 백성의 눈이 무서워 허수아비 왕인 정종을 왕위에 세운다. 하지만, 왕자의 난을 진압하는 데 일등공신이었던 이방원이 세력이 장악한 조정에서 정종이 과연 얼마나 왕위에 오래 있을 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근데, 정종이 왕위에 올라가자, 또 다시 권력 다툼이 일어나는데, 이것을 2차 왕자의 난이라고 한다. 이번에는 같은 부모끼리의 싸움이었다. 넷째인 방간이 박포라는 신료의 말을 듣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다. 둘째 형인 정종은 어차피 얼마 왕위에 있지 않을 것이고, 셋째형 방의는 원래부터 정치에는 무관심한 측면에서 자신이 세제로 올라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자기 동생인 이방원이 다음 대권을 이을 것이라고 백성들이 알고 있는 터에 대세를 모르는 방간의 반란은 무모하다고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 대세를 알고 있던 형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군대를 일으켜, 이방원을 공격했으나, 이미 민심이 방원으로 향한 터에 이길 리가 없었다. 방간과 박포는 체포되고, 박포는 사형 당했고, 방간과 그의 아들은 귀양갔는데, 방간은 태종도 친형제지간인지라 죽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세종 초년까지 사형논의가 되었으나, 태상왕이었던 태종이 극력 반대하여, 성사되지 않았다.
제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후 얼마 안 되어, 이방원이 세제로 책봉되고, 그로부터 2개월 후 정종은 이방원에게 선위하니, 이 사람이 3대 임금인 태종이다. 왕자의 난을 다시 살펴보자. 왕조 국가에 있어서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왕자들간의 권력 투쟁에 있어서, 그 나라가 신하중심으로 갈 것인가, 아님 임금 중심으로 갈 것으로 갈 것인가를 가늠하는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태종의 승리로 왕권 중심 체제로 갔지만, 나중에 세종대에 이르러 의정부를 통한 정무를 봄에 따라, 결국엔 정도전의 의도대로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들인 태종을 용서할 수 없었던 태조
1398년 태조는 강씨 소생인 방석과 방번을 잃고서, 상심하여, 정종에게 자리를 물러주고 한양을 떠났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있겠는가?라는 생각을 하지만, 17살의 어린아이인 방석의 죽음은 70살 노인의 가슴 속의 회한으로 남게 해주었다. 태조는 태종이 왕위에 오르자, 한양을 떠나며, 전국의 사찰을 찾아다니면서, 비명횡사(갑자기 죽은)한 두 아들의 명복(죽은 이의 복)을 빌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못했다. 자신의 명을 어기고, 자기 동생들을 죽인 태종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고, 한편으로 자신이 아직 건재함을 과시하고 싶었다. 이래서 일어난 것이 바로 조사의의 난이다. 사실 조사의를 내세운 태조의 난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조사의라는 인물은 강씨의 친족으로 알려져 있다. 일찍이 세자인 방석의 세자빈이 내시인 이만과 간통했을때, 강력히 조사할 것을 요구하자, 왕실의 일에 지나치게 간섭한다하여, 귀양까지 간 인물이었다. 그랬다가, 안변 부사로 있던 중, 왕자의 난이 일어나고, 왕자의 난의 승리자인 태종이 왕위에 올라가자, 자신의 위치에 불안을 느낀 조사의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조사의가 일으킨 반란의 배후에는 바로 태상왕에 있던 태조가 있었다. 따라서 반란이 일어날 것을 알고 있었던 지방 수령들이 감히 조사의의 난에 대항하지 못했고, 오히려 반군의 명을 따를 수밖에 없는 지경에 놓이게 된다.
심지어 동북면을 관장하고 있던 박만이라는 사람이 태상왕인 태조의 명을 어기지 못하고, 협조할 상황에 이르자, 그 심각성을 인식한 태종은 군사를 준비하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사신을 보내어 태조를 회유하여, 한양으로 모시려고 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함흥차사였다. 물론 함흥차사가 후세인들에 의해 지나치게 과장된 면도 있지만, 태조와 태종의 사이가 전쟁까지 치루어야 할 정도로 사이가 나빴던 것이 사실이고, 조선왕조실록에서 정부 차원에서 숨기려 하지 않았을까?
야사가 많은 윤색(덧칠되는 것)을 통해서, 신빙성이 떨어지는 건 사실이지만, 오히려 정사보다 신빙성이 있는 사실도 있기 마련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단종애사일 것이다. 물론 함흥차사가 왜곡(진실에서 벗어난 거짓)된 야사중의 하나이다. 함흥차사에 태종이 보냈다는 사신 중에 실록으로 확인되는 사람은 박순 한 사람인데, 박순이 태조를 설득하러 간 것이 아니라, 동북면 지방 수령에게 조사의를 따르지 말 것을 선동하다가, 조사의에게 피살당한 것이다.
또 함흥차사 야사에서는 무학 대사가 설득해서 돌아왔다고 하지만, 실제는 무학 대사가 돌아간 뒤, 조사의의 난이 실패로 끝나가는 것을 확인한 후, 자신의 한계가 여기까지임을 알고, 군말 없이 돌아왔다. 그리고 함흥차사 야사에서는 태종이 태조를 맞이하는 자리에서 태조가 화살 쏘거나 아님 철퇴로 태종의 머리를 박살내려고 했다는 것은 지나칠 정도의 왜곡이었다. 더구나 태종의 목숨을 보호해준 하륜이 죽을 때, 태조의 모습이 나타났다는 것은 이 야사가 명백한 왜곡임을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하지만, 이 함흥차사와 조사의 난에서 보여지는 것은 권력이라는 것은 부자도 서로 갈라지게 하는 존재이고, 결국 최후의 승자인 태종이 조사의의 난마저 진압함에 따라, 자신의 한계가 여기까지임을 자각한 태조는 결국 한양으로 돌아와 1408년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 뒤 조사의의 난으로 인한 휴유증은 상당했다. 일단, 태종에 의해 사면되었던 박만 등의 처벌을 요구하는 대간(지금의 감사원)들의 상소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상왕이었던 태종이 한 마디 말로, 이것을 무마시켰다.
"박만은 조사의의 난에 가담한 것이 아니라, 태상왕(지금 왕의 할아버지)의 명을 따른 것이다." 이것으로 볼 때, 조사의의 난은 실질적으로 태조의 난이라고 해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첫댓글 한 번에 읽어보는 조선사[2]를 잘 감상하였으며
권력이란 피를 나눈 형제지간에도 싸워야하고
부자지간에서도 갈라지게 하는 것임을 다시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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